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금동대향로와 부여박물관(부여익산답사 1일차)
삼일절과 다음 날 부여익산 답사를 다녀왔다. 내려간 것은 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처럼 백제금동대향로가 단독으로 전시됐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에 있는 국내 발굴 중 기억나는 것은 무령왕릉(1971), 천마총(1975), 그리고 백제금동대향로(1993)다. 이상하게도 천마총 발견 1년 뒤에 발굴됐던 황남대총은 기억에 나지 않는다. 백제금동향로는 내가 한국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진 후 발견됐기 때문에 특히 관심이 갔고 두어 차례 실물을 봤다. 이전에 본적이 있었지만 ‘사유의 방’에서와 같은 새로운 감흥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 다시 찾게 됐다.
돌아보는 동안 이곳을 다녀간 지 꽤 됐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미륵사지 박물관이 새로 지어졌으니 최소한 4,5년은 넘은 것 같다. 돌아보고 나니 4,5년이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간 발굴한 성과가 새롭게 정리되어 볼거리가 풍부해졌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말할 것도 없고 왕궁리오층 석탑 사리기 그리고 미륵사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기가 너무 아름다웠다. 이정도면 국뽕이 차올라도 괜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본 것은 백제금동대향로다. 아침 시작하자마자 들어갔기 때문에 사람도 적어 관람객의 방해 없이 한참 동안 볼 수 있었다. 역시 전시는 기법의 힘이 크다는 것을 다시 느낀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에서 이전에 보던 반가사유상과는 다름을 느꼈듯이 이번에도 이전과는 다른 감흥이 왔다. 과거에도 백제금동향로는 주연이었다. 그러나 이젠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주연으로 만든 전시였다. 보면 볼수록 향로의 매력에 빠져든다.
1993년 12월 12일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될 때부터 대단한 관심을 받았기에 몇 달도 지나지 않은 1994년 4월 19일부터 5월 1일까지 중앙박물관에서 전시했다. 이후 부여박물관에서 상설 전시돼 있었고, 2023년에는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30주년 맞이하여 부여박물관에서 <백제금동대향로 3.0>이란 특별전도 있었다. 내겐 1994년 전시와 부여박물관을 방문할 때마다 봤던 것이라 많이 익숙했지만 이번 전시를 본 후 몇 편의 논문을 읽어보면서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한 적합한 표현은 <백제금동대향로 3.0> 발간사에 있는 ‘국보 중의 국보’라는 말이 아닌가 한다. 그만큼 대단한 유물이란 것을 이번에 새삼 확인했다.
백제금동대향로는 높이 61,8㎝ 최대지름 19㎝ 무게 11.8㎏의 대형향로다. 청동으로 주조하고 금도금을 했다. 이귀영은 도금층이 명확하지 않아 금분을 칠하여 금을 입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273쪽) 그러나 <백제금동대향로 3.0>에서는 수은이 검출됐기 때문에 금을 수은에 녹인 후 표면에 바르고 열을 가해 수은을 증발시킨 ‘수은아말감기법’을 사용했다고 주장한다.(101쪽) 그리고 향로에는 12개의 구멍이 있는데 흡기공이 5개고 배기공이 7개라 한다.
흡기공과 배기공 각 5개소는 최상층 악사 앞과 뒤에 배치됐는데 앞쪽에 있는 조금 더 큰 것이 흡기구라고 했다. 나머지 배기공 둘은 봉황가슴 쪽에 배치했다. 봉황가슴 쪽에 배치된 것은 실제 향을 피워보면 봉황 입에서 나는 서기로 느끼도록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 아닌가 한다. 향로의 12곳 구멍 중 8곳 구멍은 도금 전에 가공한 흔적이 있는데 이것은 제작 후 향을 피워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살펴보고 다시 가공한 것으로 보고 있다.(백제금동향로 3.0 94쪽)
조경철은 <백제금동대향로 동물백과> 부록 논문에서 백제금동대향로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도교적 영향은 크지 않고 불교 유교의 사상적 배경에 도교적 요소가 약간 가미된 것으로 분석했다. 그러면서 기(용)-승(연화생)-전(선산仙山)-결(봉황)으로 이어지는 세계관이라고 했다. 여기서 조경철은 결(봉황)로 가는 단계에서 5악사가 등장하는 것을 유교에서 예禮에 따르는 악樂의 관점으로 보고 유교적 영향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봉황이 아래 다섯 악사를 배치한 것은 <서경書經/십삼경주소>에서 “순임금이 소소蕭韶라는 음악을 지어 연주할 때 봉황이 날아왔다.”라는 문구와 연관 짓고 있다.
이에 반해 조원교는 기氣가 용의 입을 통해 발현하는 기氣-화생化生-연화생蓮化生-신산神山의 세계관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다섯 산과 다섯 악사는 오행설의 영향이라고 했다. 오행설에 대한 관점은 조경철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박산향로는 불교가 전래하기 전부터 있었고, 연꽃 역시 동양의 기본적 표현이기 때문에 연꽃을 무조건 불교와 연결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보다는 인물표현이나 복장이 불교적이 아니고 신선사상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김자림도 불교의식에 따른 공양행위와 구분되는 왕실의 기념비적 성격이 금동대향로에 담겨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152쪽) 학계에서는 제례에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주류라고 한다.
제작연도에 대해 김자림은 백제금동대향로가 한나라의 향로와 불제 북제의 향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제작시기를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다. 조원교는 신산세계를 나타낸 평양 출토 박산향로나 박산단지 등과 같이 기/연화화생 표현을 보여주는 6세기 전반에 제작된 백제 무령왕릉 출토 은제탁잔, 6세기 후반에 제작된 부여 외리 출토 문양전과 비교하여 백제금동대향로의 표현과 도상이 더욱 다양하고 세련된 모습이므로 이들 보다는 조금 늦은 7세기 전반이라고 보고 있다.
이귀영은 ‘주성분인 구리와 주석 합금비 85:15로 납 동위원소로 볼 때 원료의 산지는 중국 북부 영역 중에서도 요령성遼寧省, 감숙성甘肅省의 것과 유사하다’고 했다.(272쪽) 이것 때문에 김자림은 중국에서 재료를 수입했을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기법 상으로 백제금동대향로는 ‘중공식실납법中空式失蠟法’으로 제작됐다.
중공식실납법은 안쪽거푸집 위에 밀납으로 형태를 만든 다음 다시 흙으로 덮은 후 열을 가해 밀납을 녹인 후 쇳물을 부어 만든 것이다. 백제금동대향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연화대를 받치고 있는 용형태의 다리 부분과 연화대는 따로 만들어 조립했지만 상부 박산 부분과 봉황은 CT촬영 결과 하나로 제작된 것이 확인됐다. 이렇게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주조기술은 국보 제78호 반가사유상과 관련해 보면 좋을 것이다.
이외에도 부여박물관에는 꼭 봐야할 사리기 등이 대단한 유물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금 세공품과 금동광배 그리고 건축적으로는 부여군수리에서 출토된 백제 문양전이다.
첫 번째로 부여박물관이나 익산 박물관에 보면 크기가 5㎜ 정도 작은 금 세공품에 조그마한 금 알갱이가 정교하게 붙어있는 것이 많이 있다. 이런 기법을 누금세공기술鏤金細工技術이라하는데 이 기술에 대하여 이귀영은 이 기술은 “금속의 작은 알갱이나 세선을 금속 표면에 붙여 독특한 패턴과 질감을 만드는 방법으로 선을 이용하는 세선세공과 알갱이를 이용하는 입금세공으로 나뉜다. 전자는 필리그리(Filigree), 후자는 그래뉼레이션(Granulation)이라 불린다. 이 기법은 따로 따로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알갱이와 금선을 함께 사용하여 접합하는 방식이 많이 활용된다.”고 설명하고 있다.(186쪽) 이귀영은 이 기법이 무령왕릉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웅진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두 번째로 내가 몇 차례 봤지만 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하는 금동광배다. 나는 백제금동향로와 더불어 백체 예술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금동광배에 대한 것은 <百濟 金屬工藝技術史 硏究/李貴永>에 제작 기법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한 내용이 있어 금동광배를 이해하는데 도움 됩니다. 이것을 소개하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이 광배는 현존하는 삼국시대의 광배 중에서 균형 잡힌 구성미, 유려하고 섬세한 문양과 능수능란하게 발휘된 제작기법 등에서 백제 사비기의 조금기술 수준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불상의 두광으로 사용된 원형광배(12.6cm)로서 1988년 부여의 부소산성 동문지에서 출토되었다.
앞면은 光心部, 蓮花文帶, 連珠文帶, 忍冬唐草文帶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양은 모두 투조되었는데, 투조문 주위로 점열문을 넣어 보다 화려하고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연출되어 있다. 투조된 금동판 뒤에 동판을 겹쳐 가장자리에 못을 박아 리베팅하여 제작하였다.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불상머리에 붙은 촉에 꽂아 장식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연화문은 큰 6엽 중판연화문의 사이사이에 이보다 작은 연판들을 넣어 서로 대비되도록 하였고, 연판을 투조하고 연판 안쪽과 투각된 바깥쪽으로 점선을 넣고 동시에 연판을 조금씩 들어 올려 보다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하였다.
앞면에는 크고 작은 12엽 연판의 사이사이에 또 다시 인각 원문을 에워싼 집선문을 넣어 연판들 사이에서 또 다른 연판이 끊임없이 생성됨을 표현하고 있다. 인동당초문대는 유려하고 세련된 흐름의 넝쿨과 크고 작은 잎의 연속으로 구성하여 생동감이 넘쳐나고 있다. 광심부와 주연부에는 연주문대가 타출되어 있다. 뒷면에 ‘何多宜藏法師하다의장법사’라는 명문이 있는데, 제작에 참여한 발원자로 보인다.
이 광배는 제작기술 상으로 볼 때 금판을 자르고 접는 판금가공기법, 단면을 깨끗하게 끊어낸 투조기법, 유려한 투조선을 따라 정밀하게 새겨 넣은 선조기법과 적절한 위치에 원문을 찍어 넣어 통일성을 준 인각기법, 연주문의 타출과 연판 내부의 투조와 의도적인 작은 들림에 이르기까지 정을 이용하여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제작기법이 총 망라되어 있다는 점에서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한성기부터 이어 온 彫金技術을 아우르는 것임과 동시에, 사비기 금속공예의 수준을 한 눈에 보여주는 절정판이라 평가할 수 있다.(246~7쪽)
세 번째로 소개할 것은 부여군수리 출토 백제 문양전이다. 이 문양전은 건축을 전공하고 있는 내겐 매우 의미있는 유물이다. 지금 상태를 보면 조적식 벽에 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형태는 지금도 집에서 벽을 쌓은데 많이 사용하는 블록과 같은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가운데를 비우는 것은 부재의 무게를 줄이기 위함이다. 단층일 경우는 큰 문제가 없지만 여러 층을 올라갈수록 재료무게는 건물구조에 큰 부담을 주게 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료 가운데를 비워 무게를 줄이는 것이다. 이 중공문양전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왜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 그때도 하중을 줄여야만 하는 건물이 있었을까? 백제에서도 2층 이상의 건물 등을 짓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하는 등등...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참고자료
- 향을 사르다-백제금동대향로 3.0/발굴 30주년 특별전 도록/국립부여박물관/2023.9
- 백제금동대향로 동물백과/조부나 등/유물시선/2022.10
- 百濟 金屬工藝技術史 硏究/李貴永/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박사학위논문
- 부여 능산리 출토 백제금동대향로 연구/조원교/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문화예술콘텐츠학과/박사학위논문
- 박산향로를 통해 본 백제금동대향로의 양식적 위치 고찰/김자림/한국미술사학회/미술사학연구 Vol.- No.249/2006
- 백제금동대향로의 조형성분석에 관한 연구 (중국 금상감박산향로와 비교분석)/신대택, 박승철/한국디지털정책학회/디지털융복합연구 vol.11, no.9/2013
- 부여박물관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