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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法華經)의 때·적문(迹門)의 월륜(月輪)이 처음으로 나오셨을 때·보살(菩薩)의 양안(兩眼)이 먼저 깨닫고, 이승(二乘)의 사시(斜視)가 다음에 깨닫고, 범부(凡夫)의 맹목(盲目)이 다음에 뜨고, 청맹과니인 일천제(一闡提)는 미래(未來)에 눈을 뜨게 될 연(緣)을 맺었으니, 이는 오로지 묘(妙)의 일자(一字)의 덕(德)이니라.
적문십사품(迹門十四品)의 일묘(一妙)·본문십사품(本門十四品)의 일묘(一妙) 합(合)쳐서 이묘(二妙), 적문(迹門)의 십묘(十妙) 본문(本門)의 십묘(十妙) 합쳐서 이십묘(二十妙), 적문(迹門)의 삼십묘(三十妙)·본문(本門)의 삼십묘(三十妙) 합(合)쳐서 육십묘(六十妙), 적문(迹門)의 사십묘(四十妙)·본문(本門)의 사십묘(四十妙)·관심(觀心)의 사십묘(四十妙) 합(合)쳐서 백이십중(百二十重)의 묘(妙)이니라. 육만구천삼백팔십사자(六萬九千三百八十四字) 일일(一一)의 자(字)의 밑에 일(一)의 묘(妙)가 있으니, 통틀어 육만구천삼백팔십사(六萬九千三百八十四)의 묘(妙)가 있느니라, 묘(妙)란 천축(天竺)에서는 살(薩)이라 하고, 한토(漢土)에서는 묘(妙)라고 하며, 묘(妙)란 구(具)의 의(義)이고, 구(具)란 원만(圓滿)의 의(義)이니라. 법화경(法華經)의 일일(一一)의 문자(文字)·일자(一字) 일자(一字)에 나머지의 육만구천삼백팔십사자(六萬九千三百八十四字)를 갖추었느니라. 비유컨대 대해(大海)의 한방울의 물에 일체(一切)의 하천(河川)의 물을 갖추고, 하나의 여의보주(如意寶珠)가 개자(芥子)만 하지만, 일체(一切)의 여의보주(如意寶珠)의 재물(財物)을 내리게 함과 같다. 비유컨대 추동(秋冬)에 마른 초목(草木)이 춘하(春夏)의 해를 만나서 지엽(枝葉)·화과(華果)가 출래(出來)함과 같이 이전(爾前)인 추동(秋冬)의 초목(草木)과도 같은 구계(九界)의 중생(衆生)이, 법화경(法華經)의 묘(妙)의 일자(一字)라는 춘하(春夏)의 일륜(日輪)을 만나 뵙고, 보리심(菩提心)의 꽃이 피고 성불왕생(成佛往生)의 열매를 맺는다. 용수보살(龍樹菩薩)이 대론(大論)에 가로되 「비유컨대 대약사(大藥師)가 능(能)히 독(毒)을 가지고 약(藥)이 되게 함과 같음」 운운(云云). 이 글월은 대론(大論)에 법화경(法華經)의 묘(妙)의 덕(德)을 석(釋)하는 글월이니라. 묘락대사(妙樂大師)의 석(釋)에 가로되 「고치기 어려움을 능(能)히 고치기 때문에 묘(妙)라고 칭(稱)함」 등(等) 운운(云云). 대체로 성불왕생(成佛往生)키 어려운 자(者)가 사인(四人)이 있으니, 제일(第一)에는 결정성(決定性)의 이승(二乘)·제이(第二)에는 일천제인(一闡提人)·제삼(第三)에는 공심(空心)의 자(者)·제사(第四)에는 방법(謗法)의 자(者)이니라. 이들을 법화경(法華經)에 있어서 부처가 되게 하셨으므로 법화경(法華經)을 묘(妙)라고 하느니라.
법화경제목초(法華經題目抄) 기요스미(淸澄)에서 45세에 술작 944쪽니치렌대성인의 불법이 석존의 불법과 어떻게 다른지 알아 보겠습니다.
첫째, 대성인 불법은 일생성불(一生成佛)을 설한 불법입니다. 석존 불법에서는 성불하기 위해서는 역겁수행(歷劫修行)을 통해야만 가능하다고 설했습니다. 반면에 대성인 불법은 일생동안에 성불할 수 있다는 일생성불의 원리를 명확하게 설하고 있습니다.
역겁수행이란 죽고 태어나고 또 죽고 태어나고 하는 무수한 생사의 반복을 거치면서 행하는 수행을 말합니다. 즉 석존 불법에서는 지금 현세만이 아니라 몇억만 번이고 생(生)과 사(死)를 되풀이 하면서 아찔할 정도의 긴 수행을 쌓아 나감으로써 성불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대성인의 불법은 이 일생 중에 부처의 경애를 얻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성불이란 자신과 전혀 다른 특별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부처의 생명을 여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에 불계를 열어 이 현실 세계에서 어떠한 일에도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 행복 경애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존님을 믿고 순수하게 자행화타에 걸친 실천에 힘쓴다면 어떤 사람이라도 반드시 일생 중에 성불의 경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대성인은 신앙의 대상으로서 어본존을 확립해 주셨습니다. 석존 불법에서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본존이 명확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는 반면 대성인은 전 민중의 신앙의 대상이 되는 어본존을 명확하게 확립하여 남겨 주셨습니다.
석존 불법에서는 본존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종파에 따라 가상의 부처를 본존으로 하거나 본존 없이 참선이나 계율을 위주로 하는 등 석존의 근본 가르침에서 벗어난 수 많은 종파가 난립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성인은 성불의 종자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는 대법을 어본존으로 도현하심으로써 누구라도 어본존을 믿고 자신의 흉중에 있는 불계의 생명을 열어 나타내는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어본존의 확립에 의하여 전 세계 누구라도 실천할 수 있는 신앙체계가 확립되었던 것입니다.
셋째, 대성인 불법은 성불의 근본 법을 설해 밝혔습니다. 석존 불법에서는 성불의 근본 법이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만 대성인 불법은 모든 부처를 부처가 되게 한 성불의 근본 대법을 설해 밝혔습니다.
석존은 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자신이 성불한 결과[본과(本果)]에 대해서는 설해 밝혔지만 성불한 원인[본인(本因)]은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즉 석존은 오백진점겁이라는 오랜 과거에 ‘나는 본래 보살도를 수행하여’ 성불했다고 설했지만그 때 수행했던 성불의 근본법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성불의 본인을 밝히지 않고 성불한 결과만을 설했기 때문에 석존의 불법을 본과묘(本果妙)의 불법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대성인의 불법은 석존을 비롯하여 모든 부처를 성불케 한 성불의 본인이 바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설해 밝힙니다. 이렇듯 대성인의 불법은 성불의 본인을 설했기 때문에 본인묘(本因妙)의 불법이라고 합니다.인왕경(仁王經)에 가로되 「대왕(大王)이여, 내가 이제 화(化)하는 바의 백억(百億)의 수미(須彌)·백억(百億)의 일월(日月)·일일(一一)의 수미(須彌)에 사천하(四天下)가 있고 그 남염부제(南閻浮提)에 十六의 대국(大國) 五百의 중국(中國) 十千의 소국(小國)이 있으며 그 국토 중(國土中)에 일곱 가지의 두려운 난(難)이 있다. 일체(一切)의 국왕(國王)은 그 난(難) 때문에, 어떠한 것을 난(難)이라 하느뇨, 일월(日月)이 도(度)를 잃고 시절(時節)이 반역(返逆)하며, 혹(或)은 적일(赤日)이 나오고 흑일(黑日)이 나오고 二三四五의 해가 나오며, 혹(或)은 일식(日蝕)하여 빛이 없고, 혹(或)은 일륜(日輪)이 일중(一重) 二三四五중륜(重輪)으로 나타남을 一의 난(難)이라 하느니라. 인왕경(仁王經)에 가로되 「대왕(大王)·국토(國土)가 혼란(混亂)할 때는 먼저 귀신(鬼神)이 혼란(混亂)하며 귀신(鬼神)이 혼란(混亂)해지는 고(故)로 만민(萬民)이 혼란(混亂)하다고, 또 가로되, 대왕(大王)·내가 이제 오안(五眼)을 가지고 분명히 삼세(三世)를 보건대 일체(一切)의 국왕(國王)은 모두 과거세(過去世)에 오백(五百)의 부처를 섬긴 연유(緣由)로 제왕주(帝王主)가 될 수 있었노라. 이로써 일체(一切)의 성인(聖人) 나한(羅漢)은 또한 그를 위(爲)해 국토중(國土中)에 내생(來生)하여 대이익(大利益)을 주리라, 만약(萬若) 왕(王)의 복(福)이 다할 때는 일체(一切)의 성인(聖人)은 모두 버리고 떠나리라, 만약(萬若) 일체(一切)의 성인(聖人)이 떠날 때는 칠난(七難)이 반드시 일어나니라」고.
인왕경(仁王經)에 가로되 「대왕(大王)이여, 내가 이제 화(化)하는 바의 백억(百億)의 수미(須彌)·백억(百億)의 일월(日月)·일일(一一)의 수미(須彌)에 사천하(四天下)가 있고 그 남염부제(南閻浮提)에 十六의 대국(大國) 五百의 중국(中國) 十千의 소국(小國)이 있으며 그 국토 중(國土中)에 일곱 가지의 두려운 난(難)이 있다. 일체(一切)의 국왕(國王)은 그 난(難) 때문에, 어떠한 것을 난(難)이라 하느뇨, 일월(日月)이 도(度)를 잃고 시절(時節)이 반역(返逆)하며, 혹(或)은 적일(赤日)이 나오고 흑일(黑日)이 나오고 二三四五의 해가 나오며, 혹(或)은 일식(日蝕)하여 빛이 없고, 혹(或)은 일륜(日輪)이 일중(一重) 二三四五중륜(重輪)으로 나타남을 一의 난(難)이라 하느니라. 二十八수(宿)가 도(度)를 잃고 금성(金星)·혜성(彗星)·윤성(輪星)·귀성(鬼星)·화성(火星)·수성(水星)·풍성(風星)·조성(刁星)·남두(南斗)·북두(北斗)·오진(五鎭)의 대성(大星)·일체(一切)의 국주성(國主星)·삼공성(三公星)·백환성(百宦星), 이와 같은 제성(諸星)이 각각변현(各各變現)하는 것을 二의 난(難)이라 하느니라. 대화(大火)가 나라를 태우고 만성(萬姓)이 소진(燒盡)하고 혹(或)은 귀화(鬼火)·용화(龍火)·천화(天火)·산신화(山神火)·인화(人火)·수목화(樹木火)·적화(賊火) 이와 같이 변괴(變怪)하는 것을 三의 난(難)이라 함이라. 대수(大水)가 백성(百姓)을 표몰(漂沒)하고 시절(時節) 반역(返逆)하여 겨울에 비내리고 여름에 눈내리고 동시(冬時)에 뇌전벽력(雷電霹靂)하고 유월(六月)에 빙상박(氷霜雹)을 내리고 적수(赤水)·흑수(黑水)·청수(靑水)를 내리고·토산(土山)·석산(石山)을 내리고, 사력석(沙礫石)을 내리고 강하(江河)가 거꾸로 흘러 산(山)을 띄우고 돌을 떠내려 보낸다. 이와 같이 변(變)하는 때를 四의 난(難)이라 하느니라. 대풍(大風)이 만성(萬姓)을 날려 죽이고 국토(國土)의 산하수목(山河樹木)·일시(一時)에 멸몰(滅沒)하고 비시(非時)의 대풍(大風)·흑풍(黑風)·적풍(赤風)·청풍(靑風)·천풍(天風)·지풍(地風)·화풍(火風)·수풍(水風)·이와 같이 변(變)하는 때를 五의 난(難)이라 하느니라. 천지(天地) 국토(國土)가 항양(亢陽)하고 염화동연(炎火洞然)하여 백초(百草)가 항한(亢旱)하고 오곡(五穀)이 여물지 않고 토지(土地)가 혁연(赫然)하여 만성(萬姓)이 멸진(滅盡)하리니, 이와 같이 변(變)하는 때를 六의 난(難)이라 하느니라. 사방(四方)의 적(賊)이 와서 나라를 침범(侵犯)하고 내외(內外)의 적(賊)이 일어나서 화적(火賊)·수적(水賊)·풍적(風賊)·귀적(鬼賊)이 있어 백성(百姓)이 황란(荒亂)하고 도병겁기(刀兵劫起)하리니 이와 같이 괴이(怪異)해졌을 때를 七의 난(難)이라 하느니라」고.
재난대치초(災難對治抄) 가마쿠라에서 39세에 술작 78~9쪽묘(妙)란 천축(天竺)에서는 살(薩)이라 하고, 한토(漢土)에서는 묘(妙)라고 하며, 묘(妙)란 구(具)의 의(義)이고, 구(具)란 원만(圓滿)의 의(義)이니라. 법화경(法華經)의 일일(一一)의 문자(文字)·일자(一字) 일자(一字)에 나머지의 육만구천삼백팔십사자(六萬九千三百八十四字)를 갖추었느니라. 비유컨대 대해(大海)의 한방울의 물에 일체(一切)의 하천(河川)의 물을 갖추고, 하나의 여의보주(如意寶珠)가 개자(芥子)만 하지만, 일체(一切)의 여의보주(如意寶珠)의 재물(財物)을 내리게 함과 같다. 비유컨대 추동(秋冬)에 마른 초목(草木)이 춘하(春夏)의 해를 만나서 지엽(枝葉)·화과(華果)가 출래(出來)함과 같이 이전(爾前)인 추동(秋冬)의 초목(草木)과도 같은 구계(九界)의 중생(衆生)이, 법화경(法華經)의 묘(妙)의 일자(一字)라는 춘하(春夏)의 일륜(日輪)을 만나 뵙고, 보리심(菩提心)의 꽃이 피고 성불왕생(成佛往生)의 열매를 맺는다. 용수보살(龍樹菩薩)이 대론(大論)에 가로되 「비유컨대 대약사(大藥師)가 능(能)히 독(毒)을 가지고 약(藥)이 되게 함과 같음」 운운(云云). 이 글월은 대론(大論)에 법화경(法華經)의 묘(妙)의 덕(德)을 석(釋)하는 글월이니라. 묘락대사(妙樂大師)의 석(釋)에 가로되 「고치기 어려움을 능(能)히 고치기 때문에 묘(妙)라고 칭(稱)함」 등(等) 운운(云云). ** 신래자와 초신의 분들을 위해 같이 사색해보자는 의미에서 **
소위(所謂)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환희중(歡喜中)의 대환희(大歡喜)이니라. (어서 788페이지)
경지명합, 즉신성불, 발적현본, 색심불이, 의정불이, 상칠대하칠대의 성불, 오십전전의 일념 수희 등등과 연계해서 사색해 보고자 합니다.
대우주근원의 생명 즉 구원원초인 과거 부터 현재와 미래 외 영겁 까지의 모든 시간 즉 삼세를 다 포함해서 존재하고 또 공간적으로 끝없이 존재하고 있는 근원의 생명은 환희 중의 대환희로 끝없이 찬란히 빛나고 있는 최고 무상 중의 극무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없이 청정무구한 새하얀 연꽃과 같이 해맑으며 찬란히 빛나는 햇빛과 같이 스스로 빛나면서 빛을 비추기도 하는 생명의 상태 즉 자체현조로 빛나는 주체의 입장이기도 하지요.
무시무종 무량무변의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여 존재하면서도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있는 이 생명은 우리 자신의 생명 내면 제일 깊숙한 곳 즉 구식심왕진여의 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육식에서 부터 제7식 나아가 제8식 즉 무의식 세계 즉 팔자 숙업이 자리한 생명 부분을 이 9식 즉 구식심왕의 도읍에 자리하고 있는 청정무구한 환희 중의 대환희의 생명이 솟아나와 모든 것을 정화시키고 소생시켜 우리 자신의 몸도 환희 중의 대환희 상태 즉 가장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고 마음도 환희 중의 대환희 상태에 24시간 빛나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환희 중의 대환희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억겁의 신로를 다해 간절한 마음으로 부를 때 그 찰라의 순간에 경과 지 즉 환희 중의 대환희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대어본존님과 우리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경지 명합 상태가 되고 바로 그 몸과 마음 그대로 부처의 경애를 나타내게 되는 즉신성불의 상태가 되고 또 대우주근원의 생명 즉 구원의 환희 중의 대환희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본불로 모습이 일신되게 되어 그 찰라의 순간에 자신의 그 몸과 그 마음과 그 환경 그대로인 상태에서 발적현본하게 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의 몸도 최고로 건강하게 되고 마음도 대환희하여 행복게 겨워하게 되고 주변 환경이나 여건도 일변하여 가족도 친구도 회원도 다함께 몸도 마음도 대환희 상태 즉 공덕을 덤뿍 받는 상태에 있게 되고 더 나아가 나의 부모형제 조상과 자손 대대로 까지도 마음 먹는대로 대환희하는 생명의 상태로 최극의 생명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지요.
즉 창제행으로 나 한사람의 일념이 대환희 상태로 바뀌면 그 바뀌는 찰라의 순간에 내 몸도 마음도 주변도 부모형제도 친구도 회원도 이웃도 사회도 나라도 이 지구촌 사람들과 구석구석 모든 유,무정의 일체의 생명 즉환경 까지도 일신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세계평화 지상낙원 극락정토의 지구촌과 그 속에 있는 일체중생들이 모두 환희 중의 대환희로 행복을 구가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 광선유포, 절복을 해야하는 근본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대성인님께서는 생사일대사혈맥초에 '"대저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혈맥(血脈)이라 함은 소위(所謂)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 이것이니라. 그 까닭은 석가(釋迦) 다보(多寶)의 이불(二佛)이 보탑(寶塔) 안에서 상행보살(上行菩薩)에게 양여(讓與)하신 이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는 과거원원겁(過去遠遠劫)으로부터 이래(已來) 촌시(寸時)도 떨어지지 않은 혈맥(血脈)이니라. 묘(妙)는 사(死)요 법(法)은 생(生)이라, 이 생사(生死)의 이법(二法)이 십계(十界)의 당체(當體)이며, 또 이를 당체연화(當體蓮華)라고도 하느니라. (중략) 그러하므로 구원실성(久遠實成)의 석존(釋尊)과 개성불도(皆成佛道)의 법화경(法華經)과 우리들 중생(衆生)의 셋은 전(全)혀 차별(差別)이 없다고 깨달아서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바를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혈맥(血脈)이라고 하느니라. 이 일은 다만 니치렌(日蓮)의 제자(弟子) 단나(檀那) 등(等)의 간요(肝要)이며, 법화경(法華經)을 가진다고 함은 이것이로다. (중략) 과거(過去)의 생사(生死)와 현재(現在)의 생사(生死)와 미래(未來)의 생사(生死)·이 삼세(三世)의 생사(生死)에서 법화경(法華經)과 떨어지지 않는 것을 법화(法華)의 혈맥상승(血脈相承)이라고 하느니라. (중략) 총(總)하여 니치렌(日蓮)의 제자(弟子) 단나(檀那) 등(等)은 자타피차(自他彼此)라는 마음없이 수어(水魚)라고 생각을 해서 이체동심(異體同心)이 되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바를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혈맥(血脈)이라고 하느니라, 더구나 지금 니치렌(日蓮)이 홍통(弘通)하는 바의 구극(究極)은 이것이니라. 만약 그렇다면 광선유포(廣宣流布)의 대원(大願)도 이루어질 것이니라. (중략) 기필(期必)코 기필(期必)코 강성(强盛)한 대신력(大信力)을 다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임종정념(臨終正念)이라고 기념(祈念)하시라.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의 혈맥(血脈)은 이 외(外)에 절대(絶對)로 구(求)하지 말지니라,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란 이것이로다. 신심(信心)의 혈맥(血脈)이 없이는 법화경(法華經)을 가질지라도 무익(無益)하니라." 라고 말씀해주시는 대로 인 것입니다.
육근(귀.눈.입.코.몸.마음)이 청정해지는 창제행의 원리에서 볼 때 우리들 몸과 마음 구석 구석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깨끗하게 정화될 수 있음을 숫자의 개념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현재 인류가 생각해낸 최고 작은 숫자가 청정입니다.
그 크기는0.0000000000000000000001입니다.
이 부분에서 불법의 위대함과 생명을 바라보는 근원적인 차원과 그 정화방식의 구체적이고도 깊이와 폭을 동시에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가슴이 뜁니다.
깊이 사색하면 할 수록 생명의 크기 즉 무시무종 무량무변함에 충격을 받을 정도입니다.
그 생명의 극을 공간의 크기와 시간이라는 세월을 초월하여 삼세에 걸쳐서 무량무변으로 열어가는 행위가 창제행이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숫자나 언어의 표현을 넘어선 생명의 실상..
그 중심에 우리들이 중심자로서 일체를 책임지고 창제행으로 자신 뿐만 아니라 유.무정에 걸친 일체의 생명에 대하여 그 본래의 본지를 자신도 열고 주변도 열어주고 또 서로 열어가는 위대한 생명들이고 환희 중의 대환희의 최극의 생명작용을 행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지용보살의 불계의 군단과 그 생명력의 청정함과 법력.불력. 그리고 위광세력을 상상해 봅니다.
우리들의 생명은 몸과 마음으로 되어 있으면서도 이 둘은 둘이면서도 둘이 아닌 관계 속에서 존재되고 있습니다.
그 둘을 교묘히 결합하여 자연스레 존재케하는 제3의 메카니즘이 더해 질 때 드디어 생명은 현실상에 존재하는 제대로의 모양을 갖추게 되고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더 나아가 주체인 우리들과 객체인 환경 또한 둘이면서도 둘이 아닌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서로 상존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다시말해 몸은 마음의 영향을 받고 마음 또한 몸의 영향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환경과도 서로 필연적으로 긴밀한 관계 속에 조금치의 오차도 없이 존재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들의 생명활동은 귀 눈 입 코 몸 마음(육근)을 통해 몸과 입과 마음(신구의)으로 언행을 하므로 해서 그 내용은 고스란히 내 몸과 마음과 환경 즉 대우주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기록되어 그 기록이 인간게놈지도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과거원원겁 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의 조상과 나와 그리고 또 그 때 함께 했던 환경에 오롯이 기록된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의 모습이고 과거와 현재의 나의 모습과 지금의 또 다른 행위로 미래를 결정해 가는 원리가 생명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삶의 기록은 바로 선조와 자기자신이 행한 행위에 대한 기록이고 이 기록의 모음이 업이 되어 선을 많이 행한 사람은 복운의 삶을 그렇지 않는 사람은 불운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라는데 생각이 미칩니다.
다시말해 현재의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은 자기자신이 직접 관여했기에 현재나 미래를 복되게 바꾸려면 바로 본인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인간은 대우주근원의 축소판인 소우주라서 바로 자신의 내면에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다는게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들의 생명 내면의 제팔식 즉 무의식세계에 우리들의 행.불행이 기록되어 있어서 제팔식을 팔자라고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제팔식 보다 더 깊은 곳에 근본의 생명의 상태인 제구식 즉 근본정식이 빛나고 있답니다.
이 생명의 상태는 청정무구하여 가장 맑고 깨끗한 상태로 존재되고 있고 또 최극의 기쁨-환희의 상태와 어떠한 불가능도 가능하게하는 자유자재의 생명의 위대함도 함께 하고 있기에 만일 어떤 수단을 통해 이 근원의 생명의 문을 열 수만 있다면 가장 깨끗하고 환희로운 생명이 콸콸 솟아나와 제팔식에 기록되어 있는(인간게놈지도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을 전부 깨끗이 지울 수 있고 또 새로이 원하는 인자들을 기록할 수도 있어서 본인의 바램대로의 기록을 남겨 운명을 본인이 원하는 좋은 쪽으로 근본적으로 바꿀 수도 있겠지요.
생명 근원의 차원에서 정화가 이뤄지고 새로운 운이 기록된다면 자연스레 기쁨과 환희의 마음이 끝없이 솟아나와 자신의 모습(몸.신체)이 바뀌고 마음 씀씀이가 귀해지고 풍요로와지고 주변 환경 또한 함께 일변하여 한없는 충실감과 행복감을 만끽하게 되겠지요.
그 생명의 근원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우리들은 대어본존님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수 많은 사례들이 증명하고 있기에 대우주근원의 생명.마음.불계에 정말 순수하게 겸허하게 겸손하게 감사함을 덤뿍 담아 깊이 다가가기만 하면 생명 가장 깊은 곳 즉 생명오저로 부터 정화가 시작되어 근본적인 숙명을 전환 할 수가 있기에 생각만해도 제목을 부르고픈 마음에 가슴이 떨려옵니다.
그런데 이 대우주마음 즉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에 제대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대우주마음 즉 대어성인님 처럼 한없이 베풀고 배려하고 격려하는 모습이 전제될 때 진정한 의미의 본격적인 생명정화가 이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음이 바뀌면 몸도 바뀌고 내가 바뀌면 환경도 자연스레 바뀌는생명의 원리로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의심없이 오롯이 믿고 다가가는 속에 생명정화의 원리가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창제행을 실천 할 때 외부 만를 응시하거나(자신 생명 밖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마음) 기복(복을 부탁하는마음)하는 마음자세 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면서 환희 중의 대환희의 마음으로 가장 깊은 곳에서 부터 깨끗한 샘물을 콸콸 솟게하여 바깥의 더러워진 생명을 정화해 간다라고 하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되고, 또 다른 자신인 소중한 환경(부모형제 자식 선조 자손 대자연 까지도 ) 까지도 진지하게 정화할려는 깊은 마음가짐과 배려 그리고 실질적인 실천에 의해 진정한 의미의 행복경애를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순수하고도 깊은 마음가짐과 진지하게 임하는 자세를 실천하는 것이 생명론적인 입장에서 가장 올바른 대어본존님을 향한 창제행이라 생각되어 더욱 진지하게 순수하게 겸허하게 겸손하게 오롯이 다가가려합니다.
우리들은 우리들 입장이나 우리들 생각 수준에 맞추어 세상을 바라보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대우주근원이신 대어본존님의 생명은 모든 것을 다 구비하고 계십니다.
이 대우주근원의 생명은 우리들 마음 속에 그대로 자리하고 있고 또 우리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몽땅 다 들어 있는데..
우리들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거나 아니면 설마라는 의심 때문에 자기자신이 그것을 열어서 갖지 못할 뿐이라 생각합니다.
생명이 깊이 정화되면 좋은 쪽으로 지혜가 발휘되어 대우주근원에 원래있는 좋고 아름답고 행복한 것들과 우리와 우리 가족들에게 필요한 물건 부터 세상 어떤 것들도 전부 우리들 내면을 깊이 열면 나오게 되어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것이 나와 가족과 이웃과 사회에 좋은 것이라면 전부 다 이루어 질 수 밖에 없는 원리가 생명의 원리이기에 겸손을 가장한 어리석음으로 스스로를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만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소원하는바가 크다면 대우주근원의 생명에 깊이 들어가는 행위 즉 서원을 크게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노고를 아끼지 않는 일을 실천하는그 마음가짐에 이미 아무리 커다란 소원도 모두 이뤄져가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우리들 생명은 위대합니다.
열면 열 수록 더욱 한 없이 열립니다.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한 없이 우주대로 열립니다.
그래서 지구촌 어디에 있든 마음은 서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씀씀이가 귀해지면 복된 기운이 만리 밖에서도 몰려 옵니다.
생명의 원리가 그렇습니다.
전부 우리들 생명 속에 다 갖추어져 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외부에서 오는것 처럼 보입니다.
암튼 선한마음으로 베풀려고 하면 할 수록 복은 한없이 쌓이게 되는것이 생명원리입니다.
눈덩이 처럼 쌓여가는 것이 나눔으로 오는 복이랍니다.
복은 만리 밖에서도 오고 자신의 내면 가장 깊은 곳 즉 제구식(구식심왕 진여의 도)인 근원의 생명에서 부터 솟아나서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장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한편 마음을 닫기 시작하면 겨자씨 보다도 작은 공간도 좁지가 않게느껴질 정도로 초라하게 되는 것 또한 마음이라 우리들이 정하는 마음 상태에 따라서 인생이 바뀌는 것이지요.
조금만 노력하면 그맛을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 스스로를 나는 안돼..나는아직..설마 내가..설마 대어본존님이..내 기원이 모든걸 바꿀 수 있을 까? 등등 스스로를 별 볼일 없는 작은 생명의 상태 즉 마음으로 만들다 보니 자꾸 불행하거나 무의미한 쪽으로 마음이 가고 안타까운 한숨이나 허무가 따르게 되는 것이지요.
어차피 창제행으로 우주대의 행복한 생명을 열 수 있다면 전혼을 건다는 각오가 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단 한번의 창제로도 얼마든지 일 순간에 모든 걸 바꿀 수 있기에 우리들은 더욱 순수하고 강한 확신을 갖고 오롯이 다가가면 반드시 상상을 초월하는 위대한 마음의 열림-대환희. 대복운이 솟아 나오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생명의 깊은 연대..
마음과마음의 깊은 연대가 얼마나 삶을 복되게 하고 설레이게 하는지 ..
정화의 극은 곧 청정무구한 대우주 마음이시기에 다시는 불행지지 않는 최극의 생명상태 즉 금강불괴의 생명상태가 되어 한없이 행복하고 즐겁고 가치롭고 또 베푸는퐁요로움 속에 유유자적하게 될것이라 확신합니다.
생명의 원리로 볼 때 가족과 후손과 선조와 이웃은 곧 나의 생명이기에 당연히 진지하게 정화시키려 애쓰는 그 마음 가짐에 자신의 내면이 먼저 정화되기 시작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진정한 차원의 베품을 실천할려고 마음먹는 간절함 속에 우주근원의 청정무구한 마음이신 대어본존님의 불성은 고스란히 자연스레 우리들 마음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면서 환희의 샘물을 콸콸 솟아나게 하여 근본적인 생명의 정화와 동시에 바로 복된 삶이 자신의 마음과 여건에 걸쳐 펼쳐 질 것이고 그 감동과 설레임이 매일매순간 계속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 대우주근원의 생명의 원리이기에 행하면 반드시 예외없이 최고로 아름답게 빛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될것이라 확신합니다.
대우주근원의 생명 자체가 환희 중의 대환희의 생명 상태이고 자유자재의 경애의 상태이기에 대우주근원의 마음과 하나되는 순간 자연히 우리들 생명 속에 잠자고 있던 위대한 생명력이 자연히 솟아나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누군가 잘나서 차별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정말 대우주근원의 생명처럼 깨끗한 마음가짐 순수한 마음으로 오롯이 하나로 합일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사람도 전부 최고의 생명 상태를 느끼고 체현해 낼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생명의 원리이기에 그 원리대로 누구나에게 평등하게 열리고 솟아나게 되는 것이 대우주본연의 생명 상태이시고 리듬이시고 원리이시기에 순수하게 겸허하게 겸손하게 오롯이 집중 해서 진지하게 다가가면 반드시 예외없이 전부 생명 내면에서 부터 형언 할 수 없는 위대한 생명력이 용솟음 치게되는 것이라 확신합니다.
어중간 하거나 긴가민가 하거나는 없습니다.
솟아나게 되는 것을 아주 약간의 의심의 마음이나 불손함이 막고 있을 뿐이라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 속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서로의 마음을 분기시킬 수 있는 아주 귀한 시간을 갖게 됩니다.
살아 있다는 자체가 즐거운 .. 그래서 너무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입니다..
입가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이 모든 것은 이미 우리들의 생명 내면에 존재되어 있는 대우주근원의 마음이 솟아나와 자연스레 우리들 마음을 적시고 우리들 주변을 가장 좋은 상태로 만들다 보니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주변이 바뀌고 그 바뀜이 최고로 즐겁고 복되다는데 감사할 뿐입니다.
외부 어딘가에서 오는것이 아니라 (신이나 부처가 주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원래부터 존재되고 있든 것이 자연스레 나와서 몸과 마음과 주변환경을 아름답게 빛나게 하는 것이라는 확신과 실감을 갖게 됩니다.
살아있다는 자체의 감사함과 환희를 매일 실감해 가는 우리들의 진지한 도전이야 말로 지구촌 전체가 우리들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어서..어서 ..잘 부탁드린다는 심정이 깊이 전해져 오는 듯 합니다.
그래서 더욱 진지하게 서원을 결의하고 그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있고 하면된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되는 것이 원래 생명의 작용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생명이 아주 맑은 상태라면 생각하는 대로 되는 것인데 그 탁함이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지요.
원하는 것을 우주마음 즉 대어본존님께 정하는 그 순간 바로 그 찰라에 이미 소원하는 바는 결정되어 있고 다만 사람에 따라 그 생명의 청정함 정도에 따라 나타나는 시간이 좀더 걸리거나 바로 나타나거나 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빨리 된다고 우쭐할 필요도 늦게 된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는 것이 다 깊은 뜻이 있기에 그 깊은 뜻-즉 영원히 절대적으로 행복함을 구축하는 그 뜻의 크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라도 생명의 탁함을 가지고 있고 또 청정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진지한 행위에 의해 우리들 생명은 온전히 세탁(?)되고 있기에 깨끗하게 되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 나태하거나 낙오하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최고로 빛나는 삶을 살고 또 살아 갈 수 있는 그 길을 우리는 즐겁게 기꺼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기에 희망적이고 설레이고 기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행복하네요. 밀려오는 감동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마음은 한없이 설레입니다.
환희의 물결입니다.
온 몸과 마음이 온통 훈훈한 무언가로 감싸여 황홀합니다.
끝없이 즐겁고 끝없이 미소가 번지고 끝없이 베풀고 싶은 마음에 자꾸 쓰게 되고 기원하게 됩니다.
정말 진지하게 행복하시길 기원하게 됩니다.
그냥 그렇게 됩니다.
자연스레 그냥..즐겁고..마냥 신이 납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
화를 내 본적도 없습니다.
화가 나올 시간이 없습니다.
즐거움이 나오기 바쁩니다.
그냥 모든게 좋습니다.
모든게 희망적이고 밝게 빛나 보입니다.
자유자재의 마음에 점점 접근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순수함을 논하는 것은 올바른 것 즉 청정한 것과 삿된 것 즉 올바르지 못한 것 즉 더러워지는 것의 정과 사를 명확히하고 진지하게 합일해가는 강하고 깊은 마음이 진정한 의미의 순수함이라는 걸 확신합니다.
이 일점에서 절대로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을 각오입니다.
그래야 지구촌을 지키고 사람들을 복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기꺼이 즐겁게 미소지으며 오롯이 다가가려 하는 것입니다.
삿된 기운이 조금이라도 허용된 마음의 상태로는 생명의 근본적인 정화의 길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거나 더 많은 삿된 탁한 것을 허용하는 마음가짐으로는 근본적인 생명 변혁은 요원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생명의 문제이기에 한치의 오차도 없고 또 한치의 탁함도 허용하지 않고 오롯이 다가가는 바로 그 순간 부터 모든 것은 바로 일변합니다.
그것을 직접 체험하고 있기에 장담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일깨워서 우리들 생명 내면에 있는 대우주근원의 생명이 솟아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세계를 구할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결국 각자의 생명 속에 내재되어 있는 위대한 대우주근원의 생명을 바로 자기자신이 열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일념이 아닌 경우에는 근본적인 자유자재의 자립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강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현명해야 합니다.
아무거나 다 좋다가 아닙니다.
만심과 용기를 제대로 구분하면서 한편으로는 어리석음과 순수함도 구분하면서 제대로 진지하게 겸허하게 다가갈 때 대우주근원의 생명이신 대어본존님도 웃고 우리들 생명도 계속 웃게 되는 것입니다.
위대한 생명변혁의 길에 들어선 이상 끝을 본다고 생각하고 임해야 근본적인 생명정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입장과 바쁜 일상 속에 창제행을 통한 대우주근원에의 마음의 여행은 언제나 자신을 되돌아 보게 하고 또 더 순수하게 합니다.
그 순수함의 깊이와 배려하려는 강한 결의와 실천이 저를 한없이 행복하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사 어디에서 이런 황홀감을 매일 매순간 느낄수 있겠습니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계속되는 생명의 촉발과 환희로움의 소생은 말로 다 표현못 할 정도입니다.
저 자신의 서원과 결의 그리고 그 실천의 정도를 되돌아 보게 됩니다.
대어본존님 속에는 돈도 있고 건물도 있고 인재들도 넘쳐 납니다.
그래서 커단란 서원이라 하드라도 대우주의 생명 입장에서 보면 얼마든지 쉽게 이룰 수 있는 작은 일에 불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코 보이기 위함이나 명문명리를 마음에 두고 서원한 것이 아니고 또 그 간절함이 깊고 확고하기에 결의하는 순간 부터 이미 그 전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들은 대성인님의 불제자로서 이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 대성인 앞에서 스스로 원을 세우고 그 서원대로 태어난 대사명의 위대한 생명을 갖춘 말법의 법화경행자 즉 지용보살인 부처들입니다.
부처는 자유자재의 생명이기에 무엇이든 도리에 맞다면 전부 가능하게 하여 일체를 성공시키고 이뤄내가는 엄청난 지혜와 힘을 갖추고 있는 위대한 생명들입니다.
하고자 마음을 강하게 먹고 서원한 대로 실천해가기만 한다면 전부를 가장 좋은 모습으로 다 바꾸고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지구촌의 일체의 사람들을 전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고 또 이 지구촌을 평화낙토. 상적광토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위력을 가진 우리들입니다.
그 자각과 자긍심과 결의와 실천으로 위대한 말법 광선유포의 대역사를 새겨 가십시다. 천상천하유아독존과 주사친삼덕을 갖춘 본불은 다름아닌 어본불의 직제자이자 동류인 우리들임을 확신하고 그 생명의 위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각자가 역사의 중심에 서서 생명의 역사를 이끌어가기를 바랍니다.
저 또한 더욱 순수한 일념으로 함께 환희하고 더욱 일념을 분기하여 후회없는 불제자의 도리와 사명을 완수해가고자 결의합니다.
우리들은 이미 팔십만억겁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오래 전에 대어본존님을 모시고 불제자로서 수행을 해온 대단한 경력(?)의 사람들입니다.
어서 342페이지에 나오는 "나아가서 과거(過去)를 살피건대 팔십만억겁(八十萬億劫)에 공양(供養)한 대보살(大菩薩)이니, 어찌 희련일항(熙連一恒)의 자(者)가 아니리오."의 팔십만억겁과 어서 539페이지에 나오는 "나의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스스로 육만항하사(六萬恒河沙) 등(等)의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있으며 하나하나의 보살(菩薩)에게 각(各) 육만항하사(六萬恒河沙)의 권속(眷屬)이 있느니라, 이 제인등(諸人等)은 능(能)히 나의 멸후(滅後)에 있어서 호지(護持)하고 독송(讀誦)하여 널리 차경(此經)을 설(說)하리라」고 운운(云云)."의 육만항하사를 보면... 팔십만억겁은 8의 87승 즉 8에 87개의 0이 붙은 숫자이고..육만항하사는 6만의 56승 즉 6만에 56개의 0이 붙은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깊이 사색하면 할 수록 생명의 크기 즉 무시무종 무량무변함에 충격을 받을 정도입니다.
그 생명의 극을 공간의 크기와 시간이라는 세월을 초월하여 삼세에 걸쳐서 무량무변으로 열어가는 행위가 창제행이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은 구원부터 신심을 해왔고 우리들 각자에게는 육만항하사의 사람들이 따르면서 함께 창제하고 함께 환희 중의 대환희의 생명으로 말법 광선유포를 책임져가게 되어 있는 위대한 혼의 사람들입니다. 바로 환희 중의 대환희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억겁의 신로를 다해 간절한 마음으로 부를 때 그 찰라의 순간에 경과 지 즉 환희 중의 대환희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대어본존님과 우리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경지 명합 상태가 되고 바로 그 몸과 마음 그대로 부처의 경애를 나타내게 되는 즉신성불의 상태가 되고 또 대우주근원의 생명 즉 구원의 환희 중의 대환희인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본불로 모습이 일신되게 되어 그 찰라의 순간에 자신의 그 몸과 그 마음과 그 환경 그대로인 상태에서 발적현본하게 되는 것이지요.개인의 신앙과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학교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바로 그 종교에 귀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므로 ‘방법(謗法)이지 않을까’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방법(謗法)이란 정법을 비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와 비슷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진찰을 받는 것은 방법일까요?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가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방법이 아닙니다. 대성인 불법은 어디까지나 도리입니다.친척이나 우인 등의 관계로 타종교의 제사에 참석했다고 해서 방법(謗法)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타종교에서 하는 제사라는 이유로 참석하지 않아 빈축을 사게 되어 친척 사이가 나빠진다면 상식적으로도 손해입니다.
그런 경우 타종교 방식으로 제사가 치뤄져도 마음속으로 본존님을 떠올리며 창제를 하여 고인에게 회향하면 훌륭한 추선공양이 됩니다.말대(末代)의 법화경(法華經)의 성인(聖人)은 무엇을 가지고 알겠느뇨. 경(經)에 가로되 「능설차경(能說此經)·능지차경(能持此經)의 사람이 즉 여래(如來)의 사자(使者)니라」 팔권(八卷)·일권(一卷)·일품(一品)·일게(一偈)의 사람 내지(乃至) 제목(題目)을 부르는 사람·여래(如來)의 사자(使者)로다. 시중종(始中終) 버리지 않고 대난(大難)을 이겨 나가는 사람은 여래(如來)의 사자(使者)이니라.
시조깅고전답서(四條金吾殿答書) 미노부에서 57세에 술작 1181~2쪽지금이야말로 부처가 써 놓으신 후오백세(後五百歲)·말법(末法)의 초(初)·황멸도후(況滅度後)의 때에 해당(該當)하므로 불어(佛語)가 헛되지 않다면 일염부제(一閻浮提) 내(內)에 틀림없이 성인(聖人)이 출현(出現)해 계시리라, 성인(聖人)이 나타날 전조(前兆)로는 일염부제(一閻浮提) 제일(第一)의 합전(合戰)이 일어날 것이라고 설(說)해져 있는데, 이미 합전(合戰)도 일어났으니 이미 성인(聖人)도 일염부제(一閻浮提) 내(內)에 출현(出現)하시어 계시리라. 기린(麒麟)이 나타났으므로 공자(孔子)를 성인(聖人)이라고 알며 이사(鯉社)가 울면 성인(聖人)이 나오실 것은 의심(疑心)이 없도다, 부처의 경우는 전단(栴檀)의 나무가 돋아서 성인(聖人)이라고 알며, 노자(老子)는 이오(二五)의 문(文)을 밟았기에 성인(聖人)임을 안다. 말대(末代)의 법화경(法華經)의 성인(聖人)은 무엇을 가지고 알겠느뇨. 경(經)에 가로되 「능설차경(能說此經)·능지차경(能持此經)의 사람이 즉 여래(如來)의 사자(使者)니라」 팔권(八卷)·일권(一卷)·일품(一品)·일게(一偈)의 사람 내지(乃至) 제목(題目)을 부르는 사람·여래(如來)의 사자(使者)로다. 시중종(始中終) 버리지 않고 대난(大難)을 이겨 나가는 사람은 여래(如來)의 사자(使者)이니라.
시조깅고전답서(四條金吾殿答書) 미노부에서 57세에 술작 1181~2쪽사종교를 믿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여행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사종에 대한 파절정신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종교의 절에 갈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없기 때문에 이번에 가서 사종교의 실태를 자세히 살펴보고 절복할 때 참고자료로 삼고자하는 기분으로 가면 됩니다.
절대로 겁낼 것 없이 유유한 자세로 다녀오십시오.니치렌(日蓮)이라고 자칭하는 것은 자해불승(自解佛乘)이라고도 해야만 하리라, 이렇게 말하면 영리(怜悧)한 듯이 들리겠으나 도리(道理)가 가리키는 바 그렇기도 하리라, 경(經)에 가로되 「일월(日月)의 광명(光明)이 능(能)히 모든 유명(幽冥)을 제거(除去)함과 같이 이 사람은 세간(世間)에 행(行)하여 능(能)히 중생(衆生)의 어두움을 멸(滅)함」이라고, 이 문(文)의 심(心)을 깊이 깊이 생각하시라, 사인행세간(斯人行世間)의 오(五)의 문자(文字)는 상행보살(上行菩薩)·말법(末法)의 처음 오백년(五百年)에 출현(出現)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의 광명(光明)을 비추어 내어서 무명번뇌(無明煩惱)의 어두움을 비추리라고 하는 것이니라, 니치렌(日蓮)은 이 상행보살(上行菩薩)의 사자(使者)로서 일본국(日本國)의 일체중생(一切衆生)에게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라고 권(勸)함은 바로 이것이로다, 이 산(山)에 있어서도 게을리하지 않노라, 지금의 경문(經文)의 차하(次下)에 설(說)하여 가로되 「나의 멸도(滅度)의 후(後)에 있어서 응당(應當) 이 경(經)을 수지(受持)하여라 이 사람은 불도(佛道)에 있어서 결정(決定)하여 의심(疑心)이 있을 수 없느니라」고 운운(云云), 이러한 자(者)의 제자단나(弟子檀那)가 된 사람들은 숙연(宿緣)이 깊다고 생각하여 니치렌(日蓮)과 동일(同一)하게 법화경(法華經)을 넓혀야 하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라고 불려져 버린 것은 이미 불상(不祥)이며 면(免)하기 어려운 몸이로다, 저 번쾌(樊噲)·장량(長良)·마사카도(將門)·스미토모(純友)라고 불리운 자(者)는 이름을 아끼고 수치(羞恥)를 생각하기 때문에 끝내 겁내는 일은 없었느니라, 같은 수치(羞恥)일지라도 금생(今生)의 수치(羞恥)는 대단치 않으며, 다만 후생(後生)의 수치(羞恥)야말로 중요(重要)하니라, 옥졸(獄卒)·탈의바(奪衣婆) 현의옹(懸衣翁)이 삼도(三途)의 강(江)가에서 의복(衣服)을 벗길 때를 생각하시어 법화경(法華經)의 도량(道場)으로 가실지어다, 법화경(法華經)은 후생(後生)의 수치(羞恥)를 가려 주는 의복(衣服)이니라, 경(經)에 가로되 「나자(裸者)가 의복(衣服)을 얻은 것과 같도다」 운운(云云).
이 어본존(御本尊)이야말로 명도(冥途)의 의복(衣服)이로다, 깊이 깊이 믿으실지어다. 남편(男便)의 살갗을 가리지 않으려는 여인(女人)이 있을소냐, 자식의 추위를 안타까워하지 않을 어버이가 있겠느뇨. 석가불(釋迦佛)·법화경(法華經)은 아내와 어버이와도 같은 것이외다, 니치렌(日蓮)을 도와 주시는 것은 금생(今生)의 수치(羞恥)를 감추어 주시는 사람이며 후생(後生)은 또한 니치렌(日蓮)이 그대의 수치(羞恥)를 감춰 드리겠노라, 어제는 남의 신상(身上)·오늘은 나의 신상(身上)이로다, 꽃이 피면 열매가 맺고·며느리가 시어머니로 되는 법입니다, 신심(信心)을 게을리함 없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시라
자쿠니치보어서(寂日房御書)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 903쪽기쁘도다 말법유포(末法流布)의 때에 태어난 우리들·슬프도다 이번에 이 경(經)을 믿지 않는 사람들. 대저 인계(人界)에 생(生)을 받는 자 누가 무상(無常)을 면(免)하리오. 그러한 사람들이 어찌 후세(後世)를 위해 수행(修行)을 하지 않겠는가. 곰곰이 세간(世間)의 모양을 보아하니 사람이 모두 입으로는 이 경(經)을 믿고 손에는 경권(經卷)을 잡는다고 하지만 경(經)의 심(心)에 배반(背反)하므로 악도(惡道)를 면(免)하기 어렵도다. 비유(譬喩)컨대 사람에게 모두 오장(五臟)이 있는데 일장(一臟)이라도 상(傷)한다면 그 장(臟)에서 병(病)이 생겨 나머지 장(臟)을 손상(損傷)하여 마침내 목숨을 잃는 것과 같다. 이로써 전교대사(傳敎大師)는 「법화경(法華經)을 찬탄(讚歎)할지라도 도리어 법화(法華)의 심(心)을 죽인다」 등(等) 운운(云云). 문(文)의 뜻은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 독송(讀誦)하고 찬탄(讚歎)할지라도 법화(法華)의 심(心)을 배반하면 도리어 석존(釋尊)·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을 죽이는 것이 되어버린다고 하는 의(意)이니라. 종내(終乃) 세간(世間)의 악업중죄(惡業衆罪)는 수미(須彌)와 같이 많지만 이 경(經)을 만나면 제죄(諸罪)는 상로(霜露)와 같이 법화경(法華經)이라는 일륜(日輪)을 만나서 소멸(消滅)되느니라. 그렇지만 이 경(經)의 십사방법(十四謗法) 중(中)의 일(一)이나 이(二)라도 범(犯)하게 된다면 그 죄(罪)는 소멸(消滅)하기 어렵도다. 왜 그러냐하면 일대삼천계(一大三千界)의 모든 유정(有情)을 죽였다고 해도 어찌 일불(一佛)을 죽이는 죄(罪)만 하겠는가. 법화(法華)의 심(心)을 배반(背反)한다면 시방(十方)의 부처의 명(命)을 끊는 죄(罪)로다. 이 법도(法道)에 배반(背反)함을 방법(謗法)의 자(者)라고 하느니라. 지옥(地獄)은 무서우니 불길을 가지고 집으로 삼는다. 아귀(餓鬼)는 슬프니라 기갈(飢渴)로 굶주려 아이를 잡아먹고, 수라(修羅)는 투쟁(鬪諍)이며, 축생(畜生)은 잔해(殘害)라 해서 서로 살육(殺戮)한다. 홍련지옥(紅蓮地獄)이라 함은 붉은 연(蓮)이라고 읽는데, 그 까닭은 너무나 추워 몸을 움추려 굽히니 등이 갈라져서 살이 나온 것이 홍련(紅蓮)과 흡사하니라. 하물며 대홍련(大紅蓮)에 있어서랴. 이러한 악소(惡所)에 가면 왕위(王位)·장군(將軍)도 소용 없으며 옥졸(獄卒)의 가책(呵責)을 당하는 모습은 원숭이를 놀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느니라. 이 때는 어찌 명문명리(名聞名利)·아만편집(我慢偏執)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생각하실지어다, 법화경(法華經)을 아는 승(僧)을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뜻으로 한번이라도 공양(供養)한다면 악도(惡道)에 가지 않느니라. 어찌 하물며 열번·이십(二十)번 내지(乃至) 오년(五年)·십년(十年)·일기생(一期生)동안 공양(供養)하는 공덕(功德)은 부처의 지혜(智慧)로써도 알기 어렵도다. 이 경(經)의 행자(行者)를 한번 공양(供養)하는 공덕(功德)은 석가불(釋迦佛)을 직접 팔십억겁(八十億劫)동안·무량(無量)한 보(寶)를 다하여 공양(供養)한 공덕(功德)보다 백천만억(百千萬億) 뛰어났다고 부처는 설(說)하셨느니라. 이 경(經)을 만났으므로 기쁨은 몸에 넘치고 좌우(左右)의 눈에 눈물이 고여 석존(釋尊)의 은혜는 다 보답(報答)하기 어렵다. 이와 같이 이 산(山)까지 여러번의 공양(供養)은 법화경(法華經)과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은혜를 보답(報答)하게 되나이다. 더욱더 면려(勉勵)하시라.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느니라. 모든 사람이 이 경(經)을 믿기 시작할 때는 신심(信心)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중간쯤에는 신심(信心)도 약(弱)하고 승(僧)도 공경(恭敬)하지 않고 공양(供養)도 하지 않으며, 자만(自慢)하여 악견(惡見)을 하니 이는 두려워할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처음부터 끝까지 더욱더 신심(信心)을 해 나가시라. 그렇지 않으면 후회(後悔)하게 되리라. 비유(譬喩)컨대 가마쿠라(鎌倉)에서 교토(京都)까지는 십이일(十二日)의 도정(道程)이니라, 그런데 십일일(十一日)남짓 걸어가서 이제 일일(一日)을 남겨두고 걸음을 멈춘다면 어떻게 수도(首都)의 달을 바라볼 수 있겠느뇨. 어떻게 하든 이 경(經)의 뜻을 아는 승(僧)에게 가까이 하여 더욱더 법(法)의 도리(道理)를 청문(聽聞)해서 신심(信心)의 걸음을 옮길지어다.
니이케어서(新池御書)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1439~1440쪽별점을 비롯한 점(占)은 모두 운명학이 바탕이 되어 짜여져 있는데, 바탕이 되는 운명학 자체가 학문과는 매우 거리가 멀고, 인간의 운명을 본인의 노력과 관계없이 태어나면서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보는 비현실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모든 점(占)은 비합리적인 운명론에서 발생한 것이기에 자연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 결함이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밝고 행복한 생활을 올바른 종교를 근본으로 자기 자신이 스스로 구축해 가는 것이고, 그것은 본존님을 믿는 공덕으로 비로소 실현되는 것입니다.이 법화경(法華經)의 본문(本門)의 간심(肝心)인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는 삼세제불(三世諸佛)의 만행만선(萬行萬善)의 공덕(功德)을 모아서 오자(五字)로 하였으니, 이 오자(五字) 내(內)에 어찌 만계(萬戒)의 공덕(功德)을 포함하지 않았겠느뇨. 그러나 이 구족(具足)의 묘계(妙戒)는 한번 가진 후(後)·행자(行者)가 파(破)하려고 해도 파(破)해지지 않으니, 이를 금강보기계(金剛寶器戒)라고 말한다는 등으로 주장을 하여라.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은 이 계(戒)를 갖고 법신(法身)·보신(報身)·응신(應身) 등(等) 어느 것이나 무시무종(無始無終)의 부처가 되셨느니라, 이것을 「제교(諸敎) 중(中)에 있어서 이를 숨기고 전(傳)하지 않음」이라고 천태대사(天台大師)는 쓰셨느니라, 지금 말법당세(末法當世)의 유지(有智)·무지(無智)·재가(在家)·출가(出家)·상하(上下)·만인(萬人)이 이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를 갖고 설(說)과 여(如)히 수행(修行)함에 어찌 불과(佛果)를 득(得)하지 못하겠느뇨. 그리고 보니 결정무유의(決定無有疑)라 함은 멸후탁악(滅後濁惡)의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정판(定判)하신 것이로다. 삼불(三佛)의 정판(定判)에 누락(漏落)된 권종(權宗)의 사람들은 틀림없이 무간(無間)이니라. 이와 같이 존귀(尊貴)한 계(戒)이기에 이전(爾前)·적문(迹門)의 제계(諸戒)는 지금 일분(一分)의 공덕(功德)도 없도다. 공덕(功德)이 없으니 일일(一一)의 재계(齋戒)도 무용(無用)이니라.
단(但) 이 본문(本門)의 계(戒)를 넓히시면 반드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서(大瑞)가 있느니라. 소위(所謂) 정가(正嘉)의 지동(地動)·문영(文永)의 장성(長星)이 바로 이것이로다. 대저 당세(當世)의 사람들은 어느 종(宗)들에 본문(本門)의 본존계단(本尊戒壇) 등(等)을 홍통(弘通)하였느뇨.
교행증어서(敎行證御書) 미노부에서 54세에 술작 1282쪽이 산(山)에 있어서도 게을리하지 않노라, 지금의 경문(經文)의 차하(次下)에 설(說)하여 가로되 「나의 멸도(滅度)의 후(後)에 있어서 응당(應當) 이 경(經)을 수지(受持)하여라 이 사람은 불도(佛道)에 있어서 결정(決定)하여 의심(疑心)이 있을 수 없느니라」고 운운(云云), 이러한 자(者)의 제자단나(弟子檀那)가 된 사람들은 숙연(宿緣)이 깊다고 생각하여 니치렌(日蓮)과 동일(同一)하게 법화경(法華經)을 넓혀야 하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라고 불려져 버린 것은 이미 불상(不祥)이며 면(免)하기 어려운 몸이로다, 저 번쾌(樊噲)·장량(長良)·마사카도(將門)·스미토모(純友)라고 불리운 자(者)는 이름을 아끼고 수치(羞恥)를 생각하기 때문에 끝내 겁내는 일은 없었느니라, 같은 수치(羞恥)일지라도 금생(今生)의 수치(羞恥)는 대단치 않으며, 다만 후생(後生)의 수치(羞恥)야말로 중요(重要)하니라, 옥졸(獄卒)·탈의바(奪衣婆) 현의옹(懸衣翁)이 삼도(三途)의 강(江)가에서 의복(衣服)을 벗길 때를 생각하시어 법화경(法華經)의 도량(道場)으로 가실지어다, 법화경(法華經)은 후생(後生)의 수치(羞恥)를 가려 주는 의복(衣服)이니라, 경(經)에 가로되 「나자(裸者)가 의복(衣服)을 얻은 것과 같도다」 운운(云云).
이 어본존(御本尊)이야말로 명도(冥途)의 의복(衣服)이로다, 깊이 깊이 믿으실지어다. 남편(男便)의 살갗을 가리지 않으려는 여인(女人)이 있을소냐, 자식의 추위를 안타까워하지 않을 어버이가 있겠느뇨. 석가불(釋迦佛)·법화경(法華經)은 아내와 어버이와도 같은 것이외다, 니치렌(日蓮)을 도와 주시는 것은 금생(今生)의 수치(羞恥)를 감추어 주시는 사람이며 후생(後生)은 또한 니치렌(日蓮)이 그대의 수치(羞恥)를 감춰 드리겠노라, 인상술(人相術)이나 수상술(手相術)은 지금부터 수천년전 고대 인도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들 눈에 비춰지는 모습, 형태의 특징에서 과거의 일들이나 장래의 길흉을 판단하는 것이 인상·수상 등의 관상술입니다.
우리들 인간의 생명은 색심불이(色心不二)라고 해서 육체와 정신이 일체이므로 마음에 큰 고뇌나 걱정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색법(色法)으로서 상(相)에 나타납니다. 또한 내장 등에 질환이 있으면 물론 그 특징이 드러나고, 본인의 생활 신조나 성격 등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 모습이나 형태로 나타나는 법입니다.
따라서 표면의 관상이나 손금에서 그 사람의 성격이나 건강 상태를 추측하는 것도 어느 정도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 외에도 과거의 일 등을 대강 알아맞히는 점쟁이도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미래를 틀림없이 볼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점쟁이에게 점을 보는 사람은 과거를 맞혔다는 이유로 완전히 믿고 미래의 예언을 무턱대고 받아들여 버리겠지만 사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니치렌대성인께서는 『개목초(開目抄)』 에서 『심지관경(心地觀經)』을 인용하시어 「과거(過去)의 인(因)을 알려고 하면, 그 현재(現在)의 과(果)를 보라. 미래(未來)의 과(果)를 알려고 하면, 그 현재(現在)의 인(因)을 보라.」(신편어서 p.571)고 적으신 것처럼 현재는 바로 과거의 결과이고 미래는 현재의 과보(果報)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미래를 점쟁이 등에게 물어서 일희일비하는 것보다 현재의 자신이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올바른 인행(因行)을 쌓고 있는지 아닌지를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니치렌대성인의 불법은 현실의 인생에서 ‘무너지지 않는 행복 경애’를 만들기 위한 신앙이며, ‘인간으로서 승리’를 설한 종교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앙은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특별한 세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니치렌대성인 불법에서 신앙과 생활은 그와 같이 동떨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어서에 「사관(仕官)을 법화경(法華經)이라고 생각하시라. 「일체세간(一切世間)의 치생산업(治生産業)은 모두 실상(實相)과 서로 위배(違背)하지 않음」이란 이것이니라.」(신편어서 p.1220)라고 씌어 있습니다. 사관(仕官)은 현재 우리 처지에서 말하자면 일이나 학업 또는 사회생활에 해당합니다.
일을 소중히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들의 일에 대한 사고방식을 명확하게 나타내신 일절입니다. 따라서 이 성훈은 현실 사회와 나날의 생활 자체가 불법을 실천하는 장이며, 신심을 연마하는 무대라는 점을 가르칩니다. 신심은 우리의 생명을 변혁하고 충실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어본존을 향한 제목을 근본으로 생활 터전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과제에 대해 진지하게 거듭 노력했을 때, 현실에서 도전하는 그 자체가 우리 생명에 불계를 용현시키는 기연(機緣)이 되고, 자신의 생명을 변혁하는 무대가 됩니다.
또 신심으로 개척한 생명력을 토대로 생활에서 용감하게 나아갔을 때, 생활이 좋은 방향으로 바뀝니다. 신심을 나무의 뿌리에 비유한다면, 생활은 풍부한 열매을 맺어주는 줄기와 가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신심의 뿌리가 깊을수록 반석 같은 생활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신심과 생활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연합회에서는 ‘신심즉생활’에서 생활은 그 사람의 신심을 나타내며, 신앙을 근본으로 생활에서 승리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진정으로 니치렌대성인의 불법을 실천하는 일은 신앙뿐 아니라 직장과 생활에서도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삶의 자세를 목표로 도전해야 합니다.황하(黃河)는 천년(千年)에 한 번 맑아진다고 하며·성인(聖人)은 천년(千年)에 한 번 출세(出世)한다. 부처는 무량겁(無量劫)에 한 번 출세(出世)하시느니라, 그를 만난다 해도 법화경(法華經)은 만나기가 어렵다, 설령 법화경(法華經)을 만난다 해도 말대(末代)의 범부(凡夫)가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는 만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말대(末代)의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는 법화경(法華經)을 설(說)하지 않은 화엄(華嚴)·아함(阿含)·방등(方等)·반야(般若)·대일경(大日經) 등(等)의 천이백여존(千二百餘尊)보다도 말대(末代)에 법화경(法華經)을 설(說)하는 행자(行者)는 뛰어났음을, 어서에 「사관(仕官)을 법화경(法華經)이라고 생각하시라. 「일체세간(一切世間)의 치생산업(治生産業)은 모두 실상(實相)과 서로 위배(違背)하지 않음」이란 이것이니라.」(신편어서 p.1220)라고 씌어 있습니다. 사관(仕官)은 현재 우리 처지에서 말하자면 일이나 학업 또는 사회생활에 해당합니다.
일을 소중히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들의 일에 대한 사고방식을 명확하게 나타내신 일절입니다. 따라서 이 성훈은 현실 사회와 나날의 생활 자체가 불법을 실천하는 장이며, 신심을 연마하는 무대라는 점을 가르칩니다. 신심은 우리의 생명을 변혁하고 충실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어본존을 향한 제목을 근본으로 생활 터전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과제에 대해 진지하게 거듭 노력했을 때, 현실에서 도전하는 그 자체가 우리 생명에 불계를 용현시키는 기연(機緣)이 되고, 자신의 생명을 변혁하는 무대가 됩니다.
또 신심으로 개척한 생명력을 토대로 생활에서 용감하게 나아갔을 때, 생활이 좋은 방향으로 바뀝니다. 신심을 나무의 뿌리에 비유한다면, 생활은 풍부한 열매을 맺어주는 줄기와 가지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신심의 뿌리가 깊을수록 반석 같은 생활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신심과 생활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연합회에서는 ‘신심즉생활’에서 생활은 그 사람의 신심을 나타내며, 신앙을 근본으로 생활에서 승리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진정으로 니치렌대성인의 불법을 실천하는 일은 신앙뿐 아니라 직장과 생활에서도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삶의 자세를 목표로 도전해야 합니다.고(故)로 보살(菩薩)에 합(合)해서 이승(二乘)에 대(對)하여 어려움에 따라 설(說)함」이라고 석(釋)하시었다. 뿐만 아니라 이승(二乘)의 작불(作佛)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성불(成佛)을 나타낸다고 천태(天台)는 판정(判定)하시었다. 수라(修羅)가 대해(大海)를 건너는 것을 어렵다 할 손가, 유아(幼兒)가 역사(力士)를 던지는데 어찌 용이(容易)하다 할 손가, 그렇다면 즉 불성(佛性)의 종자(種子)가 있는 자(者)는 부처가 되리라고 이전(爾前)에도 설(說)했지만 아직껏 초종(焦種)의 자(者)가 작불(作佛)하리라고는 설(說)하지 않았느니라. 그러한 중병(重病)을 쉽게 치유(治癒)함은 유독(唯獨) 법화(法華)의 양약(良藥)이니라. 오직 모름지기 그대 부처가 되고자 생각한다면 만(慢)의 당번(幢幡)을 쓰러뜨리고 분노(忿怒)의 지팡이를 버리고 오로지 일승(一乘)에 귀의(歸依)할지어다. 명문명리(名聞名利)는 금생(今生)의 장식(裝飾)이고 아만편집(我慢偏執)은 후생(後生)의 족가(足枷)이니라, 아아, 부끄러워하고 또 부끄러워할지어다, 두려워하고 두려워할지어다.
지묘법화문답초(持妙法華問答抄) 가마쿠라에서 42세에 술작 463쪽그렇게 한심하게 버려진 자(者)가 부처가 됨을 가지고 여래(如來)의 본의(本意)로 하고 법화경(法華經)의 규모(規模)로 함이라. 이에 의해서 천태(天台) 가로되 「화엄(華嚴) 대품(大品)도 이것을 다스리지 못하는데 오직 법화(法華)만이 능(能)히 무학(無學)으로 하여금 도리어 선근(善根)을 생기게 하여 불도(佛道)를 이룰 수 있게 하기 때문에 묘(妙)라고 하느니라. 또 천제(闡提)는 마음이 있어 역시 작불(作佛)하지만 이승(二乘)은 지(智)를 멸(滅)하니 마음이 생기지 않느니라. 법화(法華)는 능(能)히 다스리니 또한 칭(稱)하여 묘(妙)라 함이라」고 운운(云云). 이 문(文)의 심(心)은 상세히 말할 필요가 없느니라. 참으로 알았노라, 화엄(華嚴)·방등(方等)·대품(大品) 등(等)의 법약(法藥)도 이승(二乘)의 중병(重病)은 고치지 못하며 또 삼악도(三惡道)의 죄인(罪人)마저도 보살(菩薩)이라고 이전경(爾前經)에는 허락했지만 이승(二乘)은 허락하지 않았느니라. 이에 의해서 묘락대사(妙樂大師)는 「여취(餘趣)를 실(實)에 회입(會入)하는 것은 제경(諸經)에 혹(或)은 있지만 이승(二乘)은 전(全)혀 없느니라. 고(故)로 보살(菩薩)에 합(合)해서 이승(二乘)에 대(對)하여 어려움에 따라 설(說)함」이라고 석(釋)하시었다. 뿐만 아니라 이승(二乘)의 작불(作佛)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성불(成佛)을 나타낸다고 천태(天台)는 판정(判定)하시었다. 수라(修羅)가 대해(大海)를 건너는 것을 어렵다 할 손가, 유아(幼兒)가 역사(力士)를 던지는데 어찌 용이(容易)하다 할 손가, 그렇다면 즉 불성(佛性)의 종자(種子)가 있는 자(者)는 부처가 되리라고 이전(爾前)에도 설(說)했지만 아직껏 초종(焦種)의 자(者)가 작불(作佛)하리라고는 설(說)하지 않았느니라. 그러한 중병(重病)을 쉽게 치유(治癒)함은 유독(唯獨) 법화(法華)의 양약(良藥)이니라. 오직 모름지기 그대 부처가 되고자 생각한다면 만(慢)의 당번(幢幡)을 쓰러뜨리고 분노(忿怒)의 지팡이를 버리고 오로지 일승(一乘)에 귀의(歸依)할지어다. 명문명리(名聞名利)는 금생(今生)의 장식(裝飾)이고 아만편집(我慢偏執)은 후생(後生)의 족가(足枷)이니라, 아아, 부끄러워하고 또 부끄러워할지어다, 두려워하고 두려워할지어다.
지묘법화문답초(持妙法華問答抄) 가마쿠라에서 42세에 술작 463쪽니치렌(日蓮)을 도와 주시는 것은 금생(今生)의 수치(羞恥)를 감추어 주시는 사람이며 후생(後生)은 또한 니치렌(日蓮)이 그대의 수치(羞恥)를 감춰 드리겠노라, 어제는 남의 신상(身上)·오늘은 나의 신상(身上)이로다, 꽃이 피면 열매가 맺고·며느리가 시어머니로 되는 법입니다, 신심(信心)을 게을리함 없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시라
자쿠니치보어서(寂日房御書)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 903쪽법화경(法華經)도 설마 니치렌(日蓮)을 해태(懈怠)한 행자(行者)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리라.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지용천계(地涌千界)의 이생(利生)은 이번에 다 볼것이라. 아, 진실로·그러한 일이 있었으면 하오.
설산동자(雪山童子)가 한대로 본받고 불경보살(不輕菩薩)의 입장이 되리라, 헛되이 역병(疫病)에 걸리게 되든가, 노사(老死)에 의해 죽게 되리니, 아아, 한심하고 한심하도다, 바라건대 법화경(法華經) 때문에 국주(國主)에게 적시(敵視)당하여 이번에 생사(生死)를 벗어나고 싶다. 천조태신(天照太神)·정팔번(正八幡)·일월(日月)·제석(帝釋)·범천(梵天) 등(等)의 불전(佛前)에서의 서원(誓願)을 이번에 시험(試驗)해 보고싶소. 제사(諸師)는 차치(且置)하옵고, 각각(各各)의 신상(身上)의 일은 여기에서 기원드리리라.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법화경(法華經)을 십이시(十二時) 동안 행(行)하는 것이 되리라. 명심(銘心)하고 명심(銘心)하여 사관(仕官)을 법화경(法華經)이라고 생각하시라, 「일체세간(一切世間)의 치생산업(治生産業)은 모두 실상(實相)과 서로 위배(違背)하지 않음」이란 이것이니라, 부디 부디 글월의 뜻을 헤아리시라, 공공근언(恐恐謹言).
단월모답서(檀越某答書) 미노부에서 57세에 술작 1295쪽신심과 생활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연합회에서는 ‘신심즉생활’에서 생활은 그 사람의 신심을 나타내며, 신앙을 근본으로 생활에서 승리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진정으로 니치렌대성인의 불법을 실천하는 일은 신앙뿐 아니라 직장과 생활에서도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삶의 자세를 목표로 도전해야 합니다.아무리 해도 이 몸은 헛되이 산야(山野)의 흙이 되리니, 아까워한들 무엇하리오, 아까워한들 끝내 아낄 수 없으며, 사람이 오래 산다 해도 백년(百年)은 넘지 못하니 그 간(間)의 일은 다만 한잠의 꿈과 같다. 받기 어려운 인신(人身)을 얻어 간혹 출가(出家)한 자(者)도 불법(佛法)을 배우고 방법(謗法)의 자(者)를 책(責)하지 않고 헛되이 유희잡담(遊戱雜談)만을 하며 지내는 자(者)는 법사(法師)의 가죽을 쓴 축생(畜生)이니라. 법사(法師)의 이름을 빌어서 세상(世上)을 살고 몸을 보양(保養)한다 해도 법사(法師)로 되는 의(義)는 하나도 없고 법사(法師)라고 하는 이름을 훔친 도인(盜人)이니라, 부끄러워 할지어다, 두려워 할지어다. 적문(迹門)에는 「나는 신명(身命)을 사랑하지 않고 단(但) 무상도(無上道)를 아낌」이라고 설하고 본문(本門)에는 「스스로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음」이라고 설(說)했으며, 열반경(涅槃經)에는 「몸은 경(輕)하고 법(法)은 중(重)하니 몸을 죽여서 법(法)을 넓힌다」라고 쓰여 있느니라. 본적양문(本迹兩門)·열반경(涅槃經) 다 같이 신명(身命)을 버려서 법(法)을 넓힐지어다 라고 쓰여 있다. 이러한 훈계(訓誡)를 배반(背反)하는 중죄(重罪)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쌓여서 지옥(地獄)에 떨어진다 함은 비유(譬喩)컨대 한열(寒熱)은 형체(形體)도 없고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겨울이면 추위가 와서 초목(草木)이나 인축(人畜)을 괴롭히고 여름에는 더위가 와서 인축(人畜)을 열뇌(熱惱)케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재가(在家)의 몸은 다만 여념(餘念) 없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시고 승(僧)도 공양(供養)하시는 것이 간심(肝心)이외다. 그것도 경문(經文)대로라면 수력연설(隨力演說)도 있어야 할 것이로다. 세상(世上)살이가 힘겨울 때도 금생(今生)의 괴로움조차 슬프니 하물며 내세(來世)의 고(苦)에 있어서랴고 생각해서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시라. 기쁠 때도 금생(今生)의 기쁨은 꿈속의 꿈이며 영산정토(靈山淨土)의 기쁨이야말로 진실(眞實)한 기쁨이라고 생각하시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퇴전(退轉)없이 수행(修行)하여 최후(最後) 임종(臨終)의 때를 기다려 보시라, 묘각(妙覺)의 산(山)에 달려 올라가 사방(四方)을 쫙 바라보니 아아, 유쾌하도다, 법계(法界)는 적광토(寂光土)로서 유리(瑠璃)를 가지고 땅으로 하고 금의 밧줄로써 팔(八)의 길에 경계(境界)를 했으며, 천(天)으로 부터 사종(四種)의 꽃이 내리고 허공(虛空)에서 음악(音樂)이 들리며, 제불보살(諸佛菩薩)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바람에 산들거리고 오락(娛樂) 쾌락(快樂)하시느니라. 우리들도 그 수(數)에 들어가서 유희(遊戱)하고 즐기게 될 것은 벌써 다가왔도다. 신심(信心)이 약(弱)해서는 이와 같이 가장 좋은 곳에는 갈 수 없다, 갈 수 없느니라. 궁금한 일은 더 더욱 물어보시라, 황송하고 황송하오.
마쓰노전답서(松野殿答書) 미노부에서 55세에 술작 1386~7쪽우리들 중생이 일생 동안에 범부의 몸을 바꾸지 않고 성불의 경지를 득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불에 대해 간단히 표현하기는 어려우나 감히 그 뜻의 일단을 현대적으로 말하면 인간완성의 구극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성불에 관해서는 니치렌대성인이 출현하시기 전에도 각종의 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성불하기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한 극히 긴 세월에 걸친 불도수행이 필요하다고 했다든지 또한 부처란 우리들이 전혀 미칠 수 없는 특별한 각자(覺者)를 뜻한다고 하듯이 일반 사람들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경지라고 강조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니치렌대성인은 묘법(妙法)을 믿고 실천하면 마치 벼에 올벼와 늦벼의 차이는 있어도 1년 중에 반드시 수확할 수 있듯이 어떤 사람이든 예외 없이 일생 동안에 성불의 경지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셨습니다.
더구나 니치렌대성인이 밝히신 성불(成佛)의 뜻은 「성(成)이란 연다는 의의(意義)이고」(신편어서 p.1766)라는 성훈과 같이 종래 설해진 성불 관계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즉 자기 생명의 내면에 불계(佛界)가 있으며 이것을 열므로써 ‘부처’라는 최고의 경지를 확립하는 것이 성불의 의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성인과 동등한 존극의 생명, 지혜와 자비의 생명이 우리들의 생명 속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렵지만 그 생명 속에 있는 불성(佛性)을 깨닫고 열어 가는 것이 성불입니다. 단 말법의 우리들이 불계를 열기 위해서는 자력으로는 무리이며 본존님이라는 대경(對境)에 연(緣)해서 창제를 하지 않으면 성불은 불가능합니다.
무엇보다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만 봉창하여 부처가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라.」(신편어서 p.1388)라는 성훈대로 본존님을 수지해서 열심히 신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일생성불이란 본불(本佛)이신 니치렌대성인이 많은 결점을 갖고 있는 우리들을 대자대비로 일생동안에 부처의 경지를 획득케 하기 위해 설해 밝혀주신 최고의 인간완성을 위한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사람이 죽었을 때 성불(成佛)했다고 종종 말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부처라고 하면 죽은 사람을 생각하거나 불상 등을 생각해, 성불은 그리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망인을 애도하는 뜻에서 말하는 것이며 성불의 본의는 전혀 다릅니다. 성불이란 문자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부처란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우주와 자연의 진리를 간파하고 자기 생명의 진실한 모습을 깨달은 사람을 말합니다.
경전에서는 부처의 모습을 양미간에서 빛을 발한다든가 발바닥에 무늬가 있다는 등 여러 가지로 설하고 있으나, 이는 부처가 인간으로서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상징한 것일 뿐 특별한 모습을 하고 신통력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부처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지혜를 갖췄다든가, 사람을 지도하는 능력이 있다든가, 덕이 원만해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등 10종의 특질을 들어 설명합니다. 요컨대 모든 사람을 지키고 인도하며 자비를 베푸는 힘을 가진 광대한 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법의 본불님이신 니치렌대성인은 이 성불의 ‘성(成)’을 ‘연다’라고 읽는다고 가르치십니다. 즉 무엇인가 특별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부처라는 경계는 본래 자신 속에 있으며 이것을 ‘여는 것’을 성불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생명 속에 내재한 가능성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나타낸 획기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 성불의 경계는 대성인이 나타내신 본존님을 믿고 제목을 부를 때 현실적인 것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일생성불(一生成佛)’이라는 말이 나타내듯이 본존님에 대한 신심수행을 쌓아 나아갈 때 자신의 일생 중에 인간으로서 이상적 모습인 부처의 생명을 열어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행복생활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이 경(經)을 듣는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부처가 된다고 하는 글월이로다. 구계(九界)·육도(六道)의 일체중생(一切衆生)은 각각(各各) 마음이 다르니라. 비유하자면 이인(二人)·삼인(三人)·내지(乃至) 백천인(百千人)이 있다 해도, 일척(一尺)의 얼굴 모습이 참으로 닮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마음이 닮지 않기 때문에, 얼굴도 닮지 않느니라. 하물며 이인(二人)·십인(十人)·육도(六道)·구계(九界)의 중생(衆生)의 마음이 얼마나 다르겠소. 그러므로 꽃을 사랑하고·달을 사랑하고·신 것을 좋아하고·쓴 것을 좋아하며·작은 것을 사랑하고·큰 것을 사랑하고 각색(各色)이로다.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좋아하고 각양(各樣)이로다. 이와 같이 각양각색(各樣各色)이지만, 법화경(法華經)에 들어오면 오직 한 사람의 몸, 한 사람의 마음이니라. 비유하자면 중하(衆河)가 대해(大海)에 들어가면 동일함미(同一鹹味)로 되는 것과 같고, 중조(衆鳥)가 수미산(須彌山)에 다가가면 일색(一色)으로 되는 것과 같으니라. 제바(提婆)의 삼역(三逆)도 나후라(羅睺羅)의 이백오십계(二百五十戒)도 다같이 부처로 되었고, 묘장엄왕(妙莊嚴王)의 사견(邪見)도, 사리불(舍利弗)의 정견(正見)도 다같이 수기(授記)를 받았느니라. 이는 즉 무일불성불(無一不成佛)이기 때문이니라. 사십여년(四十餘年) 이내(以內)의 아미타경(阿彌陀經) 등(等)에는 사리불(舍利弗)이 칠일간(七日間)에 백만번(百萬番) 대선근(大善根)을 설(說)했으나, 미현진실(未顯眞實)이라고 퇴박 당하였기에 칠일간(七日間) 물을 끓여서 대해(大海)에 던져 넣은 것과 같으니라. 위제희(韋提希)가 관경(觀經)을 읽고 무생인(無生忍)을 득(得)하였으나 정직사방편(正直捨方便)이라고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법화경(法華經)을 믿지 않으면 도리어 본래(本來)의 여인(女人)으로 되돌아 가느니라. 대선(大善)도 필요(必要)하지 않다. 법화경(法華經)을 만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所用)이 없다. 대악(大惡)도 한탄(恨歎)하지 말지어다. 일승(一乘)을 수행(修行)하면 제바(提婆)의 뒤도 이으리라. 이것들은 모두 무일불성불(無一不成佛)의 경문(經文)이 허망(虛妄)하지 않기 때문이로다.
센니치니답서(千日尼答書)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1319쪽니치렌대성인 불법(佛法)은 본존님을 믿고 열심히 창제(唱題)하는 실천의 신심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우리가 근행 창제할 때 불계의 생명이 솟아 나타나서 생명 자체가 정화되는 것입니다. 불계(佛界)가 솟아 나타나는 것을 알기 쉽게 그 일면을 말하면, 강인한 생명력이 솟아 나와 남을 생각하는 자비심과 사물을 판단하는 지혜가 몸에 붙는 것을 말합니다.
니치렌대성인은 『성우문답초 하(聖愚問答抄 下)』에서 「한 번 이 수제(首題)를 봉창(奉唱)하면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불성(佛性)이 모두 불리어서 여기에 모일 때 자신(自身)의 법성(法性)의 법보응(法報應)의 삼신(三身)이 함께 이끌려서 현출(顯出)하는 것을 성불(成佛)이라고 하느니라.」(신편어서 p.406)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법신(法身)이란 부처가 증득한 진리 그 자체고, 보신(報身)이란 모든 것을 내다보는 부처의 지혜, 응신(應身)이란 일체중생을 자애하는 마음입니다.
신심한다고 해서 특별한 인격이 되거나 모습과 형태가 일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고난으로 의욕과 기력이 꺾였으나 신심으로 인해 생명 속에서 강력한 생명력이 솟아나와 고난과 대결해서 그 고난을 유유히 극복하는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파도에 시달리던 고뇌의 인생에서 파도를 헤치고 즐기는 인생으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각종 숙명·숙업을 짊어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 과거세의 중죄를 어본존에게 강성하게 기원함으로써 가볍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대성인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환희중(歡喜中)의 대환희(大歡喜)이니라.」(신편어서 p.1801)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신심 근본으로 사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인생입니다. 그리고 병이나 가정불화 등 모든 고뇌와 문제 등이 해결되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제일(第一) 기유중생(其有衆生) 문불수명(聞佛壽命) 장원여시(長遠如是) 내지능생(乃至能生) 일념신해(一念信解) 소득공덕(所得功德) 무유한량지사(無有限量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일념신해(一念信解)의 신(信)의 일자(一字)는 일체지혜(一切智慧)를 수득(受得)하는 바의 인종(因種)이니라. 신(信)의 일자(一字)는 명자즉(名字卽)의 위(位)이다, 따라서 신(信)의 일자(一字)는 최후품(最後品)의 무명(無明)을 자르는 이검(利劍)이니라. 신(信)의 일자(一字)는 수량품(壽量品)의 이(理) 현본(顯本)을 믿는 것이며, 해(解)란 사(事) 현본(顯本)을 해득(解得)하는 것이고, 이 사리(事理)의 현본(顯本)을 일념(一念)에 신해(信解)함이라. 일념(一念)이란 무작본유(無作本有)의 일념(一念)이니라. 이와 같이 신해(信解)하는 사람의 공덕(功德)은 한량(限量)이 있을 수 없느니라, 신(信)이 있는 곳에 해(解)가 있으며 해(解)가 있는 곳에 신(信)이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신(信)을 가지고 성불(成佛)을 결정(決定)하느니라, 지금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자(者)가 이것이니라 운운(云云). 제이(第二) 시즉능신수(是則能信受) 여시제인등(如是諸人等) 정수차경전지사(頂受此經典之事)
어의구전(御義口傳)에 가로되, 법화경(法華經)을 머리에 받는다고 하는 명문(明文)이니라, 여시제인(如是諸人) 등(等)의 문(文)은 널리 일체중생(一切衆生)에 걸치느니라. 따라서 삼세시방(三世十方)의 제불(諸佛)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를 받아서 수지하여 성불(成佛)하시느니라. 따라서 앞의 수량품(壽量品)의 제목(題目)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 제호(題號)를 쓰고 다음에 여래(如來)라고 표제(表題)를 썼느니라, 비밀(秘密)로 할지어다 운운(云云). 지금 니치렌(日蓮) 등(等)의 동류(同類)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는 것은 이 까닭이니라 운운(云云).
어의구전(御義口傳) 미노부에서 57세에 술작 760~1쪽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