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집(樓)이란
2층 다락집이라 말하는 루(樓)는 대개 산천경개가 수려고 전망이 탁 트인 곳에서 볼 수 있읍니다. 風光을 즐기고 노니는 장소로서, 아래층에는 기둥만 서 있는 공간으로 비워두는 게 상례입니다. 창덕궁 후원에 있는 규장각(奎章閣)의 경우 규모가 큰 2층집인데, 윗층만 따로 주합루(宙合樓)라 부릅니다. 1층은 집무실인데 반해 2층은 풍광을 즐기며 쉬는 휴게실 같은 데가 아니었나 짐작해 봅니다. 주합루에서 바라보는 창덕궁 후원(後苑, 또는 祕苑)의 풍광은 어디다 내놔도 빠지지 않으니까요.
조선 3대 명루(名樓) : 대동강 부벽루 / 진주 촉석루 / 밀양 영남루
*대동강 부벽루(浮碧樓) : 이제는 쉽게 갈 수 없는 평양, 대동강 변 금수산 모란봉 동쪽 깎아지른 청류벽 위에 서 있답니다. 고구려 때인 393년 영명사(永明寺)의 부속 건물로 지어진 오랜 역사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합니다. 부벽루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피하고 시 2수를 올림으로 가름코자 합니다.
부벽루(浮碧樓) / 이색(李穡, 고려말)
昨過永明寺 暫登浮碧樓 (작과영명사 잠등부벽루)
城空月一片 石老雲千秋 (성공월일편 석로운천추)
麟馬去不返 天孫何處遊 (인마거불반 천손하처유)
長嘯倚風磴 山靑江自流 (장소의풍등 산청강자류)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빈 성에는 조각달이, 옛 바위(조천석*) 위엔 구름이 천년을 떠도네.
기린마*는 가고 오지 않는데, 하눌님 자손*은 어디에서 노니시는고?
바람 부는 돌다리에 기대 휘파람 부노니, 산은 푸르고 강물은 절로 흐르네.
☞ 부벽루 근처 청류벽에는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이 기린을 길들였다는 기린굴(麒麟窟)과 기린을 타고 승천했다는 조천석(朝天石)이 있다고 합니다. 하눌님 자손(天孫)은 물론 동명성왕 주몽(朱蒙)을 지칭합니다.
대동강(大同江) / 정지상(鄭知常, 고려 중기)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우헐장제초색다 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대동강수하시진 별루년년첨록파)
비 갠 긴 둑에 풀빛 짙어가는데, 님 보내는 남포엔 구슬픈 노래소리.
대동강 물은 언제나 마를까?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보태니..
정지상은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과 동시대 사람으로 詩文뿐만 아니라 정치적 라이벌이었읍니다. 그는 고려 아니 조선까지 포함해도 최고의 서정시인이라 할 수 있지요. 김부식의 견제와 모함으로 비운의 죽음을 맞았음에도 위의 시는 浮碧樓에 계속 걸려있었답니다. 가끔 떼어놓기도 했지만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면 다시 걸었다나.. 이 시의 다른 제목은 ‘님을 보내며(送人)’ 입니다.
☞고려 때 김황원(金黃元)이란 문신이 있었는데, 부벽루에 올라 그 안에 걸려있는 시구들이 한결같이 신통치 못하다고 모두 떼어 태워버립니다. 그리고 스스로 시를 지어 걸기로 작정하지요. 하루종일 머리를 짜내다가 해가 기웃기웃 넘어갈 무렵에야 겨우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긴 성 한쪽으로 넘실거리는 물 물 물, 넓은 들 동쪽으로 점점이 산 산 산)”라는 한 소절을 얻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 짝을 이루는 對句를 채우지 못하고 통곡하며 내려왔다고 야화는 전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또래 중늙은이들이 초등학교 댕길 때 교과서에 나왔다는 걸 기억하시는지요, 아마도 4학년인가 5학년 책에..
(자세한 내용을 아시는 분은 댓글을 부탁합니다.)
*진주 촉석루(矗石樓) : 촉석루에 대해 까먹은(?) 벗님들도 임진왜란 때 왜장을 껴안고 남강으로 뛰어든 논개의 스토리는 기억하실 겁니다, 중·고딩 시절 머리 쥐나게 외웠던 변영로 시인의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와 함께 말입니다. 다만 강낭콩꽃이 그렇게 푸른지, 양귀비꽃이 그다지도 붉은지는 크게 신경쓰지 못했습니다(변선생님 죄송!). 촉석루가 고려 말 공민왕 때 축조되었는데 그 후 兵火로 여덟 차례나 소실되었다가 1960년 이승만 대통령 시절 현재의 모습으로 증축됩니다. 끝으로 논개는 기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적시하면서 시 한 수로 때우고자 하니 너른 이해 바랍니다.
촉석루(矗石樓) / 김성일(金誠一, 조선 중기)
矗石樓中三壯士 一盃笑指長江水 (촉석루중삼장사 일배소지장강수)
長江萬古流滔滔 波不渴兮魂不死 (장강만고유도도 파불갈혜혼불사)
촉석루 안에서 세 장사들, 한잔 술에 웃으며 긴 강물을 가리켰노라.
강은 만고에 도도히 흐르나니, 파도가 그치지 않듯 충혼도 영원하리.
김성일은 일본통신사로 갔다 돌아와서 그들이 쳐들어올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합니다. 왜란이 발발하자 그 책임을 물어 파직되었다가, 유성룡의 변호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받아 의병을 모집하고 진주성을 지키는데 힘을 다합니다.
여기서 세 장사는 진주성(晉州城)을 지키다가 전사한 충청병사 황진(黃進),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냥 가기 섭섭하여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지은 7언절구 한 수 보탭니다.
촉석루에 올라(登矗石樓) / 이승만(李承晩, 1875~1965)
彰烈祠前江水綠 義岩臺下落花香(창렬사전강수록 의암대하낙화향)
苔碑留得龜頭字 壯士佳人孰短長(태비류득구두자 장사가인숙단장)
창렬사* 앞 강물은 푸르고, 의암대* 아래로 지는 꽃 향기롭구나.
이끼 낀 비석에 구(龜)자 남아있는데, 장사와 가인은 누가 오래 남을꼬.
창렬사는 진주성 싸움에 공을 세운 김시민, 김천일, 황진, 최경희 등 39인의 신위를 모신 사당입니다. 의암대는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떨어진 바위 이름이지요.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한시에 능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실제로 접하니 대단한 내공이 느껴집니다.
*밀양 영남루(嶺南樓) : 신라대에 절(寺刹)이 있었던 자리에 고려 예종 때 영남루를 짓고, 공민왕 시절 밀양 부사가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임진왜란 등 兵火로 여러차례 소실되었다가 헌종 때인 1844년 부사 이인재가 다시 지은 것이 현재의 건물이라네요. 누대 1층에는 ‘嶺南第一門‘ 이란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조선 후기 건축물의 진면목을 접할 수 있는 좋은 소재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 3대 명루에 순위를 메긴다면 영남루가 은메달 감인데, 논개의 활약(?)으로 촉성루에 이어 3위로 밀렸습니다. 상세한 프로파일은 생략키로 하고, 역시 시 한수 올리면서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영남루(嶺南樓) / 성원도(成元度, 고려 후기)
朱欄突兀出雲天 列峀連峰湊眼前 (주란돌올출운천 열수연봉주안전)
下有長江流不盡 南臨大野闊無邊 (하유장강유부진 남림대야활무변)
붉은 난간 우뚝 구름 위로 솟고, 늘어선 산봉우리 눈앞에 펼쳐지네.
아래는 강이 끝없이 흘러가고, 남으로는 가없는 큰 벌에 임해있네.
고려 충목왕 1년(1344년) 즈음, 생몰연대 미상인 성원도가 지은 시로 앞부분만 올렸읍니다. 이를 차운한 시를 비롯 영남루를 읊은 많은 절창이 있으나 갈 길이 바빠(?) 생략합니다,
아깝게 메달권에서 탈락된 명루 : 남원 광한루와 삼척 죽서루 그리고 울산 태화루, 제천 한벽루, 여주 영월루
*광한루(廣寒樓)는 춘향이와 이몽룡이 사랑을 속삭이던 곳으로 달나라에 있다는 궁전 광한전(廣寒殿)에서 차용해 온 명칭이지요. 원래 조선 태조 때 황희가 귀양갔을 때 지은 것으로 광통루(廣通樓)라 하였으나, 세종 연간에 정인지가 月宮 이름을 따서 명명합니다.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인조 때 남원부사가 다시 짓습니다, 전면에는 부사 이상억이 쓴 ‘湖南第一門’ 이란 판액이 걸려 있습니다.
*죽서루(竹西樓)는 관동팔경 중 유일하게 바다가 아닌 강을 끼고 있는 건축물입니다. 건립 연대를 알 수 없으나 고려 원종 7년(1266년) 이승휴가 西樓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워졌겠지요. 조선에 들어와 태종 연간에 김효손이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고 전합니다.
*태화루(太和樓)는 중화요리집 이름이 아니고 울산 태화강 나룻터에 위치한 누각으로, 7세기경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고려 성종 연간인 997년에 태화루에 올라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 초 동국여지승람에는 권근 서거정 등이 남긴 기문과 중수문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중 불에 타 소실 된 것을 근래에 들어 다시 지어 2014년에야 완공됩니다.
*한벽루(寒碧樓)는 고려말 충숙왕 4년(1317년) 제천 청풍현(淸風縣)이 군(郡)으로 승격됨을 기념하여 세웠다고 합니다, 원래는 청풍면 읍리에 있었는데 충주땜 건설로 수몰될 처지라 현재의 물태리로 이전합니다. 누각에는 추사가 쓴 ‘淸風寒碧樓’ 라는 현판이 걸려있답니다.
*영월루(迎月樓)는 ‘달맞이하는 누각’ 이란 뜻으로 강원도 영월(寧越)과는 무관합니다. 경기도 여주에 신륵사로 접어들면 오른쪽으로 말바위(馬巖) 언덕에 위치해 신륵사와 남한강 전경이 시원스레 펼쳐집니다. 18세기 말경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 메달권 밖 누각에 대한 푸대접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춘향전 중 이몽룡이 어사 출도 전 변삿도 생일잔치에서 일필휘지로 갈기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바로 그 시를 붙이니 너그러이 봐 주시길..
운(韻) 자는 기름 膏, 높을 高,
金樽美酒千人血 玉盤佳肴萬姓膏 (금준미주천인혈 옥반가효만성고)
燭淚落時民淚落 歌聲高處怨聲高 (촉루락시민루락 가성고처원성고)
금 슬통 맛좋은 술은 천인의 피요, 옥 쟁반 맛난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농 떨어질 때 백성 눈물 흐르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성 또한 높더라.
** 다음에는 계곡 좋고 물 맑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이름난 정자(亭)를 찾아가 보겠읍니다.
PS : 고려말 김황원의 이야기는 1962년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국어교과서 16페이지에 나오는 걸로 확인되었읍니다. 필자의 경우 3학년 댕길 때가 1960년도이니 그 이전에도 게재되었을 가능성이 있읍니다. 초딩 3학년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걸로 보아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조숙(?)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