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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을 찾는
당신을 위해
모처럼 받으신 이 책자는...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삽니다.
행복은 사랑할 때 경험합니다.
사랑은 생명의 원인입니다.
사랑해야 생명이 태어납니다.
사랑 때문에 태어난 사람은 사랑할 때 비로소 행복합니다.
당신은 행복하기 위해 삽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이 사랑,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여기 그 진솔한 대답이 있습니다.
생활은 한껏 편리해졌어도 마음은 평안하지 않습니다.
여기저기 바쁘게 다녀도 가슴은 여전히 답답합니다.
이것저것 모두 가져 보아도 삶은 공허할 뿐입니다.
이리저리 어울려 보아도 외로움은 가시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시대,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알고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족하지도 못하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없는 것, 가지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이처럼 뜻 없는 삶을 바쁘게 살아야 합니까?
걱정이 태산 같은 요즘 세상입니다.
도덕에는 표준이 없고 예술에는 가치가 없습니다.
정치에는 소신이 없고 종교에는 신조가 없습니다.
경제에는 신용이 없고 사회에는 신의가 없습니다.
함께 사는 사회는 사라지고 이기적인 개인만 남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가는 세상입니까?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갈 확신은 있을까요? 보람과 희망으로 가득 찬 인생길은 없을까요? 행복의 파랑새는 찾을 길 없는 전설 속의 허구입니까?
모처럼 받으신 이 책자는 이처럼 중대한 문제들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삶을 영원히 바꿀 수 있는 분명한 해답이 있습니다. 끝까지 읽으시고 부디 행복을 찾으십시오.
사람이 우연히 태어날 수 있을까요?
지역 신문 상담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한 후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24세 여성입니다. 모두가 제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왜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엄마, 아빠에 의해 태어난 우연의 산물이란 생각뿐입니다."
인간은 정말 목적 없이 태어난 우연의 산물일까요? 당신은 이 숙명적인 고민을 해결하셨습니까? 인간을 우연의 산물로 돌리는 것은 진화론의 소치입니다. 우연히 만들어진 단세포생물이 장구한 세월 동안 저절로 진화하여 마침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되었다는 진화의 논리는 이미 퇴화된 가설 입니다. 이처럼 우연히, 저절로, 목적 없이 태어난 생명이라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가치가 있고,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목적 없이, 표준 없이, 의미 없이, 마구 살아가는 현대인의 불안이요 공허요 방황이요 좌절인 것입니다.
인간은 정말 저절로 태어난 우연의 산물입니까? 만든 사람 없이 스스로 생겨난 카메라를 보셨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카메라보다 천 배, 만 배 더 정교한 것이 사람의 눈입니다. 심오한 삼각함수 원리를 계산하는 데 필요한 두 대의 카메라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눈이 저절로 만들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두 눈동자와 백체를 가진 인간이 저절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세계적인 석학으로 무신론을 주장하던 영국의 두 과학자 호일리 경과 위크라마싱거 교수는 오랜 연구 끝에, 수억 년이 지난다 해도 세포 하나가 저절로 만들어질 가능성은 “폐차장에 버려진 자동차의 잔해가 비바람의 영향을 받아 (600만 개 부품과 274km의 전선으로 이루어진) 보잉 747 여객기로 우연히 조립되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일임을 시인한 후, "하나님이 계신 것이 틀림없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물며 두뇌만 150억 개의 뇌세포로 이루어졌다는 인간이 어떻게 저절로 만들어질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1).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히 3:4).
사람이 왜 사는지 이유를 아십니까?
사람이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람이 어떻게, 왜 태어나는가에 관한 대답과 같습니다.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은 사랑 때문에 태어납니다. 사람은 물론 모든 동물 심지어 대부분의 식물도
부모 혹은 암수가 사랑한 결과로 생명이 발생합니다.
한 마리의 강아지나 산 새 그리고 호박 열매 하나도 암수(우송) 두 개체가 뜨겁게 사랑한 결과로 태어납니다.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삽니다. 행복은 사람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價値)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이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사랑할 때, 사랑을 주고받을 때 사람은 비로소 행복을 체험합니다. 사랑할 때 사람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게 됩니다. 사랑받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사는 까닭을 알게 됩니다. 사는 것(to live)은 곧 사랑하는 것(to love)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사랑은 생명의 원인(原因)입니다.
생명은 사랑의 결과입니다.
사람이 사랑에 반응할 때 생명이 발생(生)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시작을 밝히는 가장 확실한 생명과학입니다.
생명이 태어나는 곳에는 언제나 사랑이 먼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의 사랑처럼 언제나 희생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신 창조주시라면 그분은 생명의 원인인 사랑의 근원(根源)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원인인 사랑의 근원이 이렇게 밝혀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요일 4: 7~8).
당신이 참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사람은 사랑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살아갑니다.
당신이 참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반응(反應)하십시오.
당신이 참으로 영원한 생명을 원한다면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 믿음으로 반응하십시오.
사람이 유한한 이성(異性)의 사랑에 사랑으로 반응할 때 유한한 생명을 가진 육신의 자식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사람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믿음으로 반응할 때 영원한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요 3:16).
사람은 결코 우연히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결코 목적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존재 가치, 당신의 행복은 당신의 족보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시고 분명히 선택하신 후 'V'로 표시하십시오.
( ) 나 → 유인원(조상 원숭이) →포유동물 → 양서류→ 파충류→ 물고기 → 아메바 → 우연히 존재한 아메바의 후손
( ) 나 → 나와 같은 여러 세대 전의 인간 조상 →(아담+하와)→ 하나님 사랑받기 위해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
당신의 인간 가치와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엄숙한 선택입니다.
어느 족보를 택하셨습니까? 어떤 운명을 택하셨습니까?
당신의 행복을 보장하는 자랑스러운 족보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사랑과 법의 괴로운 갈림길에서
옛날 '로크리얀스의 왕 ‘자로가크’는 요즘처럼 극도로 문란해진 망국적인 성도덕을 바로잡기 위해 “누구든지 음란한 짓을 하면 눈을 뽑겠다.”라는 엄한 법령을 선포하였습니다. 겁에 질린 백성이 정신을 차려 나라의 기강이 바로잡혀 가던어느 날, 첫 번째 범법자가 현장에서 검거되었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범법자는 바로 이 나라의 왕이 될 왕자였습니다."국왕께서 정말 법대로 하실까? 법대로 안 한다면 이제부터 법은 무효가 되겠지. 그렇다고 어떻게 아들의 눈을 뽑겠어."드디어 집행일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된 불쌍한 왕자는 재판관으로 변한아버지 앞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그리고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집행관의 칼날이 번뜩였고 비명과 함께 왕자의 한쪽 눈이 뽑히면서 피가 땅을 적셨습니다. 이어서 다른 눈을 향하여 칼 겨누어졌습니다.
"잠깐 멈추어라! 왕자에게는 그것으로 족하다.
나머지 한쪽 눈은 이것으로...."
거기에는 자신의 칼로 뽑은 왕의 한쪽 눈이 피 묻은 채로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버지로서 아들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법을 지켜 나라를 도덕적 파멸에서 건져 낸 것입니다. 자식도 살리고, 법도 살린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지구의 맏자식 아담과 그 아내 하와가 지구의 헌법 곧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말라는 명령을 어겼을 때 하나님께서 겪으셨던 괴로운 갈림길의 고통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은 지 4천여 년이 지난 서기 31년 유대력 1월 14일, 저 예루살렘성 밖의 쓸쓸한 갈보리 언덕 위에는 십자가가 세워졌고 그 위에서 33년을 지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마가 찢기고 손발에 못이 박혀 피투성이가 된 채로심장이 터져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옆구리는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범죄 한 인간을 살리기 위해 법을 폐기 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법의 요구대로 범죄 한 인간을 위해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사랑 때문에 지으신 인간을 범죄의 결과로부터 살리기 위해 법보다 더 높으신 입법자 하나님의 아들께서 대신 처형되심으로 사람도 살리고 법도 지키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음으로 율법이 폐했다고 가르치는 것은 참으로 법리(法理)를 모르는 큰 오해인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그렇습니다. 죽음보다 더욱 강한 사랑, 사형수가 된 자식을 살리기 위해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는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의 활화산(山)이 십자가에서 폭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들이 있습니다. 날이 새는 것이 두렵고 간수의 발소리가 무섭습니다. 가족, 친지의 면회로 알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죄를 짓더라도 죽을 죄는 짓지 말라"던 어느 사형수의 고뇌가 처절합니다. 죄를 짓고 법정에 서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죄는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며 기어이 그 값을 치러야 하는 무자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죄가 없으십니까?
“기록한바 의인(義人)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0~11).
하나님 앞에서 무죄한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결국 한 번은 엄숙한 하늘 법정의 최후 심판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모든 재판에는 재판장이 있고, 재판의 기준인 법이 있어야 합니다.
재판장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요 5:22, 27).
법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지구의 헌법인 십계명입니다(약 2:9~12).
재판 날짜가 언제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행 17:31)
지금 인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심판이 선언되어 있습니다(계 14:6-12).
그렇다면 어떻게 이 심판을 준비해야 할까요?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세상을 원대로 마음껏 살아본 이탈리아의 귀족 보르지아는 갑자기 닥친 죽음을 맞는 자리에서 이렇게 탄식하였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죽음 이외의 모든 것을 준비하였다. 슬프다. 준비하지 않았던 죽음이 이제 닥쳐왔구나."공부하고, 결혼하고, 취직하고, 사업하고 사람들은 사는 동안 살 준비에만 여념이 없다가, 인생이 마무리 되는 죽음이 닥칠 때면 아무런 준비 없이 애처롭게 죽어 갑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 16:30).
로마 간수의 이 절박한 부르짖음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엄숙한 질문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죄 사함을 얻으라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 2:38~40).
죄와 영원한 파멸로부터 구원을 얻으려면?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해야 합니다.
둘째로, 지금까지 하나님 없이 살아온 지난날의 죄 된 삶에서 돌이키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참된 회개는 진정한 용서를 가져옵니다.
셋째로, 진정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한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새 삶을 시작하는 의미로 옛 생명은 물에 잠그어 장사 지내고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침례를 받습니다. 머리에 물을 뿌리는 세례(洗禮)가 아니고 온몸을 물에 잠그는 침례(浸禮)가 성경이 가르치는 올바른 방법입니다(마 3:16; 롬 6:3).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날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성경 말씀을 읽고 들으며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 말씀과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는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게 됩니다. 날마다 가까워지는 구원과 재림을 기다리는 확실한 희망을 가지고 기쁘게 살아갑니다. 선한 일에 열심을 내며 보람 있게 살아갑니다.
지구 창조의 기념일을 알고 계십니까?
군인들이 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발이 서로 맞지 않아 어수선했습니다. 좌충우돌(左衝右突), 서로 자기 발에 맞추라고 옥신각신했습니다. 누구 발이 맞을까요? 누구 발에 맞춰야 할까요? 바로 이때, 저만치서 지휘관의 구령이 들렸습니다. 하나 둘 하나, 둘・・・ 혼란이 그쳤습니다. 순식간에 대오는 일사불란(一不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앞 사람의 발도 옆 사람의 발도 아닙니다. 지휘관의 구령(令)이 기준입니다. 그것이 맞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매주의 끝 날인 토요일이면 하나님께 예배하려고 교회에 가는 신자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성경을 보면서 어떻게 어떤 사람은 일주일 중 첫날인 일요일에, 어떤 사람은 일주일의 끝 날인 토요일에 예배하는 것일까요? 왜 발이 서로 맞지 않을까요? 누구 발이 맞습니까? 여기 우주와 지구의 총사령관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구령이 들려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0).
성경에 기록되고 하나님이 인정하신 창조의 기념일은 오직 하루,
'제칠일 안식일입니다. 구약의 창세기에 안식일의 시작이 명시되었고(창2:1~2)지구의 헌법인 십계명의 넷째 계명에 포함되었고(출20:8~11)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는 하나님의 인감도장이며(출31:13) 하늘에서도 영원히 지킬 창조 기념일로 예고되었고(사 66:23) 신약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으로 선언되었고(막 2:28) 예수께서도 규칙적으로 항상 안식일에 예배하셨고(눅4:16)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도 언제나 규례대로 준수하였으며 (행 17:2) 예루살렘 멸망(서기 70년) 이후에도 준수가 명해졌습니다(마 24:20).
그런데 어떻게 지금처럼 일요일이 안식일을 대신하게 되었을까요? 성경에는 일요일에 관한 언급이 8번 나오는데 단 한 번도 예배나 준수에 관한 명령이 없습니다. 일요일 준수의 성경적 근거를 입증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상금을 약속했는데도 아직 한 사람도 찾아간 사람이 없습니다. 상금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일요일 준수의 이유를 예수님의 부활 기념이라고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만찬 예식으로 기념하고(고전 11:26)부활은 침례로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롬 6:4; 벧전 3:21). 오늘날처럼 일요일이 공휴일로 준수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고 서기 321년 3월 7일,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태양숭배일이던 일요일(Sunday)을 정치적·종교적 목적으로 휴업하도록 선포한 '일요일 휴업령' 때문임이 「대영백과사전」과 「로마법전」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구의 헌법이요 도덕률인 십계명을 폐하지 않는 한 그 가운데 기록된 제칠일 안식일은 폐하거나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지구의 창조 기념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결혼기념일이 행복한 부부에게 특별한 날이요 행복이 깊어지는 허니문이듯, 창조 기념일인 안식일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거룩한 날이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체험하는 행복한 날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예배)하라 하더라”(계 14:7).
※죽음 저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애처롭게 숨져 간 귀여운 아기
화장터 연기 속으로 사라진 그리운 모습
아무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죽음
죽음은 정말 만사의 끝이며 속절없이 슬퍼해야만 하는 영원한 이별입니까?
죽음처럼 두렵고 슬픈 일도 없지만 죽음처럼 궁금하고 막연한 것도 없습니다.
사후세계는 정말 있을까요? 한 번 죽은 후에는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사후의 체험담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 너머 저편 세계를 아시는 분은 죽음을 초월하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죽은 후의 소감은 어떠할까요? “무릇 산자는 죽을 줄을 알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전 9:5)는 무의식 상태에서 무슨 소감이 있겠습니까?
죽고 나서 즉시 가는 곳은 어디입니까?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욥 14:10~12).
그렇습니다. 몸은 썩어 흙이 되어 "땅으로 돌아가고", 생명의 호흡은 본래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전 12:7). 그렇다면 언제 잠과도 같은 무의식에서 깨어날까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신 예수께서 세상 끝날 재림하실 때에 자신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듯이,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이룬 모든 사람을 죽음에서 일으키실 것입니다(살전 4:14~18). 사람이 죽으면 몸을 떠난 영혼이 살아서 천당, 지옥, 연옥으로 곧바로 간다는 가르침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예수 재림 때에 있을 죽은 사람의 부활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영혼", "", "영"의 표현이 신구약성경에 1,658번이나 언급되었는데, 육체를 떠난 영혼의 뜻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영혼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영혼 불멸의 가르침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속인 사탄의 속임수이자 (창2:7) 이교의 가르침이지 성경에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습니다. 영혼의 불멸이 아니라 육신의 부활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임을 성경은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고전 15:50~53).
의인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변화된 새 몸으로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고, 회개하지 않은 죄인은 재림 후 천 년 끝에 죄를 지닌 몸으로 부활하여 죄악을 끝내는 심판의 불길로 살라져 영원히 소멸될 것입니다(계 20:5~11). 그것은 끝까지 죄악을 고집하고 구원을 거절한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의 최후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인 당신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당신의 영원한 운명은 당신의 단호한 선택에 달렸습니다.
지금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침내 희망의 그날이 올 것입니다
21세기는 시작되었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21세기는 밝았지만 행복은 동지 않았습니다. 전쟁과 테러의 공포가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오염된 강과 바다, 혼탁해진 대기, 늘어만 가는 인구, 파괴되는 환경, 거세지는 천재지변, 고삐 놓친 도덕.
도대체 세상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참으로 나아갈 길 없는 위기 상황입니다.
보람과 희망으로 가득 찬 내일은 정말로 없을까요?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24:3).틀릴 수 없는 성경의 예언은 아래와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세상 역사의 마지막이 될 예수 재림의 때는 아무도 모르지만 예언된 징조들을 통해 그날이 가까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언된 예수 재림의 때와 징조
천재지변의 증가 지진, 해일, 기근, 각종 전염병이 증가하고 지구환경이 급속도로 파괴됨(마24:7~8; 눅 21:11; 사 24:3~5).●
국제 정세의 혼란 민족 분규, 전쟁, 군비경쟁이 치열해짐(눅21:10; 24:7-8; 24:3-5).
사회와 도덕의 부패 부도덕과 범죄가 편만하고 음란과 부절제가 만연함(딤후3:1~5; 마24:37~39).
경제의 불안정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노사(勞使) 관계가 악화되며 경제 통제가 불가피해짐(약 5:4~8; 계 13:16~17).
종교계의 타락 신조가 부패하고, 거짓 신앙이 사람들을 현혹하며, 강신(降神)이 성행하고, 비성경적인 종교 연합(聯合)이 추진됨(마24:23~26; 계 16:13~14).
지식의 급증과 교통수단의 고속화 인간의 지식이 급증하고 각종 교통수단이 고속화(化)됨(단 12:4).
복음의 세계적 전파 불안한 세계 정세와 사회 현상에도 불구하고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마 24:14).
예언된 예수 재림의 진정한 모습
승천하실 때처럼 실제로 개체를 가지고 오심(행 1:11)..
모두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오심. 그러므로 예수께서 비밀리에 오셔서 성도들을 몰래 데려가신다는 비밀 휴거(去)는 거짓된 가르침임(마24:27 31; 계 1:7; 살전 4:16.
하늘과 땅에 엄청난 재난과 격변이 일어나며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오심(계6:14; 벧후3:10).
영광 가운데 구름을 타고 공중에 임하심(마24:30 살전 4:17).
예기치 않은 때에 갑자기 오심(살전5:4~6; 마24:38~39, 43~44).
예수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선택입니다.
세상의 종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그것은 각자의 선택에 따라 최대의 희망일 수도 있고 최후의 비극일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 오신 여러분은 지금 어떤 결정을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영원한 행복과 구원을 위하여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더 깊은 성경 연구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기도 요청이나 개인적인 상담을 원하십니까? 교회에 출석하고 싶으십니까? 보다 건강한 삶, 보다 행복한 가정을 원하십니까?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가 여러분을 돕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덧없는 인생의 구원을 위해서는 선택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성경통신학교 콜센터로 연락하시면 지금 바로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1670-5235)
대구중동교회로 연락을 주시면 지금 바로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010-3229-4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