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입(滅入)
정한모
한 개 돌 속에
하루가 소리 없이 저물어 가듯이
그렇게 옮기어 가는
정연(整然)한 움직임 속에서
소조(蕭條)한 시야(視野)에 들어오는
미루나무의 나상(裸像)
모여드는 원경(遠景)을 흔들어 줄
바람도 없이
이루어 온 밝은 빛깔과 보람과
모두 다 가라앉은 줄기를 더듬어 올라가면
끝 가지 아슬히 사라져
하늘이 된다.
(시집 『카오스의 사족』, 1958)
[어휘풀이]
-소조한 : (분위기가) 호젓하고 쓸쓸한.
[작품해설]
‘점점 멸하여 들ㅇ어간다’는 다소 추상적인 의미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는 시적 화자가 미루나무에서 보고 느낀 가을의 공허감을 인간의 존재론적 차원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화자의 주간적 감정은 철저히 배제된 채 시각적 이미지만으로 가을을 제시하고 있다.
1연은 시간의 이미지를 제시한 부분으로, 1·2행에서는 ‘한 개 돌 속에 / 하루가 소리 없이 저물어 가듯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것을 차거움과 냉혹함의 정적인 것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에 반해 3·4행에서는 ‘옮기어 가는’ · ‘움직임’이란 시어에서 알 수 있듯이 동적 이미지로 변모한다.
2연은 도치법이 구사된 부분으로, 적막한 가을의 모습을 헐벗은 미루나무를 통해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소조한 시야’란 가을을 바라보는 화자의 쓸쓸한 마음을 뜻하며 ‘미루나무의 나상’이란 종말에 선 인간, 곧 무상한 인생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모여드는 원경을 흔들어 줄 /바람도 없이’는 바람도 없는 적막 속에 서 있는 미루나무의 외로움과 함께 인생의 허무감을 정적 이미지로 보여준다.
3연은 미루나무의 줄기를 묘사한 부분이다. 여름날의 화려했던 푸르름을 잃어버린 그것을 ‘이루어 온 밝은 빛깔과 보람 / 모두 다 가라앉은 줄기‘로 나타낸다. 젊은 날의 꿈과 영광을 잃고 황혼 길에 선 인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서 ’줄기를 더듬어 올라가면‘이란 표현은 ’나목‘을 보여 주기 위한 화자의 단순한 시선 이동이라기보더는 인생의 무상성, 유한성을 뛰어넘고 싶어하는 화자의 초월 의지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4연은 하늘에 맞닿아 있는 미루나무의 모습으로, 비록 육신은 지상에 묶여 있지만, 정신만은 삶의 유한적 한계를 극복하고 천상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화자의 태도가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처럼 이 시는 가을의 고독한 미루나무를 밑그림으로 하여, 시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때가 되면 멸입되어 자연에 귀의하게 된다는 철리(哲理)와 그것의 극복 의지를 암시적으로 보여 준다.
[작가소개]
정한모(鄭漢摸)
일모(一茅)
1923년 충청남도 부여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45년 『백맥』에 시 「귀향시편」 발표하여 등단
1972년 제4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73년 『현대시론』 발간
1983년 시선집 『나비의 여행』 발간
1975년 서울대학교 교수
197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84년 한국문화예술원장
1988년 문화공보부장관
1991년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1991년 사망
시집 : 『카오스의 사족(蛇足)』(1958), 『여백을 위한 서정(抒情)』(1959), 『아가의 방』(1970), 『새벽』(1975), 『사랑시편』(1983), 『아가의 방 별사(別詞)』(1983), 『원점에 서서』(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