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m옥션에서 구입한 간찰첩을 살펴보니 이 간찰첩의 이름은 [경재간찰] 續 또는 補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옥션에서는 이 자료가 서화에 이름이 있는 홍수주의 간찰들이라고 내걸어 비싼 가격에 나왔는데,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서 내가 구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간찰첩은 홍수주 간찰이 아니고 홍수주 간찰이 9점, 유봉서 간찰이 2점, 박태순 간찰이 12점이 수록되어 있다. 모두 지와 조대수가 받은 간찰들이다.
두 책으로 된 [卿宰簡札](乾, 坤)은 모두 조대수가 받은 것으로 이 간찰첩에 대한 글이 하나 있다.(김홍구, 2020 [조대수가 받은 간찰 모음 [경재간찰]에 대한 연구], [민족문화]55집, 한국고전번역원) 그런데 모두 조대수가 받은 이 간찰첩은 첫머리에 목록이 있는데, 목록에서 마지막에 있는 유봉서, 홍수주, 박태순은 [경재간찰](건, 곤)에는 빠져있다. 세 사람의 간찰이 흘러나온 것이다. 세 사람의 생몰연대와 본관, 자, 호 등 간단한 인적 사항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趙大壽 1655~1721 豐壤 德而 止窩 cf. 조문명이 쓴 묘표
洪受疇 1642~1704 南陽 九言 壺隱, 葵軒
朴泰淳 1653~1704 자는 汝厚이다. 대사헌을 지낸 朴潢의 손자이며, 廣興倉守 朴世相의 아들로 박세채와는 6촌간이다. 벼슬은 경상도 관찰사에 이르렀고, 《東溪集》 6권이 있다.
柳鳳瑞 1654~1699 文化 季休 cf. 남구만이 쓴 묘갈명
따라서 이 간찰첩의 이름은 [경재간찰] 속이라고 하든가 [止窩受柬帖]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와 조대수가 지우들로부터 받은 간찰을 모은 서첩. 유봉서 2건, 홍수주 9건, 박태순 12건 등 총 23건의 간찰첩.
조대수 (趙大壽, 1655 효종6 ~ 1721 숙종 47)의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덕이(德而), 호는 지와(止窩). 조희보(趙希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형(趙珩)이고, 아버지는 조상정(趙相鼎)이며, 어머니는 홍명일(洪命一)의 딸이다. 영의정 서문중(徐文重)의 사위이고, 당색은 소론이다. 진사과를 거쳐 1687년(숙종 13) 3월 삼일절제(三日節製)에서 수석해 전시(殿試)에 곧바로 나가 이 해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94년(숙종 20)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고, 이어 사서(司書)가 되어서는 평일에도 서연(書筵)을 열도록 제창하였다. 부수찬으로 옮겼다가 현감 김광우(金光宇)의 고신(告身: 관직 임명장)에 대한 서경(署經) 잘못으로 삭직(削職)되기도 했으나 곧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다. 그 뒤 수찬(修撰)으로 옮긴 뒤 대사헌 최석정(崔錫鼎) 등과 함께 장희재(張希載)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96년 교리·보덕(輔德)·부교리(副校理)·겸필선(兼弼善)·보덕(輔德)·부수찬(副修撰)·겸사서(兼司書)·사간(司諫)·부교리(副校理)·응교(應敎)를 거쳐, 이듬 해 수찬(修撰)으로 임명되고, 늙은 부모의 봉양을 위해 자청해 홍천(洪川) 수령으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그 고을이 잔폐(殘廢)하다는 것을 듣고 관직 교체를 청해 홍문관 관원에 제수되자 물의를 빚었다. 이듬해 부수찬(副修撰)·집의·수찬을 거쳐 사간으로 재직 중 남해현령(南海縣令) 이상휘(李祥輝)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탄핵을 받았다. 그 뒤 부수찬(副修撰)·응교(應敎)·수찬을 두루 거쳤다. 1699년(숙종 25) 부교리(副校理) 때 사사로이 역(驛)에 소속된 말을 사용했다는 탄핵을 받았고, 이듬해 시관(試官)으로 일할 당시 과옥(科獄)에 연루되어 정배(定配)되었다. 사후 1814년(순조 14)에 효자로 정려(旌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