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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영화 “1987”. 기자: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09호에서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경찰은 박종철의 사인을 단순 쇼크사로 공식발표한다. 며칠뒤 1987년 1월 26일, 명동성당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추모미사가 올려졌다. 故김수환/추기경: 너의 아들, 너의 제자, 너의 젊은이, 너의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탁하고 책상을 치자, 억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그것은 고문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이다 고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기자: 미사가 끝난 뒤 천주교 사제들은 현수막을 들고 일제히 거리로 나왔다. 그곳은 독재에서 민주로 이 땅의 운명을 바꾼 6월 항쟁의 서막이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며칠 후면 크리스마스죠, 그래서 저희가 오늘 특별한 이야기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저희 앞에 특별한 모형을 가져왔습니다. (명당성당과 건물들 모형). 뭔지 아시겠어요, 여러분?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저기 우리 동네인데~
최원정: 아니, 다니엘!, 우리 동네라구요?
다니엘: 우리 동네인데요~
최원정: 독일 고향 마을이 이렇게 생겼어요?
다니엘: 네, 똑같이 이렇게 생겼어요.
최원정: 명동성당 하면 천주교의 상징적인 건물이잖아요. 명동성당이 지어진 게 1898년 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122년이 되었어요. 굉장히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오늘 우리가 이야기 나눌 곳이 바로 명동성당과 또 이곳과 관련된 파란만장한 우리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이시원/배우: 오늘은 장소가 주인공인 거네요. 그러면 오늘은 역사저널 그날이 아니라 역사저널 그곳~
박상영/작가: 명동성당 뿐만 아니라 사실 각 나라 각 도시를 대표하는 성당들이 있잖아요. 이를테면 유럽만 생각해도 이탈리아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 그리고 다니엘의 고향인 독일 쾰른의 대성당들이 있는데, 사실 명동성당이라고 그러면 단순히 관광지라기 보다는 조금 더 정치적인 조금 더 민주화 운동의 성지 같은 분위기로 저는 역시 느껴지거든요.
정병준/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명동 성당이 사실은 종교적인 중심지일 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일종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특히 1970년부터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고 억압받는 자들의 피난처였고 가난한 자들의 보호처였고 그리고 용기있는 자들이 기댈 언덕이었습니다. 그래서 희망의 등불이 되었고요. 사실은 우리가 잘 기억하는 1987년에 박종철씨가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숨졌을 때 6.10항쟁이 벌어졌고 그곳에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자 요람의 중심에 명동성당과 추기경과 주교와 사제들이 존재했습니다.
최원정: 그래서 오늘 특별한 분을 모셨습니다. 이문동 성당의 주임신부님이시자 서울대교구 평화위원회 위원이신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님!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박동호/신부: 안녕하십니까? 박동호 신부입니다.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시원: 이 스튜디오 안에서 마음이 경건해지고 저~ 고해성사 한지 6개월이 넘은거 같은데~
최원정: 고해성사하는 칸 안에 들어온 거 같애요. 오늘 성탄기획으로 명동성당에 관한 이야기 나눌텐데~ 신부님! 명동성당이 이렇게 오래된지 미쳐 몰랐어요.
박동호: 명동성당은 서울대교구의 주교좌 명동성당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최원정: 주교좌~ 무슨 뜻이에요?
박동호: 주교가 한 지역을 관활하면서 자기 자리를 놓은 것을 주교좌, 그리고 그 성당을 주교좌 성당이라고 합니다 (주교좌성당(Cathedral)-주교의 공식적인 자리인 주교좌가 있는 교구, 전체의 중심이 되는 성당).
이시원: 좀 창피한 말이긴 한데 저의 어머니가 저한테 우편 오는 것 보고 실수를 한번 하셨어요. 서울대교구에서 왔는데 아니 내 딸이 서울대인 걸 어떻게 알았지~?
최원정: 서울대 관련으로 다니는 걸로 알고~
이시원: 그걸 알고 이걸 보냈나 싶어가지고~ 깜짝 놀라셨다구~
최원정: 조금 전 시작 영상에서 1987년 바로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故박종철 열사의 추모미사를 보셨는데 이 미사가 김수환 추기경께서 직접 집전하시고 강론도 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신부님!~
박동호: 네, 그렇습니다. 그날 강론 자체 내용이 상당히 파격적이라고 하겠고 충격적일 수 있는데요. 창세기에 보면 형 카인이 아우 아벨을 돌로 쳐죽였을 때 하나님이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물으니까 형 카인이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나는 모릅니다 라고 한 성경의 대목을 정권에다 대고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건과 정권을 카인에 비유하고 박종철을 아벨에 비유하고 우리 국민이 묻는 것으로 그렇게 강론을 구성해서 그날 밝히셨죠.
다니엘: 이건 굉장히 용감한 일이었던 것 같애요. 왜냐면 죽음을 각오하고 현 정권을 비판하는 강론을 하셨으니까 위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정병준: 김수환 추기경이 사실은 굉장히 강도가 높았습니다. 반정부선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끓어오르는 민심 앞에, 시대적 정신 앞에 결국은 일종의 횃불을 들어올리게 된 것이죠. 당연히 위험한 일이었구요. 아마 용단을 내리셨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굉장히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 전후해서 엘살바도르의 유명한 오스카 로메로 라는 대주교가 억압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다가 암살당하는 선례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추기경 이라고 하지만 정말 거칠 것 없는 철권통치였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이시원: 그렇다면 아까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미사 때 박종철군의 이름을 직접 거론을 하면서 경찰의 고문치사로 사망을 했다 라는 거잖아요. 정부 입장에서는 이게 굉장히 압박이 있었을 거 같애요.
박동호: 당연히 그랬겠지요. 그 당시에 추기경이 공개적으로 그런 발언을 한다는 것은 정권과 관련해서는 대립을 한다는 것으로 비칠 수 밖에 없으니까~
최원정: 1987년 천주교와 정부의 대립~ 사실 갈등의 역사는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광용/아나운서: 1898년 그러니까 고종 35년에 세워진 명동성당, 명동성당이 위치한 중구 명동길 언덕은 당시 행정구역으로 명례방(지금 명동)에 속한 곳이었습니다. 때는 정조 재위 8년째가 되는 1784년 정약용과 이승훈 이벽은 명례방에 모였습니다. 이 명례방 언덕에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인 김범우의 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것 아십니까?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가 아니라 평신도에 의해서 천주교를 받아들인 나라라는 사실~ 초기에 천주교 신자들은 김범우의 집에 모여서 신앙집회를 시작했고 이를 명례방 공동체(明禮坊 共同體)라 불렀습니다. 이후 신유박해(1801년) 병인박해 (1866년) 등에 의해 고난을 겪고나서 1886년 한불수교 통상조약이 맺어집니다. 그러니까 선교의 자유시대가 펼쳐지게 된 거죠. 당시 조선 교구장을 맡고 있던 프랑스의 블랑 주교는 명례방 공동체가 있던 언덕을 성당대지로 매입합니다. 성당을 갖는 과정~ 과연 순탄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명동성당이 경복궁을 빤히 내려다 보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궁궐뿐 아니라 성당 근처에 이 영희전이 있다는 것도 문제였죠. 영희전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영희전은 조선 후기 여섯 임금의 어진(왕의 초상화)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전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역대 임금들의 초상화를 모신 곳을 명동성당이 위압적으로 내려다 보고 있으니까 신경이 당연히 쓰일 수 밖에 없겠죠. 땅값을 돌려주겠다~ 다른 땅으로 바꾸어 주겠다 달래보기도 하고 토지관련 서류를 압류하는 등 협박도 해봤지만 블량 주교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갈등을 겪다가 결국 토지매입 12년후에 명동성당이 완공됩니다. 참고로 영희전은 명당성당 완공 이전에 다른 곳으로 새로 지어서 여섯 왕의 어진을 옮겼다고 합니다--------------
최원정: 조선이 옮긴 거에요, 영희전이! 명동성당이 세워질 때부터 조선왕실과의 갈등이 문제가 많았군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12년이나 걸렸다구요? 너무 긴게 아닌가요?
이광용: 이게 토지문제 말고도 우여곡절이 정말 많았습니다. 천주교에는 성당건축에 필요한 자재는 현지에서 조달한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에 양옥 건축 기술자가 있었을까요?
이시원: 없었을 거 같애요.
이광용: 없었죠! 그래서 벽돌공 미장이 목수 등을 중국에서 데려다가 일을 시켰는데 공사 중에 청일전쟁이 발발한 거예요. 그래서 중국인들이 다 귀국하면서 공사가 중단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시원: 그러면 첨탑의 종도 한국에서 만든 거예요?
이광용: 아~ 좋은 질문이예요. 종은 프랑스에서 가져 왔지요. 프랑스에 주문해서 완공 몇 달 전에 조선으로 들여왔구요.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도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서 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명동성당의 건축양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는 사람? 이시원 학생~
이시원: 고딕 양식!
이광용: 역시 좋은 학교 나왔어요.
정병준: 서울대 교구출신~
이광용: 고등학교 미술시간에 졸지 않고 우리 이시원 학생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 노르트담 대성당으로 대표되는 고딕 양식은 높은 천장과 뾰죽한 첨탑이 특징이죠. 신의 존재로 대변되는 빛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 그런 양식을 택했다고 합니다. 이 첨탑의 높이가 47미터나 되는 명동성당, 뾰죽집이라고 부르면서 연일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지요. 매천 황현 선생의 매천야록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길을 가던 노인들은 지팡이를 짚고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떠날 줄을 몰랐다. 당시 명동성당이 조선 후기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존재였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정병준: 그런데 사실은 이때 명동성당이 완공되었을 때 주교가 뮈텔 신부라고 하는 굉장히 유명한 분이었습니다.(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제8대 조선 교구장이었던 프랑스 신부). 한국에 굉장히 오래 계셨구요. 일제 강점기 중반 정도까지 계셨고 이 시기가 천주교로 보면 굉장히 일종의 흑역사 시기였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1910년에 경술국치가 되었는데 프랑스 신부들이 총독부가 제안해 주는 특권들을 그대로 다 수용하게 됩니다. 세금을 감면해 주겠다, 종교에 관여하지 않을 테니 종교도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 그래서 천주교 명의 땅이나 주택이나 소유권을 인정해 주고 세금도 면제해 준다 이런 일제의 제의를 사실은 교회가 모를리 없었지만 정교분리라는 원칙 속에서 현실의 통치권을 인정한다 선교의 자유 특권을 보장받는 수준에서 총독부에는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최원정: 약간 서운한게 신자들은 나라를 잃고 있는데 그거에 대한 공감을 해주었으면 어땠을까. (박동호 신부를 향해) 선교사분들에게 많이 섭섭한데요.
박동호: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 와 계신 선교사들이 주로 프랑스 파리외방 소속의 선교사들이셨는데~ 그분들의 고국인 프랑스 자체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배를 하고 있으니까 피식민지배의 정서가 그만큼 애매했겠죠.
정병준: 그런데 이 시기에 식민지배를 묵인하여 그러니까 정교분리의 입장에 섰을 뿐만 아니라 반침략 독립운동도 사실은 억압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우리가 제일 잘한 몇가지 사례가 있는데요. 1909년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했을 때 안중근 의사가 사실은 안중근 토마스였습니다. 그 집안이 독실한 가톨릭이었고 나중에 처형 되기 전에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고 얘기했지만 뮈텔 주교가 고해성사를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렇지만 안중근 의사와 관련있는 니콜라 빌렘 신부가 여순까지 가서 고해성사를 집전했구요. 그 덕분에 빌렘 신부는 2개월 동안 고해성사를 못한다 는 징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3.1운동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기독교 개신교와 천도교 불교까지 3.1운동에 참가했지만 천주교는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전반적으로 1900년대 부터 1910년대 까지 독립운동의 불꽃이 타 오를 때 사실은 천주교가 그것을 방관하거나 억압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시원: 이건 방관의 정도가 넘는 것 같거든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고해성사를 거부하고 결국에는 일제강점을 인정하는 식민지 지배정책을 받아들인 거고 거기에 순응하고 동조한 거예요.
박상영: 그때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두배의 어려움 2중고가 있었어요. 일제 자체의 압력에다가 더불어서 식민통치에는 하나도 관심없는 프랑스 천주교의 선교우선주의로 인해서 희생되고 외면당한 그런 측면도 분명히 있었어요.
정병준: 당시 천주교 교세나 교인수가 급격히 감소되고 사실은 민심이 악화됐습니다. 당시에 명동성당 신자들보고도 당신들은 조선백성이 아니다 프랑스 백성이라고 하는 그런 험담이 있었습니다. 사실 뮈텔 주교가 한국 천주교 초기 역사에 굉장히 큰 공헌이 있는 분인데 이런 논란 때문에 사실은 굉장히 안타까운 부분들이 많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시원: 그런 잘못이 있으면은 좀 그래도 과오를 뉘우치는 그런 행동은 없었나요?
최원정: 김수환 추기경께서 1993년에 안중근 사건에 대해서는 천주교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고 공식사과도 하셨으니까 요문제는 우리가~ 하~하~ 진정하세요~
이시원: 성당을 다니지 않는 분들도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이름은 다들 한번쯤 들어 보셨을 거예요.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 명동 할아버지, 이런 별명도 있었다고~ 푸근한 이미지 때문에~
정병준: 김수환 추기경이 추기경이 되었을 때 신자들이 추기경격에 맞는 차를 타셔야된다구 캐딜락을 선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걸 며칠 타셨는데 사실은 며칠 지나서 본인이 얼굴에 불을 끼얹는 것처럼 깨달았다고 합니다. 내가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한 사람들을 대변해야 하는게 아니라 귀족처럼 변했구나 며칠 타고 안타셨다고 합니다.
박상영: 뭘 타셨데요?
정병준: 유명한 광고 있잖아요. 티코를 타셨습니다.
최원정: 캐딜락에서 티코는 정말 너무~~
정병준: 그때 사실은 대우가 자사차 광고를 하는데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서 이건 우리 차 광고가 아니라 이 차를 국민차 라고 선전할려고 하니까 추기경님께서 광고모델이 되어 주십시오 라고 해서 김수환 추기경이 즉석에서 오케이 해서 캐리커처가 티코 타는 추기경으로 시대를 풍미하는 적이 있었죠 (추기경님 이야기-회사원 조순호씨는 어느날 명동성당에서 아내와 함께 미사를 보고 나오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추기경님께서 수녀님과 함께 티코를 타고 나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와~, 추기경님께서도 티코를 타시는구나!’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조순호씨에게 추기경님께서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멋지다! 티코 타는 추기경님! 우리 모두가 저분의 본을 받는다면~ 조순호씨는 우리 사회의 희망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최원정: 명동의 할아버지란 그 별명이 너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김수환 추기경께서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신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있습니다. 어떤 일인지 한번 보시죠.
-----------------이광용/KBS 아나운서: 지금으보부터 49년전인 1971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3선개헌을 강행한 박정희 대통령이 세번째 대통령이 된 직후였죠. 당시 명동성당의 성탄자정 미사가 티브이로 생중계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사집전을 준비하던 김수환 추기경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12월초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상황에서 이 생방송이 정말 좋은 기회였거든요. 당시에 시국문제에 대해 기자회견을 아무리 해도 신문에 한 줄 보도되지 않은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나 아니면 이런 얘기를 할 사람이 없다 라고 결론을 내리고 미사 1시간 전에 강론에 결연한 이 문장을 적어 넣습니다. 이건 제가 감히 말씀 드리기 뭐해서 박동호 신부님께 강론 스타일로 읽어 주시겠습니다. 감히 부탁 드리겠습니다~
박동호: (추기경 처럼 안경을 고쳐쓰고) 정부와 여당에게 묻겠습니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국가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만일 현재의 사회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독재 아니면 폭력혁명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막힌 운명에 직면할지도 모릅니다.
일동: 와!~~
이광용: 이 순간 현장의 모든 스태프들은 그야말로 얼어붙었습니다.
이시원: 이게 가능해요? 생방송에 이런 말이 나갔다구요? 겨울 공화국 이잖아요. 얼어서 바들바들 떤게 아니라 무서워서 바들바들 떨었을 것 같애요.
박상영: 그리고 이게 보통 중계가 아니고 성탄의 생중계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겠어요.
이광용: 하필이면 그날 밤에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잠 안자고 티브이 생방송을 보고 있었던 겁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이 발언이 나가자마자 버럭~ 화를 내면서 방송중지 명령을 내립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중계담당 책임자가 자리를 비웠던 거예요. 김수환 추기경의 발언이 모두 끝난 뒤에야 방송은 급박하게 중지됐습니다. 다음날 남산 KBS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담당 PD와 아나운서는 물론 기술감독까지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방송에 참여 했던 한 PD는 함께 조사를 받은 아나운서가 극심한 가혹행위까지 당한 뒤 그 충격으로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고 합니다. 그 뒤로 무려 17년동안 명동성당의 미사는 티브이로 생중계되지 못했습니다.
다니엘: 와~ 전국으로 퍼지는 생방송에서 이런 소신을 발언하셨다는 게 참 대단한 거 같애요.
정병준: 당시 한국정부가 로마 교황청에도 항의를 했다고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 이 사람은 안되겠다. 어떻게 좀 해달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교황청이 사실은 김수환 추기경한테 정부가 이러이러한 압력을 넣고 있다 라고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바꿔 말하면 교황청에서는 추기경을 신임하고 신뢰하였다는 얘기죠.
최원정: 불의에 저항해도 된다 라는 굉장히 의미있는 행보였던 것 같애요. 그런데 1974년에 한국 천주교의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동영상) 기자: 1974년 7월 6일,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비밀리에 납치된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김지하에게 돈을 건넨 혐의였다. 이후 석방된 지학순 주교는 명동성당에서 양심선언을 발표한다. 소위 유신헌법 이라는 것은 72년 10월 17일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양심선언을 통해 박정희 정권과 유신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지학순 주교, 이로 인해 그는 또 다시 구속되어 15년형을 선고받는다.
정병준: 그 당시 지학순 주교가 로마에 회의가 있어서 가있던 상태입니다. 김포공항 도착에 맞추어 사제들이 출영을 나갔는데 지학순 주교는 분명히 도착했는데 나오질 않았습니다. 중앙정보부가 납치하듯이 끌고 갔고요. 고문은 하지 않았지만 온갖 쌍욕을 하고 사실은 몰인격적인 모욕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수한 추기경이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하게 됩니다. 면담을 하고서 그날 풀려나게 됐죠. 그래서 금방 보신 것처럼 유신헌법이 무효라고 하는 공개적인 선언을 하게 된 것이고요. 그래서 다시 연행됐구요. 그리고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주교가 구속돼서 실형을 선고받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 주교를 구속한다는 거 자체가 이게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요. 제가 볼 때는 그 사건으로 유신정권 하고 천주교의 관계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런 강을 건너온 상황이었고~
박동호: 주교님의 양심선언의 내용을 몇가지만 정리해 보면, ① 부정부패가 많으므로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② 민주국가는 삼권이 나뉘어야 함에도 1인의 손에 장악되어 반대한다 ③ 1인 장기집권을 반대한다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항상 우리 교회가 말하는, ④ 인간의 기본권이 침해당하니까 반대한다. 이게 주장이고 혹시 다른 기회 다른 말이 나온 것은 전부 강압에 의한 거다 라고 아예 못을 박았습니다.
이시원: 혹시나 내가 유신을 옹호하는 말을 할지라도 이것은 고문에 의해서 한 것이다 라고 미리 선언을 한 거잖아요.
박상영: 지략가이시네요.
최원정: 기발한 고문 방지시스템~
이시원: 지학순 주교께서 이렇게 본인이 직접 양심선언을 하셨으니까 굉장히 파급효과가 컸을 것 같애요.
정병준: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니까 30대의 젊은 신부들이 우르르 몰려 나오게 된 겁니다. 교구 신부들이 모여서 지학순 주교 뿐만이 아니라 구속된 민주인사들 대학생들 그분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민주운동을 전개하게 되었구요. 이분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가 바로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이라고 하는데 함세웅 신부가 주도 했구요. 전국에 한 600명 내지 700명 사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300명 정도가 참가했으니까 거의 대부분 신부들이 참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서야될 곳이 어디냐 미래에 천국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현실 한 가운데 우리가 현실에 자리하고 서야 된다. 그것이 우리가 당면한 지금 사제들의 임무다 라고 선언하게 되는 거죠.
박동호: 종교적으로 보면 그리스도교가 사랑 관용을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사람이 고통에 내몰리고 죽음에 내몰리고 그것이 정치적으로 독재고 전체주의이거든요. 그것까지 관용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거죠. 오히려 관용이라면 그 독재와 전체주의가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그 권력을 빼앗는 것이 그 당사자들에게도 관용을 베푸는 것이고 민중에게도 관용을 베푸는 철학이 젊은 사제들에게는 있었던 것이고 지 주교님의 구속 사건과 더불어서 그게 하나로 모이게 된 계기가 된 거죠.
최원정: 그때 거리로 십자가를 들고 나오신 거잖아요. 구호도 외치고 시위행진도 벌이시고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을 이끈 함세웅 신부님의 실제 인터뷰가 있습니다. 영상을 한번 보실까요.
-------------------(동영상) 함세웅/신부: 바로 1974년 9월 26일 명동에서 미사 보고나서 첫번째 가두시위, 평화가두시위를 했었을 때 예요. 저희들도 시위경험이 없기 때문에 성당 밖에서 명동 골목 쪽으로 나갈때는 당황했거든요. 성가부르며 기도하며 나갔는데 현수막 들고 유신헌법 철폐하라 중앙정보부 해체하라 구속된 민주인사 석방하라 언론 자유 보장하라 또 서민 대중경제 보장하라 뭐 이런 여러가지 구호를 외치면서 나갔잖아요? 그때가 미사 끝나고 저녁 8시 가까이 되어서 나갔어요. 깜깜한데 지나가던 시민들이 다 그 현수막을 보고 저희를 보더니 다 박수를 치시는 거예요, 모든 시민들이. 그래서 그때서 아~ 이 침묵으로 동조하시는 분들 이게 우리들의 힘이구나~
최원정: 얼마나 감동하셨겠어요? 시민들이 막 환호하고~ 박수쳐주고 그랬을 때~ 그런데 잠깐 이 싯점에서 원래 정교분리가 오래된 전통이고 원칙으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교리를 바꾸게 된 계기~ 왜 그렇게 된 건가요?
박동호: 새로운 바람이 교회 내에서 불어오고 그것을 공식화한 절차가 1962년~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가 있어야 될 자리가 어디냐를 놓고 볼 때 정치가 됐든 종교가 됐든 경제가 됐든 문화가 됐든 국제질서가 됐든 이 모든 일들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 신앙의 목표는 사람을 구하고 사회를 쇄신하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영역에서 정치와 종교는 협력해서 사람을 구하고 사회를 쇄신하는데 기여해야 된다 라는 것을 밝히게 된 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거든요.
정병준: 김수환 추기경, 그 다음에 지학순 주교, 함세웅 신부 모두 다 이탈리아 로마나 독일에서 공부하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해외 공부할 때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고 생생하게 그런 소식들을 잘 접하고 서구에서 벌어진 일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분들이 봐서 그런 흐름을 주도하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일이었다고 볼 수 있구요. 또 한편으로는 남미에서는 해방신학이라는게 당시에 크게 큰 조류를 형성하게 됩니다. 원래 가톨릭이 남미에 들어가서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봉건제나 군주제를 앞세워서 억압하고 탄압하고 수탈하는데 앞장섰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정부패로 경제가 파탄났고 교회는 사실은 이런 불의한 상황을 못본채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2차 공의회 이후에 남미에서 해방신학이 등장하게 됩니다. 진보적인 사회참여를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거죠. 한국 젊은 사제들한테도 사실 영향을 끼치게 돼죠.
이시원: 변화하는 시대, 특히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하나의 큰 계기가 되었나 보네요.
최원정: 아니 인제 71년에 김수환 추기경의 정부비판 강론이 있었고 74년에는 지학순 주교 양심선언과 정의구현사제단이 강하게 더 열심히 뛰게 되는 계기가 되는 거죠.
정병준: 76년도에 한국민주화 운동의 전기를 긋는 획기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3.1절을 맞아서 사실은 천주교 사제들, 그리고 개신교의 문익환, 문동환 목사 그리고 윤보선, 김대중 같은 정치인들을 포함해서 약 700명의 천주교 신자와 개신교 인사들이 명동성당에 모여서 구속되었던 민주인사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기로 합니다.
최원정: 이때 미사 강론을 하신 분이 어떤 분이세요?
박동호: 김승훈 신부님이신데요. 함세웅 신부님이 김승훈 신부님한테 부탁을 해서 강론을 좀 하셔야 되겠다 그랬더니 김승훈 신부님이 아무렇지 않게 하지~ 하면서도 쎄게 말하신 거예요.
---------------(동영상) 함세웅/신부: 저희들 기대보다 더 강하게 분명하게 하신 거예요. 저희들 놀랬을 뿐아니라 너무 기쁜거예요. 그 당시에는 언론 자유없다는 등 불의한 정권 제거하고 바뀌어야 한다는 등 또 구속인사들 학생들 석방해야 된다 특별히 언론자유가 없다는 걸 강력하게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너무 기뻤어요----------------
다니엘: 너무 기쁘셨다는게 가슴에 와 닿는데 신부들은 안그러실 것 같은데 막상 뭔가 그럴 필요가 있을 때는 약간 강단이 있으신 것 같애요.
박상영: 사이다 같은 그런 기분이었을 것 같애요.
정병준: 김승훈 신부가 강론을 했고 문동환 목사가 설교를 했고, 마지막 순서로 3.1민주구국선언을 낭독했는데 이 선언 내용이 뭐냐면 긴급조치 철폐하고 구속인사 석방하라 언론 자유 보장하라 이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은 아무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서 경찰이 검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김승훈 신부를 비롯한 관련자들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연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정부가 정부전복 사건이라고 발표했는데 여기에 서명한 신부가 7명인데 3명은 구속기소, 4명은 불구속 기소되었습니다. 이게 유명한 3.1민주구국선언, 3.1명동사건이 되었습니다.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한 최초의 공개적인 집회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최원정: 국가변란을 획책했다~ 그러면서 다 잡혀갔는데 재판과정이 아주 재미있었다고 들었어요.
정병준: 사실은 비공개 재판이었구요. 당시 유신체제 하에서 군법회의 재판으로 열렸는데 재판하는 사람들이 신부 목사 정치인들 잡아넣고 보니까 다 거물급이었어요. 前대통령 윤보선, 前대통령 후보 김대중, 재야 명망가 함석헌, 그 다음에 신부들입니다. 이분들이 판사 검사들을 훈계하고 가르쳤다는 것이죠(재판하려다 훈계 받은 판사, 검사들). 김대중의 경우에는 유신헌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하면 2~3시간 정치사를 강의했다고 합니다. 목사님들은 검사들을 꾸짖고 말 그대로 민주주의의 교육장이었다. 물론 많은 희생이 따랐지만 3.1민주구국선언 명동사건이 사실은 천주교와 개신교 그리고 재야 인사들 이런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그 중에서 명동성당으로 대표되는 천주교가 일종의 상징적 구심점이 되는 그런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영상) 기자: 전국은 박종철군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함성으로 뒤덮힌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무력진압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곧 이어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다. 전두환/대통령: 이제 본인은 임기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최원정: 저희가 처음 프로그램을 시작했을 때 얘기했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정병준: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보도가 되었죠. 그래서 정부가 주범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당시 고문했던 소속 경찰관 2명을 구속하였습니다. 영등포 교도소에 수감되어서 사실은 미궁할려고 했습니다. 그냥 눈치를 보고 뭉갤려고 했습니다. 당시 영등포 교도소에 해직 기자 출신이던 재야 기자 이부영씨가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여기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구속된 2명은 피라미다. 진범이 아니다 진범은 따로 있다. 뒤에 거악이 있다 라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그래서 이부영 기자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완전히 조작되었다고 하는 내용을 편지를 써서 이를 몰래 교도소 밖으로 내보내게 됩니다. 한재동 이라고 하는 교도관이 편지를 밖으로 가지고 가서 해직 교도관이던 정병용씨에게 전달했습니다. 정병용씨가 이 편지를 재야 운동가이든 김정남씨에게 전달을 했구요. 김정남씨가 마지막으로 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 신부에게 건네게 됩니다.
박동호: 김정남씨가 함신부님을 찾아와서 사제들이 해주어야 되겠다. 이 내용이 공개되면 정권의 도덕성 내지는 불법성에 타격이 올 것이니까 이를 밝혀야 되겠다 했던 거죠. 어렵게 함세웅 신부님도 김승훈 신부님을 찾아가고 김승훈 신부님께서도 흔쾌히 받아주셔서 그럼 이제 이야기를 하자 날짜를 잡은 거죠.
-----------------(동영상) 사회자/명동성당 미사중: 저희 정의구현사제단 5.18 7주기를 맞아 성스러운 하느님의 성전에서 중대발표를 하겠습니다. 신부: 故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은 은폐 조작되었다. 박종철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은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5과 2계 학원분과 1반 경위 조한경 경장 이정호다, 인간화와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중대한 관건이 이 사건에 걸려 있다. 1987년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젠단------------------
박동호: 87년 5.18이면 7주기, 미사를 하면서 박종철의 사건을 공개하게되고 그것이 큰 뇌관이 되어서 6월 10일까지 이어지게 되는 거죠.
다니엘: 김승훈 신부는 아까 그 3.1명동사건 때 강론하셨던~
박동호: 네, 나와요~
최원정: 이번에도 흔쾌히 내가 알아서 하겠다 하셨다면서요.
정병준: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한 거죠.
최원정: 김승훈 마테오 신부님은 2003년에 선종하셨습니다. 근데 생전 인터뷰 영상이 있어요. 어떤 분인지 궁금하시죠? 영상으로 만나볼까요.
------------------(동영상) 故김승훈 신부(1993년의 인터뷰): 우린 어떠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발표했고 또 우리가 이기리라고 하는 것도 짐작이 있었고 그러나 너무 어두운 때였기 때문에 혹시 잡혀가서 약간의 곤욕을 치를 수도 있다 그 정도 우리 각오하자 체포당할런지도 모른다 체포될 때를 조금은 대비 했죠(웃음)----------------
최원정: 신부님, 마지막 웃음이 뭐 별거 아니었어~
이시원: 결국은 정의가 승리하고 진실은 감출 수 없다는 걸 신부님이 알고 계셨던 것 같애요. 결국 우리가 이길 걸 알고 있었다 라고 말하시잖아요.
박상영: 정말 여유와 너털 웃음 같이 뭔가 프래쉬한 느낌이 있는데 한편으로 안타까운 점이 왜 하필이면 신부님들까지 나서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걸핏하면 용공으로 몰고 감옥에 잡혀가고 심지어는 죽임까지 당하는 굉장히 서슬퍼런 시대였는데~
다니엘: 근데 공산주의엔 종교에 자유가 없잖아요. 신부들은 공산주의 옹호하거나 지지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분들한테 빨갱이 프레임을 씌우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시원: 빨갱이 라고 몰수가 없었겠죠.
정병준: 우리가 인혁당, 민청학련 다 빨갱이라고 몰았지만 신부들을 용공으로 몰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성직자들이 언론이나 학생들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교회라고 하는 조직도 있었고 또 해외와의 연계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신부님들은 독신이었습니다. 부양할 가족이나 재산증식에 대한 미련 같은게 있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보통 세속의 관점에서 볼 때 약점을 찾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독재정권과 맞설 수 있는 강한 전투력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은 하나님의 제단에서 정의와 공정으로 싸운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속의 권력과 싸우는 것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제들의 도덕성이었다고 라고 들고요. 반면에 이 시기에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약점은 바로 도덕성의 부족 도덕성의 결핍, 사제들이 바로 그 지점을 예리하게 비판을 한 것이고요.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당시에 시대가 이분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거기에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원정: 사제단의 폭로 사흘 뒤에 추가로 3명의 고문경관들이 구속이 됐고 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문책성 개각이 단행이 되는데 그렇다고 들끓던 민심이 가라앉을 리가 없잖아요. 결국 그렇게 6.10 운명의 그날이 시작이 됩니다.
-----------------(동영상) 1987년 6월 10일에 전국적으로 폭력정권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6월 민주항쟁-1987년 6월 10일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민주화 시위). 경찰이 국민을 향하여 무차별적으로 체류탄을 쐈고요 도시 전체가 사실은 시가전의 전장이 되었습니다. 시위를 벌이던 시민과 학생 만명이상이 밤늦게 명동성당에 모이게 됐습니다. 경찰이 추적하니까 명동성당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이때부터 6.1부터 6.15까지 5박6일간의 명동성당 농성이 시작되게 됩니다-----------------
이시원: 그래서 명동성당을 민주화의 마지막 보루라고 하나봐요. 영화 Sister Act를 보면 거기가서마피아도 경찰도 함부로 어떻게 못하잖아요.
최원정: 우리 삼한 시대에도 천신에게 제사지내는 소도도 거기에 들어오면 주인이 돌려보내지 못한다고 하는데~(소도(蘇塗)-삼한 시대에 천신이 제사를 지낸 곳, 도망자가 들어와도 돌려보내지 않는다). 물론 시위대가 죄인은 아닙니다만 그런 성지역활을 한 거 같애요.
정병준: 대치가 며칠간 계속 되면서 사실은 전원 구속 방침을 세웠습니다. 교회 문도 밀고 들어올 태세였습니다. 사실은 진입하겠다고 하면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시원: 되게 무서웠을 것 같애요. 이미 5.18을 겪어 봤잖아요.
정병준: 그래서 계엄령이 선포되고 무력진압을 할 것이라는 풍설이 많았고요. 굉장히 많은 불안이 있었습니다. 5.18의 경험측인 거죠. 전두환 정권이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우리가 뉴스에서 봤지만 티브이에 나오는 전두환의 눈빛이 살기등등했습니다. 실제 그날 밤에 당시 안기부 차장이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1980년 5.18 때 서울 주둔 506 보안대장 이었고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와 통하는 일종의 통로였는데 찾아와서 실제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상부의 뜻이 완강하다. 그러니까 최후 통첩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최원정: 최후 통첩을 전달받은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하셨을까요?
-------------------(동영상) 김수환/추기경: 당신이 이대로 말을 전해라 “여기 공권력이 투입되면 맨 앞에 당신들이 만날 사람은 나다. 그리고 내 뒤에 우리 신부들이 있다. 신부들도 들어와 있었으니까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거다. 그래서 당신들도 나를 밟고 우리 신부들도 밟고 수녀들도 밟고 넘어서야 학생들하고 만난다”--------------
이시원: 정말 수호자 같은 역할을 하셨네요~
최원정: 최후통첩에 맞선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을 들어봤는데 이건 거의 목숨을 걸고 학생들을 지키겠다는 의미였어요.
박상영: 숭고한 의지같아요.
---------------김정기 작가의 당시 명동성당 분위기 라이브 드로잉---------------------
이시원: 시위대들 앞에 수녀님들 계시고 사제들 추기경님~
최원정: 우리 밟고 가라 우리 앞에 당당히 서 계신 모습입니다 (서슬 퍼런 공권력을 마주한 채 시위대를 지킨 천주교 사제들). 실제 공권력이 투입되었으면 저분들을 밟고 갔을까요. 그런 상상도 해보게 되네요. 이렇게 오늘 이 땅에 운명을 바꾼 6월 항쟁의 이야기, 천주교 오늘 크리스마스 특집에 이어서, 천주교를 중심으로 얘기 나눠 보았는데 6월항쟁의 더 많은 이야기는 역사저널 그날에서 추후 더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 역사의 한 복판에 계셨던 주인공을 저희가 모셨습니다. 바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을 이끌으셨던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을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함세웅 신부 걸어서 스튜디오로 등장). 깜짝 놀랐지요. 여러분! 여러분들을 위한 성탄선물이었습니다. 함세웅 신부님, 지금도 정의구현사제단이 활동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 어떻게 보면 많은 시간이 지났잖아요. 거의 30년 넘는 세월이 지났는데 지금에 있는 활동하는 사제들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애요.
함세웅/신부: 우리 후배 사제나 저나 늘 하나님 앞에 약속한 자세 그리고 저희가 사제가 될때는 제단 앞에 엎드립니다 (사제 서품식). 엎드려서 마지막 기도를 하는데 엎드리는 의미는 이 세상에 대해서 죽고 십자가의 뒤를 따라 다닌다.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님, 성령의 진리를 따라 살아라 라는 사제적 전적 봉헌의 약속을 늘 간직하면서 또 이웃을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저의 사제적인 삶의 길인데 그런 길을 함께 잘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원정: 오늘 많은 분들이 함세웅 신부님이 역사저널 그날에 나오셨어~ 하시면서 좀 위로 받고 싶은 마음들이 있는 것 같애요. 올 한해 코로나 때문에 너무 힘들었고 아직도 고통에서 못벗어나고 있는데 신부님~ 우리 시청자 여러분을 위해서 좋은 말씀 따듯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함세웅: 네~ 성탄을 앞두고 역사저널 그날을 시청하시는 모든 분들 사랑과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 코로나 어려운 시대 때 우리가 고통을 함께 나누면 줄어들고 기쁨을 함께 나누면 많아진다 라는 교훈의 말씀과 같이 어려운 때에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함께 힘을 모아 이 고통을 이겨내면 과거의 당했던 고통보다 더 큰 기쁨을 확인할 수 있다 라는 십자가 구원의 윈리를 함께 확인 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성탄 때 우리가 기쁨을 나누는데 기쁨을 나누는 대상이 우리 시대 가장 어려운 분들 가난한 사람들 약한 분들 고통받는 분들 또 고난의 현장에서 봉사하는 분들 특별히 코로나 현장에서 애쓰시는 분들 목숨을 잃은 분들의 가족들 이런 분들을 정말 내가족 내형제 자매로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 바로 성탄을 맞이하는 마음이고 바로 그분들 안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그런 자세를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 한 사람이 꿈을 꾸면 그 꿈은 한 사람의 꿈으로 남지만 모두 같은 꿈을 꾸면 그 꿈은 꼭 현실이 된다 라는 브라질의 헬더 까마로 대주교님의 말씀을 간직하면서 모두 희망의 아름다운 정의의 꿈을 모두 꾸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영육간 건강을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최원정: 함세웅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불의에 맞서 주신 사제분들의 용기, 약자 편에 항상 서주셨던 양심이 우리 현대사를 든든하게 지킨 힘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역사저널 그날 순서 여기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293회에서 정리).
① 1784년 정조 8년에 정약용과 이승훈 이벽은 김범우의 집이 있는 당시 행정구역으로 명례방(지금 명동)에서 모였다. 김범우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다. 신유박해(1801년)와 병인박해(1866년) 등의 고난을 겪고나서 1886년 한불통상조약이 맺어지고 선교의 자유시대가 열렸다. 당시 조선의 교구장을 맡고있던 프랑스 블랑 주교는 명례방 공동체가 있던 언덕을 성당대지로 매입한다. 토지 매입 12년 후인 1898년 고종 35년에 명동성당이 완공되었다. 첨탑의 높이가 47미터나 되는 명동성당을 뾰죽집이라고 부르면서 연일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매천야록에 보면, 길을 가던 노인들은 지팡이를 짚고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떠날 줄을 몰랐다. 조선 후기 명동성당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존재였는지 짐작이 간다.
② 122년전 명동성당이 완공되었을 때 조선 교구장은 프랑스 뮈텔 신부(제8대)였다. 이 시기 천주교는 굉장히 흑역사 시기였다. 1910년에 경술국치가 되었는데 프랑스 신부들은 총독부가 제안해 주는 특권들을 그대로 수용한다. 종교에 관여하지 않을 테니 종교도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 그래서 천주교 명의 땅이나 주택이나 소유권을 인정해 주고 세금도 면제해 준다 이런 일제의 제의를 정교분리라는 원칙 속에서 현실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선교의 자유 특권을 보장받는 수준에서 총독부에는 저항하지 않았다. 신자들은 나라를 잃고 고난을 당하는데 그것에 대한 공감도 없었고 반침략 독립운동을 억압하는 태도를 취했다.
③ 1909년에 안중근 의사(안중근 토마스)가 이토를 저격했을 때 집안은 독실한 가톨릭이었고 처형되기 전에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고 얘기했지만 뮈텔 주교는 거부했다(이에 대해 1993년에 가서야 김수환 추기경이 공식사과). 그렇지만 안중근 의사와 관련있는 니콜라 빌렘 신부가 여순까지 가서 고해성사를 집전했다. 그로 인해 빌렘 신부는 2개월 징계를 받았다. 3.1운동에 기독교 개신교와 천도교 불교까지 참가했지만 천주교는 빠졌다. 그때 한국인들은 일제 식민통치에 관심없는 프랑스 천주교의 선교우선주의로 분명히 희생되고 외면당하였다. 당시 천주교 교인수가 급격히 감소되고 민심은 악화됐다. 당신들은 조선백성이 아니고 프랑스 백성이라는 험담도 들었다. 사실 뮈텔 주교는 한국 천주교 초기 역사에 큰 공헌이 있지만 이런 논란에 매우 안타까웠다
④ 1971년 12월 24일 3선개헌을 강행한 박정희 대통령이 세번째 대통령이 된 직후, 명동성당의 성탄자정 미사가 티브이 생중계 되었다. 미사집전을 준비하던 김수환 추기경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박대통령이 12월초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상황에서 당시 시국은 기자회견을 아무리 해도 신문에 한 줄 보도되지 않은 암흑의 시절이었다. 미사 1시간전 김 추기경은 강론에 결연한 의지로 정부와 여당에 묻겠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국가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그날 밤에 박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잠 안자고 티브이 생방송을 보고 있었다. 박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었다. 김추기경의 발언은 모두 방송으로 나갔다. 다음날 남산 KBS는 담당 PD와 아나운서는 물론 기술감독까지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모두 조사를 받았고 극심한 가혹행위를 당하였다. 그 이후 17년동안 명동성당의 미사는 티브이로 생중계되지 못했다.
⑤ 1974년 7월 6일,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비밀리에 납치된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김지하에게 돈을 건넨 혐의였다. 그 당시 지학순 주교는 로마에서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는데 중앙정보부가 비행기에서 납치하듯이 끌고 갔다, 고문은 하지 않았지만 온갖 쌍욕과 몰인격적 모욕을 많이 당했다. 김수한 추기경이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하고 지학순 주교는 그날 풀려났다. 풀려난 지학순 주교는, 유신헌법은 무효라고 공개선언하고 다시 연행됐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주교가 구속돼서 실형을 선고받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일이 벌어졌다. 주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내용은, (1) 유신정권은 부정부패가 많으므로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2) 민주국가는 삼권이 나뉘어야 함에도 1인의 손에 장악되어 반대한다 (3) 1인 장기집권을 반대한다, (4) 인간의 기본권이 침해당하니까 반대한다.
⑥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30대의 젊은 신부들이 지학순 주교 뿐만이 아니라 구속된 민주인사들 대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민주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게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다. 전국에 600~700명 사제가 있었는데 300명 정도 참가했다. 교회가 서야될 곳이 어디냐 미래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현실 한 가운데 서야 된다. 그것이 사제들의 임무다. 그리스도교가 사랑과 관용을 말한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고통에 내몰리고 죽음에 내몰리고 그게 정치적으로 독재고 전체주의이면 그것까지 관용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관용이라면 그 독재와 전체주의가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그 권력을 빼앗는 것이 그 당사자들에게도 관용을 베푸는 것이고 민중에게도 관용을 베푸는 철학이 젊은 사제들에게는 있었다. 1974년 9월 26일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보고나서 신부들은 가두시위를 했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다 환호하고 박수를 치고 동조하였다.
⑦ 1962년~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구체적으로 교회가 있어야 될 자리가 어디냐를 놓고 성직자들의 열띤 토론이 있었다. 교회의 모든 일들은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공동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 신앙의 목표는 사람을 구하고 사회를 쇄신하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영역들이 정치와 종교는 협력해서 사람을 구하고 사회를 쇄신하는데 기여해야 된다. 김수환 추기경, 지학순 주교, 함세웅 신부는 로마나 독일에서 공부하였다. 이들이 해외 공부할 때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고 서구에서 벌어진 일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남미에서는 해방신학이 형성되었다. 원래 가톨릭은 남미에 들어가서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봉건제나 군주제를 앞세워서 억압하고 탄압하고 수탈하는데 앞장섰었다. 그런데 부정부패로 경제가 파탄났고 교회는 이런 불의한 상황을 못본채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2차 공의회 이후에 남미에서 해방신학이 등장한다. 한국의 젊은 사제들도 남미의 진보적인 사회참여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⑧ 1976년 3.1절에 명동성당에 사제들, 개신교의 문익환, 문동환 목사, 윤보선, 김대중 정치인들을 포함해 700명의 천주교 개신교 인사들이 모여서 구속민주인사를 위한 미사를 봉헌, 이때 김승훈 신부가 강론을 했다. 그는 언론 자유없다 불의한 정권 제거하고 바뀌어야 한다 구속인사 학생들 석방해야 된다 특별히 언론자유가 없다는 걸 강력하게 강론하였다. 이어서 문동환 목사가 설교 했고, 마지막 순서로 3.1민주구국선언을 낭독했다. 며칠 지나서 이 사건으로 김승훈 신부를 비롯한 관련자들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연행, 이게 3.1민주구국선언, 3.1명동사건이다.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한 최초 공개적인 집회였다. 유신체제 하에 군법회의 재판, 재판하는 사람들이 다 거물급, 윤보선 前대통령, 김대중 前대통령후보, 재야 명망가 함석헌, 그리고 신부들이다. 이분들이 판검사들을 훈계하고 가르쳤다고 한다, 판검사들이 재판하려다 훈계를 받은 것이다. 김대중의 경우 판사가 유신헌법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2~3시간 정치사를 강의했다고 한다, 목사들은 검사들을 꾸짖고 말 그대로 민주주의의 교육장이었다.
⑨ 독재정권은 인혁당, 민청학련 사건처럼 신부들을 용공으로 몰 수는 없었다. 성직자들은 언론이나 학생들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교회라는 조직이 있었고 해외와의 연계가 있었다. 게다가 신부들은 독신, 부양할 가족이나 재산증식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세속의 관점에서 약점을 찾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독재정권과 맞설 수 있는 강한 전투력이 있었다. 하나님의 제단에서 정의와 공정으로 싸운다고 생각했다. 세속의 권력과 싸우는 것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사제들의 도덕성이었다. 반면 이 시기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약점은 바로 도덕성의 부족 결핍, 사제들은 바로 그 지점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다. 제일 중요한 것은 당시에 시대는 이분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거기에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
⑩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보도되었다. 정부는 주범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당시 고문 경찰관 2명을 구속, 영등포 교도소에 수감, 그런데 당시 영등포 교도소에는 재야 기자출신 이부영씨가 수감되어 있었다. 그는 여기서 구속된 2명은 피라미다. 진범은 따로 있다 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된다. 이부영 기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완전히 조작되었다는 내용을 편지를 써서 몰래 교도소 밖으로 내보낸다. 그 편지는 마지막으로 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 신부에게 건네진다. 그 편지 내용은 5.18 7주기를 맞아 김승훈 신부가 발표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은 은폐 조작되었고, 박종철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범인은 경위 조한경 경장 이정호다, 이 사건은 사회에 큰 뇌관이 되어서 6월 10일까지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
⑪ 사제단의 폭로 사흘 뒤 추가로 3명의 고문경관들이 구속됐고 민심 수습을 위해 문책성 개각이 단행되었다. 그렇다고 들끓던 민심이 가라앉을 리는 없었다. 결국 1987년 6월 10일에 전국적으로 폭력정권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1987년 6월 10일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경찰이 국민을 향하여 무차별적으로 체류탄을 쐈고, 도시 전체가 시가전의 전장이 되었다. 시위를 벌이던 시민과 학생 만명 이상이 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명동성당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6.10부터 6.15까지 5박6일간의 명동성당 농성이 시작되었다.
⑫ 대치가 며칠간 계속 되면서 전원 구속 방침을 세웠다. 그날 밤에 안기부 차장이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와서 상부의 뜻이 완강하다. 최후 통첩이다. 최후 통첩을 전달받은 김수환 추기경은 당신이 이대로 말을 전해라. 여기 공권력이 투입되면 맨 앞에 당신들이 만날 사람은 나다. 그리고 내 뒤에 우리 신부들이 있다. 그 뒤에 수녀들이 있다. 당신들이 나를 밟고 우리 신부들도 밟고 수녀들도 밟고 넘어서야 학생들하고 만난다. 이렇게 명동성당은 1970년부터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고 억압받는 자들의 피난처였고 가난한 자들의 보호처였고 용기있는 자들이 기댈 언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