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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창세기 1:2~13 하나님이 이르시되 50.18 2007.5.30
26.08.26(수)
지난 시간에 우리 1절 말씀 함께 생각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태초는 바로 시간의 기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간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죠.
영원은 시간 개념 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시간이 사실 필요 없죠 그러나 우리 인간을 포함해서 형체를 지닌 세상 만물은 시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할 수 있게끔 시간을 만드신 바로 그 시점이 1절이 말하는 태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영원과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만드신 시간의 접점이 태초라고 표현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인간은 시간만 있어서는 또 존재하지 못한다고 그랬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반드시 공간이 있어야 된다고 그랬죠 공간 속에서 시간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인간과 세상 만물이거든요.
그래서 시간을 있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바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드신 것이 천지다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그 천지는 예전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없던 것이죠. 무에서 유를 있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는 하늘 우리가 보는 땅과 같은 천지는 하나님께서 3절 이후부터 구체적으로 만들어 가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1절에서 증언하고 있는 천지라고 하는 것은 지금과 같은 하늘과 땅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구성 물질 재료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시기 위해서 영원속에 시간을 시작하게 하시고 그 속에 공간을 만드셨다라고 하는 이 1절의 간단한 이 구절은 바로 그러므로 하나님은 시간 밖에 계시는 자존자이시고 초월자이시고 무에서 유를 만드신 창조자이시고 전능자이심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복수로 쓰여져 있는데 그 복수에 따른 만든다. 창조하시느라 동사는 3인칭 단수로 되어 있다고 그랬죠
그래서 1장1절 자체가 상위일체 하나님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말하자면 1장1절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함축한 구절이죠.
바로 이 한 구절을 믿느냐 안 믿느냐 믿는다면 얼마나 믿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내용과 방향과 질과 의미와 수준과 목적이 달라진다고 그랬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창세기 중요한 1장 1절 말씀을 믿는 자리에 불러주셨다는 거예요.
이 말씀을 믿게끔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길목에 얼마나 많은 바나바들을 보내주셨습니까?
우리 인생 속에 얼마나 많은 사건들을 연출하셨습니까?
그리고 이 말이 허무맹랑해서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더 많은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이 말씀을 믿는 자로 초청을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뭐예요? 이 말씀을 얼마나 믿고 이 하나님과 얼마나 동행하느냐 우리 삶의 태도만 남은 것이죠.
오늘 이제 2절 보시겠습니다.
개역 성경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이 2절 말씀을 보고 이 2절이 1절과는 무관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1절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1절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행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1장 전체의 제목이 1절이라는 거여요.
그리고 실제로 창조는 2절부터 시작하셨다는 거여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할려고 하실 때 그때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혼돈한 땅을 비로소 질서를 잡으시고 창조하기 시작하셨다는 거여요.
그럼 어떻게 돼요. 그건 창조가 아니죠. 이미 땅도 있고 하늘도 있고 다 있잖아요. 재료가 다 있잖아요. 그건 개조지 창조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창조를 하신 것이거든요.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모든 종교에도 창조 설화가 다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에서 창조의 이야기를 할 때 시작을 어떻게 한다고 그랬죠
아득한 옛날에 태고적에 이렇게 시작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땅이 혼돈했는데 그 혼돈을 질서를 잡으시며 창조하셨다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거죠.
다른 종교에서 태고적에 아득한 옛날에 말하는 것은 그때 땅과 하늘이 다 있었어요. 그런데 황폐화돼 있는데 우리 종교의 신이 이렇게 이런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게 타 종교의 설화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건 창조가 아닌 것이죠.
이미 물질이 이 세상에 있었으니까 그러면 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타 종교의 창조 설화를 이야기하듯이 1절과 2절이 무관하다고 오해하는가?
우리 성경만 보기 때문에 그래요.
원어에 보면 2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1절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원어는 2절이 이렇게 시작해요.
그리고 그 땅이 혼돈하고
1절과 2절이 상관없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1절에 창조해 두신 땅 그 모든 구성 재료들 그것들이 혼돈하고 공허했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반드시 여러분 성경에는 그 자가 있어야 정확한 번역이 되겠습니다. 자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다. 혼돈하고 공허했다.
히브리말로 토후 보후 이렇게 쓰여 있어요.
그러니까 혼돈하고 공허했다라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상태를 의미하는 다른 의미의 두 단어가 아니라 히브리말로 같은 의미이고 같은 음인 토후 보후 후자로 끝나잖아요. 그래서 강조형으로 쓰였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그래서 그 의미는 모든 것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 한데 엉켜져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가령 예를들어서 지금 저기에 홍보관을 짓고 있는데 저 홍보관이 이제는 건물이 올라가서 형체를 다 갖추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일 처음에 저 홍보관을 짓기 위해서 땅을 밀고 저기에 모래 갖다 놓고 자갈 가져다 놓고 벽돌 가져다 놓으면 어떻게 돼요.
트럭이 와서 내릴 때 하나씩 하나씩 이렇게 내리지 않지 않습니까? 트럭이 와서 뒤로 모래 쑥 쏟아놓고 자갈 쏟아 놓고 벽돌 쏟아 놓으면 그 재료들이 사람이 손길을 갖다 대지 않으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다 뒤엉켜 있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1절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이루는 구성 물질 재료들을 만드셨는데 그것이 모두 다 한데 뒤엉켜 있었다 이 말이에요.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께서 아직 빛을 창조 안 하셨으니까 온 세상은 흑암일 수밖에 없겠죠. 그건 당연한 얘기겠죠. 그죠
그런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이 깊음이라고 하는 것이 대체 무슨 깊음을 의미하는가?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수면을 공표하십시다.
우리 성경에는 수면이라고만 번역이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그 수면 그러니까 앞에 나온 무엇과 지금 같은 거라 그 말이죠.
그게 뭐냐 깊음 깊음을 공표하시고 수면과 연결을 시켜 두십시다. 바로 그 깊음은 수면의 깊음이라는 거야.
그럼 이 수면은 또 뭔가 하나님께서 1절에 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구성 재료들 구성물들을 만드셨다는것이죠. 그런데 그것이 형체도 없이 물과 같은 액체 상태였다는 것이어요
그 액체 상태의 유동 상태가 깊은 바다처럼 깊어요.
그 위에 그 깊음 위에 흑암이 쫙 깔려 있다 지금 이런 말이에요.
10:4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바로 하나님의 영은 성령님이시죠.
성령님께서 바로 그 유동적인 그 천하만물의 구성 물질 재료 그 액체 상태인 그 위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셨다
여기 운행하시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히브리말은 라하프인데요. 이 라하프라고 하는 동사는 첫 번째로 날갯짓을 한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운행하신다 이 말을 영어로 하버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선회한다. 새가 비상한다. 이런 것처럼 성령님께서 그 수면 위를 선회하시고 비상하셨다 이런 의미로 하버라고 번역하고 우리말 성경은 운행하셨다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라하프라고 하는 그 동사의 본래 의미는요 알을 품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새가 날개로 알을 자기 가슴에 이렇게 품고 있는 상태 그게 바로 라하프입니다
그러니까 천지 창조할 때부터 성령님께서는 이미 계시는 거죠. 그죠 그러니까 신약성경에 어느 날 갑자기 성령님께서 생기신 것이 아니고 창세기 1장 1절부터 삼위일제 하나님으로 존재하시지 않습니까?
그 성령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께서 천지를 짖기 위한 그 모든 구성물질을 당신의 품으로 거의 감싸고 계셨다 이렇게 이해하면 훨씬 더 이 동사의 의미를 바르고 은혜롭게 이해하는 길이 되는 것이죠.
왜 성령님께서 그 구성물질 그 액정 상태의 그 구성 물질을 거의 품고 계셨겠어요. 바로 당신이 창조할 인간을 살게 만들 구성 물질들이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성령님께서 당신의 품으로 이 수면을 거의 품고 계신다라고 하는 것은 그 속에 창조된 우리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죠.
여러분 절대로 인간은 우주에 던져진 미아가 아닙니다. 절대로 인간은 고아처럼 어쩌다가 그냥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들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하심 속에서 창조된 귀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의 영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이 히브리어 단어가 참 중요하죠. 루아흐 엘로임 하나님의 영 그 루아흐라고 하는 것이 영이라는 말도 되지만 숨 호흡이라는 말도 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영 성령님 하나님의 영은 누구신가 하나님의 숨이다. 이렇게 번역해도 돼요. 하나님의 호흡이다 이렇게 번역을 해도 됩니다.
제가 제 책 속에서 이 호흡과 관련되어서 쓰면서 제가 그 수영과 관련된 제 경험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부산 출신이거든요. 그래서 여름 방학만 되면 늘 뭐 송도니 광한리니 해운대 가서 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뭐 바닷가에 사는 아이들이 수영을 정식으로 배워서 합니까? 아니거든요.
그냥 바닷가에서 놀다 보면 다 수영할 줄 압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죠 서울에 올라와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때 한국에서 이제 처음 헬스클럽이라는 것이 생겼을 때 회원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리고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데 제 딴에는 수영을 굉장히 잘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헬스클럽 지하에 있는 25메타 실내 풀장에서 25메타만 가면 저는 되돌아올 수가 없는 거예요.
숨이 가빠서 그런데 백발 노인 한 분이 유유하게 갔다 왔다 갔다 왔다 하시는 거예요. 체력적으로 보면 20대 제가 훨씬 왕성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수영장에서는 맥을 못 추겠어요.
그분이 하시는 것을 보고서 제가 깨달았죠.
아 이거 내가 수영을 못하는 거구나 나는 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서 나는 못하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조교한테 돈을 내고 다시 처음부터 배웠습니다. 그러고 터득한 게 수영은 호흡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수영을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아무리 힘이 세어도 절대로 오래 할 수 없습니다. 물속에서 어떻게 호흡하느냐 이것이 기본이거든요.
그 호흡이 되면 나머지는 절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고 나서 살아가면서 모든 운동이 호흡이라는 걸 알았죠
여러분 헬스클럽 가서 역기 드는 것 이거 호흡이잖아요. 그 호흡 잘못하면 오히려 건강 망치죠 그죠 골프 치는 것 호흡이죠. 야구 선수가 방망이 휘두르는 것 딱 맞는 순간 호흡이죠.
모든 스포츠는 호흡이에요. 등산도 호흡입니다.
여러분 평지를 계속 걷는 사람의 그 얕은 호흡으로는 저 설악산 못 올라갑니다.
높은 산을 올라가기 위해서는 호흡이 깊어져야 돼요. 독서도 호흡이라는 것이어요. 여러분들 매일매일 읽기 쉬운 무슨 신문 기사나 무슨 주간지 기사만 읽어보십시오. 철학 서적 절대 못 읽습니다
정말 내 인생의 자양분이 되는 깊은 의미의 책들을 보기 위해서는 독서의 호흡이 깊어져야 돼요. 찬양도 호흡입니다.
제가 청년들에게 그런 이야기 자주 합니다마는 복음성가만 부르는 얕은 호흡으로는 내 영혼 밑바닥에서 우러나는 찬양을 하나님께 절대 못 드립니다.
인생도 호흡이에요. 여러분 내 인생의 경륜이 깊어진다는 것은 삶의 호흡이 깊어지는 거예요. 내가 흥분했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호흡이 거칠어지는 거잖아요.
내 인생의 호흡이 깊을 때에만 내 생각이 깊어지는 것이고. 미래를 더 멀리 내다보고 행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0장 21절 22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가 다락방에서 제자들을 만나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들을 보낸다 너희들 성령을 받아라
그리고 후하고 당신의 숨을 내뿜어주셨어요.
여러분 누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겠습니까?
하나님의 호흡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호흡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경건 훈련을 갖는다는 게 뭐겠습니까? 남보다 성경 한 구절 더 외우고 암송하는 거 그걸까요? 아니죠.
하나님의 그 진리의 호흡으로 우리가 살아간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호흡으로 살아간다면 내 발 앞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일들 때문에 이리저리 좌지우지 당하는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 없는 초지일관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말씀하셨다는 거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 말을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요 빛이 있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빛이 있었다.
굉장히 짧은 문장이어요 그러나 짧은 만큼 하나님 말씀의 절대적인 권위와 절대적인 능력이 우리를 압도하는 문장에 빛이 있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빛이 있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므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제일 첫째 날 창조하신 것이 빛입니다. 이 빛은 저 하늘에 떠 있는 태양 빛이 아니죠.
저 태양은 14절에 네 번째 날 만들어지거든요.
그러니까 태양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같은 발광체 빛이 아닙니다. 그 태양을 지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빛을 먼저 지으셨단 말이죠.
그럼 이것은 도대체 어떤 빛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빛을 당신의 말씀으로 먼저 지으시지 않았습니까? 말씀의 빛이요. 진리의 빛이요. 생명의 빛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아무리 우리 집에 거울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그 거울은 쓸모가 없잖아요. 빛이 있어야 만물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빛이 있어야 모든 무질서가 비로소 질서를 잡게 됩니다.
모든 것이 공허하고 혼돈한 상태에 있던 그 카오스가 하나님께서 먼저 빛을 만드심에 코스모스 질서를 찾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말씀을 추구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말씀의 빛 앞에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빛 앞에서만 우리의 실체가 드러나 보이고 그 말씀의 빛에 의해서 우리가 바르게 가다듬어지기 때문에 그렇죠.
사울이 다마스커스를 가다가 예수님을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빛으로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났거든요.
나중에 그가 사도행전 26장에서 아그리바 왕 앞에서 간증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해요.
사도행전 26장13절입니다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사도바울이 그 빛을 볼 때가 낮 12시였다는 거예요.
낮 12시면 태양이 가장 빛날 때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본 그 빛을 보니까 태양이 어둡더라는 거예요.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나를 사로잡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빛을 봄으로 카오스 속에 있던 사울이 코스모스를 이루며 사도바울로 변해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시편 기자가 시편119편 105절에서 이렇게 말씀 이렇게 증언했죠.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말씀이 내 길의 빛이여요.
왜 이 말씀만이 내가 가야 될 길과 가지 말아야 될 길을 밝히 비추워주기 때문인 것이죠. 바로 그 말씀으로 창조하신 빛이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이매 빛이 있었고,
4절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제 계속 하나님께서 첫째 날 둘째 날 창조해 가시면서 계속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우리의 삶의 절대적인 관점은 기준은 하나님의 관점이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살려고해요.
중요한 사실은요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이 하나님께서 보기에 좋으신 것과 늘 일치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오히려 어긋날 때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은 다 나보기에도 결국은 좋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이 절대 선이요 절대 진리이기 때문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보면서도 늘 어떻게 행할 때 나에게 뭐가 유리하고 내게 어떤 것이 더 좋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것이 좋은가 궁극적인 훈련의 목적이 거기에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4절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고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어둠도 하늘에 태양이 없음으로 인한 어둠이 아니죠.
처음부터 있던 어둠의 하나님께 빛을 주셨으니까 그 처음에 만드신 말씀의 빛이 임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서 지금 어둠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5절
하나님이 빛을 낯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께서 빛을 낯이라고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또 어둠을 밤이라고 이름을 지으셨어요.
뒤에 가다보면 하나님께서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물을 바다라 부르셨다 계속 하나님께서 당신이 지으신 것을 이름을 붙여가시죠.
여러분 누가 무엇에 대해서 이름을 짓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사람이 그 대상을 만들었다는 거여요.
자기가 이름 짓는 그 대상은 절대적으로 자신의 컨트럴 속에 있다는 것을 공포하는 겁니다.
이번에 현대자동차가 미국 시장을 겨냥해서 새로운 신차를 만들어서 출시했답니다.
그리고 그 자동차의 이름이 제네시스 창세기라고 신문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현대자동차가 만드는 자동차의 이름을 지엠 대우가 지을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포드가 그 자동차 이름 지을 수 있나요? 안 돼요.
현대가 만든 자동차는 현대만 이름을 지을 수 있습니다. 왜 그 자동차를 만든 사람이거든요.
그 자동차가 고장 났을 때 고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현대여요 그 자동차에 필요한 부품도 지엠이 만드는 게 아니라 현대가 만드는 거예요.
그 자동차는 철저하게 현대의 지배력과 영향력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가 이름 붙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도 사람이다 이름을 지으셔요
그러면 우리의 삶의 태도는 어떠해야 돼요.
천하만물은 철저하게 그분의 지배력과 그분의 소유권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24편 1절이에요.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왜 다 그분이 지으시고 그분이 명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여러분 지혜가 무엇이겠어요.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분이 나를 지으신 분이시고 그분이 나의 소유주이시고 그분이 나의 지배자이심에 승복하는 데서부터 우리의 행복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5절
하나님이 빛을 낯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그러니까 여기에 낯과 밤은 저 태양으로 인한 낯과 밤과 다른 낮과 밤이죠.
그죠 아직 태양이 안 만들어졌으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말씀의 빛 생명의 빛 진리의 빛을 창조하시고 그 빛이 임하지 않는 것을 밤이라 칭하시고 그 빛이 임할 때를 낮이라 칭하셨다
그러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게 뭐겠어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우리에게 있어서 진정한 영적 낯은 태양이 있을 동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의 빛 가운데에 거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비록 낮 태양 속에 있어도 우리는 칠흑 같은 암흑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이 말씀의 빛속에서만 거한다면 우리가 밤이 되어서 태양이 없는 캄캄한 밤을 다녀도 우리는 대낯 속을 다니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빛은 저 태양빛이 아니라 바로 이 말씀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30:28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장 4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그러니까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로고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일평생 어둠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이가 들어가면 눈이 어두워지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어가면 돋보기도 써야 되고요. 시야도 줄어들어요. 밤이 되면 어두워지는 거고요.
그러나 우리가 진리의 말씀 속에 있으면 우리는 일평생을 빛속에서 영적 대낯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 속에 살면서 나이가 들어서 내 시력이 어두워진 만큼 우리는 그 빛속에 더 밝히 거하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죠.
5절
하나님이 빛을 낯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여기 저녁 아침도 해가 네 번째 날에 만들어졌으니까 해와 관련된 저녁 아침과는 다르다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이미 시간의 기원을 있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시간이 있게 하셨단 말이죠.
그러니까 태양은 네 번째 날에 만드셨다 할지라도 시간은 있으므로 태양이 졌다 떠오르는 것과 같은 길이만큼의 하루는 있을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하루를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이제 두 번째 날입니다.
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여기에 물자 앞에도 원어에 보면 정관사 그 물이 붙어있습니다.
그러면 무슨 물인가
2절 보니까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수면 바로 그 액체 상태인 그 수면 그 단어를 의미하는 정관사 그 그 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죠.
그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서 물과 물로 나뉘어라
물 속에 궁창을 만드셨다는 거여요.
그래서 물이 나누어지게 해라
7절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물속에 궁창을 만들어서 궁창 위에 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뉘게 하셨다는 거예요.
이 궁창이 도대체 뭔가
8절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그 액정 상태의 구성물들 가운데에 물 속에다가 하늘을 만드시고 그 물을 하늘 위에 있는 물과 하늘 아래에 있는 물로 구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이 창세기를 쓴 모세가 하도 옛날 사람이니까.
이게 뭔가 전혀 지식이 없어서 이거 뚱딴지 같은 소리했다 하늘 위에 무슨 물이 있을 수 있느냐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저 하늘 대기권 밖은 물로 뒤덮여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앞으로 우리가 계속 배워 나가겠습니다마는 창세기에 사람들이 수백 년씩 살지 않습니까?
저 대기권 위가 물로 감싸져 있을 때 우주에서 오는 모든 유해한 파장과 몸에 나쁜 것을 다 차단하는 보호벽이 될 때 그리고 이 땅이 적당한 온실 효과를 낼 때 사람이 수백 년 살 수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드실 때는 그렇게 만드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창세기 7장에 보면 이제 노아의 홍수가 시작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7장 11절에서 12절이 이렇게 증거해요.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홍수가 시작되기 시작했는데 하늘에 창문들이 열렸다
그럼 이것도 아 모세가 그때 지식이 모자라서 비가 많이 오는 것을 하늘의 창이 있다 라고 생각했구나 그게 아니라 노아의 홍수 때에 쏟아진 물은 구름에서 떨어진 비가 아니라 대기권 위에 있던 물이 그때 40일 동안 땅에 쏟아졌단 말이죠.
그래서 홍수가 끝남과 동시에 인간의 수명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대기권 밖에 인간들을 지켜주는 그 물의 장벽이 사라짐과 동시에 인간들이 직사광선에 노출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계속 인간의 수명은 줄어들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나중에 오래 산 사람은 120살 정도 사는 사람 지금도 기네스북에서 오래 사는 사람은 120년 정도여요
여러분 이런 것을 이런 것은 뭘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까? 창세기 1장에 있는 이 내용들은 절대로 허무맹랑한 설화거나 전설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그 창조의 비밀스러운 내용들을 우리에게 하나씩 하나씩 베일을 열어서 일깨워주고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9절입니다.
이제 셋째 날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또 말씀하셨어요.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자 대기권 위에 하늘 위에 물이 있지 않습니까?
그 지금 하늘 밑에 있는 물들 그 모든 물들은 한 곳으로 모여라 그리고 뭍이 땅이 라고 또 명령을 하셨어요.
10절
하나님이 묻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드러난 뭍은 땅이라 하라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한데 모인 그 물들은 바다라 하라 여기에 바다라고 하는 이 말은 히브리말로 얌민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 단어는 바다 강 호수를 다 일컫는 얌이라고 하는 단어의 복수형이어요
그러니까 강을 이루기도 하고 호수를 이루기도 하고 바다가 이루기도 하라 이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중요한 사실은 9절 다시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라
이 모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히브리 단어가요 카바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거는 한데 묶여라 이 말입니다.
물을 한 군데 모았는데 이것이 한 곳에 묶여 있지 않고 이 물이 제 마음대로 돌아다닌다고 하십시다.
큰일 나지 않겠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물은 한 곳에 묶여 있으라 말하자면 인력으로 서로가 서로를 당겨서 흩어지지 않게 하시는 것이죠.
욥기 38장 8절에서 11절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9 그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10 한계를 정하여 문 빗장을 지르고
11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하나님께서 바다를 한 곳에 다 묶어두시고 너 한계는 여기야 너 넘어오지마 그래서 물들은 바다를 이루고 뭍은 뭍을 이룬다는 거예요.
자 지금 보면 하나님께서 첫째 날 빛을 만드셨잖아요. 그죠 그리고 빛과 어둠을 분리하셨습니다.
또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분리하셨습니다.
또 땅과 바다를 분리하셨습니다.
자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분리로 시작한다는 거여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분리를 통해서 조화와 일치를 이루게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 설 때에 우리는 분리를 통한 조화와 일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40:54
이 세상 속에 뒤엉켜 살던 우리의 삶이 분리되어야 돼요.
분리될 때에만 진리 안에서 진리와 통합이 이루어지고 진리와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6장 14절 16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사도바울이 여기에서 일깨워주는 게 뭐예요?
분리해야 된다는 것이어요. 불법으로부터 분리하고 어둠으로부터 분리하고 우상으로부터 분리하라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건 자기를 부인하는 거지 않습니까? 자기 부인이라는 것이 결국 분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분리를 통할 때 진리와의 조화와 일치가 귀결로 주어지는 것이죠.
11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또 말씀하셨지요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각기 종류대로 공표하십시다.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이제 하나님께서 땅으로 하여금 명령하셨습니다.
풀과 채소와 씨 맺는 열매 맺는 나무 그러니까 이 땅의 모든 식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어요.
12절 보십시다.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공표하십시다.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공표하시고요.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지금 여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게 뭐여요?
하나님께서 풀과 모든 채소와 나무 그것들을 종류대로 만드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와 물고기 그리고 짐승을 만드실 때에도 그 단어가 강조됩니다.
21절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4절 보십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절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께서 각각의 종을 만드셨다는 것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게 틀렸다는 거여요.
진화론자들이 이야기 주장하는 게 뭐죠 본래 아무것도 없는 자연 상태에서 단백질들이 우연히 함께 모였어요.
이 단백질들이 모여 있다가 세포가 되었습니다.
그 세포가 하등동물이 되어서 이게 하등동물에서 고등동물로 자꾸 진화해 갔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원숭이가 사람이 됐다는 거잖아요.
원숭이라는 종이 사람이라는 종으로 바뀌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진화론자들의 주장자들은 생물의 종은 고정불변이 아니라는 거예요.
환경에 따라서 종 자체가 얼마든지 다른 종으로 바뀐다는 거예요.
원숭이 종이 사람 종으로 그래서 바뀔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얘기하셔요
풀 한 포기도 종류대로 만들어졌다는 거여요.
각각이 종은 이 종이고 저 종은 저 종이지 이 종에서 저 종은 절대 안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같은 종 내에서의 진화는 우리도 인정하잖아요.
그죠 아프리카 밀림 속에 있는 사람을 도시에 데려와 보세요. 그 사람 진화합니다. 그렇죠
그러나 아프리카에 있는 원숭이를 도시에 가져온다고 사람 되는 것 아니거든요. 같은 종 안에서는 진화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이 종에서 저 종은 안 된단 말이죠.
그것을 3400년 전에 모세가 쓴 글을 통해서 이미 하나님은 밝히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무슨 과학적인 지식이 있어서 3400년 전에 이렇게 각각 종류대로 종류대로라는 말을 계속 강조했겠어요. 모세는 모르고 쓴 거잖아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쓰게 것을 때문에 왜 이렇게 쓰게 하셔요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이죠. 이 모든 창조가 사흘 동안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머릿속에 한번 여러분들 그려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그 흑암과 혼돈 속에 있던 이 세상에 빛이 임하고 하나님께서 물속에 궁창을 만들어서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바뀌게 하시고
그리고 땅으로 하여금 땅과 뭍을 나뉘게 하시고 땅으로 하여금 모든 식물이 있게 하니까 삽시간에 온 땅이 초원으로 변합니다.
정말 웅대하고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하나님의 말씀인 창세기 1장부터 이 이야기를 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옛날에 이렇게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과거의 사실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전해주시기 위함입니까? 아니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언제든지 현재 진행형으로 역사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창조적인 말씀이므로 생명의 말씀이므로 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너희도 새롭게 지어져 가라는 거여요.
이 말씀 앞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죽은 문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의 유물이 아닙니다. 자존자이시오. 초월자이시오. 창조주이시오. 전능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이십니다.
이 말씀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당신 말씀의 창조의 능력을 1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우리의 삶을 드리십시다.
이 말씀과 함께 동행하십시다.
그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삶 자체는 매일매일 신비의 샘으로 엮어질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습니다.
주님 말씀을 통하여 그 빛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분리를 통하여 조화와 일치를 일구어 나아가셨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분리해야 될 것과 분리함으로 진리와 조화를 이루어가는 우리의 삶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이 말씀 위에서 날로 날로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기쁨을 누리게 도와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말씀의 토대 위에 펼쳐지는 우리의 삶 자체가 아름다운 복음서가 되게 역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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