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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묵 '태평초'로 여름나기 ...
거의 대부분이 부족하거나,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아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결핍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모든 것이 넘쳐나는 '과잉의 시대'다. 배고픔 가난보다 풍요가 좋은 거야 말할 나위 없겠지만 뜻밖의 부작용도 적지 않다. 특히 넘처나는 먹을거리 탓에 건강을 해치고 생명을 잃기까지 하니 .... 하지만 어쩌랴,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그 달고 맵고 쓰고 짜고 신, 五味는 거부할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인 유혹인 것을! 배는 고파도 모든 게 맛나던 시절이 있었다. 소백산 자락의 궁벽한 땅이 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이었으니, 사는 형편의 차이를 불문하고 그곳 사람에게 익숙한 먹을 거리의 대부분은 풀(?)이었다. 혹시 봄이 되면 밭두렁은 물로니요, 시내 낡은 집 황토 담장 아래에까지 지천으로 솟아나던 '개비름'이라는 이름의 풀을 아는지 모르겠다. 나는 삶아서 된장에 버무린 그 개비름도 나물로 먹고 자랐다. 흣날 도회의 삶을 살며 문득 그 개비름이 생각나 주변 사람에게 말을 꺼내면 대부분은 '어찌 그런 걸...'하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난 된장 맛 뒤끝에 찾아오던 쌉싸래하고 향긋한 그 맛이 오늘도 그립다.
조금은 한심해할지도 모르겠다. 그처럼 척박한 동네에서 무슨 여름철 보양식이 있을까, 하며 말이다. 그렇지만 난 지금도 고향에 들르면 가장 먼저 찾아가는 밥집이 있다. 바로 '묵밥'을 먹기 위해서다. 예전에는 '태평초'라 불렀는데 언제부터 '묵밥'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 풍요로운 시대에도 내게 생각나는 여름철 별미 음식으로는 최고 중의 최고다.
'태평초'는 메밀묵을 채 썰러 육수를 조금 붓고, 잘게 썬 김치와 다진 쇠고기, 구운 김 등의 고명에 양장으로 간을 맞혀 먹는 아주 간단한 음식이다. 먹는 것도 입안에 한 술 넣으면 숟가락을 빼내기도 전에 금세 부스러져 버리는 그야말로 후루룩이고, 돌아서면 금세 배는 헛헛하다. 그래서 노란 좁쌀 빛이 진한 밥 한 술을 남은 국물에 비벼 먹기도 한다. 찰기 없는 메밀을 근기 있는 조밥으로 보충하는 것이다.
나중에 알았다. 메밀은 찬 성질로 여름 철 더위로 달아오른 열을 식혀주는 데 맞춤한 식품이라는 것을. 또 메밀을 소화시는 데는 체지방이 필요해 더이어트에도 아주 효과적인 식품이라니, 내 고장 선조들은 후손들의 영양 과잉과 비만을 그때 벌써 예견했던 모양이다.
물론 그 어렵던 시절에 체지방이 소모되는 메밀로만 여름을 지낸 건 아니다. 푹 삶은 돼지고기 수육으로 영양을 보충하기도 했고, 내 고향 영주시 풍기읍에서 나는 인삼을 넣고 끓인 삼계탕을 먹을 때도 있었다. 특히 닭과 잉어, 또는 자라를 함께 고아낸 '용봉탕'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보양식은 어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하지만 난 그때도 지금도, 태평초 한 그릇이나 돼지고기 수육 몇 점이면 만족하고 행복하다. 아니, 그게 최고 중의 최고다. 특히 나같이 열 체질의 사람에게는 찬 성질을 지닌 메밀과 돼지고기가 제격이라니 몸의 반응이 참으로 신비하다.
藥食同源이라는 말이 있다. 벌써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도 그렇다. 당신은 여든을 목전에 두고서 딱 열흘 자리를 보전하시다가, 눈을 감기 반 시간 전 스스로 화장실을 다녀오실만큼 강건하고 꼿꼿하셨다. 그럼에도 생전에 특별히 보약을 들어서 몸을 챙기지 않으셨다. 그저 삼시 세끼 식사가 전부였다. 다만 쌀이나 보리는 근기가 없다고 조밥을 즐기셨는데 소식을 하셨다. 반찬으로는 소백산 자락에서 나는 나물과 된장을 즐기셨고, 고등어 반 토막이면 족하셨다. 어머니가 삼계탕이라도 끓어 드리면 그저 반 마리 정도에서 수저를 놓으셨다. 그런 할아버지도 여름이면 전분이나 밀가루로 차지게 하지 않는 순메밀의 생면이나 태평초는 한 대접을 다 비우시고 트림을 하셨다. 체질에 맞고, 사절기의 성질에 합당한 음식이 바로 최고의 보약이라는 것을 선조들은 몸으로 증명하셨다.
글 : 소설가 김정현, 일러스트 : 이영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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