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가방과 이별하다
이도훈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이해하려 애쓰거나
갈 수 없는 곳을 여행하려 빠져들다 보면
전철 선반에 올려놓은 가방을 잊고 내리기 쉽지
알지도 못했던 비트겐슈타인의 ‘변하지 않기 위해서는 변해야 한다.’라는 말과
있지도 않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단어를 찾아서’를 읽으려고 하다
오랜 친구 샘소나이트를 떠나보냈다.
그가 내 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무한 회전하는 2호선 전철을 갈아타고 있을 때
한 손에 매달려 너풀거리는 시산맥 가을호를 가만히 바라볼 때
그에게도 잠깐이나마 쉴 시간이 있었으면 하고
나도 잠깐 어디에 드러누웠으면 하고
그러니까 내 오랜 친구도 좀 쉬라고 말하려고 할 때
가방 안에서는
수정하려고 인쇄해 놓은 시들이 내가 시인인 줄 알려줄 테고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 전단지가 내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고
수업시간표는 내가 어디쯤 있을지 말해주겠지만
낡고 허름한 겨울이어서
곳곳에서 실밥이 터지고
만질 때마다 검은 때가 묻어나
아무도 내 가방을 열어보지 않을 것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앞주머니에 넣어둔 립클로즈와의 입맞춤이 마지막이었다는 것
어젯밤 시작노트를 꺼내 논 것이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더이상 실밥을 태우느라 불고문을 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병들었나 끙끙거리며 냄새를 맡지 않아도 돼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조급해할 시간도 없이 갑작스럽게 이별하는 게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이제는 짐꾼 노릇을 안 해도 돼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선반 위에서나 분실물센터 창고에서 훼방 없는 긴 휴식을 취할 수 있어 참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첫댓글 훼방꾼 때문에 읽기 힘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