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물걸리 절터' 아무리 망한 절이라고 해도 고달사지나 굴원사지처럼 건립했을 당시의 이름이 있었을텐데, 절이름을 추정할 수 없어 동네 이름을 딴 '물걸리 절터'다.
깨어진 석불대좌와 돌탑, 비로자나불, 광배 같은 돌덩이가 없었다면 그 곳에 절이 있었다는 것도 모를 일이었다. 몇 년사이 '강원도에서 보물이 가장 많은 곳'이란 안내판마저 사라져 알고 찾아 간 길이 아니었으면 여우에 홀린듯 빙글빙글 돌다 돌아왔을거다.
강원도 홍천의 동쪽에 물산을 저장하던 곳이라 하여 물걸리 동창마을이다. 몇 해전 남편은 백두대간을 뚫어 춘천에서 양양을 잇는 고속도로 설계를 위해 자주 물걸리 동창마을에 갔었다. 지도 위에 선을 그어 길을 내는 일은 한바탕 땅투기 광풍이 불며 수많은 사람들의 이권이 개입되는 일.
왠만하면 기본설계대로 본설계를 하는게 신상에 이로운데 남편이 내촌 톨게이트 위치를 통째로 바꿔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청와대까지 민원을 넣고 주민설명회를 하는 면사무소 벽을 경운기로 들이받고 삽과 곡괭이를 들고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톨게이트가 바뀌어 사놓은 땅을 지나지 않게 돼 독이 오른 미친 사람들을 설득하는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어려운 일임을 알면서도 노선을 통째로 바꾼 것은 기본설계 때 정한 노선이 겨울 내내 눈이 녹지 않는 북사면이었기 때문. 겨울철 표시도 나지 않게 얼어붙은 블랙아이스 도로에서의 교통사고는 자명한 일. 아무리 찾아도 이건 아니다 싶어 서석과 내촌면에 수십번을 가본 뒤 내린 결론이었다.
하루종일 햇살이 들지 않는 원래의 노선과 바꾼 노선이 지나갈 곳의 겨울 네시 풍경. 아래가 내촌 나들목이 들어설 자리. 고속도로가 완공되면 미사리에서 양양까지 156키로. 한시간 반이면 동해바다에 닿는다.(양양 고속도로 완공 후 공사 제대로 했는지 확인차 다녀왔다)
그러다 어렵게 찾아낸 곳이 겨울에도 하루종일 햇살이 드는 동창마을 남사면을 지나는 노선. 노선을 바꾸는 일의 지난한 과정과 고초를 알기에 수십번 포기할까 고민하다 밀어붙였다고 한다. 예산도 몇 백억쯤 절약되었지만 불을 보듯 뻔한 겨울철 교통사고의 위험을 알고도 간과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인간미 없는 건조한 전형적 공대 출신이라고 생각했던 남편이었는데, 그 때 진심을 다해 말해줬다. <당신 정말 훌.륭.한 일을 했어. 방점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일...> (그땐 공사비 대비 설계비를 받던 때라 공사비 절약하면 상은 못줄 망정 설계비도 깍여 손실이 컸다. 지금은 바뀜)
노선을 바꾸기로 마음 먹었을 때 물걸리 땅값이 평당 얼마나 했냐고 했더니 만원을 넘지 않았을 거란다. 굳이 밝히자면 우리는 단 한번도 남편의 머리속 정보력을 이용해 땅을 사서 이익을 취한 적이 없는 부동산이라고는 살고 있는 집 달랑 한 채 뿐인 보통 사람이다.(내게 반야심경을 가르쳐준 사부님이 누구든 편하게 와서 수행할 명상센터 만들 곳으로 동창마을에 수십번을 왔었는데 너무 외져 포기한걸 나중에 알았다, 아까비)
남편은 어렵게 설계를 했던 구간이라 제대로 공사는 하고 있는지, 다시 봐도 바꿨던 결정이 옳았는지 확인하러 나는 물걸리 절터를 보러 동창 마을에 갔다. 함께 떠나도 우리는 언제나 다른 것을 본다. 남편은 터널의 길이 혹은 다리 같은 구조물을 이야기하고 나는 연꽃이 새겨진 돌덩이들과 나무, 옛사람들 이야기를 한다.
서석면사무소 못 미쳐 몇기의 고인돌이 보인다. 고인돌 사이사이의 비석과 무덤들, 청동기 시대를 산 사람들과 현대를 산 사람들이 몇천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함께 잠들어 있다. 무덤 사이로 겨울해가 진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몇 년만의 길인데도 어렴풋히 길의 흔적들이 기억나는 것은 마주오는 차 한대 없었던 유난스런 한적함 때문인듯 하다. 이름도 특이했던 팔렬중고등학교 이정표만 있을 뿐 어디에도 강원도에서 제일 많은 보물이 있는 물걸리 절터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이지 않는다.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동창마을 골목 사이를 몇 번인가 뒤지며 마을 끝에서 끝까지를 오갔으나 물걸리 절터를 찾을수가 없다. 오래전 곰배령 다녀오다 함께 들렀던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물걸리에 확실히 오래된 폐사지가 있었음을 확인하고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좀처럼 물걸리 절터 위치를 기억해 내지 못하는 나와 달리 남편이 먼저 물걸리에 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수로를 기억해냈다. 역시 노가다 토목쟁이다운 관심과 기억력이다. 서석면 수하리에서 내촌면 물걸리까지 약 2키로쯤 되는 200여년전 축조된 동창보수로라고 했다. 김군보라는 이가 사재를 털어 만든 보로 조선 후기의 수리관개시설의 형태를 잘 보여주는 보기 드문 유적으로 <보주 김군보>의 이름이 수로 위 바위에 새겨져 있다.
낙산사에 가서도 차에서 내리지 않고 다녀오라던 남편이 현장을 살피고, 지형과의 관계를 고려하며 이리 저리 몇 걸음 옮긴다. 사흘이 멀다 하고 이년동안 드나들었던 물걸리인데, 남편은 단 한 번도 이곳에 절터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단다.
표지판도 인적도 없는 물걸리 마을 끝과 골목길을 다시 되짚는다. 물걸物傑, 만물과 호걸이 모이는 곳이 길 물을 이 하나 없는 텅 빈 곳이 돼 버렸다. 학교 앞에서 만난 아저씨의 손가락 끝을 따라 대승사 표지판을 따라 들어갔으나 여전히 물걸리 절터는 보이지 않는다. 물걸리 비로자나불이 이억오천년후에 도래할 세상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셨나보다.
초행길도 아닌데 삼십분 넘게 코딱지만한 동네를 헤맸다. 표지판 하나 제대로 세우지 않은 문화재청의 무성의에 욕을 하다 마주오는 차를 세웠더니 바로 물걸리 절터 광배와 석불들을 관리하는 아저씨. 위치를 알려주고는 금방 보호각 문을 닫았는데 잠그지 않았으니 열고 보라고 알려줬다.
민가 사이에 덜렁 남은 탑 한기와 석조물들. 쪼개진 좌대의 사자 조각이 선명하다. 마모가 심해 도무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비로자나불과 석가여래, 주인을 잃은 광배 두 점이 보호각 안에 안치되어 있다. 안과 밖, 부처와 중생, 차안과 피안이 하나임을 증명하는 비로자나불의 손가락 위치가 뒤바뀌었으나 그 연유는 모르겠다. 불상을 잃은 광배만 남은 조각이 섬세하다.
절터 주변에서 발견된 금동불을 포함해 몇 건의 출토 유물로 볼 때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입증할 만한 문헌상의 기록도 체계적인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현재 물걸리사지(物傑里寺址) 혹은 전 홍양사지(傳 洪陽寺址) 등으로 불린다.
지치지도 않고 짖어대는 민가의 하얀개의 반응이 오랜만에 사람을 만난 반가움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겁없이 개를 향해 다가서니 그렇게 으르렁대던 개가 꼬랑지를 바짝 내리고 슬슬 뒷걸음친다. 어렵게 찾은 물걸리 절터에서도 역시 내리지 않은 남편이 유리창을 열고 개 가까이 가지 말라고 손을 훠이훠이 젓는다.
대승사 이정표 위에 다섯개의 보물 사진이 있었는데, 너무 작아서 놓친 거였다. 전에는 강원도에서 보물이 제일 많은 물걸리 절터,란 이정표가 있었다. 대승사까지 가서 사람을 불렀으나 인기척은 있는데 문을 안 열어줘 포기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