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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이 충만한 교회
빌립보서 2:19~30
빌립보서는 기쁨의 책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차디찬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도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지난 날 사역을 뒤돌아볼 때, 빌립보 교인들만큼 자신에게 큰 기쁨이 된 교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감옥 안에 있던 바울이 지난날을 뒤돌아볼 때, 고린도교회처럼 문제가 많은 교회에서 목회한 일도 기억에 남겠지만, 빌립보 교회처럼 목회자에게 기쁨과 보람으로 기억된다면 얼마나 더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이런 빌립보 교회는 하루아침에 일어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빌립보교인들은 다른 어느 지역의 교인들보다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교인들의 가난은 성경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자면 ‘극심한 가난’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의 기쁨을 성경의 표현 그대로 사용하자면 ‘넘치는 기쁨’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2절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모금을 앞두고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의 모범을 이야기합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우리가 얼핏 생각해볼 때, 교회가 외부적인 핍박을 많이 당하고, 게다가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도 극심한 가난에 처해 있다면 그들의 신앙생활에 기쁨은커녕 오히려 불만과 불평만 가득할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빌립보교회는 핍박을 많이 당할수록, 성도들의 삶에 경제적인 극심한 가난이 더할수록, 이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이 세상이 줄 수도 없는 놀라운 절대평안과 기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그 반대의 상황이 더욱 염려스러울지 모릅니다. 교회가 외부적으로는 세상에서 환영을 받고, 성도들 하나하나가 재정적으로 넉넉하고 사회적으로 안정될 때 오히려 교회는 기쁨을 잃어버리고 더 큰 위기의 늪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교회가 하늘의 기쁨을 갖기 원하십니다. 목회하는 저에게는 보람이 되고, 우리 성도들에게는 감사가 넘치는 은혜를 누리기 원하십니다. 비록 우리교회가 세상 적으로 볼 때 크게 내세울 것은 없지만,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서로 사랑하며 섬길 때 우리교회가 하늘의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위대한 교회는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교회의 부흥과 발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앞서고, 그 다음으로는 보이지 않는 성도들의 수고의 눈물과 헌신이 뒤따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땀 흘려주고 울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회 안에서 함께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이 교회를 위해 땀 흘리고 하나님 앞에 눈물 뿌려가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가리켜 ‘세워져 가는 성전’으로 묘사합니다. 에베소서 2장 20절 이하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건물이 서로 연결되어 성전으로 세워져가듯이, 하나님께서 영광 가운데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우리들도 함께 지어져 간다는 말입니다. 이 지상에 있는 교회 중에서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이 지상에 있는 교회는 모두 다 공사 중인 교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건물과 시설과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어도 그 교회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일 뿐입니다. 크던, 작던,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는 지어져 가는 교회입니다. 공사 중인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해 달려가는 교회인 것입니다.
함께 지어져 간다는 의미는 성도들의 영적인 연합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다양한 직업과 계층이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연합합니다.
어제 청년들과 어린이들 열댓 명이 오늘 드려지는 입당감사예배 특송 연습을 했습니다. 연습을 마치고 자모 실에 모두 모여 간식을 먹는데,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와, 만약 우리 모두가 가족이라면 대단한 가족인데요?” 그래서 옆에 있던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가족인걸, 하나님 나라의 영적 가족 말이야! 정말 대단한 일 아니니?”
맞습니다. 우리들이 한 예배당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예배 후에 한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교제할 때, 누가 뭐래도 우리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우열이 결코 없습니다.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습니다. 경상도와 전라도, 여당과 야당이 없습니다.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오직 한 몸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저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 나라의 소중한 영적인 가족들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함께 지어져 가는 아름다운 영적인 가족! 그것이 우리들이 현재 모습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영적인 가족이라고 해서 우리들에게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빌립보교회를 보십시오. 가장 모범적이고 바울에게 기쁨을 선사했던 교회였지만, 빌립보교회 안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처럼 서로 마음이 나뉘어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멀리서 그들의 실명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너희들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말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 갈등을 겪었다고 해서 그들이 전혀 다른 길을 가야할 사람들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한 가족인 걸요. 한 배에서 태어난 자녀들도 때로는 갈등을 겪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전혀 다른 길을 가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길을 걸어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언젠가는 모두 다 천국에서 만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얼굴 붉히고, 언성이 올라가다가도 “그래도 우리는 남남이 아닙니다.”하고 고백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이야기하면서도,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영적인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영적인 연대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를 주식회사나 동아리 모임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을 교회에 나오지만 전혀 영적인 연대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저 같은 예배당 공간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맙니다만,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 됩니다. 요즘 현대인들은 개인화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는 일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목사의 심방이나, 성도들의 친교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꺼려하며, 그것이 개인생활을 침해하는 일이라고까지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연합을 이루지 못한 성도는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마귀의 공격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배고파 우는 사자가 주로 공격하는 대상이 누구이겠습니까? 무리에서 이탈되어 다른 동료들과 연합하지 못하는 사슴이나 얼룩말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았지만, 세상의 유혹과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여러분 스스로를 지키려면 영적인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교회 주변만 맴돌다가 언제든지 교회를 떠날 수도 있다는 버려야 합니다. 결코 영적인 방관자가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아닙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는 모두 불완전합니다. 때로는 인간적인 냄새가 날 수도 있고, 때로는 “어떻게 교회가 저럴 수 있어?”라는 회의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수많은 영적인 위기의 때마다 교회는 영적인 연대감으로 그 위기를 극복해 왔습니다. 이 세상에 처음으로 태동되었던 초대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정신으로 스스로를 무장함으로 수많은 위기의 상황을 극복해 왔던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세우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바로 그들입니다.
먼저 디모데는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얻은 제자였습니다. 그의 외조모는 로이스였고, 그의 어머니는 유니게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습니다. 디모데는 거짓이 없는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고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딤후 1:4-5). 또한 디모데는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나의 영적인 아들이라고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속히 보내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내려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 음성으로 20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과연 디모데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바울과 뜻을 같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
목회자와 뜻을 같이한다는 것처럼 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가 완벽한 사람은 아니겠지요? 목회자도 인간인지라 부족한 점이 보이고, 실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목회자를 존중하고, 목회자와 뜻을 같이해서 교회를 섬길 수 있다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디모데는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자였습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여기서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라고 할 때 ‘생각하다’라는 헬라어 동사는 ‘염려하다’라는 뜻입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뜻을 같이하여 빌립보교회를 위해 진실히 염려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혹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28~29절에서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교회를 위해 염려했고, 그 누군가의 믿음이 실족하게 되면 함께 마음으로 애를 태웠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영적 어버이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 일로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은 거꾸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염려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염려하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 애타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 눌리는 것이 있다면 여러분은 영적인 어버이이며, 목회자와 뜻을 같이 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고린도후서 7장 10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교회 설립 3주년을 맞아 저는 여러분이 교회를 위해 염려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이제 설립된 지 3년 밖에 안 되는 짧은 역사를 가진 우리교회가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것인가?”
“내가 연약한 우리교회를 위해 근심하며, 목회자와 함께 뜻을 같이하여 십자가를 지고 헌신할 부분은 무엇인가?”
디모데가 그랬듯이 여러분이 그런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2절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디모데의 연단을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디모데는 복음을 위해 연단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연단을 통해 숭고한 인격의 사람, 겸손한 인격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젊은 디모데는 나이 많았던 바울에게 마치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이 겸손하게 섬기며 봉사했던 것입니다.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목회자와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수고할 때 함께 수고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좋은 교회, 아름다운 교회는 함께 만들어 가야 합니다. 예배당 문만 왔다, 갔다하며 구경꾼노릇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어떻게 교회 일이 목사 혼자만의 일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옆에서 거들어주고, 시간이 지나면 제가 하는 일을 여러분이 해야지요? 성도들 심방도 여러분이 하시고, 어깨띠를 띠고 전도지를 들고 길거기로 나가 전도하는 일도 여러분이 하셔야 합니다. 교회 청소며, 봉사며, 여러 가지 섬김과 봉사의 일에 여러분이 수고하셔야 합니다. 정말 내 교회, 내 가정으로 생각하고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교회설립 3주년을 맞아 이렇게 거룩한 뜻을 정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봉사할 수 있는 건강도 주시고, 봉사할 수 있는 물질도 주시고, 안정적인 직장과 사업장을 보장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하면, 주님이 내 일을 책임져 주신다.”
얼마나 귀한 믿음입니까? 그래서 성도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충성하며, 교회를 위해 눈물 흘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디모데처럼 말이지요. 교회를 위해 보이지 않게 땀 흘리는 사람, 교회를 위해 보이지 않게 눈물 흘리는 사람이 많은 교회가 행복한 교회입니다. 기쁨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빌립보교회가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보이지 않게 땀과 눈물을 흘렸던 바울과 디모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부족한 저와 함께 마음을 같이하여 하늘사랑교회를 위해 땀 흘리고, 눈물 흘리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교회는 설립초창기부터 많은 어려움을 견뎌낸 교회입니다. 디모데처럼 연단 받은 교회입니다. 그 연단의 과정이 있었기에 3년이라고 하는 짧은 시간에 지금처럼 좋은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주에도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한 줄로 길게 늘어선 성도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많은 성도들이 다 어디에서 왔나?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되돌아보면, 저희 가정과 최 권사님 한 분만이 이곳 갈마동으로 성전을 얻어 이전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가 불과 2년 전의 일입니다. 2년 전만 해도 과연 우리교회에 사람이 올지, 또 온다면 어떤 성도들이 올지 우리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 한 생명을 우리교회에 보내주셨습니다. 작은 물방울이 모여 큰 시내를 이루듯이, 작은 자가 천을 이룰 것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도 같이, 주님 앞에서 연약하여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저를 부르시어 교회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그 역사의 주역이 되셔야 합니다. 지난 3년간이 연단의 시간이요, 눈물의 시간이었다면, 앞으로의 우리들이 맞이할 시간은 기쁨과 감격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회자와 뜻을 같이하여 주십시오. 정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목회자인 저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해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들을 통해 이 땅에 수많은 상처받은 영혼들이 주께 돌아오고, 다음 세대가 행복한 교회를 일구어 가십시다.
또 한 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분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젊은 디모데와 함께 나이 많은 에바브로디도도 함께 보내기를 원했습니다. 우리 한 음성으로 25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소개하면서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내 쓸 것을 돕는 자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바울이 얼마나 에바브로디도를 신뢰하는지를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26절에 보면,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이 병든 것을 빌립보교인들이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병든 것 때문에 근심한 것이 아니라, 빌립보교인들이 자신의 병든 것을 알고 근심할까봐 심히 근심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30절에서도,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함이니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는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이 죽을 처지에 이르렀어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했습니다. 오직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헌신했던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일이라면 자신의 목숨도 돌보지 아니할 정도로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에바브로디도를 언급하면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런 분들은 교회에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됩니다.
“우리교회 아무개 권사님, 아무개 집사님, 아무개 성도님을 보세요. 정말 그분처럼 나도 살 수만 있다면 좋겠어요.” 우리교회에 에바르로디도와 같은 분들이 계시다면 우리가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교회를 위해 헌신, 봉사하는 분들을 기쁘게 여기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이런 분들을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또한 우리들이 작은 에바브로디도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좋은 모범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면 교사인 여러분이 먼저 에바브로디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심방하고, 양육해서 아이들의 미래에 좋은 역할모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와 관련해서 30절 말씀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이 말씀에 보면, 에바브로디도가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두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그리하였고, 둘째는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 즉, 목회자를 섬기는 일을 위해서였습니다. 성도는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할 뿐만 아니라 목회자와도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혹 어떤 이는 “나는 주님을 사랑하지만 목회자는 사랑하지 않아. 그는 흠 많은 인간에 불과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목회자를 미워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듯이, 목회자를 섬기는 여러분의 일에 부족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권면은 제 개인의 안위를 위해 여러분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영적인 유익과 생활의 전반적인 축복을 누리기 위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먼저 목회자의 사역을 이해하고 기도로 협력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목회자를 존중하고 목회자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안산에 가면 안산제일교회를 시무하시는 고훈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어느 날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로부터 위암말기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권사님 한분도 같은 시기에 똑같은 위암말기 진단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권사님은 연로해서 도저히 수술을 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위암말기 진단을 받고 교회로 달려와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도 말기 암이고, 우리 목사님도 말기 암입니다. 우리 목사님은 앞으로 목회하실 날이 많이 남으신 목사님이신데 어차피 저는 나이가 많아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목사님의 암 덩이를 모두 저에게로 옮겨주세요. 내 생명을 취하시고 우리 목사님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세요.”
권사님은 매일 눈물로 기도를 드렸고, 몇 개월 후에 아주 평화로운 모습으로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고훈 목사님께서 그 권사님의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하늘나라로 가게 해 달라는 기도를 중단했다고 합니다. 말기 암에서 해방되어 은혜의 복음을 전하고 싶었고, 자신이 건강해져서 자신을 위해 삼손의 마지막 기도를 드린 권사님과 교우들에게 은혜를 갚고 싶어졌다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권사님의 기도를 들으셔서 고훈 목사님은 위암말기의 상황에서 극적으로 치유를 경험하고 지금은 얼마나 훌륭한 목회자로, 존경받는 목회자로 건강하게 목회를 잘 하시는지 모릅니다. 목자는 양들의 기도를 먹고 삽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해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교회설립 3주년을 맞아 교회에 대한 소속감과 연대의식을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여러분을 불러 하늘사랑교회의 가족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또한 목회자와 뜻을 같이하여, 목회자와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여러분 자신이 되게 하십시오. 우리가 추구하는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회는 여러분의 수고와 땀과 눈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또한 주님을 섬기듯이 목회자를 섬기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목회자를 섬겨야 한다고 말할 때 단지 목회자이기 때문에 섬겨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복음을 위하여 수고할 때 여러분은 목회자를 존중하고 존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의 모범을 기억하시고, 죽기에 이르렀어도 자기의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였던 에바브로디도를 기억하십시오. 앞으로 우리교회의 미래가 여러분의 기도와 헌신과 섬김을 통해 밝게 열리는 아름다운 간증과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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