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roken Appointment
Thomas Hardy
You did not come,
And marching Time drew on,
and wore me numb. -
Yet less for loss of your dear presence there
Than that I thus found lacking in your make
That high compassion which can overbear
Reluctance for pure lovingkindness' sake
Grieved I, when, as the hope-hour stroked its sum,
You did not come.
You love not me,
And love alone can lend you loyalty;
- I know and knew it. But, unto the store
Of human deeds divine in all but name,
Was it not worth a little hour or more
To add yet this: Once, you, a woman, came
To soothe a time-torn man; even though it be
You love not me?
깨어진 약속
토마스 하디 / 한재호 역
당신은 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시간은,
날 마비시켰어요.
하지만 사랑스런 당신이 여기 없는 것보다,
당신의 마음 속에, 내키지 않음 따위는 연민(憐憫)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자애로운 마음이 당신 안에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슬프게 했어요. 희망의 시간이 다 되었을때,
당신은 결국 오지 않았어요.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요.
오직 사랑만이 당신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 난 알아요. 그리고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인간의 신성한 행위라고 이름 붙여져 있는 것들 중에 다음의 것을 더하는 일은
약간의 시간을 들여서라도 해볼만 하지 않았나요?
여인이여, 그대 일찍이 와서
세월에 찢겨진 한 남자를 위로해 줄 수는 없었는지.. 비록 날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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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어느 날, 화자랑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던 사람이 약속한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의, 화자의 실망한 마음을 애절하게 잘 드러낸 시 입니다. 약속했던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까닭을 시인은 2연 첫 부분에서 'You love not me, And love alone can lend you loyalty,' 즉,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그 마음이 약속을 충실하게 지키려고 했을텐데, 그런 마음이 없어서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에서 화자가 슬퍼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 상대방이 약속을 어겼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1연에서 시인이 말하듯이, 나를 꼭 사랑하지 않아도, 사람을 향한 연민 혹은 인간애(lovingkindness)같은 것이 그 사람 마음 속에 있었다면, 오는 것이 설사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나를 위로해 주려고 와줄 수도 있었을텐데, 그런 자애로운 마음이 상대방에게 없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 화자를 더욱 슬프게 하는 이유입니다.
실연당한 사람을 찾아가 위로해주는 것은, 우리가 신성하다고 말하는 인간의 많은 행위들 위에 하나를 더 얹는 행동일수도 있었을텐데, 촌각(寸刻)이라도 고려해 볼만한 가치가 없었던 것일까요?
상대방에게, 자신을 사랑해주는 마음 뿐 아니라 동정해 주는 마음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화자의 심정이 너무도 가슴 아프게 전해져옵니다.
**시험이 끝났지는 한 일주일 됐는데, 이제야 비로서 글을 남깁니다.(은밤님.. 너무 죄송해요)
오늘이 스승의 날이라서 모교에 갔었습니다. 이 날 저는 총 세 분의 교수님들을 뵙고 왔는데, 두 분은 제 전공인 수학과 교수님들이시고, 한 분은 영문과 교수님이십니다. 앞의 두 분을 찾아간 것은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는, 평범한 언급에 해당되겠지만, 제가 영문과 교수님을 찾아가게 된 것은 약간 의아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것 같아서, 잠깐 제 소개도 할겸 너무 길지 않게 그 이유를 적어보겠습니다.
제 전공은 수학이지만, 학부 2학년 때 어느 순간 수학만 하는 것이 너무 지루하게 느껴져 다른 쪽에도 관심을 찾던 중 영문학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원래 문학을 좋아하긴 했는데, 국문학은 그 전에 많이 접해봐서, 이전까지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전혀 생소한 분야인 영문학을 한번 배워보고 싶었습니다. 그 때부터 전 영문과에 개설되는 영문학 과목을 많이 듣게 되었는데, 영문학사, 미문학사, 미국시, 미국 소설, 영국 소설, 셰익스피어 비극 등 이런 과목들을 들었습니다. 근데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재밌게 들었고, 졸업 후에도 문학을 계속 좋아하게 해준 수업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영국소설' 이라는 강좌였어요.
그 때 그 수업에서는 총 세 개의 영국소설을 읽었는데, 메리 쉘리의 '프랑켄 슈타인'(Frankenstein), 토마스 하디의 '더버빌가의 테스'(Tess of the D'urbervilles),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오지'(Heart of darkness) 라는 소설이었어요. 그 중 전 "더버빌가의 테스'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때부터 저는 하디라는 작가를 굉장히 좋아하게 되었어요. 그 당시 이 과목을 가르쳐주셨던 교수님은, 당시 영어 소설을 읽는 것에 익숙치 않던 저에게 제가 오피스로 찾아가서 해석이 잘 안되는 문장들을 여쭤볼 때마다 항상 친절하고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마 그 교수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영문으로 읽다가 지쳐 그냥 번역본을 구해서 읽었을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냥 한글 소설 하나 읽은 것으로 끝나고 말았을테니, 그 이후 영문학에 특별한 관심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 덕분에 전 영어로 읽어보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우리말과는 다른 영어라는 언어의 다양함과 미묘함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이후에 다른 영문학 작품을 읽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 교수님께서는 토마스 하디를 전공하셨는데, 그래서 테스를 배울 때 선생님께 작품과 작가에 대해 다양한 배경지식을 들어가며 공부를 했었고, 그 때문에 제가 이 소설과 이 작가를 유난히 더 좋아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후로 저는 하디의 소설 중 '비운의 쥬드'(Jude the Obscure)라는 작품을 더 읽었고, 나중에 하디가 시인으로서도 굉장히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고 그의 시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디가 시인으로도 작품을 많이 남겼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전 하디의 "selected poems" 라는 시집을 구입했고 그 후 시간 날 때마다 거기 있는 시들을 읽었는데, 그 중 어떤 것은 잘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대게 많은 시들이 한 두 연이 잘 이해가 안돼 완전히 이해를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교수님을 방문했을 때, 하디의 시집을 들고 가서 제가 잘 몰랐던 시들을 질문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자신도 오랫만에 하디 시를 읽게 돼 너무 좋다고 하시며 제가 여쭤보는 시들을 같이 한줄 한 줄 읽어가시며 이해가 미흡했던 부분들을 알려주셨는데, 오늘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 중에 하나가 지금 올리는 "A Broken Appointment"라는 시 입니다. 예전에 제가 이것의 마지막 부분이 이해가 잘 안되서 무척 답답해 했었는데, 오늘 드디어 선생님께서 그 궁금증을 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시험도 끝나고, 얼마 전 은밤 님께 시험이 끝나면 꼭 하디 시를 올리겠다고 약속을 드렸기 때문에, 오늘 이 시를 이해하고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된 상태에서 이곳에 이 시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첫댓글 토마스 하디의 시는 배우지 않았는데 ...번역도 고맙고요. 곰곰히 읽어 보겠습니다.
1. 늦어서 죄송하다고 말해 준 것이 고맙습니다. 그러나 늦을 것도 죄송할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원인은 없지만 결과는 고마운 일이 되었습니다. 2. 아래에서 세 번째 줄에 this는 마지막 두 줄을 지칭하는데, 번역시만으로는 그 사실을 알기가 어렵네요.
3. 그런데 하디는 처량한 하소연을 하고 있고 이성이 막혀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러 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동정심으로라도 만나러 와주었으면 하는 것이 바람맞은 사람의 불쌍한 심정이긴 하겠지만 상대방으로서는 그런 상황에서 간다는 것은, 아무리 동정심이 하늘을 가린다 해도 이미 번지수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라서, 있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가능합니다. 사랑하지는 않지만 동정심으로 만나주는 일. 그런데 이때는 상대방이 그런 사실을 명확히 밝히지 않는 한 이쪽으로서는 사실을 알기 어려운 게 보통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은 실제 사랑과 구별하기도 어렵고, 이런 것이 진실한
[이어서] 사랑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하디의 논리는 그런 가능성조차도 짓밟힌 처량한 바람맞은 남자의 억지성 독백입니다. 하하. 이런 일을 많이 당해봐서 그 상황심리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의 코멘트였습니다.
놀란 토끼눈님, 은밤님 안녕하세요, 처음 이곳에 가입할 때 했던 약속을 못지켰는데도 꾸짖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셔서 늘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은밤님께서 지적해주신대로 번역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제가 번역을 해본 적이 많이 없어서 익숙치 않은데, 원문의 뜻과 어긋난 부분이 있거나 더 좋은 번역이 생각나시면 언제든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은밤님의 감상은 잘 들었습니다. 은밤님께서 이런 비슷한 상황을 많이 당하셨다니, 저는 믿어지지가 않네요. 대학 시절부터 당시 여학우 분들께 인기가 굉장히 많으셨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마 겸손이시겠지요^^ 저는 은밤님과 견해가 조금 다른데요, 전 이 시가 어느날 여인에게 바람맞은 사람의 처량한 넋두리 정도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 이 시의 화자는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을 아주 이상적으로,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선함을 다 갖고있는 그런 천사같은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그 날 오지 않은 것을 보고, 자신이 그 사람에게 가졌었던 환상이 깨지는데서 오는 슬픔이 더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설정은 '테스' 라는 소설에서도 '주드' 라는 소설에서도 하디의 소설을 비극적으로 만드는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가령 '테스'에서 에인젤이 테스를 부를 때, 온갖 여신의 이름을 불러가며 테스를 그런 존재로 신격화시키자 테스는 그 사람들은 자기가 아니라며 자기를 그냥 테스라고 불러달라고 합니다. '비운의 쥬드'에서도 처음에 쥬드가 아라벨라를 만났을 때, 아라벨라라는 여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결혼을 했다가 나중에 아라벨라라는 여인이 자기가 생각했던 그런 여인이 아니었음을 알게되고 실망한 나머지 이혼을 하게 되지요. 그렇듯 우리는 처음에 어떤 마음에 드는 상대를 바라볼 때,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인식을 하지못하고, 거기에 우리의 상상을 덧붙여 그 사람에게 없는 merit까지 붙여가며 그렇지 않은 사람을 그런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거기에 바로 비극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에서도 화자는 아마 처음에 자기가 좋아했던 사람을 그렇게 이상적으로 마음속에서 그렸다가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큰 충격에 빠지는 거라서, 자신이 바람맞았다고 처량하게 넋두리 한다기 보다는, 상상했던 것과 실재의 괴리감에서 오는 차이가 화자의 마음을 더 괴롭게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엔 은밤님과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예전에 제가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어 화자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아,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주관적 견해이니, 이 생각이 옳다는 그런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Jude님의 글을 읽으면서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전공이 사회학이었는데 영문학과 과목을 여러 과목 들었던 것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19세기 영시, 20세기 미소설, 셰익스피어 비극이 우선 생각나는데요, 특별히 워즈워스와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그리고 햄릿, 로미오와 줄리엣을 좋아했습니다. 저도 하디의 작품에 관심이 많은데 아직 많이 읽지는 않았구요, Jude님께서 하디의 작품과 만난 얘기를 들으면서 참 좋고 고맙습니다.
만나기로 약속하고 약속 장소에 나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데 시간은 자꾸 가고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기다림에 지쳐서 이제는 감각이 무딘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인간이 얼마나 위로가 필요한 존재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high compassion"과 "pure lovingkindness"를 연결지어 볼 수 있는데 사랑이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 '억지성 독백'이라는 말은 저의 느낌을 장난스레 쓴 것입니다. 시 읽기는 자신에게 느껴오는 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어떤 거대한 철학이나 어려운 개념 하에서 시를 쓴 것이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시는 그 순간 재미 없어지며, 그런 시 읽기는 제가 가장 경계하는 행위가 될 따름입니다. 창작 시와 소설이라면 작가는 그 작품 하나로서 전달할 수 있는 것을 다 전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역시 작가와 작품은 그다지 독립시키기 어려운 경우도 많긴 하지요. 그런데 그런 작품일수록 작품성이나 작품의 생명력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Jude 님 자신의 번역인 줄 몰랐네요. 번역이 자연스레 잘 되어 있는데 그 부분은 그냥 두면 원문의 의도와 동떨어져 보여서 지적했던 것입니다. 제가 2002년에 이 시를 번역하고 소개하고 했었는데, 저는 직역으로 딱딱하게 했었거든요. 저의 대부분의 접근 방법이 원문의 직접적인 뜻이 이러하니까 원문을 읽을 때 참조하고, 감동은 원문에서 직접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었거든요. 그래서 가급적 직역을 해서 제시하곤 했었지요. 하지만 항상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 번역은 새로운 창작임이 분명합니다. 번역시는 항상 번역자의 이름이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은물결님 안녕하세요. 항상 좋은 시 소개해 주셔서 감사하게 보고 있습니다. 예전에 하디 시 'Hap' 도 소개해 주신 적 있으시지요?^^ 저랑 좋아하는 작가가 몇명 겹치네요. 저도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그리고 전 셰익스피어 drama 중에선 'King Lear'를 참 좋아합니다. 앞으로 은물결님과 이 곳에서 많은 교류를 나누고 싶습니다.^^ 은밤님께서 이 시를 예전에 번역하신 줄이 있으신지는 몰랐습니다. 제가 알았더라면 굳이 좋은 번역을 놔두고 어설픈 번역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텐데..원래 저는 실명을 밝히기가 조금 그래서 처음엔 Jude 역으로 하려고 했는데, 공지문에 반드시 실명을 써야 한다는 언급이 있어 실명을 밝혔습니다.
실명은 인터넷에서 도용되는 경우가 많아서 권장하고 있는 사항입니다. 물론 꼭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남의 번역을 올리는 것이라면 가능한 한 번역자를 밝히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리고 번역은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영어식 표현을 쓰면,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스스로 시를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번역을 해보는 것이 최상의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