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불반조((心不返照) 간경무익(看經無益)”이란 말이 있다. 경전을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돌이켜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이익도 없다는 뜻이다. 소설이나 신문기사를 읽듯이 건성으로 읽고 지나친다면 설사 대장경을 줄줄 왼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하듯 독송할 때 경전은 살아서 빛을 발한다. 경전이라는 거울에 일상의 자신을 비추어 봄으로써 자신의 현 존재를 뚜렷이 인식할 수 있다.
우리들이 한 집에 살지 않으면 아무리 오랫동안 사귀어온 사이라 할지라도 그 실체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함께 여행이라도 하면서 며칠 동안 한 울 안에서 같이 지내보면 그 사람의 정체를 있는 그대로 알게 된다. 좋은 친구란 세상에 그렇게 흔하지 않다. 내 자신 또한 남에게 어떻게 비칠지 때로는 헤아려보아야 한다. 틀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큰 고역이 아닐 수 없다. 한평생을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 끌려가는 삶이 있다면, 그것은 불행한 인생이다. 적어도 자기 인생만은 자주적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초기 경전에는 ‘선우(善友)’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그만큼 친구와 영향이 크다는 뜻일 것이다. 친구를 잘 두어 덕을 보는 일도 많지만, 친구 때문에 한평생 말할 수 없는 피해와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부처님이 석 가족이 살고 있는 한 마을에 머물렀을 때, 시자인 아난다가 부처님께 불쑥 이런 말씀을 드린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들이 선량한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이 길의 절반에 이른 거나 다름이 없겠습니다.”
이 길이란 구도의 길이고 열반에 이르는 길, 또한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의 길일 수도 있다. 아난다의 이와 같은 말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렇지 않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착한 벗은 이 길의 전부이니라.” 그러면서 부처님은 더 자세히 그 뜻을 말씀하신다.
“너희들은 나를 선우(善友)로 삼았기 때문에 늙지 않으면 안 될 몸이면서 늙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죽지 않으면 안 될 인간이면서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착한 벗을 만나 함께 지내는 것은 이 길의 전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친구를 만나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유유상종(類類相從),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린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와 어울리는 친구들을 보면 훤히 알 수 있다. 친구란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는다. 우리들이 흔히 겪는 일인데,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갔다가 그 친구가 하는 짓을 보고 환멸을 느끼면서 함께 길 떠난 것을 못내 후회하는 일이 더러 있다. 친구와 함께 여행을 해봐야 그 친구의 정체를 알 수 있다. 이럴 바에야 혼자 떨어져서 자기 식대로 지내는 편이 훨씬 좋았을 것이라고 거듭거듭 후회하게 된다. 속물들과 함께 어울리면 내 자신도 또한 속물이 되고 만다.
“외롭지 못한 것을 보고, 그릇되고 굽은 것에 사로잡힌 나쁜 벗을 멀리하라. 탐욕에 빠져 게으른 사람을 가까이하지 말라.”
조금은 외로울지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외로움은 자기 자신을 맑히는 일이기도 하다. 시시껄렁한 세속적인 유희나 오락 또는 쾌락에 빠져들지 말고 그런 일에 관심도 갖지 말라는 것. 왜냐하면 그것은 내 자신을 멍들게 하는 오염이니까. 창조적인 만남이란, 서로가 좋은 영향을 끼치면서 범속한 늪에서 거듭거듭 헤쳐 나오는 일이다. 서로가 잠든 영혼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켜 삶에 활기를 불어넣는 사이다.
“물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번 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라”는 것. 이것은 집착이구나, 여기에는 즐거움도 별로 없고 괴로움뿐이로구나, 이것은 고기를 낚는 낚싯밥이구나, 이렇게 알고 미련 없이 떨쳐버리면서 거듭거듭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 새로운 시작을 통해 인생은 거듭거듭 되살아난다.
부처님 제자 중에서 카샤파(迦葉:가섭)와 아난다(阿難)는 매우 대조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카샤파는 아주 검소하고 가난하게 지내는 것을 수행자의 이상으로 삼는 반면, 아난다는 부처님 시중을 드는 시자였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에게서 호의와 많은 보시와 공양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은 걸식하는 태도에서도 아주 대조적이었다.
카샤파의 경우는 일부러 가난한 집만을 찾아 다녔다. 그 까닭은, 현재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전생에 일찍이 복을 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이 다음 생에라도 가난을 면하려면 지금부터 복을 지어야 한다는 뜻에서였다. 그러니까 단순히 밥을 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복밭을 마련해주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언젠가는 문둥병 환자에게서 걸식을 한 적도 있었다. 그는 평생 마른 옷은 입지 않고 다 해진 누더기만을 걸치고 다녔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이카샤파에 의해 최초의 경전 편찬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더라도, 교단에서 차지한 그의 덕과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얼굴이 잘생긴 아난다는 여승들에게나 일반 신자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부처님을 가까이서 모신 그늘의 덕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걸식할 때 부잣집만을 골라 다녔다. 부드럽고 맛있는 음식을 즐겨 했을 법도 하지만, 자기네가 먹고 살기도 어려운 처지에 놓인 가난한 집보다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안이 남에게 보시하기에도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배려에서였다.
이와 같은 두 사람의 걸식(탁발)태도를 보고, 부처님은 그런 차별을 두지 말고 차례대로 평등하게 걸식하라고 타이르신다. 여러 가지 맛을 탐해서 집착하지 말고, 무엇을 달라고 요구하지도 말라는 것, 문전마다 평등하게 고루 음식을 빌 것이지 어느 특정한 집을 골라 다니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법자체가 평등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구(比丘)란 팔리어 빅쿠(bhikṣu)를 음역한 말인데. 거지라는 뜻이다. 보통 거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콧대가 세어 보시나 공양을 받고도 굽신 거리지 않는다. 걸식(乞食)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밖으로는 밥(음식)을 빌어 육신을 돕고, 안으로는 법(진리)을 빌어 중생을 돕는다는 뜻이다. 보시를 받고도 그에 알맞는 법을 베푸지 않으면 빚을 지게 된다. 그러니 될 수 있는한 시주의 은혜[施恩]가 가벼워야한다. 세상에는 절대로 공것이란 없기 때문이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세상을 살라는 교훈, 지당한 말씀이다. <숫타니파타>에 들어 있는 신선한 말씀 중에서도 이런 표현을 대할 때 말의 아름다움에 감사를 느낀다. 사람답게 살려는 사람은 어디에도 거리낌 없이, 숲 속의 용맹한 사자처럼, 늘 살아 움직이는 시원한 바람처럼,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오염되지 않는 청초한 연꽃처럼 살 수 있어야 한다.
이와 비슷한 내용을 다른 곳 ‘성인’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남에게 이끌리지 않고 남을 이끄는 사람, 어진 이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얼어붙은 대지에 다시 봄이 움트고 있다. 겨울 동안 죽은 듯 잠잠하던 숲이 새소리에 실려 조금씩 깨어나고 있다. 우리들 안에서도 새로운 봄이 움틀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미루는 버릇과 일상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그 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한다.
인간의 봄은 어디서 오는가? 묵은 버릇을 떨쳐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때 새 움이 튼다.
출처: 월간 맑고 향기롭게 산방한담(山房閑談) 2017년0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