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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1. 묵상글 (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 칼을 내려놔야 하느님께서 계신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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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1.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1.21 01:05
- 칼을 내려놔야 하느님께서 계신다!
오늘 사무엘기에서 어린 다윗은 아무것도 그러니까 전투를 위한 도구인
칼이나 표창을 가지지 않고 나온 데 비해 어른이자 대 장수인 골리앗은
창과 표창과 창까지 가지고 나왔고 이에 다윗은 이렇게 비웃으며 신앙 고백도 합니다.
“너는 칼과 표창과 창을 들고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 이름으로 나왔다.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기 모인 온 무리가 이제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이번엔 제가 이런 묵상을 하였습니다.
칼과 창을 들고나왔기에 하느님께서 안 계신 것이다!
칼과 창을 내려놔야 하느님께서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손에서 칼과 창을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손에서 칼과 창을 놓는 이유는
우리가 무기에 의지할 때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
무기에 의존할 때 하느님께 의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볼 것입니다.
지팡이에 의지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상황입니까?
지팡이가 없으면 넘어진다는 뜻이고,
지팡이가 있어야만 서 있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느님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고 무기에 의지해야만
내가 지탱하고 존재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얼마나 불쌍하고 안타까운 상태입니까?
이런 맥락에서 기도를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무기에 의지하는 사람은 결코 그리고 도무지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기도 없고 무기를 들지 않는 사람은 모세처럼 만군의 주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모세의 군대가-군대라고도 할 수 없지만- 전투에 나갔을 때 모세는 전장에 없었습니다.
그도 어쩌면 같이 전투에 나갈까 말까 고민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예 전투에 나가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 이유를 전장에 내보내는 군사들에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너희는 이제부터 만군의 주 하느님의 군사들이다!
너희는 다만 도구들이고 싸움은 만군의 주님께서 하신다!
아무것도 없으니 오로지 주님만을 믿고 주님께 의지하라!
그리고 그는 산 위로 올라가 팔을 들었다 내렸다 하며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주님만 의지하겠다는 선택이고 주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약 먹는 것과 비교하면 신자 아닌 사람이 약에만 의지하는 것과 달리
신앙인이라고 하는 우리는 약을 주신 주님께 의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어차피 의지해야 한다면 하느님께 의존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의지하면 하느님 아닌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을 것이고,
그 어느 적과 마주해도 ‘그까짓 것!’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어떤 적과 만나도 두려움 없이 다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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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1.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전사
영적 승리의 삶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나아가 치는 데에 내 손 익게 하시고,
싸움에 손가락들 익혀 주셨나이다.”(시편144,1)
삶은 영적전쟁이요 믿는 이들은 예외없이 주님의 전사입니다.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입니다. 수도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제대가 없는 즉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영적전투를 해야 하는 영원한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존경받는 선비들은 공부의 쓸모를 묻는 질문에 자신의 삶으로 대답한다’<다산> 하는데, 하느님을 찾는 공부에 전념하는 수도자들 역시 그러합니다.
1982년 수도원 입회, 수도생활 만44년 동안 초창기부터 참 많이 강조해온 주님의 전사에 영적승리의 삶이요 이를 표현한 아주 오래전 <담쟁이>란 시를 자주 읽으며 영적 전의를 새로이 합니다. 지금 겨울철은 <봄꿈>을 꾸며 봄을 기다리고 있을 담쟁이입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색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의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기쁨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70대 후반의 노년에도 여전히 영적 승리의 삶을 추구하는 주님의 전사로서 신원을 새로이 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은 4세기 초 14세로 순교한 로마의 유명한 동정 순교자 성녀 아녜스 천상탄일의 축일입니다. 오늘 여러 아름답고 사랑스런 아녜스 수녀들과 자매들을 기억하며 미사봉헌합니다.
말그대로 주님의 전사로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영적승리의 순교로 생을 마감한 아녜스 성녀입니다. 로마의 부유한 가정 출신에 뛰어난 미모로 많은 청혼을 받았으나 하느님께 동정을 서원하고 이를 거절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때 박해시 청혼자중 한 사람은 그녀를 그리스도인으로 고발했고 총독의 위협과 고문에도 끝내 신앙을 고백하고 지키다가 기쁜 마음으로 사형장에 나아가 짦은 기도후 순교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다음 오늘 성무일도시 성녀 축일의 찬미가와 즈카르야 노래 후렴 및 마리아의 노래 후렴의 고백이 성녀의 면모를 알려 줍니다.
“동정녀여 그승리를 경축하오니, 우리나약 가엾음을 불쌍히여겨
이모두를 위하여서 빌어주시어, 죄사함과 천상복락 얻어주소서”
그 길고 아름다운 찬미가 11개연중 1연만 인용함이 지극히 아쉽습니다. 이어지는 성녀의 두 후렴의 고백도 참 감동적입니다.
“보라, 나는 내가 갈망하는 것을 보았고, 희망하는 것을 얻었으며, 지상에서 온 마음으로 사랑한 분을 만났도다.”
“성녀 아녜스는 두 팔을 벌리고, ‘내가 사랑하고 찾으며 갈망하던 거룩하신 성부여, 당신께 나아 가나이다.’ 하고 기도하였도다.”
참 거룩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런 동정 순교자 성녀 아녜스입니다. 주님의 전사로 영적승리의 순교로 삶을 봉헌한 성녀였습니다. <얼마나> 많이가 아니라, <어떻게> 주님을 많이 최선을 다해 주님을 사랑했는지가 판단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 상권에서도 우리는 필리스티아 골리앗 용사에 승리한 주님의 전사, 소년 다윗을 만납니다. 무릿매 끈과 돌맹이 하나로 팔라스티아 용사에 승리한 다윗입니다. 주님의 전사, 다윗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너는 칼과 창을 들고 나왔지만, 나는 네가 모욕한 이스라엘 전열의 하느님이신 만군의 주님이름으로 나왔다. 오늘 주님께서 너를 내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이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하겠다. 또한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로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하겠다. 전쟁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그분께서 너희를 우리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배경한 주님의 전사들에게는 천하무적, 백전백승 영적승리의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전사 다윗을 계승한 다윗의 자손 우리의 예수님의 활약상이 어제에 이어 오늘도 복음에서 놀랍게 펼쳐집니다.
무지의 완고함에 눈먼 적수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순간에도 하느님의 자비와 지혜, 용기의 전사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이를 낫게 해주시고 적수들의 말문을 막아버리니 그대로 완벽한 영적 승리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명령하시니 그대로 두려움과 불안으로 마음이 오그라든 우리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이어 안식일의 주인인 주님의 전사 예수님은 적수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미 질문안에 답이 들어 있으니 이들은 침묵으로 대답합니다. 이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며 주님은 지체없이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명령하십니다.
“손을 뻗어라!”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게 됩니다. 말마디를 바꿔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펴라!” 두려움과 불안으로 쪼그라든 우리 마음을 치유하여 활짝 펴주시는 주님의 권능의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곧바로 나아가 헤로데 당원들과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니 주님의 영적전쟁은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죽어야 끝날, 살아 있는 동안 영원히 계속될 영적전쟁이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무장시켜 오늘 하루도 당신의 전사로 빛나는 영적승리의 삶을,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은 나의 사랑, 내 성채,
나의 산성 구원자,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
민족들을 내 밑에 굴복시키셨네.”(시편144,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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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1.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하느님께서는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을 부르십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주님께서는 우리 삶의 광야에서도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에...
하느님께서는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을 부르십니다.
2026년 1월 20일 화요일
흑인 여성 신학자 델로레스 윌리엄스(Delores Williams: 1937–2022)는 하가르가 광야에서 받은 주님의 부르심을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들의 삶의 체험과 연결하여 성찰하였습니다.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들의 역사 속 많은 주제들은 성경에 나오는 하가르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두 여인을 가장 깊이 이어주는 것은 광야에서의 신앙 체험입니다(창세기 21장 참조).... 수많은 흑인 여종들은 자서전을 남기며, 광야로 혹은 '주님의 현존이 그들을 덮어 주신' 건초더미로 숨어 들어가 기도하던 체험을 증언했습니다. [1]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 넓은 세상에서 의지할 분은 하느님뿐이다" [2]라는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따라 삶을 이끌어 갔습니다. 이는 하가르가 이야기의 마지막 순간에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았던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흑인 그리스도교 여성들에게 "광야" 혹은 "광야 체험"은 거의 파멸에 이르는 상황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신자 각자에게 친히 길을 보여 주시며, 사람이 더 이상 길이 없다고 여겼던 곳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윌리엄스는 하가르에게 베푸신 주님의 도우심을,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는 영감과 용기의 원천으로 바라봅니다:
성경 이야기에서 하가르의 광야 체험은 황량하고 외로운 광야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주인 사라의 가혹한 학대를 피해 도망쳐 나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그러나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는 신비한 체험을 통해 자신과 아이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하가르와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들에게 광야 체험은 심각한 고난 한가운데서 완전히 홀로 서 있는 경험이었으며, 오직 주님의 도우심만을 의지하는 자리였습니다.
이런 고난의 체험과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가르와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들은 위험을 무릅쓰는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하가르는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따르면서도, 광야에서 만난 하느님께 이름을 드릴 용기를 내었습니다. 이는 곧 그 하느님이 그녀의 하느님이시며, 아브람과 사라의 주인으로서의 하느님과는 다른 차원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 이름을 붙인 이는 하가르뿐입니다. 또한 수많은 흑인 여성들(노예와 자유인 모두)은 흑인 공동체의 해방을 위해 큰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예컨대 미국의 노예제도 속 폭력과 잔혹함 가운데서도 해리엇 터브먼은 목숨값이 걸린 몸으로 삼백 명이 넘는 노예들을 해방시켰습니다. 그녀는 남북전쟁에서 첩자와 지휘관으로 활동하며, 오직 하느님께만 도움과 힘을 의탁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가르와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 여성들을 "광야의 자매들"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위해 싸우며, 파괴적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극복해 나갔습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올해의 제 좌우명이 ‘희망 어린 미지(未知)’라고 느낍니다. 여섯 달 전 제 배우자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부재와 함께 삶의 모든 영역이 깊은 상실로 흔들렸습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지만, 날카롭고 감당할 수 없었던 슬픔이 조금씩 누그러지면서 이제야 이 알 수 없는 미래를 ‘희망’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Colleen A.
References
[1] Elizabeth, Memoir of Old Elizabeth, a Coloured Woman (Collins, 1863), 7. See Six Women’s Slave Narratives, ed. Henry Louis Gates, Jr.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2] Elizabeth, Memoir, 4.
[3] Delores S. Williams, Sisters in the Wilderness: The Challenge of Womanist God-Talk (Orbis Books, 2013), 96–9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Levi Ventura,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이 작은 푸른 싹처럼, 우리도 저마다의 고유한 땅과 자리와 환경 속에서 자라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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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사랑의 상처?!
만일 예수님께서 단순히 "하느님을 사랑하시오!" 혹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라고만 말씀하셨다면, 아무도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이 위축되어 살아가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당시 종교 권위자들의 잘못된 권위를 흔들며, 그들이 백성을 착취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지위를 무너뜨리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만이 예수님의 분노를 언급합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셨다고 기록하지만(요한 2,15), 분노하셨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만이 예수님의 분노를 언급합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셨다고 기록하고는 있지만(요한 2,15), 예수님께서 분노하셨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또 마르코 복음서의 독특한 점은 예수님께서 자주 "둘러보셨다."라고 하고 묘사하는 것입니다(마르 3,34; 5,32; 10,23; 11,11). 오늘의 독서에서는 "그분은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많은 성화(聖畵)에서 예수님은 하늘을 바라보며 슬프고 감상적인 표정을 짓고 계십니다. 그러나 분노로 둘러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없습니다. 그런 그림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지 못할 것이지만, 적어도 예수님을 단순히 '착하신 분'으로만 제한하지 않게 해줄 것입니다. 참고로 중세 영어에서 'nice'라는 단어는 '어리석은'(stupid)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아마도 요즘 우리말에서도 어린아이들에게 착하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나마 글자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표현이지만, 어른들에게 착하다고 묘사하는 것은 좀 바보스럽다고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지 않아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토록 분노하셨을까요? 어떤 번역은 "그들이 마음을 닫았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 우리말 성 번역은 "그들의 완고한 마음 때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표현은 사실 같은 의미입니다. 지성은 본래 열려 있는 것이지만, 마음이 닫히면 지성도 닫히게 됩니다. 그 앞에 있던 사람들은 사랑이 없었고, 타인에 대한 감각이 없었기에 마음이 굳어 있었습니다. 사랑은 마음을 열어주는 상처와도 같습니다. 노리치의 율리안 성녀는 "참된 자비의 상처""를 청하였습니다. 그 상처는 결코 아물어서는 안 되는 상처입니다.
사랑의 상처란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을 열어 주지만, 동시에 그 사랑은 상처처럼 깊은 자취를 남깁니다. 이 상처는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 안에 새겨진 흔적으로, 마치 상흔처럼 남는 것이지요. 율리안 성녀가 청한 상처는 결코 아물어서는 안 되는 상처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끊임없이 기억하게 하는 은총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것은 우리가 늘 주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지하고 있다는 표징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처가 영원히 남아 있듯이, 우리 믿는 이들도 자비의 상처를 통해 주님과 더 깊이 결합하게 됩니다. 이 상처는 치유만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과의 친밀한 결합을 지속시키는 통로입니다.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은 언제나 타인의 고통과 하느님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상처는 닫히지 않고, 늘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결코 아물어서는 안 되는 상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대개 마찬가지로 경험했겠지만,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이런 아물지 않은 상처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늘 자녀들을 감싸주고 치유하고 끌어안아 주지만 어머니는 사랑의 상처를 지니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저의 큰 형님이 여러번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자기 어렸을 때 중풍으로 10년이 넘게 골방에 오래 누워 계시던 시어머니(제 할머니)의 대소변을 다 받아드리고 식사를 챙겨 드려야 했기 때문에 어머니 몸에서 냄새가 많이 났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형님이 어머니가 곁에 오실 때면 냄새가 난다고 저리 가라고 타박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살짝 자리를 피하곤 하셨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바로 사랑의 상처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가끔은 그때를 생각하면 어머니의 사랑에 눈물이 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절대 아물지 않는 열린 상처는 '나'를 향해 있지 않고 아픈 타인을 향해 있는 사랑과 자비의 경향을 지닙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주님의 상처를 보며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사랑의 상처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노리치의 율리안나 성녀처럼 [참된 자비의 상처]를 청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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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1.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도 여전히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마르 3,3). “손을 뻗어라”(마르 3,5)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누구인가?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잡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곧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사실, 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고 한 것이지만, 그것은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입니다. 그러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 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마르 3,3). “손을 뻗어라”(마르 3,5)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빈손에 못을 박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을 건네주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께서는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셨습니다. 죽음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과 빛이 되셨습니다.
오늘 저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움켜쥔 것을 내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손을 뻗어 상처를 입고 구원의 피를 흘려야 할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손에 구원의 못을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사랑으로 상처 입을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건네줄 줄을 알아야 할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손이 당신 구원을 전하는 손, 당신 사랑을 건네주는 손이 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손을 뻗어라.”(마르 3,5)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고
움켜 쥔 것을 나누어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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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1.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우리는 성녀 아녜스를 기념합니다. 아녜스는 겨우 열세 살 안팎의 어린 소녀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아녜스는 너무 작고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그녀는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종종 비슷한 장면을 봅니다. 코닥은 디지털카메라를 가장 먼저 개발한 회사였습니다. 그러나 필름 시장을 지키기 위해 그 기술을 세상에 내놓지 않았습니다. ‘지금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서’ 새로운 길을 선택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결과, 코닥은 디지털 시대의 중심에서 밀려났습니다. 일본의 비디오 기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력은 뛰어났지만 국제 표준이 되지 못했습니다. 자기 방식, 자기 틀을 고집하는 사이, 세계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결국 뛰어난 기술도 시장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덩치가 큰 골리앗이 작은 다윗에게 패배한 이야기와도 닮았습니다. 골리앗은 무기와 갑옷, 경험과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변화를 읽지 못했고,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다윗은 작았지만, 하느님을 향한 믿음 하나로 새로운 방식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승리는 힘의 크기가 아니라, 믿음의 방향에서 갈렸습니다.
2007년 아이폰과 핸드폰이 있었습니다. 아이폰은 스마트폰이 되었고, 스마트폰은 업데이트를 통해서 새로운 기능을 발전시켰습니다. 핸드폰은 업데이트할 수 없었고, 시장에서 퇴출당하였습니다. 지금 스마트폰은 모바일 환경에서 다양한 기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은 단순히 전화를 주고받는 것이 아닙니다. 스마트폰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테슬라의 전기 자동차와 내연 기관 자동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테슬라는 전기차를 만들었습니다. 500만 대의 전기차가 운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500만 대의 전기차는 데이터를 모았고, 모인 데이터로 전기차는 계속 업데이트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데이터를 바탕으로 완전 자율 주행 자동차로 발전되었습니다. 자동차는 차를 팔면 업데이트되지 않습니다. 10년이 지나면 중고차가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테슬라는 10년이 지나도 계속 업데이트되면서 성능이 좋아집니다. 다윗과 같았던 아이폰과 테슬라는 냉혹한 자본의 시장에서 다른 경쟁자를 누르고 스마트폰과 전기 자동차의 분야에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성녀 아녜스도 그러했습니다. 그녀는 로마 제국의 권력과 사회적 관습, 폭력 앞에서 타협할 수 있었습니다. 살아남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녜스는 “나는 이미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생명보다 믿음을 선택했습니다. 세상은 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조금만 타협하라, 지금 가진 것을 지켜라, 너무 앞서 가지 마라.” 그러나 신앙은 때로 정반대를 요구합니다. 지금 붙잡고 있는 것을 내려놓을 용기, 하느님께 자신을 맡길 용기,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복음의 기준을 선택할 용기입니다. 성녀 아녜스는 덩치 큰 골리앗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혁신의 다윗이었습니다.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시대를 넘어선 증언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까지 그녀를 기억하고, 공경합니다. 오늘 성녀 아녜스를 기념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세상의 것을 지키기 위해 복음을 미루고 있지는 않은지, 나는 세상의 것을 잃을지 두려워 하느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신앙인에게 혁신이란 세상의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작아 보여도 하느님 안에서 선택한 길은 절대 작지 않습니다. 성녀 아녜스처럼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의 다윗으로 살아가기를 청하며,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두려움보다 믿음을, 안정보다 복음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주소서. 작아 보여도 하느님 안에서 담대하게 살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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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1.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마르 3,1–6
안식일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예수님 앞에 섭니다.
사람들은 치유보다
규칙을 지키는지를 지켜봅니다.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손을 내밀어라.”
그 손은 곧 펴집니다.
초대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사람을 묶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한다.”
복음은 분명히 말합니다.
굳어 있는 것은 손이 아니라
마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낫게 하시는 분이시기에 앞서
관계를 다시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문화 주간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규칙을 지키는 사람인가,
아니면 사람을 살리는 사람인가?
주님,
제가 옳음을 지키느라
사람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굳어진 마음을 먼저 풀어 주시고,
필요한 곳에 손을 내밀 수 있는
자비의 용기를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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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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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1.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13:40 추가>
■ 생활묵상 : 하느님 나라에 갈 얼굴은 따로 있는가?
어제 오후에 카톡으로 영세 받은 본당 한 자매님의 선종 소식을 들었습니다. 불과 2주전 주일에 그때 본당에 가서 미사를 드린 후에 제가 엄마 아니면 어머니처럼 여기는 분이 어제 선종하신 자매님 성함을 언급하며 암에 걸렸다는 말씀만 듣고 누군가를 찾으시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때 그 사실을 알았는데 어제 부고를 접했던 것입니다. 보통 보면 본당에서 상이 나면 거의 대부분 본당 바로 옆에 있는 병원에서 연도를 합니다. 이건 참 좋은 장점입니다. 성당 가까이에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연도를 하기에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다시 본당으로 돌아가 앞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면 저도 언젠가는 이 병원 장례식장에서 하게 될 겁니다. 어제 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레지오에서는 또 마침 어제 레지오하는 날이라 레지오 마치고 가기 때문에 저는 오늘 개인적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원래는 같이 가고 싶었지만 개인적으로 해야 하는 업무가 있어서 그랬습니다. 연세를 정확하게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영세 받았을 때부터 잘 아는 자매님이십니다. 저녁 강의를 하고 잠시 저녁 미사를 참례하러 헐레벌떡 가야 하는 상황에서 학원 나오면 잘 마주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이었고 무엇보다도 신앙생활하시는 모습이 순박하셨습니다. 얼굴을 보면 마치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그런 할머니 같은 분위기를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몇 년 전에 무릎수술을 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게 그분에 대한 건강 정보가 다였습니다. 개인적으로 깊은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언제나 저에게도 항상 친근한 얼굴로 잘 대해주셨습니다. 나름 성당 생활을 영세 받고 열심히 했으니까 그렇게 하시지 않았나 봅니다.
외적으로 보면 아직은 건강하셨던 분이시셨는데 그만 암이라는 병이 자매님과의 이별을 재촉하였습니다. 저녁에 집에서 컴퓨터로 하는 업무라 11시쯤에 마친 후에 오늘 연도를 가겠지만 자매님의 영혼을 위해 잠시 기도를 하며 묵상한 게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성당을 10년 조금 넘게 같이 뵙고 했지만 자매님 가족은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래서 저는 형제님도 계신지도 모르고 그저 혼자서만 나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제 부고를 보니 아들 둘 딸 한 분 이렇게 있고 또 다 세례명이 있어서 아마도 성가정을 이루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정도만 대충 어림짐작만 할 뿐입니다. 이걸 보고서 제 머리에는 순간 복합적으로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순간 여러 생각이 한꺼번에 처리된 것 같은 생각입니다. 아마도 자매님은 거의 바로 천국행으로 직행하실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저는 그분의 얼굴에서 그런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한평생 살다보면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아주 단순한 그런 죄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것도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어도 분명 확실한 건 그건 그냥 인간이면 우리 천주교에서는 죄라고 한다면 죄가 되겠지만 세상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죄라고도 할 수 없는 그 정도의 일일 것입니다. 그만큼 순박하시다는 것입니다. 이건 그저 성당을 다니고 또 강론을 듣고 해서 마음에 변화가 돼 마음이 착하고 순박한 그런 게 아니고 원래 타고난 심성이 순박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천성이라고도 합니다. 그분은 그런 면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이건 제가 남자이고 또 오랜 세월 사람을 다루는 직업이었던지라 이런 것도 있지만 원래 제가 가진 직감 이런 걸로 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거의 바로 천국행이라고 말씀을 드릴 만큼 아마 일평생을 착하게 살으셨지 않았을까 한다는 것입니다. 연옥을 가신다고 해도 아마 아주 잠시 스쳐지나가실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건 제 영역도 아니고 오로지 하느님만 아실 겁니다. 저는 다만 이 세상에서 자매님의 영혼이 빨리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바랄 뿐이고 또 몇 년 후면 다시 만나길 바랄 뿐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두서없이 한 것 같은데요 사실 제가 묵상한 걸 말씀드리고자 하는 건 이제부터입니다. 아주 단순한 결론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갈 얼굴은 따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미인 미남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추남 추녀는 갈 수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미추로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얼굴은 비록 세파에 찌들려 굴곡이 져 있어도 그 사람의 얼굴에서 묻어나는 순박한 표정이라든지 맑은 영혼이 서려 있으면 그런 분은 천국에 빨리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얼굴을 이쁘게 하려고 성형도 하기도 합니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남자인 저도 이제 55세가 된 상황에서 봐도 입가에 생기는 한자로 팔자 모양 그런 걸 팔자주름이라고 하죠. 아마도요. 그런 게 엷게 생기려고 하는 걸 보며 한편 없었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도 잠시 들 때도 있는데 대개 성형을 하면 여자분들이 많이 하는데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이것도 우리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부질없는 일입니다.
저는 미남은 아니지만 이젠 조금 세파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래도 아직까지는 성당에서도 상당히 동안이라고 하니 만족하고 삽니다. 15년 정도는 동안이라고 하니 이 정도면 만족합니다. 옛날에 영세 받기 전에 결혼을 하려고 만난 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건 얼굴이 참 선하다고는 다 듣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미남도 부럽지만 얼굴이 미남인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저는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저는 노력을 합니다. 저도 아직까지도 많이 부족한 인간이지만 그래도 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또 마음에 가능하면 하느님처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마음을 먹으려고 무진장 노력을 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타고난 얼굴은 미남으로 바꿀 수 없지만 그렇게 마음이라도 아름답게 먹으려고 해야 그나마 인상이라도 좋게 될 것 같아서 그렇게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이 세상에서는 영혼보다는 실제 겉으로 드러나는 얼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우리는 영혼의 세계를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영혼이 아름다운 얼굴이 되는 게 속되게 표현해 장땡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니깐요. 얼굴도 미인 미남이고 영혼도 미인 미남이면 그야말로 그보다도 더 큰 축복은 없겠지만 그것도 뛰어넘을 만큼 아름다운 영혼을 가꾼다면 그게 더 큰 축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얼굴을 한번 보세요. 세상 사람들이 보는 그런 미를 가꾸려고 할 게 아니라 하느님의 영이 서려 있는 얼굴로 변화가 되기를 소망해보십시오. 저는 아직 갈 길이 멀군요. 방금 거울을 보니 그렇습니다. 이제 저도 하느님 만나러 갈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 잘 가꾸어야 할 텐데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첫날밤에 신랑을 만나기 위해 얼굴을 꾸미는 신부처럼 남아 있는 이 시간을 그렇게 잘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사람도 있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사실 넓게 보면 그 차이는 불과 얼마 남지 않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그 시간은 우리에게 멀리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 착각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그나마 지금의 시간도 영혼을 아름답게 꾸미고 화장할 시간이 있게 되지 이 착각 속에 있는 사람은 어느듯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을 만날 시간이 갑자기 오게 될 때 그때 깨닫게 된다면 그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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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121.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13:40 추가>
마르 3,1-6 "손을 뻗어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을 맞아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회당을 찾으십니다. 그곳에는 한 쪽 손이 오그라든 장애우가 한 사람 있었지요. 회당에서 이루어는 예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 같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보통 정결함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다보니 죄인이나 불치병 환자들처럼 율법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이들과 한데 어울리는 것을 극도로 꺼렸지요. 그럼에도 회당 안에, 그것도 안식일에 한 쪽 손을 쓰지 못하는 병자가 있었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배치로 보입니다. 즉 그들은 불치병에 걸린 환자를 굳이 안식일에 회당에 데려다놓아 예수님 눈에 잘 띄게 만든 겁니다.
이미 여러 차례 수많은 이들 앞에서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를 치유하실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랑과 자비가 가득한 그분이라면 손을 쓰지 못해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그를 가엾이 여겨 그냥 지나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랑과 자비를 알아보기까지 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들의 안목과 앎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요.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구세주가 아니라 경쟁자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시기 질투의 대상, 제거해야 할 눈엣가시였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이 그들이 그토록 중요시 하는 율법을 통해 하느님과 그분 뜻을 바라보지 못하고 율법 그 자체에만, 그것에 적혀있는 글자에만 사로잡혀있었기에 생긴 문제들이었지요.
그들은 안식일 규정도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안식일이라는 제도를 왜 만드셨는지, 왜 율법 규정을 통해서 안식일에 세속적인 일을 하지 말라고 지시하셨는지 그 뜻을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안식일 법’에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된다’고 규정하는 일들을 하지 않는 것에만 온 신경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자기들이 안식일에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을 너무나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자랑스러움을 다른 이들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무기로 삼았습니다. 마음이 영적 나태함과 교만으로 인해 한껏 오그라들어 있는, 그래서 신앙생활이 주는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안식일 규정을 보다 잘 지키기 위해 중요한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안 하는게 아니라, 반드시 해야할 중요하고 귀한 일들을 실천하는 일임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셨던 용서와 화해, 사랑과 자비의 실천이 바로 그것이지요. 하느님을 위해, 그분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그분 뜻을 실천하는 이들은 죄책감과 불안함으로 마음이 주눅들지 않고 하느님을 향해 손을 쭉 뻗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그들 손을 잡아주시면 그들 마음을 옭죄던 부정적인 것들이 사라지고 건강해져,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을 온전히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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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 중 일부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476
1월21일 [성녀 아네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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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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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서울대교구 박재준 브루노(흑석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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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육체 치유에 앞서 마음부터 치유하신 예수님!>
인간의 두 손은 수많은 신체 부위 가운데 정말이지 각별하고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인간의 활동은 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벽 알람이 울리면 손을 뻣어 스톱을 시킵니다. 손을 사용해 양치를 하고 이를 닦고 머리를 감습니다. 성당에 가서는 두 손으로 빵과 포도주를 축복하고 그 손으로 성체를 나누어줍니다. 식탁에 앉아서도 손으로 빵을 들고 잼을 바릅니다.
손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컴퓨터를 켭니다. 손으로 자판을 두드리고, 손으로 계좌 이체도 합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의 두 손이 하루 온 종일 어마어마한 일을 하고 있네요. 손이 없거나 오그라들었다면 얼마나 불편할 것인지, 얼마나 삶이 위축될 것인지요?
뿐만아니라 손은 인간관계 안에서도 아주 중요한 소통의 도구입니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사람들은 손으로 하트 표시를 만듭니다. 최고라는 표시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웁니다. 격려의 표시로 주먹을 움켜쥐고 파이팅을 외칩니다. 오랜만에 만나면 누구나 오른손을 내밀며 반갑게 악수를 나눕니다.
이런 면에서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너무나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은혜롭게도 오늘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무엇이든 곧게 만드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육체를 치유하기에 앞서 마음부터 치유하십니다.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이유로 마음까지 오그라든 채 오랜 세월 위축된 삶을 살아온 그에게, 더이상 그렇게 외곽에서 살지 말고 중심으로 나오라 하십니다. 잔뜩 주눅들어 살지 말고 당당히 주도적인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그런 의도로 이렇게 외치신 것입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손을 뻗어라.”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바리사이들은, 오늘은 안식일인데, 어찌 저자가 저리도 태연히 거룩한 안식일 법을 어기는거지? 하며 못 마땅해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뒷전이고 율법에만 혈안이 된 바리사이들의 모습에 심기가 불편해진 예수님께서 노기띤 얼굴로 강력한 경고장을 날리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그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치유 받았지만, 그들의 오그라든 마음은 치유 받지 못했습니다.”(아타나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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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리더는 살려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마르코 복음은 제대로 보니 정말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 것 같습니다. 공동체를 통해 병이 치유 받고 죄의 용서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이에서 분란의 원인이 된 터라 아마 공동체의 리더의 자격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바오로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서운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제 복음을 보면 아무래도 리더는 규율보다는 자비와 사랑이 앞서야 한다고 믿는 것은 확실합니다. 장발장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주교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도 역시 리더로서의 예수님의 특별한 모습이 나옵니다. 일단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기고 사람을 고쳐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아시고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는 “사랑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지 않으냐?”라고 물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율법이 사랑을 깔아 누르는 집단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에 마음이 몹시 아프고 슬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십니다.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은 곧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합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안식일에 그렇게 자비를 베풀면 그들에게서 보복이 온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참사랑은 자신이 죽는 두려움도 넘어섭니다. 자기 생각을 먼저 한다면 사랑을 베풀 수도 없고 그러면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리더는 자비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이유는 자신의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돈과 명예와 육체적 편안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사랑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세속-육신-마귀에 빠진 지도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는 사랑한다며 공동체를 이끌지만 결국 공동체를 이용해 자기 배를 불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많은 수가 수백, 수천억 원을 횡령하여 자기 주머니를 채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 때 경제가 발전하고 모든 것이 나아진 것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자만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들은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배를 먼저 채우려는 리더는 공동체에 해를 끼칠 수밖에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잘 압니다. 남미 나라들이 잘 살다가 그렇게 몰락한 이유도 자기 배나 불린 지도자들 때문이고 카다피와 같이 가족들이 배를 불리는 나라의 시민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놀라운 것은 많은 가난한 이들이 그들 때문에 가난한데도 여전히 그들을 또 뽑아준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가난할 줄 알아야 자녀가 배부를 수 있는 것은 진리입니다.
남극을 탐험한 두 탐험가가 있습니다. 우선 로버트 팰컨 스콧(Robert Falcon scott, 1868~1912)입니다. 1911년 12월에 남극에 도착했지만, 그 뒤 9개월 동안 연락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1912년 11월에 그의 일기장과 시신이 발견됩니다. 그의 일기장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신사처럼 죽을 것이며.. (중략).. 안타깝지만 더 쓸 수 없을 것 같다. 모든 꿈이 사라졌다.” 스콧을 비롯한 7명의 대원은 모두 그렇게 사망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몇 년 뒤 1914년 8월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Henry Shackleton, 1874~1922)도 27명의 동료와 함께 남극에 도착했지만 역시 조난을 하고 맙니다. 그들은 남극에서 무려 1년 7개월을 버티고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새클턴은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대원들을 위로해주고 용기를 주고 팀을 하나로 만들어 갈라지지 않게 했습니다.
1916년 4월 20일 섀클턴이 대원들을 모아 놓고 중대 발표를 합니다. 그의 지휘 아래 몇몇 대원들이 제임스 커드 호(작은 구명보트)를 타고 사우스조지아섬에 있는 포경기지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조난한 곳에서 사우스조지아 섬까지는 무려 1280km. 그토록 멀고 까마득한 곳을, 겨우 6m 길이의 갑판도 없는 배를 타고, 지구에서 가장 험난한 바다 위로, 그것도 겨울에 지나가야 합니다. 그 바다에는 시속 100km의 바람이 불고 20m 높이의 거대한 파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만만찮은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섀클턴은 해냈고 또 3000m가 넘는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산을 넘는 등의 4개월간의 고생 끝에 조난 후 643일 만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모두 구조할 수 있었습니다.
스콧 선장도 훌륭한 탐험가였지만 섀클턴은 동시에 훌륭한 리더였습니다. 자신의 팀을 하나로 만들 줄 알았고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차리는 지도자 앞에서는 공동체가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체는 지도자의 피로 결속됩니다.
피를 내어주어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지도자가 있고 공동체의 피로 자신의 배를 불리는 리더가 있습니다.
일본은 이미 저출산이 자기 나라에 큰 위기가 될 줄을 알면서도 노인에게만 돈을 썼습니다. 노인 복지는 잘 되었을 수 있지만, 경제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정책을 편 이유는 정치인들이 표를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노인 인구가 많으니 그들에게만 잘해주면 정권을 오래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일본은 정권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라도 망해갑니다.
우리는 자신과 자신의 정당이 지금 피해를 보아도 결국 우리나라 미래의 발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살리려는 리더는 공동체를 죽일 것이고 자신을 죽일 줄 아는 리더만이 공동체를 살릴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죽일 줄 모르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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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님]
어떤 일을 선한 뜻으로 시작하고서도 이내 마음이 완고해져 결국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선한 의향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기심과 두려움과 편견 때문에 마음이 굳어지면 하느님께서 주신 선한 뜻은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예전에 본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한 의대생이 죽을 위험에 놓인 사람을 살리려고 최선을 다하였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이는 「응급 의료에 관한 법률」, 제5조의 2(선의의 응급 의료에 대한 면책)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 법은 위험을 무릅쓰고도 이웃을 돕는 사람의 선한 의도를 존중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성경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나온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먼저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알아채어 계산하지 않고 용기 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이를 지켜보던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을 보시고 몹시 슬퍼하셨습니다. 그들은 사랑보다 율법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완고한 마음은 사랑의 길을 막고, 하느님의 뜻을 가리는 장벽이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세상에서 선한 몫을 선택해야 합니다. 길을 가다 어려움에 놓인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라도 채워 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의 발걸음을 내디딜 때, 우리는 예수님의 기쁨이 되고 세상에 하느님의 선하심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완고한 마음에서 벗어나 참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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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1-6: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하신 사건을 전해준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단순히 치유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마음을 먼저 드러내신다. 예수님은 물으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악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4절) 사람들은 침묵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생명보다 율법 조항을 지키는 데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신다. 안식일은 단순한 규정의 준수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선을 행하는 날이라는 것이다.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자비가 우선하기 때문이다.
복음 속 인물 중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불행해 보인다. 그러나 더 큰 불행은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 곧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치유의 기적 앞에서도 기뻐하지 않았다. 생명을 살리는 사건을 보고도 분노와 시기, 살의로 반응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도움을 청했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교만에 사로잡혀 있었다.”(Sermo 62) 육체의 병은 주님이 쉽게 치유하시지만, 마음의 완고함은 회개 없이는 치유될 수 없다.
예수님은 그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손을 뻗어라.”(5절) 여기에는 단순한 육체적 동작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오그라든 손은 죽은 행위, 이기심과 죄의 상징이다. 펴진 손은 생명의 행위, 나눔과 사랑의 상징이다.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오그라든 손은 탐욕으로 움켜쥐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할 때, 손은 펴져 나누고 사랑하는 손이 된다.”(In Matthaeum Homiliae, 40)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병자의 손만을 치유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굳어진 마음과 행위를 펴도록 초대하고 있다.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손을 잡아 예수님을 없애려 했다. 오그라든 손끼리 잡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잡아야 할 손은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손다. 내 손은 움켜쥐는 손입니까, 펴서 나누는 손입니까? 나는 생명을 살리는 손을 붙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낡은 이데올로기와 자기 고집에 사로잡힌 손을 붙잡고 있습니까?
오늘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너의 손은 어떤 손이냐? 너는 누구의 손을 붙잡고 있느냐?” 우리의 손이, 또 우리의 마음이 오그라든 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펴지는 손이 되기를 기도하자. 그리하여 주일마다 드리는 미사와 삶 속에서, 안식일의 참된 정신인 감사, 생명, 사랑, 자비가 드러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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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때에 하느님의 곳에서는>
마르코 3,1-6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하느님의 때에 하느님의 곳에서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
언제나
하느님의 때요
어디나
하느님의 곳이니
늘 믿음이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위해 지으신
당신의 때에
당신의 곳에서는
더욱 더 굳건한 믿음이어라
언제나
하느님의 때요
어디나
하느님의 곳이니
늘 희망이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위해 지으신
당신의 때에
당신의 곳에서는
더욱 더 샘솟는 희망이어라
언제나
하느님의 때요
어디나
하느님의 곳이니
늘 사랑이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위해 지으신
당신의 때에
당신의 곳에서는
더욱 더 뜨거운 사랑이어라
언제나
하느님의 때요
어디나
하느님의 곳이니
늘 품음이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위해 지으신
당신의 때에
당신의 곳에서는
더욱 더 따스한 품음이어라
언제나
하느님의 때요
어디나
하느님의 곳이니
늘 돌봄이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위해 지으신
당신의 때에
당신의 곳에서는
더욱 더 살가운 돌봄이어라
언제나
하느님의 때요
어디나
하느님의 곳이니
늘 베풂이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위해 지으신
당신의 때에
당신의 곳에서는
더욱 더 넉넉한 베풂이어라
언제나
하느님의 때요
어디나
하느님의 곳이니
늘 살림이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위해 지으신
당신의 때에
당신의 곳에서는
더욱 더 북돋는 살림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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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종교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신앙생활은 왜 하는가?>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르 3,1-6)
1) 이 이야기는, 앞에 있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라는 말씀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라는 말씀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안식일’을 넓은 뜻으로 ‘모든 율법’으로, 또 ‘종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은, “종교가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종교를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가 됩니다.
2)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라는 말씀은, “안식일은 ‘좋은 일’(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는 날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
“합당하냐?”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냐?”입니다. 이 말씀은,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목숨을 구하는 일’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을 뜻하고, 그리고 그 일에는 ‘몸의 병’을 고쳐 주는 일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도와주는 일이 모두 포함됩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0).” 라는 십계명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안식일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선행과 사랑 실천도 안 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살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예외가 있긴 했는데, 목숨이 위험한 응급환자를 구조하는 일은, 예외적으로 안식일에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야기에 나오는 장애자는 응급환자가 아니니까 안식일이 아닌 날에 고쳐 주어도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 주신 것은, 안식일이 어떤 날인지를 가르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선행과 사랑은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곧바로 실행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3) 사실 선행과 사랑 실천은 요일과 상관없이 날마다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는 더욱더 적극적으로, 더 많이 실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거룩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거룩함’의 반대쪽에 있습니다. ‘거룩함’은 선과 사랑으로 온전히 실현됩니다. 선과 사랑이 없으면 거룩함도 없습니다.>
4) 안식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종교와 신앙생활 전반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종교는 무엇을 하는 곳인가? 사람을 살리는 곳입니다. 따라서 종교는 ‘생명의 기쁨’이 가득 차서 흘러넘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율법들과 계명들로 사람들을 억압하기만 한다면, 또 헌금을 강요하기만 한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생명의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숨이 막힐 지경이라면, 그런 종교는 없애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앙생활은 왜 하는가? 내가 살고 싶어서 합니다. 율법과 계명은 사람을 살리는 일의 보조 수단일 뿐입니다. 그것들을 지키는 것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적은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의 생명력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입니다. 사랑은 억압이 아니라 ‘섬김’입니다.(루카 22,27)
“안식일이니까 그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 병자와 장애자를 고쳐 주는 일도 하면 안 된다.”라고 주장하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에는 ‘사랑’도 없고, ‘섬김’도 없고, ‘거룩함’도 없고, ‘생명의 기쁨’도 없고, 남을 억압하는 ‘어둠’만 있습니다.
반면에, 장애자를 고쳐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사랑’이고 ‘섬김’이고 ‘거룩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을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은 사랑의 날, 섬김의 날’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병에도 안 걸리고, 다치는 일도 없는 사람들이었을까? 자기 자신이 병자가 되거나 장애자가 된다고 해도 고집을 안 꺾었을까?>
율법주의자들의 종교에는 하느님도 없고, 사람도 없고, 율법만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종교가 아니고, ‘제 맛을 잃은 소금’, 즉 하느님께도 사람들에게도 율법주의자 자신들에게도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마태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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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번 비뚤어지면 돌아오기 힘들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다. 유다인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법적인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유해 준 병자는 손이 오그라든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 주셨다. 그래서 결국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는 안식일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그러나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고발할 마음만 커갔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한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칭찬은커녕 흉보고 비난하며 불평한다. 이렇게 보면 신체적인 장애를 지닌 사람보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더 문제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를 보고 함께 기뻐하기보다 외적인 규정을 어겼다는 사실 하나에 집착해서 예수님을 해칠 궁리를 하는 사람은 바로 시기 질투하는 나의 모습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경건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킨다고 자만하면서, 실제로는 교만의 죄를 범하고 생명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른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지를 알면서도 마음 한번 비뚤어지면 대책이 없다. 그는 중환자다. 그는 치유 받아야 한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도 더 먼저 치유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크다. 혹 나도 잘못된 고정관념, 어떤 것에 대한 집착, 쓸데없는 고집, 자존심의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다. “손을 뻗어라.” 하시며 오그라든 손을 성하게 하신 능력의 말씀이 오그라든 우리 마음을 펴주시길 기도한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칠 수 없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치기 쉽기 때문이다.” “주님, 성령의 힘으로 오든 악을 용감히 이겨내고. 마침내 천상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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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예수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하였고, 예수님의 질문에 입을 다문 채, 좀처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한가운데’로 초대한 이상,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우리 사회에 내쳐지고 소외받고 천대받는 이들이 우리 삶 한가운데 등장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우리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 다른 이들과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쳐다만 보고 있을까요? 어쩌면 그런 수동적 침묵은 우리의 비겁함과 잇속 계산에 따른 이기심에서 말미암은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노기를 띠십니다.
그리고 손이 오그라든 이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은 우리의 이기심을 깨부수는 명령과 같습니다. “마음을 열어라. 이웃을 향하여라. 더 이상 너의 ‘밥그릇’만 채우지 말아라.” 하고 예수님께서 다그치십니다.
세상은 이러한 예수님을 없애려고 계획합니다. 세상은 제 ‘밥그릇’을 위하여 신념도, 사상도 내팽개칩니다. 바리사이들이 헤로데 당원들과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합니다. 우리 역사로 보면, 일제 시대에 민족주의자들과 친일파가 한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어울리지 않는 이 두 집단이 함께 모의를 한다는 것이 신기하지만, 제 밥그릇 앞에서는 민족도, 나라도, 옳음에 대한 열망도 내팽개칠 수 있는 것이 세상인가 봅니다. 이런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이 지켜 나가야 할 것은 단 하나, 정의를 향하여 ‘손을 뻗는 일’입니다. 꽉 막힌 세상의 이기심 그 한가운데서 세상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펼쳐 나가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하려고 우리는 오늘도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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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안식일은 무행(無行)이 아니라 선행(先行)의 날이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일(창세 2,2-3; 탈출 20,8-11)과 할례를 받는 일(창세 17,10-11)은 하느님께 대한 유다인들의 가장 중요한 신앙행위의 지침들이다. 동시에 이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신앙심을 저울질하는 종교적 기준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 사람들이 이 지침들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데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늘 불쌍하고 없는 사람들에게 이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앞서간 복음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밀이삭을 자르는 행동으로 안식일법을 어겼고, 오늘은 예수님 스스로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심으로써 안식일법을 어기신다.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 편에서 보았을 때 치유의 행위가 범법(犯法)이 되나 예수님 편에서 볼 때는 는 아니다. 우리는 앞서간 복음을 통하여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두 가지 법칙을 발견하였다.
첫째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2,27)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의 아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2,28)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치유기적은 원래 따로 전해오던 것을 마르코가 의도적으로 이 자리에 배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예수와 그 반대자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의 논쟁을 일단락 짓기 위해서이다. 물론 논쟁의 일단락은 예수에게 불리하게 진행된다. 반대자들이 예수를 제거하려고 결의하고 그 작업에 착수하겠기 때문이다.(6절)
예수께서는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진행되더라도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와 뜻을 밝히려 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신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법칙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려 하시는 것이다.
안식일법을 지킨다는 것은 이 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천지창조의 완성의 날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낸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유다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이 날에 금지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예수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문하신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은가?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은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은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옳은가?
이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도 하다. 혹자는 예수께서 굳이 안식일법을 어기지 말고, 안식일을 피해 다른 날을 택하여 좋은 일을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루카 13,14 참조)
그러나 꼭 알아두어야 할 점은 예수께 있어서 내일은 없고, ‘지금’과 ‘여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안식일과 좋은 일을, 안식일과 사람을 살리는 일을 서로 연결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도 밝혔지만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모든 일에게 손을 떼고 쉬셨다(창세 1,2)고 해서 이렛날을 무위도식 하는 날로 생각하면 착각이다. 이 날은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는 날이기에 거룩한 날이고 다른 날보다 복이 많은 날이다.
이 날이 유다인들에게는 토요일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일이다. 따라서 이 날은 죽은 무행(無行)의 날이 아니라 살아있는 행위의 날, 선행(善行)의 날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사명의 핵심은 바로 ‘생명을 주는 일’, ‘사람을 살리는 일’에 있다. 이들 일은 안식일에 더욱 더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 것만 챙기고 나만 살자고 하는 행위는 안식일의 정신에 절대적으로 어긋난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죽임을 당할 줄을 내다보시면서까지 안식일에 다른 사람을 살리시는 뜻을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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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근태 루카 신부님]
<안식일은 생명의 날>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이 휴식의 날인 안식일에 행하신 치유 기적이 문제로 제기됩니다: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안식일법은 십계명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계명은 5세기 교부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간결하게 정리해 놓으신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나 동방교회의 십계명과 비교해보면, 계명이 ‘열 가지’라는 사실은 동일하나, 분류 자체에는 약간의 차이가 보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2계명을 프로테스탄트나 동방교회는 둘로(2-3계명) 나누어 놓았고(2-3계명), 9-10계명을 하나로(10계명) 묶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십계명 본문 자체가(탈출 20,2-17: 신명 5,6-21) 계명 앞에 첫째, 둘째, 셋째 등 서수를 붙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그러함에도 이를 십계명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기초로(탈출 34,28; 신명 4,13; 10,4), 1세기 유다교 학자 필론과 5세기의 아우구스티노가, 본문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아우르면서도, 다소 다르게 분류를 시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필론이 속한 유다교도 이 십계명을 가장 중요한 법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유다교 제1계명이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라는 사실입니다(탈출 20,2: 신명 5,7). 십계명을 인간의 자유를 짓누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옛날 이집트에서처럼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서, 종살이라는 죽음에서 해방이라는 생명으로 이끌기 위해 주어진 법임을 강조하려는 차원으로 이해한다면, 필론의 분류법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안식일법 제정 이유는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탈출 20,8-11; 신명 5,12-15).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이렛날에 쉬셨으니, 그분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도 마땅히 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물로 남종과 여종들, 이방인들, 하물며 집짐승까지도 쉬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엿새 동안 생업을 위해 고생했으니, 하루 휴식을 취하고, 다시 엿새 동안 생업에 종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휴식은 따라서 생명을 위한 것이며, 그러니 안식일은 ‘생명의 날’인 셈입니다. 신명기가 이집트에서의 종살이 생활을 상기시키는 다소 다른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나, 생명 수호라는 주제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 주님은 치유 사건을 통하여 안식일 본래의 의미를 되살리고자 하십니다. 생명의 하느님께 바쳐야 할 날, 하느님께서 사랑을 나누시고자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신 사람을 위한 날, 그 사람이 죽음의 상태에 있다면 당연히 (치유를 통해) 생명을 되돌려주어야 할 날임을 강조하십니다. 문제는 마음이 완고해 생명이 아니라 죽음의 세계를 즐기는 자들, 곧 바리사이들의 의식입니다. 노기를 띠실 수밖에 없고, 슬픈 감정을 숨길 수 없으셨던 대상들, 진정 오그라든 손이 아니라 마음을 뻗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뻗어라.”
오늘 주님은, 바리사이들을 향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이웃의 생명과 행복에 대한 우리의 닫힌 마음을 꾸짖으시는 것 같습니다. 해결 방법은 오그라들고 닫힌 우리의 마음을 펴면 됩니다, 뻗으면 됩니다! 펴고 뻗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웃을 더불어 살아야 할 존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고마우신 분들이라는 마음으로, 그분들과 더불어 생명의 하느님을 찬미하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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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마르코. 3,5)
완고한 마음은 우리가 익힌 ‘살아온 방법’을 지나치게 신뢰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완고한 마음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런 마음은 자신의 것으로만 가득 차 있어서 다른 사람이 들어갈 공간이 없습니다.
완고한 마음은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목숨처럼 소중하여 그것을 잃게 되는 두려워 그 손을 더욱 꽉 쥐게 됩니다. 두려움은 우리 손을 더욱 경직되게 만듭니다. 손을 펴지 못하기에 우리는 더 이상 잡을 수도 없습니다.
완고해질수록 우리 손은 더욱 오그라듭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가진 것에 집착하는 만큼 우리 손은 오그라듭니다. 무엇이든 집착할수록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집착할수록 우리는 더욱 완고해집니다.
우리의 손이 오그라든 것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만큼 우리의 손은 오그라들게 됩니다. 어느 정도씩 우리 모두는 자기중심적이지만 손을 뻗는 만큼 우리는 이타적으로 됩니다. 손이 얼마나 오그라들어 있는지도 모르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잡고 있는 것을 놓아야 손을 펼 수 있고, 오그라든 손을 펴야 우리는 새로운 것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움켜 쥔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도 놓아야 새로운 생각과 감정을 선물로 얻게 됩니다.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완고함은 부드러움으로, 오그라든 손은 펴지게 됩니다. 말씀의 은총으로 우리의 완고함과 오그라든 손은 치유가 되어 펴지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드러움과 자비와 사랑의 말씀을 선물로 주십니다. “손을 뻗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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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유명한 성지로 성지 순례를 가면 늘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사람이 북적이는 곳이라도 아주 한가한 장소가 있습니다. 어디일까요? 바로 성당 안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감실 앞에는 늘 한가합니다. 기도하는 곳에 순례 온 사람들이지만, 정작 기도는 하지 않고 사진 찍기에만 전념합니다. 그 모습을 보며 요즘의 우리 신앙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느님 주변을 서성이기는 하지만 정작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우리가 아닐까요? 가까이에 있을 뿐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성당에 다닌다고는 말하지만,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옛날에 복사도 서고, 레지오도 했다고 소리 높여 말하지만, 지금은 성당 다닌 지 너무 오래되었다고 말합니다. 천주교 신자라고는 하지만, 그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전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가까이에 있을 뿐’에 멈춰서는 안 됩니다. 적극적으로 주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의지를 세워야 그 안에서 많은 의미와 깨달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구경만 한다고 실력이 늘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구경의 대상이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는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까이 그리고 함께 해야 우리의 신앙도 커집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나옵니다.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삶의 능력을 상실하고, 생계가 위협받아 사회적으로 위축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는 하느님을 향해 뻗지 못하고 자기 안으로 굽어버린 인간의 처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고통받는 이웃이 있는데, 사람들은 연민 대신 율법 규정을 어기는지 감시하는 심판관의 눈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그냥 주님 곁에 가까이에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가운데로 나오게 합니다. 이는 고통받는 이를 공동체의 중심에 두시는 행위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시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라고 질문하십니다.
당시에는 생명이 위급한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치료 행위는 금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의 규정문제가 아닌 ‘선이냐, 악이냐’라는 본질의 문제로 전환하십니다. 즉, 율법의 근본정신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할 능력이 있음에도 규정을 핑계로 방관하는 것은 악을 저지르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시며 “손을 뻗어라.”(마르 3,5)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오그라든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향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오그라든 영혼을 쫙 펴고, 당신 곁에 가까이 오라는 것입니다.
그냥 가까이가 아니라, 진정으로 함께하는 우리는 되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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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손을 뻗어라."(마르 3,5)
움츠러든 것은
손만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가는 우리의
마음도 함께
접혀 있습니다.
두려움과 수치,
체념으로 가득 찬
우리의
손을 뻗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지금,
여기서
손을 뻗으라고
하십니다.
손을 뻗는 행위는
은총을
다시 인식하는
우리의
행위입니다.
힘을 주라는
말씀이 아니라
쥐고 있던 것을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손을 뻗는 의미는
완전함이 아니라
진실함에 있습니다.
손을 뻗는 순간,
고립은 끝나고
연결이 시작됩니다.
치유는 혼자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완성된 존재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이
다시 숨 쉬게 되는
날입니다.
치유는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두려움을 지나
관계 쪽으로
손을 뻗는
생명의
오늘입니다.
오늘의 은총에
응답하는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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