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양근 한·영·중·일 ESSAY_곰의 집
꾸오화
나는 지금도 티 없이 맑은 어린 소녀를 보면 꾸오화(國花)를 생각한다. 내가 스물다섯의 나이로 대만(臺灣)에 유학을 갔을 때, 꾸오화는 중학교 삼학년이었다. 그 때 나는 대학원에 입학을 했으니까, 내가 보기에는 아직 전혀 물정모르는 어린 학생에 불과했었다.
꾀죄죄하고 무더운 기숙사에 틀어박혀 일단의 공부가 끝나면 무료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그 기숙사의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청소부 아줌마의 방이었다. 그 아줌마는 기숙사 근방에 따로 초라하긴 하지만 자기 집이 있었다. 그러나 기숙사에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처음에는 그 방에 텔레비전이 있었던 것이 내가 찾게 된 동기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한국에는 텔레비전이 그리 보급되어 있지 않아서 큰 식당이나 가야 겨우 흑백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 때 대만은 벌써 각 가정마다 텔레비전이 보급되어 있었고 컬러텔레비전까지 나와 있었다. 내가 텔레비전 방을 찾아간 것은 무료한 것이 첫째 이유이지만, 텔레비전 구경도 하면서 언어를 배우기 위한 것도 있었다. 말을 배우기 위해서는 텔레비전이 아주 좋은 선생 노릇을 해주고 있었다. 또한 아줌마의 딸인 꾸오화나 그의 식구들과 몇 마디라도 말을 건넬 수 있다는 기대심리도 컸다.
대만에 유학할 때면 잘못 하다가는 룸메이트나 주위 사람들이 모두 ‘까리꽁’ [대만인을 우리가 그렇게 불렀다. 그들은 ‘와 까리 꽁’(내가 너에게 말하겠는데…)이란 말을 무척 많이 쓴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대만어이다]들이어서, 우리에게 필요치 않은 대만어만 하루 종일 듣게 되고, 막상 우리가 필요한 표준 중국어는 말하거나 들을 기회가 전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모처럼 꾸오화 식구들은 대륙사람이라 아주 정확한 중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특히 꾸오화와 꾸오화의 남동생의 유창하고 재미있고 빠른 만다린(Mandarin)은 나를 매료시키기에 족했다.
그 방에는 항상 꾸오화의 식구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텔레비전도 보고 잡담도 하고 있었다. 꾸오화의 아버지는 평생을 사병생활(私兵生活)을 한 퇴역군인으로 국가의 직업 알선책에 의하여 이곳 대만대학에 일자리를 얻은 것이고, 기숙사에서 잡역을 맡고 있었는데 말이 많은 비교적 소인(小人) 타입의 남자였다. 꾸오화의 어머니는 청소도 하고 구내식당 카페테리아에 반찬도 몇 가지 제공해서 삯을 받기도 하는 마음씨 곱고 복스럽게 생긴 부인이었다. 꾸오화의 남동생은 나더러 수수(叔叔, 아저씨)라고 불렀고, 꾸오화는 나더러 꺼거(哥哥, 오빠)라 부르며 무척 따랐다. 우리는 같이 산보도 하고 극장에도 갔다. 그러나 대부분 같이 시간을 보낸 곳은 역시 텔레비전 방이었다.
내가 재학하는 사이에 꾸오화는 고등학교 삼학년이 되어 있었다. 꾸오화는 더 명랑하고 활달한 소녀로 되어 갔다. 그 낭랑한 목소리는 잡질이 한 번도 침입한 적이 없는 항상 맑고 밝은 순수한 목소리였다. 꾸오화는 나만 보면 멀리서도 손을 흔들며 뛰어와 좋아서 발을 동동 굴었다. 나도 꾸오화만 보면 모든 구름이 걷히고 정신이 맑아지며 괜스레 신바람이 났다.
내가 졸업이 다 돼 갈 무렵의 어느 날 저녁, 나는 그 날도 텔레비전 방을 찾았다. 그 날은 그 방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꾸오화 어머니만 혼자 텔레비전을 보면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던 눈치였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마침 잘 만났다는 듯이 이내 텔레비전을 끄고 나에게 할 말이 있는 듯한 제스처를 하며 다가앉았다.
“량껀(良根)아! 졸업하면 정말 너희 나라로 돌아가니?”
“물론 돌아가지요.”
너무나 당연한 질문을 하기에 아무런 생각 없이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너, 우리 꾸오화랑 같이 여기서 살면 안 되니?”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그런 말을 알아듣기 좋게 말하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것임에 틀림없는 그런 표정으로,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으므로 털어놓는 다는 그런 단호한 태도로 말은 계속됐다.
“내가 저축한 돈이 좀 있는데…. 방 한 칸은 얻어줄 수 있다. 어떠니?”
나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태진전에 어안이 벙벙하였다. 마치 긴 세월이 그 몇 분 사이에 다 지나가고, 대만 토착민으로 변해 있는 지나간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착각도 느꼈다. 꾸오화 어머니는 금니를 환히 내보이며 다정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굳은 결심을 한 눈치였고, 내 일언지하(一言之下)만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웃기만 하였다. 끝내 내가 결정적인 말을 하지 않자 하는 수 없었는지 방금 한 말은 일단 유보라는 식으로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꾸오화 어머니는 나를 만나면 이야기 끝에 꼭 일단의 여유를 주곤 하였다. 그 때의 질문에 이제라도 대답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역력히 눈에 비쳤다.
꾸오화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버스회사에 취직했다. 아주 성숙하고 제법 의젓한 처녀로 변해가고 있었다.
내가 학교를 완전히 졸업하고 혼자 귀국할 짐을 싸고 있는 어느 날 낮,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하였다. 문을 열어본즉, 내가 떠나는 날을 알고 꾸오화가 때마침 찾아와준 것이었다. 꾸오화는 막 피기 시작한 향기 짙은 한 떨기 꽃이 되어 활짝 웃고 문 앞에 서 있었다. 꾸오화는 부츠를 신고 뚜벅뚜벅 내 방으로 걸어 들어왔고(중국에서는 방에서도 신을 신는다) 그 때도 티 없이 맑은 이야기들만 해주었다.
“쥐(具)꺼거! 한국에 가면 뭐가 되지? 선생? 사장? 정치가?” “쥐꺼거! 한국은 추운 나라지? 이제부터 추워서 어떡하지?” “쥐꺼거!…”
마치 이것이 영원한 이별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양, 언제라도 또 만날 수 있는 사람인 양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얘기하였고, 내 짐을 싸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고 끈을 잡아 주기도 하였다. 나는 말대꾸를 하면서 여러 번 꾸오화의 얼굴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곤 하였다. 이 세상에서 천사를 빼놓고는 가장 순진한 아히!
꾸오화는 근무 도중에 말하고 나왔기 때문에 또 회사로 가봐야 한다며 문을 나섰다.
나는 그 길로 짐을 챙겨 비행장으로 향했다. 꾸오화는 지금쯤 그 때가 나와 영원한 이별의 날이었음을 알았을까. (1986, 4.)
첫댓글 "마치 이것이 영원한 이별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양, 언제라도 또 만날 수 있는 사람인 양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얘기하였고, 내 짐을 싸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고 끈을 잡아 주기도 하였다. 나는 말대꾸를 하면서 여러 번 꾸오화의 얼굴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곤 하였다. 이 세상에서 천사를- 빼놓고는 가장 순진한 아히"
- 청맥 선생님은 걸어다니시는 천사
(천사 눈에는 천사만 보이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