갑진년의 설 연휴/정동윤
(덕수궁과 서울시립미술관)
명절 연휴의 마지막 날
아내의 지인이 방문한다기에
내가 불편할 수가 있어서
정동의 덕수궁에 다녀오기로 하고
즐기는 커피를 내려 외출을 챙겼다
명절이라 경복궁 창덕궁은
꽤 붐빌 것 같아
서양식 영빈관인 덕수궁 돈덕전을
최근 복원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꼭 가고 싶었다.
월대를 회복한 대한문 지나
발걸음 재촉하지 않고
보고 싶은 곳으로 조용히 흘러
역사의 주역 만나 보리라 생각했다
물길 막힌 금천교 얼어붙은 연못도
풍경으로 보고, 눈여겨볼 전각,
사연 있는 나무, 격동의 주인공 찾아
돋보기의 눈으로 보려고 하였다
함녕전 일대를 지나
중화전 뒤의 석어당은
'옛 임금이 머물던 집' 이란 뜻
임진왜란 이후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던 집을
전란 후 한양으로 온 선조가
행궁으로 삼고 경운궁이라 불렀으며
특히 신하 복이 많은 선조가 16 년간
머물다 붕어하셨고
인목대비가 유폐되었으며
또 광해군이 왕좌에서 쫓겨났고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했으며
고종이 침전으로 사용하였던
2층 목조 건물엔
단청을 사용하지 않은 빛바랜 처마,
민간의 집처럼 사각기둥이 특징으로
1층 석어당 현판은 고종의 친필.
넓은 앞 뜰의 수형 좋은 살구나무는
왕조의 길고 힘든 세월을 모두 아는 듯
중후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뜰로 올라가면
한식과 서양식을 절충한
독특한 양식의 정관헌을 만난다
지붕의 차양 칸이 동, 남, 서
삼면으로 덮여 돋보이며
난간엔 전통문양인 사슴과 박쥐를
새겨놓았고 격조 있는 모란과 오얏꽃을
꽃병에 담아낸 모습의 짧은 기둥,
상부를 코린트식에 이오니아식을 더하고
그 위에 오얏꽃을 배치한
동서 문화의 조합으로 만들어 낸
독특한 약식으로 돋보였다
이곳에서 고종이 커피를 마시며
손님을 접대하기도 하고
어진도 보관하였다고 한다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서
커피를 처음 맛본 이후로
독일인이며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처형인
손탁 여사를 만나고부터
손탁 여사의 서양 요리와 커피 맛에
고종과 엄귀비는 완전히 빠져들었다
손탁 여사는 영어 독일어 불어가
유창할 뿐 아니라 한국말까지 능숙한
언어 감각이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손탁 양이 경성에 왔던 때는 32 세였다
그 온화한 풍모와 단아한 미소는
경성 외교관의 꽃이었다" 라는 당시의 평가.
그녀의 활약은
경내부 황실 전례관의 직책을 수행하고
대한제국 황실 의전을 담당하면서
고종 부부의 신임을 톡톡히 받았다
고종은 지금 이화여고 자리 일부의 땅을
하사하여 그곳에 손탁 호텔을 짓게 하였고
외교구락부의 역할도 수행케하였다.
그리고 또 한 분을 조명해 보련다
호머 헐버트(1863~1949),
최근에 덕수궁 둔덕전의 복원이 완료되고
2층에 그의 사진이 걸려있었는데
반갑고 고맙고 존경스러웠다.
그는 7개 국어를 구사하는 언어학자,
조선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교육자,
독립신문 발행을 도우며
한글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를 도입한
한국어 연구에 앞장선 한글학자였다.
또한 고종에게 헤이그 밀사 파견을
건의하고 자신이 먼저 헤이그로 가서
사전 작업을 하였으며 이준 이위종 이상설,
그를 제4의 특사라고 할 만큼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노력을 하였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자 결국 고종은
순종에게 나라를 물려주는 수모를 겪었다
대한제국 말기 국권수호를 적극 도왔으며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지원한
홍안의 독립운동가였다.
해방 후 1949 년에 이승만 정부에서
그를 초청하였고 노구를 이끌고 기꺼이
한국에 왔으나 일주일 후에
노환으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유언은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대한민국은 그를 최초의 사회장으로 정중한
장례를 치르고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하였다.
그가 노구를 이끌고 한국에 온 것도
고종 황제가 상하이 독일 은행에 예치한
내탕금을 되찾기 위한 소송 서류를 전하기
위해서다. 이미 그 독일 은행은 문을 닫았고
서류를 위조하여 내탕금을 빼 먹은 일본과
법정 투쟁을 이어가긴 늦었으니...
고종이 물러나고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꾸고
덕수궁에 있는 고종에게 네덜란드 공사가
1913년에 마로니에 두 그루를 선물로
가지고 왔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서 대한 제국의 뜻이
제대로 펼칠 수 없었던 실패를 위로하기 위해. 지금 둔덕전 앞 뜰에 가시 칠엽수
두 그루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으며
그 뒤쪽에는 아주 나이가 많은 회화나무
한 그루가 노구를 지탱하며 두 마로니에를
그윽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돈덕전을 개방하여 덕수궁의 많은 자료를
비치해 놓고 체험과 독서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니 역사의 향기가 풍겨 나온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전은
목조 건물의 조선 궁궐에 서양식의
석조 건물은 대단히 파격적이다
한 건물 안에 정전 편전 침전을 겸하니
건물 자체로 궁전이 되는 것이다
지금 이곳은 미술 전시관으로
보기 힘든 전시의 기획을 보여주기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람들이 석조전 앞의 배롱나무에
열광하기도 하지만 덕수궁 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참싸리나무를 찾아보면
나이 든 참싸리에 숙연해지기도 할 것이다
덕수궁을 나와 손탁호텔 위치를 짚어보고
서울 시립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1928 년에 일제강점기 때 지은 경성 재판소로 그전엔 한성 재판소였다
해방 후 대법원 청사로 사용하다 1995 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옮긴 후 지금은
서울 시립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덕수궁 돌담 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된 이유가 이곳 법원 안에
이혼 법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건물 입구의 아치형 문과 좌우 대칭적
모습은 르네상스풍으로 옛 중앙청,
서울역 등과 비슷한 특징들이 보인다.
오늘은 이곳에서
사진작가 구본창의 '구본창의 항해'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전시회
또 '80 도시 현실' 등을 관람하였다
반나절만에 다 보기가 어려웠는데
마침 친구가 연락이 와서
수요일에 다시 들여다보기로 하고
아쉬운 발걸음으로 미술관을 나왔다.
올 명절은 봉은사와 왕릉 탐방,
부모님 산소 성묘, 그리웠던 가족 모임
고궁과 미술관 방문으로 잘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