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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엥겔스: [칼 맑스의 [프랑스에서의 내전] 독일어 제3판] 서설, 이수흔 역
[프랑스에서의 내전]에 관한 인터내셔널 총평의회의 담화문을 재출판하고 서설을 덧붘여 달라는 요청은, 나에게는 뜻밖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들만 간단히 다룰 수밖에 없다.(선집6,323)
나는 상술한 좀더 긴 노작 앞에 독일-프랑스 전쟁에 관한 총평의회의 짤막한 두 담화문을 첨부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내전]에서 두 번째 담화문을 언급하고 있고, 두 번째 담화문은 첫 번째 담화문 없이는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맑스가 집필한 이 두 호소도 역시 [내전]에 못지않게,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처음으로 입증된 저자의 놀랄 만한 재능, 역사적 대사건들이 우리의 눈앞에서 아직 일어나고 있거나 방금 종결된 때에 그 사건들의 성격, 의미, 필연적 결과들을 명확히 파악하는 재능을 보여주는 탁월한 표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으로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독일에서 맑스가 예언한 이 사건들의 결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선집6,323)
만일 루이 보나파르트에 대한 독일의 방어 전쟁이 프랑스 인민에 대한 정복전쟁으로 변질된다면 이른바 해방전쟁 후에 독일에 닥쳐왔던 모든 불행이 더 격화된 형태로 새로이 부활될 것이라는 첫 번째 연설문의 이야기는 적중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그후 20년 동안 비스마르크의 지배^를 받았고, 데마고그들에 대한 박해 대신에 동일한 경찰의 전횡과 문자 그대로 동일한 언어도단의 법규 해석을 동반하는 예외법과 사회주의자 사냥을 겪지 않았던가?(선집6,323-324)
알자스-로렌의 합병은 “프랑스를 러시아 품안에 밀어 넣게” 될 것이어고, 이러한 합병 후에 독일은 러시아의 공공연한 노예가 되거나 아니면 잠시 쉬고 나서 새로운 전쟁, 더욱이 “슬라브 종족과 라틴 종족의 동맹에 맞선 종족 전쟁을” 준비하거나 해야 한다는 예언이 과연 문자 그대로 입증되지 않았던가? 프랑스 영토에 대한 합병은 프랑스를 러시아의 품안으로 집어 넣지 아니 하였던가? 비스마르크는 부질없이 20년 내내 차르의 호의를 간청하면서 그의 종복 노릇을 하고 소 프로이센이 ‘유럽의 최대 강국’으로 되기 전에 늘 그러했던 것보다 더욱 비굴하게 신성 러시아의 발 밑에 엎드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첫날부터 모든 문서로 확인된 군주들 간의 동맹을 간 데 없이 휘날려 버리는 전쟁, 그 결말을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전쟁, 천오백만 내지 이천만의 무장한 병사들이 유럽 전체를 유린하도록 내맡겨 버리는 인종전쟁, 오직 전쟁의 최후 결과의 예측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 앞에 최강의 군사 대국들조차도 불안해 하기 때문에 아직 맹위를 떨치지 않고 있는 인종전쟁, 이러한 전쟁이라는 디모크레스의 검이 항상 우리의 머리 위에 드리워 있지 않단 말인가?(선집6,324)
그런 만큼 더욱이 우리는 1870년의 국제 노동자정책의 선견지명에 대한 빛나는 전거, 반쯤 망각되어 버린 이 전거를 독일 노동자들이 다시 접하도록 할 의무가 있다.(선집6,324)
이 두 호소에 유효한 것은 [프랑스에서의 내전]에도 역시 유효하다. 5월 28일에 코뮌의 마지막 전사들은 벨빌의 비탈에서 힘의 우위에 굴복하였다. 그리고 이틀 후인 30일에 맑스는 총평의회에서 노작을 낭독하였다. 이 노작에서는 파리 코뮌의 역사적 의의가 간결하고 힘있게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모든 방대한 문헌도 결코 따르지 못하리 만큼 예리하게 또 무엇보다^는 정확한 필치로 서술되어 있다.(선집6,324-325)
1789년 이후 프랑스의 경제적⋅정치적 발전으로 인하여 최근 50년 동안 파리에서는,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띠지 않는 어떠한 혁명도 일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자신의 피의 대가로 승리를 쟁취한 프롤레타리아는 승리한 후에 자신의 요구를 들고 나왔다. 이 요구들은 그때그때의 파리 노동자들의 발전 상태에 따라 다소 불명료하였고 심지어는 애매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요구들은 결국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계급적 대립의 철폐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은 물론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불명확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요구 자체는 벌써 현존 사회질서에 다하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욱이 이 요구들을 제기한 노동자들은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국가의 방향타를 쥐고 있는 부르주아의 첫째 신조는 노동자의 무장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가 전취한 각각의 혁명 후에는 새로운 투쟁이 벌이졌는데 그것은 노동자의 패배로 끝나 버렸다.(선집6,325)
이러한 일은 1848년에 처음으로 일어났다. 의회 내 반정부파인 자유주의 부르주아는 자기 당파의 지배권을 보장해 줄 선거법 개정을 실시할 목적으로 개혁 연회(Reformbankette)를 열었다. 그들은 정부와 투쟁하는 가운데 더욱더 인민에게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점차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층 가운데 급진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층에게 점차 앞 자리를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층의 배후에는 혁명적 노동자들이 서 있었다. 이들은 1830년 이후 부르주아나 심지어 공화주의자들이 예감하고 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큰 정치적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와 반정부파 간의 관계에 위기가 닥쳐왔을 때 노동자들은 시가전을 개시하였다. 루이-필립은 자취를 감추고 그와 더불어 선거법 개정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 대신에 공화국이, 그것도 승리한 노동자들이 ‘사회’공화국이라고까지 명명한 그러한 공화국이 나타났다. 이 사회공화국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노동자들 자신에게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국가의 한 세력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방향타를 쥐고 있는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은 발 밑에 어느 정도 확고한 지^반이 있다고 느끼게 되자마자 노동자의 무장해제를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이 무장해제는, 직접적인 위약, 노골적인 조롱, 그리고 실업자들을 먼 지방으로 추방하려는 시도를 통하여 노동자들을 1848년 6월 봉기로 몰아붙임으로써 일어났다. 정부는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확보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5일간의 영웅적 투쟁 끝에 노동자들은 패배하였다. 그리고 바로, 로마 공화국을 몰락케 한 내전 시기 이후 일찍이 보지 못한 무방비 상태의 포로에 대한 잔인한 학살이 뒤따랐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독립된 한 계급으로서 자신의 이익과 요구를 가지고 부르주아지에 맞서 용감하게 등장하자마자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에게 얼마나 광적으로 복수하는가를 보여주는 최초의 일이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1848년은 1871년의 부르주아지의 광란에 비한다면 아직 어린애의 장난 같은 것이었다.(선집6,325-326)
형벌이 곧 뒤따랐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프랑스를 아직 통치할 수 없었다면, 부르주아지는 이미 통치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 당시에는 불가능하였다. 그 당시 부르주아지의 대부분은 아직 군주주의에 호의적이었고 세 개의 왕조적 당파와 그 네 번째 공화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부르주아지의 내부 알력을 기화로 모험가 루이 보나파르트는 모든 권부−군대, 경찰, 행정기관−를 장악하고 또 1851년 12월 2일에는 부르주아지의 최후 보루인 국민의회를 분쇄하였다. 제2제국이 시작되었다. 정치 및 금융 모험가 도당에 의한 프랑스의 착취가 시작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소수의 대부르주아지만의 배타적 지배였던 루이-필립의 협애하고 소심한 제도 밑에서는 전혀 불가능하였던 공업의 발전도 시작되었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노동자에 맞서 부르주아지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또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지에 맞서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자본가들로부터 그들의 정치 권력을 빼앗았다. 그러나 그 대신 그의 지배는 투기와 공업 활동, 요컨대 부르주아지 전체의 전대미문이 발흥과 치부를 조성하였다. 물론 엄청나게 큰 규모로 부패와 대량 절도 행위가 이루어졌으며 궁정이 그 중심으로 되어 그러한 치부 중에서 큰 몫을 떼어냈다.(선집6,326)
그러나 제2제국은, 1814년에 상실한 제1제국의 국경, 적어도 제1공화국의 국경의 반환을 청구하는 프랑스 배외주의에 대하여 호소하였다. 구군^주국 국정 내에 있는, 아니 더욱 잘려나간 1815년의 국경 내에 있는 프랑스제국이라고 하는 것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그래서 때때로 전쟁을 하여 국경을 확장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나 그 어떠한 국경 확장도 독일의 라인강 좌안처럼 그렇게 강력하게 프랑스 배외주의자들의 환상을 자아내는 것은 없었다. 라인강 연안의 1제곱 마일은 그들에게 알프스 산맥이나 또는 그 어떤 다른 곳의 10제곱 마일보다 더 중요하였다. 제2제국이 존재하고 있는 한, 단번에든지 또는 점진적으로든지 라인 좌안에 대한 반환 청구는 다만 시간 문제였다. 이 시간은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함께 닥쳐왔다. 비스마르크 때문에 또 자기 자신의 교활하기 짝이 없는 우유부분단한 정책 때문에, 기대했던 ‘영토 보상’에 기만당하자 보나파르트에게 남은 것은 전쟁뿐이었다. 이 전쟁은 1870년에 발발하여 그를 스당으로 그리고 다음에는 빌헬름스회에(Wilhelmshöhe)로 내쫓았다.(선집6,326-327)
그 필연적 결과는 1870년 8월 4일의 파리혁명이었다. 제국은 카드로 만든 집처럼 힘 없이 넘어지고 다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적이 문전에 서 있었다. 제국의 군대는 메츠에서 포위되어 벗어날 가망이 없었거나 독일에서 포로로 잡혀 있었다. 이러한 위급한 정세 하에서 인민은 전(前)입법원 파리 대의원들이 ‘국민 방위 정부’를 조직하는 것을 묵인했다. 이에 더욱 빨리 동의한 것은, 지금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파리 사람들이 방위를 위해 국민방위대에 편입되어 무장을 갖추고 있고 그 결과 이제는 노동자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즉시 거의 전부가 부르주아들로 구성된 정부와 무장한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이 폭발하였다. 10월 31일 노동자 대대들은 시청으로 돌격하여 일부 정부 각료를 체포하였다. 배신과 정부의 노골적인 위약(Wortbruch)과 속물들의 몇몇 대대들의 간섭으로 그들은 다시 석방되었다. 그리고 외국 군사력에 의해 포위된 도시 내에서 내전이 발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종래의 정부가 존속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선집6,327)
기아에 지친 파리는 1871년 1월 28일에 마침내 항복하였다. 그러나 전쟁사에 전재미문의 명예를 간직한 채 항복하였다. 보루가 넘어가고 환상(環狀)방벽은 무장해제되고, 상비병과 기동 방위대의 무기는 양도되었으며,^ 그들은 스스로 전쟁포로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국민방위대는 자신의 무기와 케넌포를 소지하면서 승리자들과 휴전만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승리자들 자신도 감히 파리에 개선 입성을 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다만 파리의 넓지 않은, 게다가 일부분은 공원인 한 모퉁이를 점령하였을 뿐이고 그 모퉁이조차도 겨우 수일 간 점령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131일이나 파리를 포위하고 있었던 그들 자신이 이 무장한 파리 노동자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즉 노동자들은 외국 정복자에게 제공한 한 구석의 좁은 경계를 한 사람의 ‘프로이센인’도 넘어서지 못하도록 빈틈없이 감시하고 있었다. 파리 노동자들은, 제국 군대 전체의 항복을 면전에서 받았던 그 군대로 하여금 자기들에 대한 이와 같은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였다. 혁명의 근원지에 복수하려고 기어든 프로이센 융커들은 바로 이 무장 혁명 앞에 경건하게 멈춰 서서 이 혁명에 경이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선집6,327-328)
전쟁 동안 파리 노동자들은 전투의 정력적인 지속을 요구하는 데 전념하였다. 그러나 파리가 투항하고 강화가 체결된 지금, 새로운 정부 수반인 티에르는 파리 노동자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 한 유산계급−대토지 소유자와 자본가−의 지배는 항상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로 그가 할 일은 그들의 무장해제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는 파리 포위 공격 기간 동안 민간 기부금으로 지불되어 제조된 국민방위대의 대포를 탈취하라는 명령과 함께 3월 18일에 상비군을 파견하였다. 이 시도는 실패하였다. 파리는 일사불란하게 방어를 위한 전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베르사이유에 있는 프랑스 정부와 파리 사이에 전쟁이 선언되었다. 3월 26일 파리 코뮌이 선출되고 28일에 선포되었다. 이때까지 정부를 이끌어 온 국민방위대 중앙위원횐느 파리의 파렴치한 ‘풍기경찰’의 폐지를 먼저 포고한 뒤 사퇴하여 코뮌에게 전권을 양도하였다. 30일에 코뮌은 징집과 상비군을 폐지하고 무기를 잡을 수 있는 모든 시민으로 이루어진 국민방위대를 유일한 무장력으로 선포하였다. 코뮌은 1870년 10월부터 4월까지의 주택 임대료를 면제하고 이미 지불한 금액은 미래의 지불로 산정하며 시영 전당포에 전당 잡힌 물건들의 판매를 일체 중지시켰다. 같은 날 코뮌에 선출된 외국인들은 집무를 비준 받았다. 왜냐하면 “코뮌의 깃발^이 곧 세계공화국의 깃발이기” 때문이었다. − 4월 1일에는 코뮌 직원의 봉급이 6,000프랑(4,800마르크)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따라서 코뮌 의원들의 봉급 또한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 다음 날에는 국가로부터 교회의 분리, 종교적 목적을 위한 일체의 국가 지불의 폐지, 일체의 교회 재산의 국유재산으로의 전환이 포고되었다. 그 결과 4월 8일에는 모든 종교적 상징, 성상, 교리, 기도, 요컨대 “개인의 양심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학교에서 추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점차 실시되었다. − 5일에는 포로가 된 코뮌 전사들이 베르사이유 군대에 의해 매일 총살당하는 것에 대응하여 인질을 체포한다는 훈령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실시되지 않았다. − 6일에는 국민방위대 제137대대가 기요틴을 끌어 내어 인민들의 대환호 속에 공개적으로 태워 버렸다. − 12일에는 코뮌은, 나폴레옹이 1809년 전쟁 이후에 노획한 케넌포로 주조한 것으로서 배외주의와 민족들 간의 적의의 상징이었던 방돔-광장 전승 원주를 넘어뜨릴 것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5월 16일에 집행되었다. − 4월 16일에는 코뮌은, 공장주들이 폐쇄한 공장들의 통계표를 작성할 것, 이제까지 거기서 일하던 노동자들을 협동조합들로 결합하여 이들의 힘으로 이 공장을 경영할 계획을 작성할 것, 그리고 이 조합들을 하나의 거대한 연합체로 조직할 계획을 작성할 것을 명령하였다. − 20일에는 코뮌은, 제빵공의 야간 작업을 폐지하고 제2제국 이후 경찰히 임명한 인물들−노동자에 대한 일급착취자들−에 의하여 독점적으로 운영되어 온 직업소개소를 폐지하였다. 이 직업소개소는 파리의 20개 구의 구청의 관할로 넘어갔다. − 4월 40일에는 코뮌은, 노동자들에 대한 사적 착취이며 그들의 노동도구와 신용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와 모순되는 전당포를 폐지할 것을 명령하였다. − 5월 5일에는 코뮌은, 루이 16세의 처형에 대한 속죄로 건립된 참회예배당을 파괴할 것을 결정하였다.(선집6,328-329)
따라서 3월 18일부터는, 이때까지 외국의 침입에 맞선 투쟁으로 인해 뒷전에 밀려나 있었던 파리 운동의 계급적 성격이 날카롭게 또 확연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코뮌에는 거의 노동자들 혹은 공인된 노동자 대표들밖에 없었으므로 코뮌의 결정들은 결정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코뮌은, 공화주의적 부르주아지가 단지 비겁함 때문에 단념하였지만 노동자계급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하여서는 필수적인 기초를 이루는, 예컨대 국가에 대해서 종교는 순전히 사적인 일이라는 원칙이 실시되는 개혁안을 포고하였다. 혹은 코뮌은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직접 관계되며 그리하고 부분적으로 낡은 사회 질서를 깊이 찌르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포위당한 도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실행에 옮기는 것을 시작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5월 초부터는 더욱 증대된 베르사이유 정부군과의 투쟁에 모든 힘이 요구되었다.(선집6,329-330)
4월 7일에 베르사이유는 파리 서부전선의 뇌이이(Neuilly) 근교 세느강 나루터를 장악하였다. 한편 11일에 남부 전선에 대한 그들의 공격은 으데(Eudes) 장군에 의하여 심한 타격을 받아 격퇴당했다. 파리는 계속적으로 포격을 받았는데, 그것도 프로이센의 파리 포격을 성소 모독이라고 낙인을 찍은 바로 그 자들로부터 포격을 받았다. 바로 이 자들이 이제는, 자신들에게 파리를 탈환해 줄 스당(Sedan)과 메츠(Metz)에서 포로가 된 프랑스 병사들을 조속히 송환해 줄 것을 프로이센 정부에 애원했다. 이 군대들이 점차 도착하게 되어 5월 초부터는 베르사이유가 결정적 우세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파리 대주교의 인질로 파리에 잡혀 있는 여타의 모든 성직자들을 오직 한 사람 즉 코뮌에 두 번 선출되었으나 클레르보에 포로로 잡혀 있는 블랑키와 교환하자는 코뮌의 제안으로 시작된 협상을 티에르가 파탄시켜 버린 4월 23일에 벌써 명백하게 되었다. 이것은 티에르의 달라진 어조에서 더욱 명백히 나타났다. 이때까지는 질질끌며 애매하던 그가 지금에 와서는 돌연히 뻔뻔스럽고, 위협적이고 난폭해졌다. 남부전선에서 베르사이유는 5월 3일에는 물렝-사케 각면보(Redoute von Moulin-Saquet)를, 9일에는 완전히 파괴된 이씨 보루(Fort von Issy)를, 14일에는 방브(Vanves) 보루를 각각 점령하였다. 서부전선에서는 그들은 시의 성벽까지 잇닿은 수많은 촌락과 건물들을 점령하면서 점차 주 방벽에까지 전진하였다. 5월 21일에는 배반행위로 인하여 또 이곳에 배치된 국민방위대의 소홀한 태도로 인하여 그들은 성내로 돌입할 수 있었다. 북부와 동부의 보루들을 점령하고 있던 프로이센은, 휴전에 의하여 통행이 금지되어 있던 도시 북부지구를 베르사이유가 통과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그럼으로써 파리 사람들이 휴전에 의하^여 공격을 받지 않게 보장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약하게 수비하고 있었던 긴 전선에 걸쳐 그들이 공격을 하며 전진하도록 허용하였다. 그 결과 본래 번화한 도시인 파리 서반부에서는 미약한 저항만이 있었다. 침입하여 오는 군대가 본래 노동자 도시인 동반부에 접근하면 할수록 저항은 보다 치열하고 보다 완강해졌다. 8일 간의 전투 끝에야 비로소 코뮌의 마지막 수호자들은 벨빌(Belleville)과 메닐몽탕(Ménilmontant)의 고지에서 쓰러졌다. 그리하여 일주일 내내 더욱더 미친 듯이 날뛰며 자행되었던 무방비 상태의 남자, 여자, 어린이에 대한 학살은 그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후장총으로는 빨리 사살할 수 없자 경기관총으로 패배자들을 수백 명씩 한꺼번에 총살하였다. 마지막 대량 학살이 자행된 페르-라세즈(Père-Lachaise) 묘지의 ‘연맹병의 벽(Mauer der Föderierten)’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과감히 일어설 때 지배계급들이 얼마나 광포하게 될 수 있는가를 지금도 무언 중에 그러나 웅변으로 말해 주는 증인처럼 서 있다. 모두 학살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이번에는 대규모로 체포하기 시작했고 또 포로들 가운데서 마음 내키는 대로 끌어낸 희생자를 총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대규모 수용소로 끌려가 거기서 군법회의의 재판을 기다렸다. 파리 동북부를 포위하고 있던 프로이센 군에게는 한 명의 도주자도 통과시켜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그러나 장교들은 종종, 병사들이 총사령관의 명령보다도 오히려 인도적 감정에 더 사로잡힐 때 이를 못 본 체 하였다. 특히 한눈에 알 수 있는 코뮌 전사들을 많이 탈출시켜 준 한 작센 군단은 그 인도적 행위로 영예를 떨쳤다.(선집6,3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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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1871년 파리 코뮌의 활동과 역사적 의의를 돌이켜 볼 때 우리는 [프랑스에서의 내전]에 서술된 것에 약간의 보충을 가해야 되겠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선집6,331)
코뮌 의원들은, 국민방위대 중앙위원회 내에서도 지배적이었던 블랑키주의자들인 다수파와 소수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 소수파는 주로 프루^동 사회주의 학파의 추종자들로 이루어진 국제노동자협회의 회원들이었다. 당시 블랑키주의자들은 그 대부분이 다만 혁명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 본능만을 따르는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소수만이, 독일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알고 있던 바이양을 통해서 원칙을 비교적 명백하게 이해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었다. 이것으로 오늘날의 우리의 견해에서 볼 때 경제와 관련하여 코뮌이 반드시 했어야만 할 많은 것을 놓쳐 버렸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코뮌이 프랑스은행의 문전에 공손히 머물러 섰던 신성한 존경심은 아무리 해도 이해되지 않는 바이다. 이것은 또한 커다란 정치적 오류였다. 코뮌이 은행을 수중에 넣는 것−이것이야말로 만 명의 인질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렇게 하였더라면 프랑스의 부르주아지 전체는 코뮌과의 강화에 관심을 갖도록 베르사이유 정부에 압력을 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블랑키주의자와 프루동주의자로 구성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뮌이 많은 올바른 행동을 하였다는 것은 훨씬 더 놀라운 일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코뮌의 경제적 훈령에 대한 책임은 칭찬할 만한 측면에 대해서나 그렇지 못한 측면에 대해서나 우선 프루동주의자들이 져야 하고, 코뮌의 정치적 활동과 실책에 대한 책임은 블랑키주의자들이 져야 한다. 두 경우에서−방향타가 공론가들의 수중에 들어갈 때에는 흔히 있는 일이듯이−양자 모두 그들의 학파의 교리가 가르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하였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선집6,331-332)
소농민과 수공업 장인의 사회주의자인 프루동은, 조합을 한사코 증오하였다. 그는 조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합에는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이 더 많으며 그것은 본래 무익할 뿐더러 해롭기까지 한데, 그것은 노동자의 자유를 구속하는 하나의 쇠사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동자의 자유와 모순될 뿐만 아니라 노동의 절약에도 모순되는 비생산적이고 거추장스러운 순전한 독단이며 이러한 결점은 그 이점보다 더 빠르게 자라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합과는 반대로 경쟁, 분업, 사적 소유는 경제적 힘이다. 예컨대 철도와 같은 대공업과 대기업이라는−프루동의 말에 의하면−예외적인 경우에만, −노동자의 조합은 적합하다([혁명의 일반 이념], 제3연구를 보라).(선집6,332)
그런데 1871년에 대공업은 심지어 공예수공업의 중심지인 파리에서도 이미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어서 코뮌의 가장 중요한 훈령은 대공업과 심지어 매뉴팩처까지도 조직을 만들 것을 명하고 있었다. 이 조직은 각 공장의 노동자조합에 근거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든 협동조합을 한 개의 대연합체로 통합하여야 하였다. 요컨대 이러한 조직은, 맑스가 내전에서 아주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결국은 공산주의로, 즉 프루동의 학설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갈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코뮌은 또한 프루동 사회주의 학파의 무덤이었다. 이 학파는 프랑스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사라져 버렸다. 이제 프랑스에서는 맑스의 이론이 ‘맑스주의자’ 못지 않게 ‘기능주의자’ 사이에서도 확실히 지배적이다. 다만 ‘급진적’ 부르주아지들 사이에서만 아직 프루동주의자들을 볼 수 있을 뿐이다.(선집6,333)
블랑키주의자들이라고 더 나은 것은 없다. 음모의 학교에서 성장하였고 이 학교에 알맞은 엄격한 규율로 결합된 그들은 다음의 견해에서 출발하였다. 즉 비교적 소수라 할지라도 결단성 있고 잘 조직된 사람들이라면, 어떤 유리한 시기에는 국가의 방향타를 장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거대하고 단호한 정력을 발휘함으로써 이를 유지하여 인민대중을 혁명에 끌어들이고 그들을 소수 지도자들의 주위에 집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권력을 새 혁명정부의 수중에 가장 엄격히 독재적으로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그 대다수가 바로 이 블랑키주의자들로 구성된 코뮌은 대체 무엇을 하였던가? 코뮌은 지방 프랑스인에게 보내는 자기의 모든 선언에서, 프랑스의 모든 코뮌들과 파리를 하나의 자유연방으로, 즉 처음으로 국민 자신에 의하여 실제로 창조되어야 할 하나의 국가 조직으로 통합할 것을 호소하였다. 나폴레옹이 1798년에 창설하였고 그때부터 새로운 정부마다 반가운 도구로서 물려 받아 자기의 적들을 반대하는 데 이용한 바로 이전의 중앙집권화된 정부의 억압권력, 즉 군대, 정치경찰, 관료, 바로 이 권력은 파리에서 이미 몰락한 것처럼 도처에서 몰락해야 했다.(선집6,333)
코뮌은 처음부터 다음의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노동자계급은 일단 지배권을 획득하면 낡은 국가기구를 가지고서는 더 이상 관리해 나갈 수^ 없다는 것, 이러한 노동자계급은 방금 전취한 지배권을 다시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자신들을 반대하여 이용되어 온 모든 낡은 억압기구를 제거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들의 대의원들과 관리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언제든지 경질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 이전의 국가의 특징은 무엇이었던가? 사회는 자신의 공동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단순한 분업에 의해서 자신의 특수한 기관들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국가권력을 정점으로 하는 이 기관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특수한 이익에 복무함으로써 사회의 종에서 그의 주인이 되었다. 그것은 예컨대 세습군주에서뿐만 아니라 민주공화국에서도 볼 수 있다. 그 어디에도 바로 북아메리카에서와 같이 ‘정치가들’이 국민의 독립적이고 강력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곳은 없다. 거기에서는 양대 정당이 서로 번갈아 지배권을 장악하는데, 이 정당은 다시 정치를 하나의 장사거리로 만들고 연방과 각 주의 입법의회의 의석을 투기 대상으로 만들거나 자신의 당을 위한 선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며 자신의 당이 승리한 후에는 보상으로서 자리를 얻는 그런 사람들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참을 수 없게 된 이러한 질곡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 30년 동안 미국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시도를 했으며 또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들이 더욱더 이 부패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 들고 있는가는 주지하는 바이다. 본래 사회의 단순한 도구로 규정되었던 국가권력이 어떻게 사회로부터 독립하여 가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바로 미국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왕조도 귀족도 없으며 인디언을 감시하는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상비군도 없고 고정된 직위와 연금 청구권을 가진 관료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기에서, 국가권력을 번갈아 소유하고 가장 부패한 수단으로 또 가장 부패한 목적을 위해서 그것을 이용하는 정치 투기자들의 양대 도당을 본다.− 그리고 명목상으로는 국민에게 봉사하고 있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그들을 지배하며 약탈하는 정치가들의 이 양대 카르텔에 대하여 국민은 무력하다.(선집6,333-334)
국가 및 국가기관이 사회의 종에서 사회의 주인으로 전화한다는 것은 이때까지 존재한 모든 국가에서 불가피했는데, 이것을 반대하여 코뮌은 확^실한 두 가지 방법을 적용하였다. 첫째로, 코뮌은 행정, 사법, 교육의 모든 직책들을 관계자들의 보통선거권에 이거하여 선출하여 임명했다. 게다가 코뮌은 이 관계자들에게 언제든지 소화할 수 있는 권한을 설정하였다. 둘째로, 코뮌은 직위 여하를 불문하고 모든 공무원에게 다른 노동자들이 받는 정도의 임금을 지불하였다. 코뮌이 일반적으로 지불한 최고 봉급은 6,000프랑이었다. 이리하여 대표 기관의 대표들에게 여전히 불필요하게 추가되는 제한된 위임권이 없어도, 엽관 운동과 출세주의에 대한 믿음직한 빗장이 설치되었다.(선집6,334-335)
이제까지의 국가권력이 이와 같이 분쇄되고 이 국가권력이 새로운 참으로 민주주의적인 국가권력으로 교체되었다는 것은 내전 제3장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한 번 그 몇몇 특징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 독일에서는 국가에 대한 미신이 철학으로부터 부르주아지의 일반적 의식과 심지어 많은 노동자들의 일반적 의식에까지 옮겨갔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의 표상에 의하면 국가란 “이념의 실현” 또는 철학적인 말로 번역하면 지상에서의 신의 왕국이며 영원한 진리와 정의가 실현되고 있는 또는 실현되어야 할 영역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국가와 그에 관련되는 모든 것에 대한 미신적인 숭배가 생긴다.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마치 사회 전체의 공공사업과 공공이익은 이제까지 그것들이 처리되는 것과는 다르게, 즉 국가와 높은 봉급을 받는 관리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처리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더욱 쉽게 이 미신적인 숭배는 뿌리를 내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일 그들이 세습 군주제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나 민주공화제를 신뢰한다면 아주 대단하게 과감한 전진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가란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억압기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이는 민주공화제에서도 군주제에서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국가는 기껏해야 하나의 악에 불과한 바, 계급적 지배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악을 물려 받는다. 그리고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코뮌과 마찬가지로, 새롭고 자유로운 사회 상태에서 성장한 한 세대가 국가의 이 모든 폐물을 내던질 수 있을 때까지 가능한 한 가장 신속하게 이 악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선집6,335-336)
최근 독일의 속물들은 다음과 같은 말에 따다시 유익한 공포를 느끼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좋다. 신사 여러분, 이 독재가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 싶은가? 파리 코뮌을 보라.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였다.(선집6,336)
파리코뮌 20주년 기념일 1891년 3월 18일 런던에서.
칼 맑스: [프랑스에서의 내전, 국제 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담화문], 독일-프랑스 전쟁에 관한 총평의회의 두 담화문과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서문을 증보한 독일어 제3판, 베를린, 1891년. MEW22, 188-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