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력 비판...!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혹시 이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하나님(하느님)은 왜 인간을 위하시지? 왜 인간을 위해서 일하시지?"
"내로남불"의 유래에 대해 말하기 위해, 서양 근대의 계몽주의사상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무지몽매로 점철되는 현실에 대한 자각과 비판이 "계몽"입니다. 그리고 그 계몽을 가져오는 것은 인간의 "이성" 능력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성의 독단을 막고 이성을 비판하는 것 또한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독일의 칸트는 3대 이성 비판서를 내놓습니다. 바로 "계몽의 계몽"을 위해서인거죠.
현재 우리 자신들에게서 보여지는 진보의 모습이 바로 이 "계몽의 계몽"을 게을리하면서, "계몽"(현실비판)에 머물면서 또 거기에 갖혀서, "독단"을 낳아, "내로남불"의 함정에 빠져 있었던 겁니다.
촛불 깨시민들이 어떤 존잽니까? 바로 이 점을 꿰뚫어본 것이고 또 심판한 겁니다.
논리학 책의 구조를 보면, 개념론, 판단론, 추리론, 오류론, 이렇게 순서대로 나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 순서는 다릅니다. 실제로는 개념이 먼저가 아니고 판단이 먼저입니다. 판단은 "judgement"이기도 하지만, 불완전한 형태로서의 "sentence"(문장)이기도 합니다.
아이들 발달 단계에서는, 한 단어, 두 단어, 세 단어로 늘려가다가 완전한 문장으로 완성됐을 때 발달 단계는 끝납니다. 이 때부터 판단이 시작되는 겁니다. 즉, 생각다운 생각을 한다는 것이죠.
칸트는 판단력(판단하는 능력)을 이성의 고급 능력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의 감성능력과 이성능력을 조화시키는 우리의 능력이 바로 이 판단력(urteilskraft)이라고 보았고, 그것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이 예술의 영역이라고 봤습니다. 따라서 예술이 추구하는 미(beauty)나 미적인 것(aesthetic)들은 모두 균형과 조화의 원리에 따른다고 봅니다.
가장 조화롭고 균형의 능력을 우리는 어디서 볼 수 있을까요? 바로 자연이고 자연의 창조주인 신(god)인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우리는 신을 닮으려 할 것이고, 우리의 이성은 신의 원리, 아름다움의 원천인 균형과 조화를 찾게 됩니다. 이 때 가장 고급 이성인 판단력이 작용을 일으킵니다.
갑자기 더 쓰기 싫어졌는데요. 급히 마무리하겠습니다.
현실비판에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도 자기 함정, 자기 독단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적폐청산을 주장하는 사람이 지금 내가 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자기 이성에 대한 판단이 흐려지면 균형감을 상실하고 부조화를 드러냅니다. 그럼으로써 내로남불의 형태로 보여지게 됩니다. 진보가 진보답지 못할 때는 더 어글리한(추한) 모습으로 보여진다는 겁니다. 따라서 "계몽의 계몽"이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한다는 저의 말씀!
좀 더 간단히,
현실은 이성이 비판하고, 이성은 누가 비판? 그 이성이 논리적 이성이든 도덕적 이성이든, 판단력이 한다는 겁니다.
끝.
kjm / 2021.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