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 장
원 고 1. 양영수(대구광역시)
2. 김재림(광주광역시)
3. 오철석(광주광역시)
4. 심선애(광주광역시)
원고들 소송대리인 변호사 정채웅, 이상갑, 임태호, 김정희, 정인기, 김상훈
원고들 소송대리인 법무법인 이우스
담당변호사 임선숙, 김정호
피 고 미쓰비시(三菱)중공업 주식회사
일본국 도쿄도 미나토구 코난 2-16-5
(日本國 東京都 港区 港南 2-16-5)
대표취체역(代表取締役) 오미야 히데아키(大宮 英明)
손해배상(기)
청구취지
1. 피고는 원고들에게 각 150,000,000원 및 위 돈에 대하여 이 사건 소장 부본 송달일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20%의 비율에 의한 돈을 지급하라.
2. 소송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3. 제1항은 가집행할 수 있다.
라는 판결을 구합니다.
청구원인
1. 손해배상책임의 성립
가. 원고들의 강제동원 경위 등
(1) 원고 양영수의 강제동원 경위 등
<가정환경>
원고 양영수는 광주 금동 53번지에서 1남 1녀 중 막내였습니다. 원고 위로 여섯 살 위인 오빠가 있었습니다. 대대로 집안은 넉넉한 편이었고 밥을 굶거나 헐벗고 살지는 않았습니다. 원고는 외동딸이어서 큰 부모의 이쁨을 많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원고의 큰 아버지, 아버지, 오빠까지 모두 지식도 많고 항일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 집안이었습니다.
아버지 형제는 2남 1녀였는데, 어머니에 의하면 큰 아버지는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 때 참여했다가 그해 총살을 당해 돌아가셨는데 큰 집의 아들까지 부자지간에 학살을 당해 집안에 제사 지낼 사람도 없을 정도로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원고의 아버지는 어릴 적 원고에게 한문도 가르쳐 주시고 신학문도 가르쳐 주실 만큼 지식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앞으로 네가 커서 활동할 때는 좋은 세상 돌아오니까 외국 말을 알아두어라”며 한문과 중국어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원고의 아버지는 집을 비우시는 날이 많았습니다. 원고가 어머니한테 ‘아빠는 어디 가셨느냐’고 하면 ‘서울 가셨다’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는데,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어느 날 어머니가 솜바지를 싸서 ‘어디 다녀온다’고 집을 나서시길래 몰래 뒤를 따라갔다가 아버지가 경찰서 유치장에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큰아버지 영향 때문인지 원고의 아버지는 사흘이 멀다 하고 유치장을 드나들었고, 무슨 일이 벌어지면 일본 경찰이 항상 아버지를 찾거나 일본 경찰로부터 쫓겨 다녔습니다..
<동원 경위>
1944년 3월 광주 대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두어 달 뒤 학교에서 연락이 와 가 보니, 6학년 때 담임선생이었던 야마모토라는 일본인 남자 선생님이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공짜로 할 수 있다. 좋은 학교도 갈수 있다”며 일본에 갈 것을 권유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일본에 가면 공짜로 공부도 할 수 있으니 참 좋을 것 같고, 특히 오빠는 징용으로 끌려가 집에 없고, 아버지가 늘 쫓겨 다니면서 어머니는 그 뒷바라지 하시느라 가정 형편이 말이 아닌데, ‘내가 일본에 조금이라도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버지를 덜 괴롭힐 것 아니냐. 내가 좀 힘들더라도 집안이 좀 편해야 하지 않느냐’는 순진한 생각에 일본에 가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원고의 나이는 열 네 살이었습니다. 뒤늦세 사실을 알게 된 원고의 어머니는 ‘죽어도 같이 죽자. 지금도 늦지 않으니 몰래 빠져 나오고 마음 돌려라’며 극구 말렸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습니다. 원고가 일본으로 떠나갈 때도 아버지는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의 생활>
원고는 광주역에서 출발해 여수로 가서 밤배를 타고 항해하여 다음날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였습니다. 나고야 도착해서 며칠 쉰 다음 어딘가로 수송되었는데 그곳이 피고의 항공기제작소였습니다. 군수공장에서의 생황은 외출이 불가능했고 징역 살다시피 한 것이었습니다. 아침 9시에 출근하면 12시에 점심 먹고, 저녁 5시까지 일 하고, 일 끝나면 숙소 돌아와 6시에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퇴근하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겨우 밥 한 숟가락 먹었습니다. 하루 종일 고된 일에 피곤에 지쳐 그대로 잠자리에 쓰러져 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잠자리는 다다미방이었는데, 온기라고는 없기 때문에 추워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마저도 나중에는 밤마다 공습 때문에 자다가 이불 둘러쓰고 기숙사 밖 방공호로 뛰어다니기 바빴습니다.
원고는 하루 종일 비행기에 들어가는 부속품에 국방색 페인트 칠 하는 일을 했는데 겨울이면 얼마나 춥던지 손이 깨질 것 같았습니다. 손이 시럽고 추워서 팔짝팔짝 뛸 정도였습니다. 빨래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식사는 가끔 빵이나 감자를 주기도 하고 밥도 겨우 한 숟가락 정도이고 반찬도 단무지 정도여서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물이 맞지 않았던지 탈이 나 몸에 부스러기 같은 발진이 생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나 목욕을 시켜줬는데, 일본 사람들이 먼저 목욕하고 난 뒤에야 원고 등 한국에서 동원된 사람들이 들어갔습니다. 근 200여명이 한꺼번에 들어가야 했는데, 말이 목욕이지 물 구경도 못해 볼 정도였습니다. 작업복도 제대로 없어 한 벌 주면 몇 달씩 그대로 입어야 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은 전투기 공습이었는데, 폭격기가 한번 지나가면 사방이 불덩이가 되었습니다.
고향 부모님한테 편지도 했지만 부모님 근심할까봐 ‘여기는 좋고, 편안하게 잘 있다’고 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편지 내용을 사무실에서 모두 조사하기 때문에 쓰고 싶은 말을 쓸 수도 없었습니다.
1944. 12. 나고야에 큰 지진이 나서 건물이란 건물이 다 무너졌는데, 원고에게는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공장 건물이 한번에 무너져버린 것이 아니라, 마치 그네를 타듯 한번 땅이 흔들리면 공장 건물이 휘청하고, 또 잠깐 제자리에 돌아왔다가 두 번째 흔들리면서 건물이나 벽돌이 왕창 주저앉는 식이었습니다. 어딘가에서 ‘윙, 윙’ 괴상한 소리가 울리면서 아스팔트나 땅이 쩍쩍 갈라졌는데, 처음 겪는 일이라 너무 무서웠습니다.
1945년 나고야에서 더 이상 어렵게 되자 원고 등 피동원자들을 도야마로 데려 갔는데, 도야마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폭격 때문에 방공호로 도망 다니기 바빴습니다. 그러다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원고는 다른 피징용자들과 마찬가지로 월급이라고는 구경도 못해 봤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마당에 감히 달라는 얘기를 해 볼 생각도 못해 봤습니다.
<귀국>
해방되고 집에 돌아와서야 그동안 노무자로 끌려간 오빠도 다시 만나고 아버지로 다시 볼수 있었습니다. 광주에 도착하자 단숨에 집까지 뛰어가 집안으로 들어갔더니, 어머니가 나를 보더니 거의 기절을 하였습니다. 원고의 어머니는 해방이 되어 다른 사람들은 다 돌아오는데 원고가 안 돌아오니 ‘우리 딸은 죽었구나’하고 생각했답니다.
<위안부로 오인 받은 피해>
원고는 14살 때 일본 갔다가 15살에 돌아왔고, 20살에 전북 정읍 출신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딸 하나만 낳았는데, 아무리 내 딸이라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일본에 갔다 왔다’는 얘기는 일체 안했습니다. 정신대라면 전부 몸 팔다 온 것으로 취급해 버리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알 수 없어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원고의 딸은 딸 입장에서 어머니가 과거와 관련하여 뭔가 감춘 비밀이 있다며 못 미더워하고 서운해 하기도 했습니다. 원고가 일본에 강제동원당한 일은 두고두고 원고 가족들의 화목한 생활을 방해하는 작용을 한 것입니다.
<건강>
원고는 올해 여든 여섯 살 나이로, 2012년 9월부터 양로원에 들어가 생활하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혈소판이 안 좋고 늘 피가 부족하는 등 건강이 악화되고 있어 사는 것에 점점 자신이 없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2) 원고 김재림의 강제동원 경위 등
<가족관계>
원고 김재림은 1남 4녀 중 넷째이자 막내딸입니다. 집안은 소작 농사가 전부일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에 언니들은 일찍이 학교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나, 언니들이 ‘막내 동생마저 학교를 포기할 수 없다’며 부모님 몰래 입학을 시켜주었습니다. 원고는 공부를 재미있어 하며 열심히 노력한 덕택에 우수한 성적으로 1944년 3월 화순 능주초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동원경위>
원고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944년 봄 무렵 광주 시내 부동정(不動町. 현재는 광주 동구 불로동임)에 살고 있던 친척집에서 가사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원고와 나이가 같지만 생일이 이른 언니가 있었는데 원고에게 ‘일본에 가면 학교를 다닐 수도 있고 취직해서 돈도 벌 수 있다고 한다, 우리 같이 가자’고 권하였습니다. 원고는 당시 친척이라고는 하나 남의 집 일을 도우며 밥을 얻어먹고 살고 있었고 소학교에 이어서 공부를 더 하고싶은 욕심에 ‘같이 가겠다’고 결정하였습니다. 원고가 살고 있던 삼촌댁에는 원고 이외에 영암군 금정(金井)에서 올라 온 사촌 언니 이정숙(李貞淑)이 먼저 와서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정숙도 함께 떠나기로 했습니다.
<일본 이동 경로>
원고 등이 집합한 장소는 광주부(光州府) 청사 앞이었는데, 인솔자가 미리 집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원고 등이 집결지에 도착해보니 그 곳에 있으리라 기대했던 삼촌 댁 언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원고는 결국 사촌언니인 이정숙과 둘만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기차 탈 때까지도 설레이는 감정만 있었는데 도중에 고향인 화순 능주역을 지날 무렵부터 마음이 심란해지고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원고는 문득 부모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이 때부터 여수에 도착할 때까지 눈이 붓도록 울었던 기억을 합니다. ‘가난이 무엇이기에 재산이 있는 사람은 뒤로 쏙 빠지고, 가진 것 없는 사람만 이렇게 이국 땅으로 떠나야하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서러움이 밀려와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원고는 목포, 나주, 광주, 순천, 여수 등지에서 불려온 이들과 함께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 항을 경유해 1944년 6월 1일경 나고야에 있는 미쓰비시사의 항공기 제작회사에 배치되었습니다.
<미쓰비시에서의 생활>
원고는 미쓰비시에서 하루 종일 군용 비행기의 부속품을 깎는 일, 비행기 날개에 페인트 칠을 하는 일 등을 했습니다. 불과 열 서너 살 나이의 소녀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기계에 매달리다 저녁이 되어 숙소에 돌아오면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 정도로 피곤하였습니다. 생전 처음 해 보는 낯설은 일이었기에 더 힘이 들었는데, 힘든 내색을 하면‘괜히 일하기 싫어 꾀를 부린다’면서 밥을 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언제 울릴지 모르는 공습경보 때문에, 하루 일을 마치고 기숙사에 들어왔다고 해서 잠을 편히 잘 수도 없었습니다. 항상 야간공습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낮에 입은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신발도 못 벗고 보조가방까지 메고 자리에 누워야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고향 부모님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은 공장일을 시작한지 한참 후의 일이었는데, 공장 사무실 근무자들이 편지지 겉봉투는 아예 붙이지 말도록 했기 때문에 힘든 사정에 대해서는 쓸 수도 없었습니다.
해방이 되어 돌아올 때까지 월급은 구경도 못해 봤습니다. 월급은 언제 주느냐고 물어보면 ‘통장에 다달이 저축하고 있다’고 하여 그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수중에는 돈 한 푼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지진 피해>
1944년 12월 7일, 점심 먹고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 뛰어 나가면서 ‘도망가라’고 소리쳤습니다. 바깥을 보니까 다들 정신없이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원고는 그때서야 사촌 언니 손을 잡고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미처 빠져 나갈 사이도 없이 여기저기서 건물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원고는 공포에 질려 그만 언니 손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여기저기에 건물더미에 깔려 발만 허우적거리는 사람, 피투성이가 된 사람, 형체는 없이 어디서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소리….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습니다. 원고도 건물더미에 깔려 갇혔는데 다행이 발 하나가 바깥으로 나와 있어 그것을 본 구조대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원고도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죽어나가는 사람이 무더기로 많은 상황이어서 위급한 환자가 아니면 특별한 치료를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한참 후 언니 생각이 나서 옆에 사람들한테 안부를 물었더니 ‘저쪽 방에 있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며칠이 지나도 언니 안부를 들을 수 없어 이상한 생각이 들어 ‘살았으면 얼굴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독촉하자, 그때서야 ‘언니는 벌써 죽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원고의 사촌언니 이정숙은 화장 된 후 유해만 쓸쓸히 고향으로 돌려보내졌습니다.
<귀국 과정>
해방 후, 피고의 직원은 ‘우리가 알아서 짐과 월급을 챙겨 줄 것이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아무것도 챙기지 말고 한국에 돌아가 있으라’고 해서 간단한 소지품도 챙기지 못한 채 빈 몸으로 귀국선에 올랐습니다.
<결혼 후 지금까지의 생활>
원고의 남편은 보성 율어 사람이었는데, 결혼을 앞둔 시점에 시어머니께서 원고가 일본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알고 결혼을 엄청 반대하였습니다. 다행히 결혼식을 치루었고 남편과는 큰 어려움 없이 결혼생활을 유지해 올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 혹여 다른 사람들에게 근로정신대로 동원되었던 사실로 인해 군 위안부로 오해를 받을까봐 어느 한 순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원고의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동네 사람들 모두 원고가 일본에 다녀온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3) 원고 오철석의 누나 망 오길애의 강제동원 경위 등
<가족 관계>
오길애는 2남 7녀 중 둘째 누나이고 원고 오철석은 다섯째입니다. 원고의 큰 누나는 1944년 당시 서울여자사범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원고를 포함한 형제자매들은 모두 각 학년에서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습니다. 오길애는 목포산정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얼굴도예쁘고 성격도 좋아 항상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성적표를 보면 모든 과목이 월등한 편이었고 2등으로 졸업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사실은 오길애가 1등 성적이었으나 남학생에게 1등상을 주기 위해 2등으로 밀려났다고 합니다.
<동원 경위>
오길애는 원고가 초등학교 2년 때인 1944. 5.경 열네살의 나이로, 목포산정초등학교 동창생으로 도난카이(東南海) 지진으로 함께 숨진 최정례 등과 함께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에 강제동원되었습니다.
<일본에서의 사망 경위>
오길애는 미쓰비시 나고야 공장에 가서도 영리함을 인정받아 소대장 직을 맡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오길애는 1944년 12월 7일 나고야 일대를 강타한 도난카이(東南海) 지진이 발생할 당시 같이 끌려온 다른 근로정신대 대원들을 먼저 피난시키고 나오다가 무너지는 건물더미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숨졌다고 합니다.
피고측은 오길애의 시신을 화장을 해서 그 유골만을 원고 가족들에게 보내 왔습니다. 원고 가족들은 같은 지진으로 숨진 최정례와 함께 공동묘지를 만들어 나란히 비석을 세우고 근로정신대로 동원된 사실도 새겨 넣었습니다. 원고는 성장하여 군대 생활을 할 때까지도 해마다 누이에게 성묘를 다녔는데, 묘지 인근이 정비되면서 묘지도 훼손되고 비석도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미쓰비시 동원 및 지진 희생 근거>
오길애는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로부터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받아, 사망자에 대해 지급하는 위로금을 수령하였습니다.
피고 측은 1952년경 나고야에 위치한 미쓰비시중공업 오에(大江)공장 부지 내에 미쓰비시중공업에서 일하다 여러 사정으로 숨진 사람들을 추도하기 위한 ‘미쓰비시중공업 순직비’를 세워두고 있고 순직비 뒤편 동판 보관함에는 여러 장의 동판에 순직자들의 이름을 새겨 보관하고 있는데, 근로정신대로 동원되었다가 위 지진으로 사망한 6명의 순직일, 한국이름, 창씨명도 위 동판에 기재되어 있는 바, 오길애도 위 6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족의 고통>
유난히 똑똑하고 총명했던 딸이 난데없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원고 가족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한이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4) 원고 심선애의 강제동원 경위 등
<가족관계>
원고는 현재 광주광역시 북동 지역에서 9남매(3남6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원고가 근로정신대로 강제동원될 무렵 원고의 집에는 증조 할머니, 조부님, 부모님, 형제들이 모두 한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원고의 아버지는 항상 새벽 3시에 일어나 하루 일을 시작할 정도로 성실하고 부지런한 분이었고 그 덕에 재산을 증식하여 농사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흉년이나 보릿고개를 모른 채 대체로 넉넉하게 생활하였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원고는 여덟 살에 현재의 광주 수창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수창초등학교는 학년당 남자 2개반, 여자 2개 반이었고 1개 반은 대략 60여명 정도로 구성되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은 불과 몇 명뿐이었고 거의 대부분은 일본 사람들이었으며, 학교에 가면 아침에 기미가요 등 일본 노래를 배우거나 집단 체조 등을 하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에서는 일본 말만 쓰게 하고 조선말은 일체 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일본 가게 된 경위>
원고는 1944. 3. 수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일을 돕고 있다가, 1944. 5.경 주위 친구들로부터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원고는 일본에 가게 되면 새로운 경험을 얻을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근로정신대 지원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고 등 신청자들은 광주시청 건물 앞으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집합한 다음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키가 작고 약해 보이는 사람은 탈락당하고 비교적 건강하고 체격이 좋은 아이들만 선발되었습니다. 모집인은 ‘부모님 승낙이 있어야 하니 도장을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원고 역시 다른 지원자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에게 ‘일본에 가겠다’고 하면 반대할 것이 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부모님의 승낙을 받을 생각을 하지도 않고 어느 날 아버지 모르게 서랍에서 아버지 도장을 훔쳐다가 가져다 주었습니다. 원고는 일본에 간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출발 당일에서야 부모님에게 일본에 가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을 드렸고 원고 집에서는 한 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원고를 특별히 예뻐하셨던 할머니는 “다 큰 자식 일본 보내 죽일 셈이냐”고 울부짖다가 혼절하시기까지 하였습니다. 원고는 간단한 옷가지 정도만 챙겨 집결지였던 광주공원에 나갔다가 그곳에 있던 신사에 집단 참배를 한 다음, 본정통(本町通)이라 불렸리 광주 시내를 한 바퀴 돌아 남광주역까지 줄을 지어 행진을 했습니다. 일본 군인의 인솔 하에 앞에서는 나팔을 불고 북을 치고, 원고 등 피동원자들은 머리에 띠를 두른 채 일장기를 흔들며 걸었습니다. 피동원자들이 지나가는 연도에는 환송하기 위해 나온 서석초등학교, 수창초등학교, 대성초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원고는 그 모습을 보면서 무슨 대단한 일에 나서기나 한 것처럼 우쭐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피동원 소녀들은 광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순천을 거쳐 여수에 도착했는데, 광주역에서 출발한 사람이 대략 60여명 정도였습니다. 원고의 언니는 당시 시집을 가서 광주 시내에 살고 있었는데 아기를 밴 몸으로 배웅한다며 광주공원에서부터 여수까지 따라 나섰습니다. 여수에서 헤어질 때, 언니는 동생을 몹시 걱정하고 슬퍼하면서 눈물을 지었지만 원고는 그때까지도 강제노동을 당하러 간다는 사실을 모른 채 오직 더 나은 생활이 보장되는 일본으로 떠난다는 생각에 슬픈 감정을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원고 일행은 여수에서 밤배를 타고 출발해서 다음 날 아침 시모노세키항에 내린 다음 곧바로 기차를 갈아타고 나고야에 도착했습니다.
<미쓰비시에서의 생활>
나고야에 도착한 직후 한차례 나고야성 등을 구경시켜 주었으나, 며칠 후 비행기 만드는 공장에 배치된 다음부터는 하루 종일 고된 작업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원고가 맡은 일은 줄이라는 작업도구로 비행기 부속을 매끈하게 다듬는 일을 해야햇는데, 처음해보는 일이어서 서툰데다가 할당된 작업량이 많아 매우 힘들었습니다. 기숙사는 다다미방이었는데 서로 마주보도록 복도를 중심으로 양편으로 다다미가 놓여 있는 구조였습니다. 벼룩이나 빈대가 뛰어다니는 모습이 눈이 보일 정도로 많을 만큼 지저분한 숙소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아침 식사는 된장국에 반찬이라고는 단무지 정도였고, 한 참 자랄 나이에 식사량이라고는 숟가락 하나 정도로 워낙 적어, 그것도 없어서 서로 먹으려고 난리였음.
원고 등은 미군의 일본 본토 폭격과 동남해 대지진의 영향으로 나고야 항공기제작소 가동이 더 이상 어렵게 되자 1945년 도야마에 있는 미쓰비시 공장으로 재배치되었는데, 그곳은 나고야 보다 훨씬 시골이었을 뿐 아니라 모든 환경이 더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원고는 도야마로 이동한 후에는 비행기 외부에 페인트 칠 작업을 해야했는데, 페인트 냄새가 아주 심해 곧 토할 것 같고 머리가 쪼개질 정도로 두통이 생겼습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나고야에 있을 때보다 밥을 더 적게 줘서 언제나 배가 고팠습니다. 원고 등은 배고픔을 달래기위해 공장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잡초를 뜯어다 끓인 물에 데쳐 먹거나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아직 채 익지도 않은 땡감을 따먹거나 급기야는 들판에 나가 꽃을 뜯어 먹기도 했습니다.
나고야에서 몇차례 집에 편지를 보낸 기억이 있는데, 피고측 직원들이 중간에 편지 내용을 다 살펴본 후 발송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잘 지낸다’는 말만 하지 ‘고생이 심하다 ’는 말은 쓸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 했지만 월급은 단 한번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폭격과 지진에 대한 공포>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특히 무서운 일은 미군의 폭격이었는데, 나고야에 있을 때 특히 많았습니다. 폭격기가 떴다고 사이렌이 울리면 일하던 것을 내던지고 공장 밖으로 무작정 도망가고, 저녁에 기숙사에 돌아와서도 폭격 사이렌이 울리면 이불을 둘러쓰고 방공호 속으로 들어가 공습이 해제될 때까지 숨어 있어야 했습니다. 방공호 속에 들어가면 그 곳에서 날을 지새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렇게 저녁마다 잠을 못 자도 아침이 되면 쉴 시간 없이 다시 공장으로 일하러 가야 했습니다. 이런 생활이 일상화되자 나중에는 방공호 속에 있으면서 죽고 사는 걱정을 할 틈도 없이, 무서운 것도 잊고 그대로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아침이 되어 방공호 속에서 나와 보면 주변에 말이 죽어 있기도 하고 사람이 죽어 있기도 하는 등 참담한 모습이었는데, 그 참상이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있습니다.
1944년 12월 7일 나고야에 큰 지진이 있었는데 그때 광주에서 같이 간 사람 중 2명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원고는 그날 공장에서 일하지 않고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학교에 가서 덧버선 같은 걸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학교는 오두막 같이 생긴 1층 목조건물이었습니다. 지진이라는 것을 겪어본 경험이 없어서 처음에는 땅이 흔들리는데도 뭐가 뭔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지진이니 밖으로 피하라는 소리를 듣고서야 건물이 무너지는 순간 거의 풀풀 기다시피 해서 겨우 운동장으로 빠져 나왔습니다. 학교 목조건물도 무너지고 학교 앞에 있던 큰 건물이나 굴뚝도 넘어지고 운동장에서는 물이 솟아 한강 물 같이 가득차올랐습니다. 원고가 일하고 있던 공장으로 돌아가 보니 공장이 다 무너져 있었고, 광주에서 온 일행 2명이 건물더미에 깔려 죽었다는 소식도 듣게되었습니다. 여관집 외동딸로 원고와 같은 수창초등학교 선배였고 소학교 졸업 후 고등과 2년을 더 배워 유독 똑똑하고 예쁘게 생겼던 김순례도 위 지진 때 사망했습니다. 화장 후 유골만이 고향으로 보내졌습니다.
<해방 후 귀국>
일본 천황이 라디오 방송에서 울면서 항복한다고 말하는 소리를 도야마에서 다른 사람들과 일하다가 듣게 되었습니다. 천황의 항복 발표 순간 일본 여자들은 모두 땅바닥에 엎어져 울었던 반면 한국 사람들은 해방됐다고 만세 부르며 좋아했습니다. 원고는 해방 후 두어 달 지난 10월 하순 쯤 센자키[仙崎]를 거쳐 부산을 경유해 고향 광주로 돌아왔습니다. 광주역에 할아버지가 마중을 나와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에 의하면 해방 된 날부터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역에 나와 손녀딸을 기다리곤 하여 역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결혼 후 생활>
원고의 남편도 징용으로 일본 어느 지역으로 노무자로 끌려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원고는 일본에 갔다 왔다는 말은 가족한테도 절대 말하지 않고 지금까지 지내왔습니다. 일본 갔다 온 사람은 모두 일본군을 상대한 위안부로 취급당했기 때문에 그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항상 조심해야만 했습니다. 원고는 예순 아홉 살 때부터 파키슨 병을 앓아 약에 의존하여 연명하고 있고, 근래에는 기력이 더 약해져서 거동하기도 힘들며, 손이 심하게 떨려서 남 앞에서 같이 밥 먹는 것도 어렵습니다.
나. 피고의 불법행위
(1) 일본의 한반도 침탈과 태평양전쟁 등의 발발
(가) 일본 정부는 1910. 8. 22. 대한제국과 사이에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한 후 1937.경 일어난 중일전쟁과 1941.경 일어난 태평양전쟁을 치루면서 군수산업에서의 노동력 부족이 심각해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938. 4.경 ‘국가총동원법’을, 1939. 7.경 ‘국민징용령’을 각 공포하고, 한반도에서는 모집 형식의 노무동원계획을 실시하여 노동력의 통제와 총동원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고, 1940.경에는 ‘조선직업소개소령’을 공포하고, 1941.경에는 ‘국민근로보국협력령’을 시행하고, 1942.경에는 ‘국민동원계획’을 세워 전쟁을 위한 군수산업에 필요한 노동력 동원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나) 일본 정부는 1943. 9. 13. 차관회의에서 필요한 여성 근로요원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신규학교 졸업자, 14세 이상의 미혼자, 정비되어야 할 불급불요학교 재학자, 기업정비에 의한 전직가능자’를 동원대상으로, ‘항공기관계공장, 정부작업창’을 배치장소로, ‘도청부현의 지도 아래 시군촌장에게 취직 권장을 노력하도록 하고, 반상회, 부락회, 이웃조, 부인회, 학교장들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협력시키며, 도청부현 지도 아래 학교장 등이 학교 졸업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여자정신대를 모집할 것’을 동원방법으로 하는 ‘여자근로동원의촉진에관한건’을 의결하였고, 1944. 3. 18.에는 ‘여자정신대제도강화방책요강’을 결정하여 일본국 내의 여성들을 강제적으로 정신대로 조직시켜 필요한 업무에 협력할 것을 명령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였고, 1944. 6. 21.에는 ‘여자정신대수입측조치요강’을 결정하였다. 일본 정부는 1944. 8. 23. ‘여자정신근로령(1944년 칙령 제519호)’을 공포 시행하여 한반도에서도 시행하였습니다.
(다) 한반도에서 근로정신대 동원은 위와 같은 ‘여자정신근로령’ 시행 전부터 행해지고 있었는데, 1944.경 이후에는 특히 늘어나 국민학교(현재의 초등학교)를 통해서 국민학교 6학년이나 국민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모집이 행해졌습니다.
(라) 여자정신대제도강화방책요강 및 여자정신근로령에서는 기본적으로 국민등록자인 여성들을 정신대 대원으로 할 것으로 정하고 있으나, 당시 한반도에서 여성의 국민등록은 기능자, 즉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기능자로서 중학교 정도의 학교 졸업자 또는 실력과 경험에 의해 광산기술사, 전기기술자, 전기통신기술자 등으로 현직에 취업하고 있거나 예전에 일한 적이 있는 자만으로 한정되어 있어, 국민등록자의 범위는 매우 좁았습니다. 그러나 위 여자정신대제도강화방책요강 및 여자정신근로령에는 ‘특히 지원을 한 자는 정신대원으로 할 것을 막지 않음’이라고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역시 위와 같이 지원이라는 형식으로 근로정신대원 모집이 행해졌습니다. 모집된 근로정신대원들은 구 미쓰비시 공장, 후지코시 강재공업 주식회사 도야마 공장, 주식회사 도쿄아사이트 방직, 주식회사 누마즈 공장 등의 군수 공장에 동원되었습니다.
(마) 여자정신근로령은 정신근로대를 받으려고 하는 자는 지방장관에게 이를 청구 또는 신청하고 지방장관이 그 필요성을 인정하면 시정촌장 기타 단체의 장 또는 학교장에 대하여 대원의 선발을 명하여 그 결과를 보고받고, 지방장관이 대원을 결정하여 통지하면 이 통지를 받은 자는 정신근로를 하고 정신근로대를 받게 된 자가 원칙적으로 그 경비를 부담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2) 근로정신대와 위안부의 구별
(가) 1930년대 이후 특히 중일전쟁이나 태평양전쟁이 전면화되는 1938.경부터 1945.경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여성들 중 다수가 군위안부로 끌려갔고, 그 중에는 대부분 10대에서 20대였으며, 미성년인 여성들도 많았습니다.
(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43.경부터 1945.경까지 주로 국민학교 졸업직후인 12세부터 16세 정도의 어린 소녀들이 근로정신대로 동원되어 일본에 보내졌으나, 그 수는 군 위안부에 비하면 소수입니다.
(다) 군 위안부의 경우 경찰과 군대의 개입, 납치 등의 방법으로 끌려가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돈을 많이 준다’는 등의 말로 속여, 간호사, 여자정신대, 위문단 등에 취업시켜주는 것처럼 유혹하는 방법으로 모집하였다. 근로정신대의 경우 ‘여학교에 갈 수 있다’, ‘일해서 돈을 벌 수 있다’고 속여서 동원하였으며, 대다수의 경우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민학교의 교사, 교장, 면장 등 행정기관이나 헌병들이 관여하여 모집하였습니다.
(라) 군 위안부를 모집할 때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모집된 경우는 거의 없었고, 종군간호원, 여자정신대, 위문단, 가극단, 봉사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모집하였다. 한반도에는 1940년 이후 농촌정신대, 학도정신대, 보국정신대, 국어보급정신대, 보도정신대 등 조선총독부 혹은 일본군에 의하여 정신대라는 명칭이 쓰인 조직은 사회 전반에 걸쳐 있었고, 1944.경 이후 조선총독부는 대대적인 선전으로 근로정신대를 동원하였습니다.
(3) 일본국의 강제노동금지 조약 가입
(가) 일본국은 1930. 6. 28. 강제노동에 관한 조약을 채택하고, 위 조약을 1932. 10. 15. 비준하고, 1932. 11. 21. 비준등록 하였습니다.
(나) 위 조약은 강제노동을 ‘어떤 자가 처벌의 위협 아래서 강요당한, 그 자가 임의로 신고하지 않았던 모든 노무’로 규정(위 조약 제2조 제1항)하고 있습니다. 또한 위 조약은 예외적으로 강제노동이 인정되는 경우를 규정(위 조약 제10조 제1항)하고 있기는 하나, 그러한 경우에도 추정연령 18세 이상 45세 이하의 건장한 남자만이 강제노동을 하도록 규정(위 조약 제11조 제1항)하고 있어 여성이나 18세 미만의 아동에 대하여는 어떠한 강제노동도 금지하고 있습니다.
(다) 위 조약은 합법적인 강제노동의 경우에도 상당 액수의 임금을 지급하여야 한다고 규정(위 조약 제14조)하고 있습니다.
(4) 피고의 설립
(가) 구 미쓰비시는 일본의 패전 이후 일본 내 연합국 최고사령부(GHQ)의 재벌해체정책을 따름과 아울러 패전으로 인하여 일본 기업들이 부담하게 될 엄청난 액수의 배상 및 노무자들에 대한 미지급임금 채무 등의 해결을 위하여 제정된 일본의 회사경리응급조치법상의 특별경리회사, 기업재건정비법상의 특별경리주식회사로 지정된 후, 1949. 7. 4. 기업재건정비법에 의한 재건정비계획 인가신청을 하여 1949. 11. 3. 신청한 내용대로 주무대신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나) 구 미쓰비시는 1950. 1. 11. 그 재건정비계획에 따라 해산하기로 하고, 같은 날 구 미쓰비시의 현물출자 등에 의하여 기업재건정비법상의 새로운 회사인 중일본(中日本)중공업 주식회사(상호가 1952. 5. 29. 신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로, 1964. 6. 1. 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로 변경되었다), 동일본(東日本)중공업 주식회사(상호가 1952. 5. 27. 미쓰비시일본중공업 주식회사로 변경되었다), 서일본(西日本)중공업 주식회사(상호가 1952. 5. 27. 미쓰비시조선 주식회사로 변경되었다)의 3개 회사(이하 새로이 설립된 3개 회사를 합쳐 ‘제2회사’라고 한다)가 설립되었습니다. 그 뒤 중일본중공업 주식회사가 1964. 6. 30. 동일본중공업 주식회사, 서일본중공업 주식회사의 2개 회사를 흡수합병함으로써 현재의 피고로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구 미쓰비시의 종업원들은 직위, 급료를 그대로 하고 구 미쓰비시에서의 재직기간을 통산하여 퇴직금을 산정하기로 하여 제2회사로 승계되었고, 제2회사의 초대사장들은 모두 구 미쓰비시의 상무이사들이 취임하였다. 또한, 피고 자신도 구 미쓰비시를 피고의 기업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 회사경리응급조치법은 “특별경리회사에 해당될 경우 그 회사는 지정시(1946. 8. 11. 00:00을 말한다. 제1조 제1호)에 신계정과 구계정을 설정하고(제7조 제1항), 재산목록상의 동산, 부동산, 채권 기타 재산에 대하여는 「회사의 목적인 현재 행하고 있는 사업의 계속 및 전후산업의 회복진흥에 필요한 것」에 한하여 지정시에 신계정에 속하며, 그 외에는 원칙적으로 지정시에 구계정에 속하고(제7조 제2항), 지정시 이후의 원인에 근거하여 발생한 수입 및 지출을 신계정의 수입 및 지출로, 지정시 이전의 원인에 근거하여 발생한 수입 및 지출은 구계정의 수입 및 지출로 경리처리하며(제11조 제1, 2항), 구채권에 대해서는 변제 등 소멸행위를 금지하되, 예외적으로 변제를 인정하는 경우에도 구계정으로 변제하여야 하고, 신계정으로 변제하는 경우는 특별관리인의 승인 등 일정한 요건을 갖춘 경우 일정한 금액의 한도에서만 가능(제14조)”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라) 구 미쓰비시는 회사경리응급조치법, 기업재건정비법에 따라 1946. 8. 11. 오전 0시를 기준으로 하여 신계정과 구계정을 분리한 후, ‘회사의 목적인 현재 행하고 있는 사업의 계속 및 전후산업의 회복진흥에 필요한 동산, 부동산, 채권 기타 기존 재산 등’을 신계정에 속하도록 한 후 위 재산을 현물 출자하여 3개의 제2회사를 설립하였고, 그 외 그때까지 발생한 채무를 위주로 한 구계정상의 채무를 부담하면서 청산회사가 된 구 미쓰비시는 1957. 3. 25. 설립된 료주(菱重) 주식회사에 흡수합병되었다가 1957. 10. 31. 해산하였습니다.
(5) 소결
이상의 제반사정들을 종합하여 보면,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불법적인 침략전쟁의 수행과정에서 기간 군수산업체인 군수공장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조직적으로 인력을 동원하였고, 핵심적인 기간 군수산업체의 지위에 있던 구 미쓰비시는 일본 정부의 위와 같은 인력동원정책에 적극 협조하여 인력을 확충하였는데, 원고 등은 당시 한반도와 한국민들이 일본의 불법적이고 폭압적인 지배를 받고 있던 상황 아래에서 장차 일본에서 처하게 될 노동 내용이나 강도 환경 등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 채 일본 정부의 위와 같은 조직적인 기망에 의하여 강제연행 되었다. 나아가 여자근로정신대령의 규정에 비추어 구 미쓰비시의 신청으로 일본 정부가 필요 인원을 모집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점, 원고 등은 당시 만 13, 14세의 어린 소녀들로 1932.경 일본에서 비준 등록된 강제노동에 관한 조약에서 절대적으로 금지되는 강제노동의 대상들인데 구 미쓰비시 역시 이러한 점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구 미쓰비시 역시 원고 등이 강제연행 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알았거나 알 수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더욱이 원고 등은 만 13세, 14세의 미성년자들로 어린 나이에 가족과 이별하여 생명이나 신체에 위협을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열악한 환경에서 위험한 노동에 종사하였고, 구체적인 임금액도 알지 못한 채 강제노동을 하였습니다. 구 미쓰비시는 원고 등으로 하여금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 무렵까지 노동에 종사하게 하면서, 삼엄한 감시를 하였고, 가족들과의 서신 교환도 사전 검열에 의하여 제한하고, 식사의 양과 질 역시 현저히 부실하며 임금도 전혀 지급하지 아니하였습니다. 1944. 12. 7. 동남해지진이 발생하여 이 사건 공장이 무너졌을 때에도 원고 등에게 적당한 피난장소나 식량을 제공하는 등의 구호조치를 취하지 아니한 채 방치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구 미쓰비시의 원고 등에 대한 강제연행 및 강제노동행위는 당시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에 적극 동참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하고, 동남해 지진이 발생했을 때 원고 등에 대해 아무런 구호조치를 취하지 아니한 채 방치하고 망 오길애를 사망에 이르게까지 한 행위는 사실상의 고용관계에 있는 원고 등에 대하여 사용자로서의 안전배려의무를 방기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며 이러한 불법행위로 인하여 원고 등이 심한 정신적 고통을 입었음은 경험칙상 명백하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구 미쓰비시는 위와 같은 불법행위로 인한 원고 등의 정신적 고통에 대하여 이를 배상할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구 미쓰비시와 피고는 그 실질에 있어 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할 것이므로 법적으로는 동일한 회사라고 할 것이고, 따라서 원고들은 구 미쓰비시에 대한 청구권을 피고에 대하여도 행사할 수 있습니다.
2. 손해배상의 범위
원고 등의 연령과 성별, 불법성의 정도 및 그 고의성, 피고가 이러한 불법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및 그 관여 정도, 그로 인한 원고 등의 피해의 정도, 그럼에도 불법행위 이후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책임을 부정한 피고의 태도 등의 일체의 사정과 함께 이 사건 불법행위 시와 현재까지 사이에 장기간의 세월이 경과함에 따른 국민소득수준이나 통화가치의 변경 등을 고려하고, 오랜 기간 동안의 통화가치 변경 등을 고려한 위자료배상채무의 지연손해금은 예외적으로 그 위자료 산정의 기준시인 사실심 변론종결 당일로부터 발생한다고 보아야 함에 따라 불법행위 시로부터 변론종결 시까지 장기간 동안 배상이 지연됨에도 그 기간에 대한 지연손해금이 전혀 가산되지 않게 된다는 사정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보면, 피고가 지급하여야 할 위자료는 이 사건 변론종결일을 기준으로 원고 등 이 사건 근로정신대원 1인당 150,000,000원으로 정함이 상당하다 할 것입니다.
3. 결론
그렇다면 결국 피고는 원고들에게 청구취지 기재와 같이 손해배상을 할 법적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므로 원고의 청구를 모두 인용하는 판결을 선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원고들이 고령으로 여명이 얼마남지 않은 점, 이 사건과 같은 쟁점에 관하여 대법원 판결 및 하급심 판결이 이미 선고되어 있어 쟁점에 관한 판단이 정립되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변론절차가 개시되고 판결이 선고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소송지휘권을 행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입증방법
1. 갑제1호증 위로금등 지급결정서(양영수)
1. 갑제2호증의1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 심의결정통지서(김재림)
1. 갑제2호증의2 위로금등 지급결정서(김재림)
1. 갑제3호증의1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 심의결정통지서(오길애)
1. 갑제3호증의2 위로금등 지급결정서(오길애)
1. 갑제4호증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 심의결정통지서(심선애)
1. 갑제5호증 제적등본(오길애)
첨부서류
1. 소장 부본 1통
1. 위임장 1통
2014. 2.
원고들의 소송대리인 변호사 정채웅
변호사 이상갑
변호사 임태호
변호사 김정희
광주지방법원 귀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