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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 여행] 조선의 선비 권상하의 황강영당 및 수암사...........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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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 여행] 조선의 선비 권상하의 황강영당 및 수암사...........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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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유랑자가 권상하의 黃江影堂[황강영당] 및 遂庵祠[수암사]를 방문해 본다. 사실 황강영당을 첫 번째는 방
문에서는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들어가 보지를 못했고 아쉬운 마음에 발길을 돌려야만 했었다. 두번째는 한수면을
마지막 들러보기 위해 다시 방문하여 돌아 나오는 길에 때마침 관리인으로 보이는 한분이 문을 열고 있어 반가운
마음에 차를 급하게 돌려 방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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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모르면 손발이 개고생 한다고 하였던가 알고 보았더니만 황강영당을 관람하고 싶으면 주차장 우측 안쪽에 영
당을 관리하는 가옥[관리사]이 하나있는데 그분에게 문의를 하면 관람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몰랐으니까, ㅠㅠ
참고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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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강영당은 제천시 한수면 송계 리에 위치한 1726년 세워진 서원으로 기록되며 일명 ‘한수재’ 또는 황강 영당
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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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유랑자가 2013년 괴산 여행때 萬東廟[만동묘]에서 알게 되었던 그 인물, 노론의 거두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
를 11년이 지나서야 이곳 제천에서 그의 영당을 보게 된 것이다. 참으로 오래도 걸렸다. 괴산 화양동계곡 에는 송
시열을 배향한 화양서원이 들어서 있다. 어쩌면 조선 팔도에서 가장 위세 높은 서원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곳이기
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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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조선왕조실록에 3천번이나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로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사회는 우암
의 그 영향력이 그의 제자들에 의해 계속해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우암의 큰 제자 권상하가 이곳 황강으로 은
거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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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강영당은 제천시 한수면 송계 리에 위치한 서원은 1726년 세워진 황강서원으로 기록되며 ‘한수재’ 라고도 불
리는 곳이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황강영당’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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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角門[일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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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675년 송시열의 伸辨疏[신변소]에 참가하고 난 후 스승 송시열이 유배를 가게 되자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는 정치를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은거할 곳을 찾던 중 한양과 멀리 떨어진 오지 남한강과 월악산이 어
우러진 황강이 있는 깊은 계곡[지금의 송계계곡]으로 숨어들어 학문에만 힘썼다. 참고: 伸辨疏[신변소란: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임금에게 올리던 상소문]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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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악산 계곡 황강으로 들어온 권상하는 1686년 10월 한수재를 지었으며 이때 송시열의 방문으로 가을달밤에 비
친 황강의 모습을 보고 [찬물에 비친 서재]라는 뜻의 寒水齋[한수재]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고 그해 11월에는 열락
재를 지어 후학 양성에만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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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한수재‘라고 일컫는 이유는 바로 ’수암사’가 조선후기 학자인 권상하의 사당으로 호가 수암, 한수재 라
고 하여 그리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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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齋室[재실]이다. 이곳은 제향 때 사용되며 유림이 학문을 강론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재실건물은 工자형 평면의 목조기와집으로 대청 1, 방 7, 부엌 2로 구성되어 있으며, 팔작지붕과 우진각지붕이 겸비된 5량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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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689년 6월 스승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자 그의 유품을 거두고 유언에 따라 화양동 계곡에 ‘만
동묘’와 창덕궁 안에 ‘대보단’을 세웠다. 그 후 숙종이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우의정과 좌의정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벼슬길엔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한수재를 지은 지 32년이 흐른 1721년 8월29일 한수재 에서 幽
冥[유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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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황강 영당을 가려면 제천 8경에 속하는 송계계곡 입구 제천시 수산면 탄지 삼거리에서 송계 3교를 건너면
바로 길 오른쪽에 제천 황강 영당 및 수암사라는 안내 입간판을 볼 수 있다. 오늘날 황강 영당은 조선 주자학의 대
가인 송시열과 그의 제자인 권상하와 권상하의 제자 한원진, 윤봉구, 권욱의 영정을 봉안하는 황강영당과 한수재,
수암 권상하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수암사]으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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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江影堂[황강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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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계단 위의 정문에 들어서면 좌측에 고택 寒水齋[한수재], 우측에 황강영당 그리고 정면의 계단 위에 遂庵
祠[수암사]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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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황강 서원은 권상하의 사후 1726년(영조 2)에 건립하고 다음 해인 1727년 黃江書院[황강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고 다시 황강영당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여기엔 ‘황
강영당’으로 개칭된 이유가 있었다. 대원군은 1864년 전국 서원의 실태를 조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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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원의 폐단과 존폐 문제를 제기한 후 제일 먼저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송시열의 만동묘를 철폐하게 이른
다. 이어서 1871년에는 대대적인 서원 철폐령을 내리면서 1868년에는 사액서원을 제외한 ‘一人一願[일인일원]’
을 원칙으로 전국 1,000여 곳의 서원을 대부분 정리해 버렸다. 사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여기에는 과거 대원군
의 한이 서린 이유가 있었다. 물론 萬東廟[만동묘]라는 비굴한 이름은 조선의 나약함을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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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하의 '제'를 올리는 수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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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동묘란 그 이름은 화양동계곡 첨성대 암벽에 새겨진 우유부단 했었던 선조의 친필 ‘萬折必[[만절필동]’에서 따
온 이름이다. ‘萬折必[[만절필동]이란 ’‘황하는 아무리 곡절이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이 말
은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신하된 도리를 결코 그만둘 수 없다는 비굴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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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이후 인조의 삼전도 굴욕이라는 항복이후 후금[청]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크게 고조돼 있던 터라,
만동묘를 끼고 있는 화양서원이 하는 일은 무조건 옳다며 모두 만동묘에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던 때였다. 여기
에는 대원군의 일화가 있다. 흥선대원군의 破落戶[파락호] 시절 화양서원 앞에서 큰 봉변을 겪었다고 한다. 여기
에서 “破落戶[파락호]”란 재산이나 권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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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사는 황강영당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는데 권상하의 위패를 봉안하는 사당이다. 권상하는 호가
遂庵[수암] 또는 寒水齋[한수재]로서 송시열의 수제자였고 송시열에 이어 기호학파의 지도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
긴 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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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흥선 대원군[이하응]”처럼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파락호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당시 만동묘에 들어가거나 그 앞을 지나가려면 누구나 초입의 하마 소에서부터 걸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만동
묘를 찾은 대원군이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무심코 하마소를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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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만동묘의 묘지기가 득달같이 달려 나와서는 그를 말에서 끌어내려 발길로 걷어차는 등 갖은 모욕을 다 주
었다. 훗날 고종 때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을 불러왔을 정도로 그악 스럽던 화양서원의 횡포는 오랫동안 지
속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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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주위에는 막돌담장을 두르고 일각문을 설치했으며, 일각문 바깥에는 齋室[재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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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개망신을 넘어 복날 개 패듯이 얻어맞은 대원군은 훗날 정권을 잡은 뒤 화양서원과 만동묘를 ‘도적놈들의 소
굴’이라며 철폐해 버렸고, 이를 빌미로 다른 서원들까지도 문을 닫도록 명령했다. 이때 權尙夏,[권상하:1641~1721]
의 황강 서원도 철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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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황강 서원은 권상하의 거주 공간인 한수재에 소재한 것이 아니라 한수재로부터 황강 상류 지역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권상하 사후에 지어진 것이긴 하지만 다른 사당이나 서원보다 넓게 조성되어
있으며 조금은 높은 담장으로 둘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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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안의 오른편 담장 앞에, 권상하가 1797년에 황강서원에 세웠던 廟庭碑[묘정비]와 ‘遂庵先生舊宅之碑[수암
선생구택지비]’가 있다. ‘수암선생구택지비’는 玉所[옥소] 權攝[권섭:권상하 조카]이 쓴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원
래 수암의 집에 세워진[1727년] 것을 이곳에 옮겨왔다고 한다. ‘寒水齋[한수재]’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고택은 원
래 수암이 거주했던 집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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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영당건물은 수차 중수된 것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목조기와집이다. 영당건물의 남측에는 송시열의
필적으로 된 ‘寒水齋[한수재]’라는 편액이 있으며, 동측에는 초서로 된 ‘黃江影堂[황강영당]’이라는 편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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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면서 한수재의 서재로 사용하던 건물에 영정을 봉안하면서 黃江書院[황강서원]
에서 黃江影堂[황강영당]으로 개칭되었다.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 지구로 편입되면서 1983년 현재의 위치인
송계 리로 옮겨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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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송시열은, 제자 권상하의 巨室[거실]을 ‘遂菴[수암]’과 ‘寒水齋[한수재]’라고 이름 지어 주었는데, ‘수암‘이란
薛瑄[설선:1389~1464)의 讀書錄[독서록]에 “내 마음이 진실로 배움에 뜻을 두면 하늘이 내 소원을 이루어준다. ”라
는 구절에서 뜻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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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의 조카인 권섭의 문집인 玉所稿[옥소고]가 서가에 꽂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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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에 따라 황강영당으로 개칭되었으며 그 자리에 송시열(宋時烈) · 권상하(權尙夏) ·
한원진(韓元震) · 권욱(權煜) · 윤봉구(尹鳳九) 5인의 영정을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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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있는 영정들은 모두 假本[가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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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재’는 朱子[주자]의 ‘재거감흥’ 이란 20수중 제10수 시 중에서 “秋月照寒水[추월조한수: 가을 달이 차가운 물
(맑은 물)을 비추는 것과 같이 분명하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道[도]를 깨우친 사람의 모습, 도를 깨달은 사
람의 밝은 마음을 의미한다. 아무튼 권상하는 조선의 대표 성리학자인 율곡 이이와 우암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
학파의 정통을 잇는 후계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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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권상하는 서울 출신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致道[치도], 호는 遂菴[수암], 寒水齋[한수재]이며, 시호는 文
純[문순]이다. 그리고 권상하는 1721년 향년 만 80세를 일기로 한수재 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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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림지 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원본 '권상하 초상'은 송시열(1607~1689) 학문의 정통 계승자로 평가되는 권상하
(1641~1721)의 79세때 초상화다. 제천 황강영당에 300년 넘게 봉안된 내력이 분명한 작품이다. 화면 위에 '한수
옹(권상하) 79세 진영(寒水翁七十九歲眞)'이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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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 청은 조선 숙종 어진 제작에 참여한 평양 출신 화가 김진여(1675~1760)의 '권상하 초상'을 2024년 8
월 22일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지정했다. 조선 숙종의 어진(임금의 초상) 제작에 참여한 평양 출신 화가 김진
여(1675~1760)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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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하가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5년 후, 1726년[영조2]에 黃岡書院[황강서원]이 설립되었고, 다음해에
賜額書院[사액서원]이 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한수재집:寒水齋集], [삼서집의:三書輯疑]등이 있다.
권상하의 대표적인 후학으로는 江門八學士[강문팔학사] 또는 '호중팔학사'라 불리는 윤봉구, 한원진, 이간, 채지
홍, 이이근, 현상벽, 최징후, 성만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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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팔학사는 그 수도 많고 학문 수준도 높아 李珥[이이]-金長生[김장생]-송시열-권상하로 이어진 정통 기호학파
의 학설과 정치적 입장을 계승하고 전파하는 데 크게기여한 인물들이다. 이들을 ‘강문팔학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淸風[청풍]의 黃江[황강: 지금의 충북 제천시 한수면]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강문 이란 말이 붙게 되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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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송계계곡이 있는 ‘한수면’이란 이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기호학파의 적통을 잇는 權尙夏[권상하:
1641~1721]의 호 ‘寒水齋[한수재]’에서 ‘寒水[한수]라는 이름을 따와 寒水面[한수면]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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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당의 동측 일각문 밖에는 인근에서 옮겨온 것으로, 1797년[정조 21]에 조성된 黃江書院廟庭碑[황강서원묘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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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당의 동측 일각문 옆에 1720년[경종 원년]에 조성된 遂庵先生舊宅之碑[수암선생구택지비]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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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강영당 찾아가기
주소:충북 제천시 한수면 미륵송계로 1801
(지번) 한수면 송계리 산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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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메모
▶1:당일 여행 코스= 송계계곡 8경(자연대,망폭대,덕주산성 남문, 망폭대, 와룡대, 팔랑소)
→덕주사(수경대, 학소대, 덕주산성, 황강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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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박 2일 여행 코스=의림지→박달재→(숙박)→송계계곡→덕주사→신륵사 → 하늘재
→귀가 → PS~1박2일 산책길=월악산 만수계곡길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1143,~ 걷기
좋은길 7선/거리2.0km/만수교~마의태자교~만수교[소요시간:6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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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박 3일 여행 코스
★.해설사가 직접 동행하는 가스트로 투어.[제천미식이와 떠나는 셀프맛여행]★
►체험안내: 가스트로 A, B코스 (각 코스별 식당 5곳)~사전예약 필수
-A코스 : 관계의 미학 -덩실분식 찹쌀떡 -마당갈비 영양밥 -빨간오뎅 -샌드타임
-B코스 : 대장금식당 -상동막국수 -이연순사랑식 -제천 맥주 -빨간오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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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삼한의 초록길→의림지→역사박물관 →솔밭공원→비룡담 저수지(생태숲)→ (숙박)
2일차:가스트로 A.B →중앙시장→달빛정원 → 교동 민화마을 →관란정 → (숙박)
3일차:한방엑스포공원 →탁사정 →배론성지 →박달재 →목굴암(박달과 금봉이사당)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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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찾아 가는길
▷*버스=서울-제천, 동서울종합터미널에서 30분 간격(06:30~21:00) 운행, 약 2시간 소요.
▷*열차[Itx.]무궁화=청량이-제천역 청량리 역에서 2시간 견격, [KTX 는 1시간 간격 운행]
약 1시간 53분 소요.[KTX는 1시간 소요]
►철도고객센터는 1544-7788,1588-7788이다.
▷*자가정보= 경부(중부)고속도로→영동(중부내륙)고속도로→평택제천고속도로→중
앙고속도로 → 남(북)제천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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