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 主が望まれる人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는 여덟 번째 시간으로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義のために迫害されている者)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보에는 한자 한 글자. 박해할 때의 ‘해(害)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드디어 오늘은 8차 시험. 최종시험에 대한 말씀을 전하는 날입니다. 사실 이 팔복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할 때에 일부러 날짜를
맞춘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팔복 마지막 말씀을 전하는 날이 오늘 고난 주일 예배와 시간이 같아졌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 팔복의 여덟 번째 말씀은 참으로 고난주간의 말씀과 정확하게 부합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참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마지막 시험 다운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マタイの福音書 5章10節
“義のために迫害されている者は幸いです。天の御国はその人たちのものだからです。”
그리고 여기에는 이 말씀에 대한 설명도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절~12절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わたしのために人々があなたがたをののしり、迫害し、ありもしないことで悪口を浴びせるとき、あなたがたは幸いです。
喜びなさい。大いに喜びなさい。天においてあなたがたの報いは大きいのですから。あなたがたより前にいた預言者たちを、人々は同じように迫害したのです。
이를 풀어서 말씀을 드리자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향해서 사람들이 욕을 하고 핍박하고 거짓말로 온갖 악담을 할 때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받을 상이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선지자들도 다 그런 일을 당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에 선지자들도 다 당한 일들이니까 너희들도 그냥 참아라, 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장차 우리가 받을 그 상이 얼마나
크냐 하면 과거 위대한 선지자들이 받은 그와 갈은 상만큼 크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고난주간은 맞이하여, 우리의 고난과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받는 고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 천국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합니다. 성경을 전합니다. 우리는 우리 행동에 대해서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말씀대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다름 아닌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좋은 일로 넘쳐날 때에 모든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이는 당연하겠지요. 누가 나한테 내가 가장 갖고 싶어하는 선물을
주었어요. 그러면 그것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께서 내가 그 동안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을 주셨다면, 믿음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모두가 똑같이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할 것입니다.
하지만 고난이 찾아오면 어떻습니까. 이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평과 불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심한 경우에는 믿음을 버리는 일도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몇 백년 동안 노예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었을 때, 그들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뒤에서는 애굽의 정예부대가 그들을 죽이기 위해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차라리 우리를 그냥 노예로 살게 내버려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왜 우리를 광야로 끌고 나와서 죽게
만드느냐고 소리를 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홍해를 가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를 통과하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무사히
홍해를 건너게 된 반면, 그들을 추격해 온 애굽 군대는 모두가 홍해 바다 속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러자 그 때까지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합니까.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치면서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러한 광경을 보면 참 좋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입니까.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는 구분이 안 갑니다. 무슨 구분이 안 가냐 하면
누가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구분이 안 간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무슨 뜻이 되겠습니까. 누가 진정한 축복을 받을 만
한지 구분이 안 간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려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슬쩍 고난을 겪게 하면 금방 티가 납니다.
홍해를 건너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그들, 그러나 그들의 딱 3일만에 그들의 믿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출애굽기 15장 22절~24절
“22.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モーセはイスラエルを葦の海から旅立たせた。彼らはシュルの荒野へ出て行き、三日間、荒野を歩いた。しかし、彼らには水が見つからなかった。
彼らはマラに来たが、マラの水は苦くて飲めなかった。それで、そこはマラという名で呼ばれた。
民はモーセに向かって「われわれは何を飲んだらよいのか」と不平を言った。
바다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을 직접 체험했던 그들이 얼마나 큰 믿음을 가졌는지를 시험해보기 위해서는 딱 3일이면 충분했습니다.
“우리를 수 백 년 간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주시고, 홍해까지 갈라서 건너게 해주신 하나님께서는 이후에도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이다.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주실 것이다”라고 믿을 만도 한데, 더도 말고 3일 동안 물을 안 주는 고난을 주었더니 금방
이렇게 그들의 밑천을 드러내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되고 맙니까.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는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면서 하나 둘 죽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지요.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カレブ)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신다는 믿음이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나왔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성인 남성은 60만 명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중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60만분의 2, 여호수아와 갈렙(カレブ)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요. 회사가 돈을 잘 벌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몰려오겠지요.
그 때는 정말 모두가 교회를 사랑하고 회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깁니다. 고난이 닥쳐 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때까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 둘 떠나가고 맙니다.
바로 그 때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회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판명 나겠지요. 이를 가려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 3장에 보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 가 등장하지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ネブカドネツァル)
왕은 유다에서 끌고 온 그들을 높여서 왕을 섬기게 했었는데, 하루는 왕이 금신상을 세우고 그것들한테 절을 하게끔 만듭니다. 그리고는
거기에 대고 절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풀무불 속으로 던져 넣겠다고 하지요.
그런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는 금신상에 대고 절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러지 말라고 직접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あなたは、ほかの神を拝んではならない。主は、その名がねたみであり、ねたみの神であるから。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다른 우상들에게 절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이제 느부갓네살(ネブカドネツァル) 왕은 그들에게 최후통첩을 합니다.
다니엘 3장 14절~18절
14.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15.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16.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ネブカドネツァルは彼らに対して言った。「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よ。おまえたちは私の神々に仕えず、また私が建てた金の像を拝みもしないというが、本当か。
今、もしおまえたちが、角笛、二管の笛、竪琴、三角琴、ハープ、風笛
、および、もろもろの楽器の音を聞いたとき、ひれ伏して、私が造った像を拝むなら、それでよい。しかし、もし拝まないなら、おまえたちは、即刻、火の燃える炉
の中に投げ込まれる。どの神が、私の手からおまえたちを救い出せるだろうか。」
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は王に答えた。「ネブカドネツァル王よ、このことについて、私たちはお答えする必要はありません。
もし、そうなれば、私たちが仕える神は、火の燃える炉から私たちを救い出すことができます。王よ、あなたの手からでも救い出します。
しかし、たとえそうでなくても、王よ、ご承知ください。私たちはあなたの神々には仕えず、あなたが建てた金の像を拝むこともしません。」
아무리 왕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우리 목숨을 빼앗아간다 하더라도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겠다고 하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からだを殺しても、たましいを殺せない者たちを恐れてはいけません。むしろ、たましいもからだもゲヘナで滅ぼすことができる方を恐れなさい。
아무리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죽일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이 세상에서의 죽음이 아닌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권세를 가진 분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세
사람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다니엘 3장 23절~27절
23.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졌더라
24.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25.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26.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27.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この三人、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は、縛られたままで、火の燃える炉の中に落ちて行った。
そのとき、ネブカドネツァル王は驚いて急に立
ち上がり、顧問たちに尋ねた。「われわれは三人の者を縛って火の中に投げ込んだのではなかったか。」彼らは王に答えた。「王様、そのとおりでございます。」
すると王は言った。「だが、私には、火の中を縄を解かれて歩いている四人の者が見える。しかも彼らは何の害も受けていない。第四の者の姿は神々の子のようだ。」
それから、ネブカドネツァルは火の燃える炉の口に近づいて言った。「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いと高き神のしもべたちよ、出て来
なさい。」そこで、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は火の中から出た。
太守、長官、総督、王の顧問たちが集まり、三人を見たが、火は彼らのからだに及んでおらず、髪の毛も焦げず、上着も以前と変わらず、火の臭
いも彼らに移っていなかった。
왕의 명에 의해서 풀무 속으로 던져 넣게 되지만, 그들은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분명히 세 사람을 던져 넣었는데 불 가운데에 네
사람이 다닌다고 하는데, 그 중 넷째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도 같다고 합니다.
왕이 그들에게 나오라고 불렀더니 사드락과 메삭과 아멧느고가 나오는데 어디 하나 상한 모습이 없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 목격한 느부갓네살 왕은 말합니다.
다니엘 3장 28절~30절
28.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29.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
30.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
ネブカドネツァルは言った。「ほむべきかな、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の神。神は御使いを送って、このしもべたちを救い出された。王の命令に背いて、自分たちのからだを差し出しても神に信頼し、自分たちの神のほかはどんな神にも仕えず、また拝まないこの者たちを。
それゆえ、私は命令する。諸民族、諸国民、諸言語の者のうち、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の神に対して不敬なことを口にする者はだれでも、八つ裂
きにされ、その家はごみの山とされる。このように救い出すことのできる神は、ほかにないからだ。」
それから王は、シャデラク、メシャク、アベデ・ネゴをバビロン州で栄えさせた。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이처럼 놀랍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켰을 때, 그 때까지는 하나님을 모독했던 그 입에서
이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흔히들 예수님께서는 당하신 것도 고난이라고 하고 우리도 우리 삶 속에서
고난을 당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자칫 오해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또 사람들이 오해를 하기 쉬운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それからイエスは弟子たちに言われた。「だれでもわたしについて来たいと思うなら、自分を捨て、自分の十字架を負って、わたしに従って来なさい。
그렇다면 여러분,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고통을 당하신 것처럼 우리도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에는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차이점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이는 당시 세상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같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죄인으로서 형벌을
받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만, 영적으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해서 받아주셨던 것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와 우리가 지는 십자가가 모두 같다고 한다면, 우리도 형벌로서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하지 못했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머지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논리에 빠지고 말게 됩니다.
히브리서 10장은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1절~14절
“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さらに、祭司がみな、毎日立って礼拝の務めをなし、同じいけにえを繰り返し献げても、それらは決して罪を除き去ることができませんが、
キリストは、罪のために一つのいけにえを献げた後、永遠に神の右の座に着き、
あとは、敵がご自分の足台とされるのを待っておられます。
なぜなら、キリストは聖なるものとされる人々を、一つのささげ物によって永遠に完成されたからです。
예수님은 그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죄 중에 80%만 해결하신 것이 아닙니다. 90%만 해결하신 것이 아닙니다. 99.99%만 해결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온전하게 해결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영접한 우리는 이제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형벌은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에 있어서 공통점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순종인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순종이 무엇입니까. 쉽습니다. 하라고 하면 하는 것이요,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しかし、私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によって、神は私たちに対するご自分の愛を明らかにしておられます。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순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지휘관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부하들에게 “돌격!”이라고 명령하고서 자신은 뒤에 있는 지휘관이요, 또 하나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고 앞서 나가는
지휘관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지휘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풀무 속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순종의 십자가를
져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고난은 오로지 축복을 위한 고난이자 시련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이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보니까 시드니 올림픽 여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다카하시 나오코 선수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훈련을 할
때, 이렇게 뛰고 있으면 감독이 뒤에서 차를 타고 함께 따라온대요. 그런데 달리고 있는데 하루는 너무 힘들어서, 감독님, 지금, 제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라고 했답니다. 그러니까 감독님이 차에서 뭐라고 하셨을 것 같으십니까.
딱 한 마디 하더래요. “그렇구나.”
그렇다면 그 감독이 왜 그랬을까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몰라서요? 국가대표 감독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선수를
미워해서요? 이 또한 그럴 리가 없겠지요. 만약에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선수한테 무슨 일이 생겨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이는 전적으로
감독 책임입니다. 그 사람의 감독 인생은 어쩌면 끝장이 날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그 감독님이 왜 그랬을까. 답은 하나지요. 감독님은 지금 그 순간 그 선수의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얼마나 힘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만에 하나 그 선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감독이 알고 있었던 것은 그것 뿐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바로 지금 그 순간을 극복해야만 금메달을 딸 수 있다고
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あなたがたが経験した試練はみな、人の知らない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は真実な方です。あなたがたを耐えられない試練にあわせることはなさいません。むしろ、耐えられるように、試練とともに脱出の道も備えていてくださいます。
로마서 8장 18절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今の時の苦難は、やがて私たちに啓示される栄光に比べれば、取るに足りないと私は考えます。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私を強く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私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아이고, 주님, 나 지금 너무 힘들어요. 이게 부족해요. 저게 없어요. 이것도 필요해요. 저것을 해주세요, 내가 지금 사람들한테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어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저런 고통을 겪고 있어요…… 이렇게 기도할 때 주님은 어쩌면 “음. 그렇구나” 라고만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지실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나, 주님이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보다 앞서 가시는 지휘관이십니다. 우리가 이겨낼 만한 시험만을 허락하시고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시험
너머에는 우리가 받을 놀라운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져주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주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험을 이겨냄으로 인하여
마침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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