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상방(十大商幇)은 왜 명나라때 형성되었는가?
15.16세기의 명나라는 경제, 사회 정치적인 요소가 공동으로 작용하여, 각지의 십대상방을 탄생시켰다. 당시는 중국과 유럽이 거의 동일한 출발점에 서 있었다.
100여년간 사라졌던 '상방'이라는 단어는 다시 한번 사람들의 눈에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 '상방'이 있는 지방은 '신X방'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다. "신진상(新晋商)" "신노상(新魯商)" "신절상(新浙商)"등이 그것이다. 심지어 과거에 상방이 없던 지방까지도 자기들을 '신X방'이라고 부르고 있다. 예를 들면 역사상 경방(京幇)이라는 것이 없었음에도 요즘 "신경방(新京幇)"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상방은 중국역사상 지역관계와 연결되어 있는 상업집단이다. 하나의 "상방"이 되려면 반드시 다섯가지의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해당 지역이 상당히 발달한 상업을 구비해야 한다.
둘째, 대량의 자본을 축적한 거상들이 중추가 되어야 한다.
셋째, 경영, 제도, 문화등의 측면에서 다른 상업집단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어야 한다.
넷째, 많은 독립된 상인들이 경영과 경쟁의 필요에 따라 지역의 유대감을 중심으로 하여 느슨한 연합을 해야 한다.
다섯째, 역사상 중요한 영향을 미쳤어야 한다.
이런 조건에 따르면 학계에서는 중국역사상 10대상방이 있다고 보고 있다.
산서의 진중(晋中)을 중심으로 한 진상(晋商)
안휘의 흡현, 무원등 휘주6현을 중심으로 한 휘상(徽商)
산동의 임청, 제녕, 요성, 연대일대의 노상(魯商)
녕파를 중심으로 한 절상(浙商)
용유현을 중심으로 하여(상산, 구현과 강산5현)의 용유상(龍遊商)
소주서남의 오현경내의 태호중동, 서동정산(현재 오현의 동산진과 서산진)의 동정상(洞庭商)
강서의 인구유동으로 형성된 강우상(江右商)
복건연해를 중심으로 한 민상(?商)
광주, 불산일대를 중심으로 한 월상(?商)
진상과 동시에 흥기하고 진상의 동생으로 불리는 섬상(陝商)
이 10대상방이 가장 활약한 시기는 명청이었다. 그러나 모두 명나라때 형성되었다. 시간은 서로 달랐지만, 왜 10대상방이 명나라때 형성되었는가?
상방의 형성은 상품경제의 발전의 결과이다. 상품경제발전은 또한 생산력발전의 결과이다. 중국의 경제와 문화는 송나라때 상당히 높은 수준에 올랐었고,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에 이르렀을 때 다시한번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명나라의 농업생산공구는 이미 전통농업하에서는 완비된 수준에 도달한다. 인력리(人力犁), 풍력수차는 널리 쓰였고, 용골차(龍骨車)는 개선되었으며, 축력(畜力)도 이용했다. 수리건설도 상당히 발전되었고, 15세기초가 되어서 명나라때 이미 제방을 40,897군데 쌓았고, 인공수로가 4162곳, 제방을 수리한 곳이 5048곳에 달하였다. 농업측면에서 비석반종, 골회초앙근, 구전법, 제당경작법등이 나타났다. 복건, 절강에는 이모작이 나오고, 광동에는 삼모작까지 이루어졌다. 옥수수, 땅콩, 담배, 감자, 해바라기가 도입되었으며, 면화재배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명나라때 인구는 영락제때 6500만에서 만력년간에 1.2억명으로 늘었다. 전문가들의 추정에 의하면, 만력년간의 농업생산품총량은 696억근에 이르렀을 것으로 본다. 강남의 쌀생산은 2석(300근)에 이르렀고, 당시의 유럽과 동일한 수준이었다. 봉건사회는 농업이 기초였다. 농업의 발전은 공상업의 발전에 물질적인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명나라때는 관영수공업이 쇠락하고, 민영수공업이 신속히 발전되었다. 특히 소주항주의 사주업(紗綢業), 광동불산의 야금, 철기주조업, 강서 경덕진의 도자기제조업 및 기타지방의 면방직업등은 생산기술이건 생산규모면에서 모두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예를 들어 방직업에서는 족답소거(발로 고치를 켜는 기계), 직기, 제화기등 기술도구를 널리 사용했다.
명나라때 소주의 직염국은 직기가 173대가 있었고, 매년 단자(緞子) 1534필을 생산했다. 민영직호는 관영의 직조국을 초과했다. 명나라 말에, 민간 직호는 3만명에 달하였으며, 적어도 관청소속 장인의 3배였다. 여기에 불산의 야철업은 명나라 말에 이미 큰 고로를 갖추고, 원주체를 병모양으로 바꾸는 등 야금업의 일대 혁신을 이루었다. 하루밤에 철 3600근을 생산했다. 특히 민영야철업이 발달하여 영락3년에서 선덕9년의 30년간 생산량이 13만근에서 833만근으로 70배 증가했다. 경제사학자들은 중국명대에 자본주의의 맹아가 여기서 탄생했다고 본다.
경제발전의 기초위에서 상업도 상당히 발전했다. 국내무역을 보면, 국내시장은 이미 봉쇄된 지역성시장에서 국내통일시장으로 변모했다. 송응성의 <<천공개물>>에서 과장되게 말한 바에 따르면 운남의 차마가 요양을 통과하고 광동 휘주의 상인이 하북성까지 다닌다고 하였다. 명나라때 이정의 말에 따르면 연조, 진진, 제량, 강회의 물건이 밤낮으로 남을 향하고, 만해, 민광, 예장, 남초, 구월, 신안의 물건이 밤낮으로 북을 향한다. 장강과 대운하를 연해서 신흥 상업도시가 나타났다. 예를 들면, 성도, 중경, 무창, 양주, 소주, 항주등이 그것이다. 금병매, 삼언이박과 같은 책들이 명나라때의 시정소설인데, 이때의 상업발달상황을 잘 보여준다.
명나라중기이후에 대외무역도 상당히 발전한다. 조선과 항해기술도 송나라에 비하여 많이 발전한다. 해외무역은 주로 남양(南洋)지역이었고, 다음이 일본(日本)이었다. 중국의 수출은 비단, 자기, 은기, 칠기등 공예품이 위주이고, 수입은 주로 소목, 호초, 서각, 상아등이었다. 복건의 관세수입만 만력초기의 2만냥백은에서 숭정때는 5-6만냥으로 증가했다. 당연히 해금의 영향으로 대외무역은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10대상방의 형성에 중요한 작용을 한 것은 정책의 변화도 있었다. 명나라 초기에 북부변방을 보호하기 위하여 9변(九邊, 아홉군데의 군사기지)을 두었고, 80여만의 군인과 30필의 전마를 두어 국가재정에 주는 부담이 컸다. 홍무3년부터 실행한 식량으로 염인(鹽引, 소금거래허가증)을 바꾸는 개중제(開中制)는 진상과 섬상이 탄생한 계기가 되었다. 개중제가 없었으면 산서와 섬서의 상인은 세력을 형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명나라 중기에 개중제는 절색제(折色制)로 바뀌는데, 관부의 허가를 받은 사인염업의 독점경영은 휘상의 성장에 핵심요소였다. 명나라 중기에 요동과 장가구에는 각각 동서마시(東西馬市)를 열었는데, 진상이 염업을 위주로 하다가 다종경영으로 바뀌는데 중요한 촉진작용을 한다. 이런 정책이 없었다면 '주서구(走西口, 산서 사람들이 서쪽입구를 나가서 몽고등과 무역에 종사하는 것)"과정에서 성장하는 진상은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명나라 중기의 해금이 완화된 것은 절상, 민상, 월상들을 형성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경제발전은 바로 상업발전을 가져온다. 이것은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규율이다. 어떻게 금지하고 제약하더라도 사람이 이익을 쫓는 본성은 아무리 큰 위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장사에 나서게 하는 것이다. 봉건사회에서 계속하여 중농억상의 정책을 썼고, 상인의 사회지위는 매우 낮았지만, 장사는 여전히 막을 수 없는 조류였다. 명나라 십대상방의 형성은 바로 당시 경제발전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정책이 상업발전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점이다. 명나라때의 절중제, 절색제, 동서마시의 개방의 원래 출발점은 봉건통치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상업발전과 상방형성을 가져왔다. 유한하게 대외개방을 한 것은 압력에 따른 것이었다. 유한하기는 해도 작용은 아주 명확했다. 그러나 명나라때의 전제통치로 세수명목이 많았고, 세관을 군데군데 세워서 무역은 상당히 큰 제약을 받았다. 이런 정책하에서 상방의 성장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15,16세기의 명나라때, 중국과 서방국가는 기본적으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중농억상과 해금을 실시했고, 서방국가는 이미 중상주의와 대와개척정책을 썼다. 이것이 중국이 서방에 낙후된 근본적인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