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집 제2권 8-7 8 즉경即景 보이는 경치 그대로 7 청신淸晨 이른 아침
청신하이위기장清晨何以慰飢腸 이른 아침에 어떻게 주린 창자 위로하나?
려곽신증서반향藜藿新蒸黍飰香 명아주 새로 찌니 기장밥도 향그럽다.
백옥자감빙씨곤白屋自甘氷氏困 백옥白屋에서 빙씨氷氏의 곤란함 달게 여겼고
청산불수열관망靑山不受熱官忙 푸른 산은 열띤 관리의 바쁜 것 아랑곳하지 않네.
견제북령운유습鵑啼北嶺雲猶濕 두견새 우는 북쪽 산마루에는 구름 아직 젖어 있고
아기동림일이황鴉起東林日已黃 까마귀 동녘 숲에 떴는데 해는 이미 황혼이라.
이약학선도시망餌藥學仙都是妄 약 먹고 신선을 배움은 모두 망령이니
안심개시월인방安心箇是越人方 마음 편히 갖는 것이 바로 월인방일세.
►청신淸晨 맑은 첫새벽.
►여곽藜藿 ‘명아주 잎과 콩잎’이라는 뜻으로 아주 변변치 못한 飮食을 比喩(譬喩)
‘명아주 려(여)藜’ 명아주(명아줏과의 한해살이풀) 나라의 이름
‘콩잎 곽/미역 곽, 낙화 깔릴 수藿’ 콩잎. 곽향藿香(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
►서반黍飰 기장밥
‘기장 서黍’ 기장(볏과의 한해살이풀)
‘밥 반飰’ 밥(반飯, 飯) 식사. 먹다
►백옥白屋 초라한 草家. 가난한 사람의 집. 흰 띠 풀로 지붕을 잇고 못살기 때문
일모창산원日暮蒼山遠 날 저물어 푸른 산은 먼데
천한백옥빈天寒白屋貧 하늘은 차고 오막살이집 가난하다.
시문문견폐柴門聞犬吠 사립문 밖의 개 짖는 소리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눈보라치는 이 밤 누가 돌아오는가보다.
/<유장경劉長卿 봉설숙부용산逢雪宿芙蓉山>
물긍주문시勿矜朱門是 붉은 대문 가진 高官 집이 옳다하여 자랑하지 말며
누차백옥비陋此白屋非 이 백옥은 그르다하여 더럽게 여기지 말라.
/<두보杜甫 감림甘林>
►빙씨氷氏 얼음을 먹는 사람의 뜻으로 가난하게 살던 송나라 왕단王旦의 고사에서 나왔다.
►월인방越人方 월방越方이라고도 하며 점치는 기술. 월인이 점을 잘 쳤다고 한다.
●청신淸晨 맑은 새벽에/서거정徐居正(1420-1488 세종2∼성종19)
청신소좌옹면금淸晨小坐擁緜錦 맑은 새벽 솜이불 안고 조금 앉아있으려니
창일휘휘정객심窓日暉暉淨客心 창밖의 빛나는 햇살은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한다.
세월기하시시사歲月幾何詩是史 흘러간 세월이 얼마인가, 내 시가 바로 역사인데
안용여차주위잠顔容如此酒爲箴 얼굴이 이와 같으니 술을 조심해야 하오.
방신지유두릉검防身只有杜陵劒 몸 지키는 일 오로지 두릉의 칼이요
수탁증무육고금垂橐曾無陸賈金 늘어뜨린 주머니에는 일찍이 육고의 금은 없었다.
하일귀환잉걸골何日歸還仍乞骨 어느 날에야 돌아와 강직함을 구걸하여
향참귀거착인삼向鑱歸去斲人蔘 보습을 가지고 인삼을 캐어볼까
●왕단王旦(957-1017)
1. 못난 외모이나 반드시 크게 귀해질 상이다
대명신현大名莘县 사람으로 자는 子明.
북송北宋 때의 大臣으로 왕호王祜의 아들로 새벽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단旦으로 지었다.
태어날 때부터 얼굴과 코가 비뚤어지고 목 줄기가 남달리 튀어 나와 외모가 못났는데
어느 날 화산의 한 도사가 그의 얼굴을 보고
“후에 반드시 크게 귀해질 상이다”라고 예언했다.
어렸을 때부터 말수가 적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문학적 재질이 있었는데
부친 왕호는 그를 매우 아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공경재상公卿宰相이 될 것이다.”
2. 지혜롭고 어진 정치
태종 태평흥국太平興国 5년(980)에 23세의 나이로 진사에 급제한 왕단은
곧 大理寺評事를 거쳐 호남 평강平江(湖南성 핑장현) 현령이 되어 평강현에서 4년 동안 재직했다.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백성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정책을 시행하고
덕으로 교화함으로써 백성들이 평안히 살면서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전운사였던 조창언이 마침 평강을 지나다 그가 펼치는 정책을 보고
마음에 들어서 크게 칭찬하고 자신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태종 옹희雍熙 원년(984)에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평강을 떠나
담주潭州(후난성 동부 샹탄湘潭시) 은장銀場 지역을 감독하게 되었고 얼마 후에
조정으로 들어가서 저작좌랑著作佐郎이 되어 詩文選集 <문원영화><시류詩類> 편찬에 참여하였다.
왕단은 <양조국사兩朝國史>를 감수했으며 <文集> 20권이 있었지만
다 소실되고 3수의 시가 <全宋詩>에 수록되어 있다.
또 일부 문장이 <全宋文>에 남아 있다.
3. 진종의 신임
진종 경덕景德 원년(1004)에 진종(조항)이 친히 전주澶州(허난성 찬저우) 정벌 길에 올랐을 때
수행했던 그는 얼마 뒤에 옹왕3 조원빈趙元份(969-1005)의 병이 위중해지자 조정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에 상서좌승尚書左丞이 되었고 그 다음 해에 工部상서,
同中書門下平章事를 거쳐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진종 대중상부大中祥符 원년(1008)에 진종이 하늘과 땅에 드리는 제사인
봉선封禪을 지내려고 했으나 왕단이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종은 강행하기로 결정하고 오히려 왕단을 천서의장사天書儀仗使, 封禪大禮使,
중서시랑中書侍郎 겸 형부刑部상서로 임명하여 <봉사단송封祀壇頌>을 짓게 하였다.
또 병부兵部상서로 삼고 분음汾陰(산시성 완룽현 서남쪽)에서 제사 지내게 했으며 다시 大禮使,
상서성우복야尚書省右僕射, 소문관대학사昭文館大學士로 임명하여 <祠壇頌>을 짓게 하였다.
그 뒤 다시 門下시랑에 임명되었고 대중상부 3년(1010)에는
병부상서 지추밀원知樞密院, 중서시랑 겸 형부상서가 되어 조정의 대소사를 관장하였다.
진종 천희天禧 원년(1017) 가을에 왕단의 병이 위중해졌고 건강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니 마지못해 진종이 허락하며 그 대신 재상의 녹봉을 주도록 했다.
그리고 진종이 내시를 보내 안부를 묻고 죽과 탕약을 보내주었으나
왕단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진종은 3일 동안 조회를 파하고 친히 조문했다고 한다.
사후에 왕단은 태사太師, 상서령尚書令 겸 중서령中書令,
위국공魏國公에 추봉되고 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 때문에 ‘왕문정王文正’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훗날 소훈각이십사공신昭勋阁二十四功臣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소훈각이십사공신昭勋阁二十四功臣이란 보경宝庆 2년(1226)에 소훈각昭勋阁에
24명의 공신들의 초상을 그려놓고 추모한 것을 일컫는 것인데 그 성원은
조보赵普, 조빈曹彬, 설거정薛居正, 석희재石熙载, 번미潘美, 이항李沆, 왕단王旦,
이계륭李继隆, 왕증王曾, 여이간吕夷简, 조위曹玮, 한기韩琦, 증공량曾公亮,
부필富弼, 사마광司马光, 한충언韩忠彦, 여이호吕颐浩, 조정赵鼎, 한세충韩世忠,
장준张浚, 진강백陈康伯, 사호史浩, 갈필葛邲, 조여우赵汝愚이다.
그 중에 武臣은 조빈曹彬, 번미潘美, 조위曹玮, 이계륭李继隆, 한세충韩世忠이다.
4. 청렴과 비범의 상징
1) 재상 구준과의 일화
왕단이 재상으로 있을 때 구준이 여러 차례 진종에게 왕단의 단점을 폭로했지만 왕단은 오히려
구준을 칭찬했고 나아가 구준을 절도사,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추천하기도 했다.
뒤에 구준은 스스로 자신의 덕이 왕단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고 고백했다.
왕단은 일생 동안 집과 땅을 가지지 않는 등 청렴결백을 유지했고
자손들에게 스스로 자립해야 한다고 일렀다.
2) 비범함에 관한 전설
왕단이 23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후난 평강현령이 되었을 당시
평강현 관사에는 귀신들이 자주 출현해서 겁이 많은 사람은 오래 거주하지 못했다.
왕단이 부임하기 전날 관사를 지키던 관리가
“재상이 곧 도착하니 우리들은 이제 도피해야겠다.”
라고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귀신들이 소란을 피우는 일들이 없어졌다고 한다.
황당무계한 이야기이지만 한편으로는 귀신들까지도 왕단을 존경했을 만큼
그가 많은 사람들의 신망과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을 짐작케 하는 전설이다.
또 하나의 전설은 어느 여름날 왕단이 한 가난한 농가에 도착하여 큰 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주변에 있던 개미들이 그가 쉬고 있는 곳에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보는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모두 貴人의 복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역시 왕단의 비범함을 보여주는 전설이라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