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예대학 출신 작가 작품>
어느 봄날
정종수
코로나 사태 이후 대다수 업무는 집에서 처리한다. 움직임이 적어지니 자연히 게으름이 앞선다. 겨울에 움츠렸더니 몸과 마음이 각자도생이다. 나가서 운동하라는 성화에도 몸은 귀찮다며 집안을 맴돈다. ‘늙음의 시작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아찔하다. 젊은 놈이 나태함에 빠졌다는 자책에 정신이 번쩍 든다.
지척에 있는 팔거천으로 나갔다. 팔공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금호강에 이르기까지 말끔히 정돈된 개울을 따라 쉼 없이 흐른다. 냇가로 나온 수달의 입에 물고기 한 마리가 걸려있다. 이목구비가 유난히 아름다운 백로는 가는 목을 길게 뻗어 멍하니 바라본다. 잘은 보이지 않지만, 빼앗긴 성찬에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일 같다.
하천 제방을 메우고 있는 건 노란 유채꽃이다. 누가 뿌려놓은 씨앗도 아니 건만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틈새를 비집은 보라색 야생화가 얌체같이 앉았다. 노란 바탕에 보랏빛 배색이라, 그 교활함이 밉기보다 아름답다. 오월을 기다리는 덩굴장미의 꽃망울이 시선을 붙잡는다. 길손의 마음을 사로잡을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개나리와 벚꽃이 떠난 자리에 연분홍의 철쭉이 고운 자태로 우쭐대고 있다. 미풍에 한들거리는 이팝나무꽃은 가는 눈을 뜨고 만개를 기다리고 있다. 내주쯤이면 백색 꽃술의 복스러운 순결함이 내 마음을 빼앗을 것이다.
어깨선을 넘어온 긴 머리, 야들한 분홍색 롱스커트, 늘씬한 몸맵시가 찰랑거리는 치맛자락 안에서 젊음을 발산하고 있다. 어디론가 바삐 가는 걸음이 당당하고 싱그럽다. 맞은 편으로 노인과 애완견이 함께 오고 있다. 노인이 애완견을 데리고 오는지, 애완견이 노인을 이끌고 오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인다. 색바랜 검은색 운동복을 입고 흰색 모자를 눌러쓴 얼굴에는 어딘가 근심이 가득해 보인다. 나이 들수록 밝은 옷을 입으라는 말의 의미에 새삼 공감하게 된다. 남은 생을 손꼽지 말고 이 좋은 봄날을 마음껏 즐겼으면 좋으련만.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꽃구경을 나왔다. 노란색 옷을 입고 두 갈래 땋은 머리에 빨간 리본을 달았다. 각별한 모성이 아이에게 온전히 전해져 있다. 가는잎조팝나무꽃 앞에서는 엄마 팔을 당겨 꽃냄새를 맡아보라 한다. 아이의 영특함이 여간 아니다. 한 겹 두 겹 세월의 껍질이 덧씌워지면 훗날 빼어난 영양令孃으로 자라날 것이다.
며칠 전 집 안 정리한답시고 오랫동안 닫아 둔 수납장을 열었다. 그곳엔 색바랜 일기장이 십여 권 있었다. 젊은 날, 낙서처럼 즐겨 썼던 세상사 넋두리가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스물다섯 청년에서 지천명 중년까지 내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생의 아픔들이다. 떠난 연정에 가슴앓이했던 사랑의 시련이 백지 위에 가득하다. 불안정한 밥벌이에 희망 잃고 허덕이는 청춘의 고뇌가 빼곡하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뺏기지 않으려는 갈등의 잔상들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흔들이지 않고 피는 꽃도, 스스로 힘만으로 피는 꽃도 없건만, 쓰려지면 안 된다는 오기로 살았으니 후회가 두텁다. 살아남기 위해 달려가는 생의 길 위에서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 앞에 매번 넘어지고 절망했다. 다시 일어나 달음질해보지만, 부족한 체력은 이내 바닥을 들어내고 말았다.
올해 핀 이팝나무꽃은 내년에도 피는데 놓치면 잡지 못한다는 시간의 압박감에 지나온 인생은 허무만 남았다. 채우려면 비워야 하거늘 남의 것만 보고 부족하다, 허약하다, 질책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인 양 욕심 했으니 문드러진 상처가 아픔으로 남았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을 지나 남의 말이 들린다는 이순에 이르렀으니 마침내 내려놓을 수 있음이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병마에 맞닿으니 남은 생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야 비움의 이치를 깨우치니 이 또한 부끄러울 노릇이다. 남의 것 보지 않고 나만 보고 덜어내니 겨우 보이는 게 화사한 봄꽃이고 남실대는 잎새들이다. 불어오는 바람에 향기가 있고, 내리쬐는 햇살에도 온기가 있다.
천지가 연한 녹색의 향연이다. 갓 태어난 새잎들이 수줍게 웃고 있다. 연록 잎 사이를 비집고 봄 햇살이 인도 블록에 앉았다. 길섶에 핀 철쭉꽃 맵시가 바람에 살랑인다. 뿜어지는 분향이 햇살에 닿으니 그들은 어느새 연분홍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연둣빛 청초함이 홍엽의 절색으로 추풍에 흩날릴 제, 마음에 주단을 깔고 감사함 가득 담아 봄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수필문예》 제21집, 2022. 수필문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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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프로필
수필문예회 회원
제40회 전국달구벌 백일장 참방
대구수필문예대학 35기 수료
jsjeng102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