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전설 - 단심(丹心)이 흐르는 남한강 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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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0.08. 15:32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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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전설
단심(丹心)이 흐르는 남한강 줄기
태백산맥의 준령인 오대산(금대산, 혹은 대덕산)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정선에 이르러 ‘아라리’의 전설과 노래를 만들고 다시 흘러 단종이 유배되었던 영월 땅에 닿는다. 영월군 서면 신천리, 남한강의 지류가 굽어 보이는 언덕 위에 관란정(觀瀾亭)이란 정자가 있어 비운의 왕 단종을 추억하게 한다. 관란(觀瀾)이란 “흐르는 물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세조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元昊)의 호이면서 그가 손수 세운 정자 이름이기도 하다.
세조에 의해 단종이 영월 땅 청령포(淸冷浦)로 유배되었을 때 원호는 고향 원주를 떠나 이곳 서강 상류로 와서 관란이란 정자를 짓고 먼발치에서나마 옛 임금을 섬겼다고 한다. 그가 날마다 청령포를 향해 절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했으니 관란(觀瀾)이란 눈물 흘리며 바라본다는 뜻으로 해석함이 좋을 듯하다.
관란정 ‘관란(觀瀾)’이란 “흐르는 물을 따라 본다”는 뜻으로, 세조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의 호이면서 그가 손수 세운 정자의 이름이다. 단종이 영월 땅 청령포로 유배되었을 때 원호는 고향 원주를 떠나 이곳 서강 상류로 와서 관란이란 정자를 짓고 먼발치에서나마 옛 임금을 섬겼는데, 날마다 청령포를 향해 절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원호는 이 정자에 기거하면서 남류하는 강물을 이용하여 표주박에 문안 편지를 띄우기도 하고, 또 낙엽으로 엮어 만든 배를 이용하여 채소나 과일 같은 음식을 실어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용케도 이들 물건이 단종이 계신 청령포에 정확히 닿았다고 하니 지극한 충성심을 하늘도 감동한 것인가.
원호의 충성심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한 여인이 강가로 빨래하러 나왔다가 울고 있는 원호를 보고 우는 연유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어서 나는 이렇게나마 한 임금을 섬기고 있는 중이라오.”
이같은 원호의 말은 또 다른 파문을 일으킨다. 여인 역시 슬피 울면서 “실은 제가 며칠 후 개가하려 했는데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생각을 고쳐 먹어 수절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도 평생 한 남편을 그리며 수절했다는, 그런 이야기다. 원호 역시 단종이 사약을 받자 두문불출하며 삼년상을 치렀고, 평소 앉거나 누울 때도 머리를 동쪽으로 향했다고 한다. 단종이 잠든 장릉(莊陵)이 관란정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원호의 일편단심도 그렇지만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던 엄흥도의 무용담이나, 머루를 따다 바쳤다는 추충신(秋忠臣)의 고사 등 영월 땅은 온통 단종애사(端宗哀史)에 얽힌 전설로 점철되어 있다. 이 지역의 지명 역시 예외는 아니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넘어온 고개를 지금도 군등치(君登峙)라 부르고, 그때 타고 온 말이 슬프게 울었다는 우레실은 명라곡(鳴羅谷)으로, 또 그 말이 말방울을 떨어뜨렸다는 고개는 방울재란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영월 청령포
단종을 향한 원호의 단심이 여기까지 미쳤다고 한다.
영월이란 지명도 단종과 결코 무관하지는 않다. 백제 때 이 고을이 1백 가호가 넘었다 하여 백월(百越)이라 부르던 것이 고려 때 영월(寧越)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편안히 넘을 수 있는 곳, 그러나 이곳으로 귀양 온 단종은 결코 편안히 넘을 수 없었을 게다. 세월이 흘렀으나 어린 왕에 대한 애틋한 정을 끊지 못하는 것은 그가 편안히 넘기는커녕 다시는 영원히 되넘어가지 못하는 영월(永越)이 된 탓이 아닐까?
오대천과 주천강이 영월에서 조양강을 만나면 비로소 남한강이 그 본래의 모습을 갖춘다. 본류를 형성한 남한강이 충청도 단양(丹陽) 땅으로 접어들면 그 옛날 우직한 충성심의 상징으로 고구려 온달 장군의 족적을 만난다. 영춘면 백자리와 하리 중간에 위치한 온달산성이 그것인데 문헌상에는 성산고성(城山古城)이라 적고 있다.
단양의 온달산성
성산고성(城山古城)이라 불리는 이 산성은 용감한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이 서려 있다. 남쪽으로 소백산맥의 웅장한 산줄기가 보인다.
영월 장발리에 있는 선돌
온달이 전사한 후 생겼다는 이 돌은 그의 용맹성을 상징하는 듯하다.
역사상 인물 중에 바보 온달만큼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장군도 드물다. 우스꽝스런 용모에다 우직하기 이를 데 없는 위인이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가 되었다는 사실부터 전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평소 울기를 잘하던 평강공주더러 “그렇게 울기만 하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내겠다”는 으름장이 어쩌다 현실화된 사실부터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 예측이나 했을까,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금실이 그렇게 좋을 줄을, 그리고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그토록 깊을 줄을. 이곳 단양은 신라와 국경을 맞댄 최전선으로 온달은 이 산성에서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전사 전설도 결코 예사롭지 않다. 한이 맺혀 꿈쩍도 하지 않던 그의 시신이 사랑하는 아내 평강공주의 말 한마디로 움직였다고 하니 말이다.
온달성 아래는 그가 수련했다는 온달굴(‘남굴’이라고도 함)이 이제 개발을 기다리고 있고, 전투 중 잠시 쉬면서 바위에 윷판을 새겼다는 쉰돌〔休石〕과 함께 장발리에는 선돌〔立石〕 같은 자연석도 남아 있다. 이 선돌은 온달이 백자리에 성을 쌓을 때 소백산의 산신 마고할멈으로 하여금 돌을 나르게 했는데 그가 패주했다는 소식을 들은 할멈이 나르던 돌을 그대로 팽개친 것이라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온달을 도우러 산성으로 가던 누이동생이 장발리에 이르러 오라비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선 채 돌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온달산성 단양 땅 영춘면 백자리와 하리 중간에 있는 온달산성(문헌상에는 성산고성으로 되어 있다)은 평강공주와 결혼하여 고구려의 장군이 된 바보 온달이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곳이다. 한이 맺혀 꿈쩍도 하지 않던 그의 시신이 평강공주의 한마디에 움직였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으로, 성 아래에는 그가 수련했다는 온달굴이며 그와 관련한 쉰돌, 선돌이 남아 있다. |
남한강 줄기가 소백산 기슭을 휘돌아 매포읍 도담리에 이르면 강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세 봉우리, 곧 도담삼봉(島潭三峰)이란 명승지를 만난다. 이 세 바위섬은 본래 강원도 정선 땅에 있던 것인데 어느 해 큰 홍수로 이곳까지 떼밀려 왔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예전에는 강원도에서 매년 세금을 받아 갔으나 이 지역 한 아이의 기지로 세금을 물지 않게 되었다는, 흡사 설악산의 울산바위와 유사한 전설이 있다.
그런데 삼봉을 대하는 이곳 사람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봉우리 셋 중 가운데 있는, 가장 높은 것을 남봉(男峰)이라 하고 좌우 두 개를 각각 처봉(妻峰)과 첩봉(妾峰)이라 부른다. 남봉은 본처에게서 딸만 셋을 두었으나 후일 첩봉을 얻어 소망하던 아들을 보게 되었다. 그러니 첩만 총애하게 되고 본처에게는 소홀히 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삼봉은 한 남자와 두 여인의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세 바위섬 곁에 있는 천연 석문(石門)과 함께 단양팔경의 제1경으로 치는 이 도담삼봉에 대한 발상이 다소 유치하다고 생각된다. 다만 그렇게 보아 그런지 남쪽에 있는 첩봉은 불룩한 배를 자랑스럽게 내밀며 남봉에게 애교를 떠는 형상이며, 북쪽의 처봉은 등을 돌린 채 잔뜩 토라진 모습 그대로이다.
빼어난 풍광에 비해 전설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담삼봉은 조선 초 왕조의 기반을 닦은 삼봉 정도전(鄭道傳)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대학자이기도 했던 정도전은 인근 도전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이곳에서 놀았던 인연으로 삼봉(三峰)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의 출생지인 매포읍 도전리(道田里)는 본래 도전리(道傳里)라 적었으나 그가 태종 이방원에게 배척을 당한 후 글자마저 바뀌고, 그의 흔적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단양의 도담삼봉
삼봉 정도전이 어릴 때 놀던 곳으로 단양팔경 중 으뜸으로 꼽힌다. 흔히 세 봉우리를 한 남자가 처와 첩, 두 여인을 거느린 형상이라고 한다.
어떻든 삼봉 정도전은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일등공신이요 오로지 태조 한 임금을 섬긴 충신임엔 틀림이 없다. 일편단심 한 군주를 섬긴 충신이 많았기에 고을 이름조차 단양(丹陽)이라 했을까? 단양을 고구려 때는 사비골〔沙伏忽〕이라 불렀는데 ‘사비’는 붉은색을 뜻한다. 이 사비를 신라 때는 적산(赤山)으로 적고 고려 때는 단산(丹山)으로 적었다. ‘사비’란 말은 모음 사이의 ‘ㅂ’이 약화되면 ‘새’로 발음된다. 단양읍 장회리와 두항리 사이에 단구협(丹邱峽)이란 긴 골짜기를 ‘새바우골’이라 부르는데 이 이름이 바로 ‘사비 → 새’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물에 잠기고 만 옛 단양의 옥터 거리 옆에 인공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이 인공못이 지명 및 풍수지리와 관련이 있다고 전한다. 곧 단양(丹陽)이란 두 글자가 모두 불과 관련된 이름이다. 말하자면 화기를 막는다는 뜻에서 이곳에 연못을 파고, 또 두악산에 물과 소금을 담은 항아리를 묻었다는 것이다. 물이 불을 이긴다는 오행상극설이 용케 적중했음인가. 그 이후로 이 고장에 화재가 없어졌고, 더더구나 충주댐이 건설된 뒤로 옛 단양은 아예 물 속에 잠기고 말았다.
탁오대
퇴계 이황이 발을 씻었다는 곳으로 단양 수몰지에서 옛 군청자리로 옮겨 놓았다.
수몰된 구단양의 흔적은 상방리 옛 군청 자리 앞마당에 서 있는 우화교신사비(羽化橋新事碑)와 탁오대(濯吾臺)라 새긴 바위가 잘 대변해 준다. 탁오대는 본래 하방리 강가에 있던 바위로서 조선 명종 때 퇴계 이황 선생이 이 고을 군수로 있을 때 손수 새긴 글씨라고 한다. 선생은 여가를 이용하여 단양 산수를 즐기곤 했는데, 특히 우화교(羽化橋)를 지나 이 바위에 이르러 갓끈을 풀어 놓고 한가롭게 놀았다고 한다.
고구려 왕실에 충성을 다한 온달 장군, 끝까지 단종을 섬긴 원호, 태조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운 삼봉 정도전 등 남한강 줄기 따라 단심(丹心)의 족적을 더듬는 이번 여행에서 마지막으로 대하는 탁오(濯吾)란 글귀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정선·영월·단양 등 이 궁벽한 곳에 귀양왔거나 낙향한 인사들의 심정을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등장하는 한 어부가 잘 대변하고 있다. 퇴계는 이곳 단양에서 물은 비록 맑았더라도 자신의 발을 씻었던 모양이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네이버 지식백과] 단심(丹心)이 흐르는 남한강 줄기 (물의 전설, 2000. 10. 30., 천소영, 김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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