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3년 전인 2017년 2월 7일에 구미시의 여헌기념관에서 개최하는 여헌학회에 참석하였을 때, 황지원이 지은 253쪽의 깨끗한 책자를 선물 받았다. 그 책명은 『단계 하위지, 목숨은 가볍게 의리는 중하게 여긴 사육신』이다. 그 사이 3년이란 세월이 지났으니 손때가 묻은 책표지가 약간 변색되는 것 같아서 다시 펼쳐보았다.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라는 문장이 다시 눈길을 끌게 하였다. 그는 24세(1713년)의 나이에 증광시의 병과에 급제하여 출사하게 되었으며, 1722년에 병조좌랑에 올랐다. 30대 후반에 유배된 후부터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0년간 전국을 방랑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정리하여 『택리지』를 편찬하였다는 것이다.
이 책자에 의하면, 하위지가 조선 태종12년(1412-1456)에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이문리와 노상리 및 완전리 일대인 영봉리에서 네 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15명이 배출되었고 이 중 장원급제자가 7명이었으며, 부장원이 2명 나왔으니 그런 말도 나올 만하다.
경주부에서는 조선시대에 문과급제가 76명이고, 이 중에 장원급제자는 김종일, 이을규, 최 벽 등 3명인데, 특히 이을규는 김세량과 동반 급제하였으나 장원인 김세량이 친구인 이을규에게 양보하여 이을규가 장원급제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이 그 아름다운 우정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칭송하였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하위지는 본관은 진주이고, 경상남도 진주 일원에서 세거하다가 선산에 정착하게 된 것은 고려 때 관료생활을 하다가 낙향하여 진주에서 세거하고 있던 할아버지가 야은 길재의 문하에 아들 하담을 수학케 하고, 또 영봉리에 살고 있는 유면의 딸과 혼인시키게 되어 처가 인근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담은 면학 정진하여 태종 2년(1402)에 임오 식년시에 부장원으로 급제하여 세종 9년에 지청송부사에 임명되어다, 그의 장인인 유면이 태종 5년(1405)에 장원급제하여 한 집에서 옹서(翁婿)가 급제하게 되어 경사가 거듭 생겼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형 하강지가 1429년 4월 11일 기유 식년시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동생 하기지 역시 병과 7인중 1인으로 장원급제하였으며 막내아우 하소지도 생원이었으니, 형제 4인이 모두 출중하여 일약 명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하위지는 공부에만 몰두하여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않아서 마을 사람들이 형제들의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24세 때인 세종 17년(1435) 을유(乙酉) 생원시에 2등 17인으로 입격하였고, 27세 때인 세종 20년(1438) 무오 식년시에 문과 을과 3인 중 1등으로 장원급제 하여 집현전부수찬에 제수되었다. 세종 25년(1443)에 집현전전수관으로 승진하여, 『치평요람』 편찬에 참여 하였다.
그 후 집현전직전, 중훈대부 사헌부집의에 제수되었고, 집현전부제학을 맡아서 『세종대왕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세조가 선위를 받자 교서를 보내 출사하기를 더욱 청하기에, 하위지가 부르심에 나아가니 예조참판을 제수하고 매우 총애하였다. 그러나 상왕(단종)의 보령이 어린 탓에 부득이하게 선위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세조의 녹을 먹는 것이 부끄러워 참판이 된 이후로는 그 녹을 방 안에 쌓아 두고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조 2년(1456) 45세 때 창덕궁에서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거사를 계획하였으나 일이 여의치 않아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였는데, 6월 2일 김질의 고변으로 국문을 받게 되었다.
성삼문 등에게 생살을 지지는 낙형(烙刑)을 시행하고, 다음에 하위지의 차례에 이르니, 하위지가 말하기를 “무릇 사람이 반역자라는 이름을 얻었으면 이는 여타 유배에 처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니, 다시 무슨 죄를 더 묻을 것이 있는가? 이미 역적이라는 이름을 씌었으면 그 죄에 대해 마땅히 죽일 뿐이니 다시 무엇을 묻는가?” 하니 세조가 노여움이 풀려 낙형을 시행하지 않았다, 6월 8일에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에 처해졌다.
여헌 장현광선생은 하위지의 묘갈명에서 “하늘과 땅이 알고 있는데 또 어찌 글로 사람들에게 알려 보일 것이 있겠으며, 또 심상한 문장력으로 어찌 그 만분의 일이라도 드러낼 수 있겠는가?”라고 표현하면서 필설(筆舌)로 다할 수 없다는 그 고결한 절의에 각필(閣筆)하고 말았다.
‘목숨은 가볍게, 의리는 중하게’ 여긴. 사육신 하위지 선생의 충절에 다만 고개 숙여 묵념할 뿐이다.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하고, 의리는 지켜야 한다.’는 것을 하위지선생은 가르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