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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담, 인금, 금계 3개동의 유래
1. 첫머리
우리 화남초등학교는 어담동, 인금동, 금계동의 3개동 학생들이 다니던 학교입니다. 어담동은 원어담, 승통곡, 자개동, 거물억, 개간지, 새터 등 6개의 자연부락이 있고, 인금동은 상인금, 하인금, 월애 등 3개의 자연부락, 금계동은 고사, 굽리, 탑리, 신기 등 4개의 자연부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금동 중 월애는 하회에 있는 풍남국민학교에 가깝고, 금계동 중 신기동은 의성 중률국민학교에 가까워 그리로 취학을 하였습니다.
1994년 2월 28일경 화남초등학교는 여느 농촌지역 초등학교와 마찬가지로 학생수의 감소로 제45회 졸업생을 끝으로 1995년 3월 1일 폐교가 되고 모든 학적부가 인근 일직초등학교로 이관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해방되던 전해인 1944년 개교하여 육이오 사변 직전 1950년 5월 8일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에 개교를 하여 근대화의 완성과 더불어 폐교가 된 아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고향 마을 3개동의 역사를 보존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소개글은 이제인(2회) 고문님이 보내주신 자료와 김석한(32회), 강낙구(24회) 동문과 여러 동문들이 상의한 자료를 토대로 하였고 개인적인 생각은 최대한 배제하고 기술하였습니다.
2. 마을의 형성 역사
우선 우리 3개동 중에서는 탑리가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안동 신세동 7층 전탑, 일직면 조탑동 5층 전탑과 같은 형식의 5층 전탑이 마을 한가운데 있다가 1959년 사라호 태풍때 상층부가 무너져 현재는 기단부만 남아 있습니다. 탑이 있었다면 절도 있었을 것인데 절의 이름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김석한 동문에 의하면 화인사라고 합니다. 탑리라는 마을의 형성이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 고려시대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고려초기 이전에 형성된 마을인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전탑이라는 것은 신라시대 후기에 주로 안동지방에서 지어졌고, 고려 중기 이후에는 지어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나머지 마을은 언제 형성되었을 까요. 인금동은 최소한 조선 중엽 임진왜란때 영의정 서애 선생의 막하에서 활동을 한 정략장군 황귀성(1548~1605)공이 태어난 마을이고 그 이전 3대조 산소까지 인금동 대봉에 봉안되어 있으므로 최소한 1400년대 조선 초엽에 인금동에 정착하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인금동은 원래 고유의 이름이 이금실인데 음지를 더한다는 뜻으로서 익음(益陰)에서 유래되었으며 피난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마을 이름에 실자가 들어가면 피난지라고 합니다.
인금동에 집성촌을 이루어 거주하는 평해 황씨들은 처음에 풍산 시우실에서 마적떼들과 임진왜란을 피해 건너왔을 때 다래 넝쿨을 걷어내고 농토를 일구었다고 전해집니다. 인금동에는 여러 개의 골짜기가 있는데, 골 이름이 집골도 있고, 다래골도 있습니다. 처음 인금동에 정착할 때는 지금의 마을 지점이 아니고, 낙동강에 좀 더 가까운 집골 입구입니다. 집골 입구에는 조선시대 초엽에 쓰던 유물들이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마을 중 가장 양지바른 곳에 익양서당(益陽書堂)이 있으며 지방문화재 자료로 등록을 추진중입니다.
고사는 진주강씨의 집성촌으로서 금춘당 강한(1511~1553)공이 입향조이므로 마을이 형성된 역사는 최소한 500년 이상은 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금춘당은 퇴계와 동문수학한 분이고 고사마을에는 오래된 사당이 있어 마을 이름도 고사(古祠)라고 합니다. 마을 서쪽에는 역시 오래된 느티나무 고목이 있어서 마을의 역사가 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담은 현재 학교 뒤의 산 모양이 자라를 닮아서 못이 필요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어담(漁潭)이라고 하였답니다. 1937년 원어담에 화남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부터 원어담에는 술도가도 있었고, 문방구 가게도 있어서 3개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한 때는 어담지서도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으며 풍천면 출장소, 농협분소, 보건진료소가 생겨서 3개동 마을의 행정편의와 복지향상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월애는 청송심씨와 의성김씨가 양대 문중으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다가 현재는 청송심씨는 몇집이 거주하고 있고 의성김씨가 주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습니다. 월애에는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자료로 등록된 청송심씨의 고택 월오헌(月塢軒)이 있습니다. 월오헌은 조선 중기에 이곳으로 입향한 심명한(1654~1711)공의 7대손으로 후학교육에 힘쓴 심동섭(1846~1924)공이 19세기 말엽에 건립한 고택으로서 일제시대 때 신간회 간사로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심규하씨가 독립운동의 지역 본부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조산리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 중 동쪽은 산이 감싸고 있으나 서쪽은 개활지여서 풍수지리상 산의 역할을 할 느티나무 20여 그루 심어서 산세를 바로 잡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조산리(造山里)라고 하였습니다. 조산리와 월애는 산을 하나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마을인데 의성김씨와 청송심씨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으며 상호 인적, 물적 교류가 있었던 점이 특이합니다. 월애는 인금동에서도 가장 풍산쪽에 가까워 아동들이 하회 소재 풍남초등학교에 주로 다녔고, 1980년대 말에 풍남국민학교가 먼저 폐교되어 몇 기수는 화남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굽리는 탑리의 동쪽에 있는 마을로 구음사(九音寺)라는 절이 있어서 마을이름을 굽리라고 하였으며 경주 김씨의 집성촌입니다.
거물억은 원래 인근 산꼭대기에 봉화대가 있고 역참의 기능이 있어서 원래 거물역(炬物驛)이라고 하였는데 줄여서 거물억이라고 하였답니다. 조선시대에는 요즈음과 같은 전화 등 통신수단이 없어서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데는 주로 봉화를 이용하였습니다. 거(炬)는 횃불이라는 뜻이고 1개의 연기(낮) 또는 횃불(밤)을 피우는 1거는 평시에 사용하고, 5거는 적이 침입하는 등 가장 위급할 때 사용하는 등 5단계로 나누어 봉화를 올렸다고 합니다. 봉화대가 있는 곳은 사방을 조망하기 위해 지형이 높을 뿐 아니라 5개의 봉화를 동시에 올릴 수 있을 만큼 지리적 공간이 필요하였습니다. 거물억 남동쪽에 있는 삼포대는 경주 남산과 서울 남산을 잇는 직선거리의 중심에 있어서 봉화대의 역할이 있었고, 실제로 삼포대에 가면 정상이 평평하고 학가산을 비롯하여 사방이 잘 보입니다.
그 외 자개리, 승통곡은 나중에 형성된 마을로 알고 있고, 새터는 가장 나중에 형성된 마을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농협 어담지소가 있는 삼거리에는 조선 말엽까지 조그마한 장이 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장터거리라고도 하지요. 개간지는 해방 후에 인구가 급격히 늘어 개간을 하여 가장 최근에 형성된 조그만 마을입니다.
3. 나무의 수령으로 본 마을의 기원
탑리, 이금실, 조산리, 고사, 굽리, 원어담 등 마을 형성의 역사가 오래된 마을은 마을 입구에 500년 이상된 느티나무 고목이 있습니다. 3개동 모두 긴 골짜기를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서 마을 어귀에 큰 나무를 심어 풍수상의 비보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이들 나무를 당나무라고 하고, 그 밑에 돌무더기를 쌓아 금삭줄을 쳐놓고 신성시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우리나라 선사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민간신앙의 표시이고 우리가 몽고족 계열과 같은 종족이라는 징표가 됩니다.
나무의 수령을 보면 그 마을의 역사를 알 수 있는데, 역사학계나 식물학계에서는 우리가 생각한 것 보다 나무의 수령을 많이 봐주지 않습니다. 우리 인금리에 있는 느티나무도 둘레가 12미터 정도인데 수령을 500년 정도 되었다고 안내판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물론 마을이 형성되자 마자 당나무를 심는 것은 아니니 나무의 수령과 마을의 역사가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을이 형성되고 난 뒤에 당나무를 심지, 먼저 당나무를 심어 놓고 그 마을에 이주하는 일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마을에 당나무가 있다면, 그 마을의 역사는 최소한 그 나무의 수령 이상은 되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담동은 느티나무의 위치로 보아 원래 마을이 느티나무가 있는 골인 계석곡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안동김씨 재궁도 거기에 있고, 원래는 마을이 거기에 있었는데 터가 너무 좁아 원어담 현재의 위치로 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화남초등학교가 1937년 현재의 위치에 들어서고 나서 원어담은 3개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4. 묘소를 통하여 본 마을의 기원
마을의 형성 역사는 마을에 살았던 분들의 웃대 묘소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 중 가장 윗대 어른 묘소가 언제 설치되었는가는 족보에 생몰연대가 나와 있으니까요. 그래서 어담, 인금, 금계 3개동의 역사는 그런 묘소의 추적에 의해 가능하다고 할 것입니다. 3개동에는 평해황씨, 진주강씨, 용궁전씨, 청송심씨, 의성김씨, 경주김씨, 안동김씨, 안동권씨, 경주이씨 등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생존시에는 집이 필요하고, 사후에는 무덤이 필요합니다. 과거 교통이 불편할 당시에는 무덤은 거의 마을 인근에 설치하였습니다. 간혹 세도가에서는 명당을 찾아 수백리 먼 곳에 설치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것이고, 그 당시 영구차가 없던 시절에는 거의 대부분이 마을 인근에 묘를 설치하였습니다.
마을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은 문집이나, 집의 대들보에 기재된 상량문을 보면 알 수 있고, 상량문이 없다면 기둥이나 서까래의 연대측정을 통해서나, 동네 입구에 있는 나무의 수령을 통해서나, 묘소의 설치 연대 등을 추적하면 거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의 유래에 대한 문집이나 자료 등은 찾기가 쉽지 않고, 집은 목조라서 오래 보존되지 못하고, 화재 등으로 소실이 자주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쉬운 방법은 묘소의 설치연대를 측정하는 것입니다.
족보는 자신 및 배우자의 이름, 생몰연월일, 묘지위치 및 좌향을 기본으로 기록하고, 그 외 관직이 높은 분이나 학문과 덕망이 높은 분은 추가로 행적을 기재합니다. 족보에는 생몰연대를 60갑자에 의해 기록했습니다. 그 갑자를 알면 생몰연대를 거의 정확하게 서기연도로 환산할 수 있습니다. 가령 고종 갑신년이면 고종 연간에 갑신에 해당하는 연도를 찾으면 금방 서기연도가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1980연대 이후 나온 각 문중의 족보들에는 편리성을 위해서 서기연도로 환산해서 생몰연대를 기록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생몰연대를 잘 모르는 집안도 많지만 족보를 하는 사람들이 후손들의 말을 듣고 정리해 주기도 한답니다. 생몰연대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몇대 조가 가장 윗대 어른인지는 알 수 있으므로 1대를 평균 30년으로 계산하면 마을의 역사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5. 우리나라 인구의 변천과 마을의 흥망성쇄
우리 마을의 역사를 알려면 우리나라 역사상 인구의 변천사를 알아야 합니다. 통계청에서 1992년 발간한 한국통계발전사의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남북한 전체의 인구는 1543년 임진왜란 전에는 416만명이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쳐서 많은 전사자 및 아사자가 생겨나 1세기가 지난 1639년도에는 152만명으로 줄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말엽에 인구가 회복되어 600만 정도를 유지하였고,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에는 2,000만 동포라고 선언하고 있으니 그 당시는 남북한 인구가 2,000만이었습니다. 현재는 남한 4,900만, 북한 2500만, 해외동포 500만 합치면 8,000만 쯤 되지요.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 인구가 조선시대 말엽 이후, 8.15. 해방이후 급격하게 늘어났습니다.
그러니 조선시대 중엽 이전에는 탑리 이외에는 현재 마을이 위치한 곳이 전부 풀숲이 우거진 야산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을 터 말고도 다른 입지가 좋은 곳이 한반도 전체에 많고, 그 곳에 400만 인구가 얼마든지 살 수 있었는데 굳이 교통이 불편한 3개동에 사람이 많이 살 이유는 없었던 것입니다. 탑리가 그래도 가장 터가 넓고 물도 많아 동네형성의 입지가 좋았다고 할 것입니다. 마을의 입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과거에는 땔감의 역할도 중요하여 완전 평야지대 보다는 산과 들이 어우러진 곳이 입지적으로 유리하였습니다.
요즈음은 산이 있으면 산을 깍아 길을 새로 만들고 터널도 만들어 자동차가 씽씽 달리지만, 1960연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산은 하나의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차라리 강은 산 보다가 장애가 덜했습니다. 인금동에서 풍산을 통해서 안동읍내를 가는 거나, 일직을 통해서 안동읍내를 가는 거나 거리상으로는 조금 더 일직이 멀기는 하지만 풍산쪽을 거의 이용했습니다. 강은 일단 평지이고,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 그냥 빙등(氷登)을 할 수 있으며 갈수기에는 바지를 걷고도 건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일직을 통해서 가자면 인금재와 목상재 2개를 넘어야 하고, 길도 요즈음과 같이 차길이 아니고 가파른 구길을 숨차게 올라야 합니다.
그래서 마을과 마을 사이에 산이 하나 가로막혀 있으면 정말 힘듭니다. 마을의 역사와 마을 간의 교류를 이야기 할 때, 산과 강의 역할상 차이를 도외시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도보로 이동하는 과거에는 강 보다는 산이, 자동차로 이동하는 현재는 산 보다는 강이 더 큰 장해요인이 됩니다.
역사를 이야기 할 때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해석하는 것은 많은 오류를 범합니다. 현재 우리 3개동이 일직으로 거의 통행을 하고 있다 하여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라는 것, 현재 우리 3개동이 자연부락 단위로 10여개 마을을 형성하고 살고 있으니 먼 옛날에도 그랬을 것이라는 것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탑리 마을 한 복판에 전탑이 사라호 태풍 이전까지 있었다고 하니, 그 주위에 절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절을 운영하던 사람들이 끝까지 절을 보존하지 못하고, 전탑마저 세월에 풍화되어 무너지고, 현재는 기단석 마저도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이래 숭유억불 정책을 취하여 급격하게 관리가 소홀하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지금 산중에 있는 절이 많이 남아 있고, 평지에 있는 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드시, 고려시대 이전 탑리에는 절만 있었고 그 부근에 마을은 형성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의성 고운사가 절만 있고 주위에 민가가 없드시 말입니다. 그런데 차츰 용궁전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니, 조용하던 절의 분위기는 깨어지고, 수행도장으로서 기능을 상실하여 절을 지키고 있던 스님들이 관리를 소홀히 하여 절이 폐사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탑이 들어오자 말자 마을이 형성되었느냐. 탑이 들어오고 나서 한 사오백년 뒤에 마을이 형성되었느냐는 마을의 역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무조건 탑이 있었으니까, 탑이 건립된 시기에 마을도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6. 안동의 유래
안동은 원래 영가, 길주, 복주 등의 이름으로 불리다가 신라시대 경덕왕때 고창군으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안동 출신 3태사(안동김씨, 안동권씨, 안동장씨)의 도움을 빌어 후백제 견훤의 군사와 싸워 이기고 삼국통일을 이루었다는 공로로 편안한 동쪽이라고 하여 안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그 때부터 안동지방에서는 차전놀이가 유행하였고, 국가지정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지요. 고려말에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에 피난왔는데 강을 건널 때 부녀자들이 줄지어 허리를 구부려 노국공주가 강을 건너도록 도왔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 때 유래가 놋다리밟기가 있고 역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공민왕이 안동지역 백성들의 헌신적 노력에 감격하여 개성에 있었던 고려조정에서는 안동을 도호부로 승격시켰습니다. 공민왕뿐만 아니라 충렬왕 등 고려말 조정에서는 국가에 무슨 변란이 있으면 개성에서 거리가 아주 먼 안동으로 잠시 피신하곤 하였습니다. 지금도 안동시청에 있는 안동웅부(安東雄府, 부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는 뜻)라는 현판은 공민왕이 친필로 쓴 글씨입니다.
고려시대 이래 우리나라 행정 체계는 道, 府, 郡, 縣의 계통으로 내려왔습니다. 도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8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팔도유람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 밑에 부가 있었는데, 큰 것은 도호부(都護府, 요즈음으로 말하면 직할시 광역시의 개념)라하고 나머지는 그냥 부라 하였습니다.
임진왜란때 부산은 동래부 소속이었고, 안동은 안동부였는데, 동래부와 안동부의 인구가 거의 비슷했다고 하나 지금은 인구 차이가 30배 정도 차이나지요. 1970년대 초 안동은 포항, 울산과 비슷한 인구를 가졌는데 지금은 3배, 6배의 차이가 납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마을과 도시의 역학관계는 그렇게 심하게 변하는 것입니다.
부 보다 더 작은 도회지는 군이라 하였고, 좀 더 작은 도회지는 현이라 하였습니다. 현이 가장 말단 행정구역이었는데, 현 중에는 도에 직속된 직할현이 있고, 군에 속하는 속현이 있었습니다. 안동에는 고려시대 이래로 안동부가 있었고, 그 밑에 풍산현, 예안현, 일직현이 있었습니다. 풍산현은 그 당시 풍천면 지역, 호명면 지역까지도 포괄하는 넓은 지역이었는데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는 풍산현이 예천군 소속이었습니다. 풍산현이 언제부터 안동으로 편입되었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조선시대 때라고 보여집니다. 1145년에 저술된 삼국사기의 기술에 의하면 그 때까지는 풍산현이 예천군의 소속이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예천군은 본디 수주군인데 경덕왕때 이름을 고쳤고 4현을 거느렸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밑에 영안현, 안인현, 근품현, 은정현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영안현(永安縣)은 본디 하지현(下枝縣)인데 경덕왕때 고쳤으며 지금의 풍산현(豊山縣)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풍산은 신라시대 중기에 하지현이라고 하였다가 신라말기에 영안현, 고려시대에는 풍산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더불어 삼국사기에 안동과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면, 고창군은 본디 고타야군인데 신라 경덕왕때 고친 이름이고 지금은 안동부로서 3개의 현을 거느렸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밑에 직녕현, 일계현, 고구현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직녕현(直寧縣)은 본디 일직현(一直縣)인데 경덕왕 때 고친 이름이고 현재는 일직현으로 이름을 회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와 같이 일직현은 신라시대때부터 안동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을이었는데, 그 뒤 세력이 점점 위축되어 현재는 안동에서도 낙후된 면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탑리, 어담, 인금은 풍산현 소속이었을까, 일직현 소속이었을 까가 문제됩니다만 최소한 인금동은 거리상 풍산현 소속인 것은 맞습니다. 탑리도 풍산쪽에 가까워 풍산현 소속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어담을 비롯한 모든 마을은 하나의 큰 골짜기를 통하여 형성된 마을이고 일찍 쪽은 목상재로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풍산현 소속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일직현은 고려시대 이전에는 번성한 현이었는데, 오히려 조선 초엽에 와서 역모 때문에 조정에 미움을 받고 나서 핍박을 받아 세력이 급격하게 약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직에 있는 조탑이라든지 고분군이라든지 이런 것을 보면 마을의 역사가 아주 오래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때 일직현이 번창할 때는 조탑동 일대가 안동에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고려시대 때는 탑리가 일직현 소속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풍산현 소속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7. 마치는 글
이상으로 3개동의 역사에 대하여 기술을 하였는데, 기록이 확실하게 없으니 고증할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 동네의 역사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만 기록이 잘 안되어 있으니 구전으로 밖에만 알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찾아보고, 삼국사기 등 역사책, 문집, 족보, 금석문, 묘지명 등을 찾아보고, 주위에서 들은 내용을 종합하여 최대한 객관적으로 우리 3개동의 마을 유래에 대하여 설명을 하려고 하였는데 오류가 있더라도 양해를 바랍니다(글쓴이 황현호).
첫댓글 회장님 대단하십니다 꼼꼼히 잘 정리 하셨내요 그래서 가문의 족보가 필요한 거지요 역사 공부 잘했습니다.
고향에 대한 것을 많이 알게되었습니다.
안동김 후손으로 자부심을 갖게합니다. ㅎㅎㅎ
향토 사학적인 의미를 부여한 회장님 노고애 큰박수를 보냅니다.
아무나 회장하는 것 아닌가 봅니다. ㅎㅎㅋㅋ
지금 풍천면 사무소 2층계단에 현으로 포시된 지도를 확대해서
벽에 걸어 두고 있는데 관심있게 봐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