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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롬 10:11-15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롬 10:11-15 / 성경은 ㄷ)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결코 실망하는 일이 없다고 이르고 있습니다. (ㄷ. 70인역 사28:16) 12) 이 점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를게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주님을 모시고, 주께서는 당신께 구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풍성한 복을 아낌없이 주십니다. 13) ㄹ)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ㄹ. 70인역 욜2:32) 14) 그러나 주님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주께 구원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주님의 이름을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주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알려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또 보내는 분이 없다면 누가 어떻게 가서 알릴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ㅁ) `하나님과 누리는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ㅁ. 사52:7(참조,나1:15))
예수 그리스도는 마음과 입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누구나 차별이 없이 누구에게나 주가 되신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차별 없는 복음(11-12)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다고 할 때 그 목표는 구원이고, 그 대상은 예수가 부활하신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 이유는 믿음의 주체가 누구든지입니다. 즉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 없이 누구든지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만인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와 정죄에도 차별이 없는 것처럼 구원의 기회에서도 차별이 없습니다. “부요하시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속의 부유를 가리키는 것보다, 그를 부르는 자들을 받아들이실 준비가 완벽하다는 의미에서 부유하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가난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측량할 수 없이 부요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의 구원(13)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믿음을 전제한 경배 행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들을 때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하며 차별이 없다는 말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선민으로서 유대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도전이었고, 이방인들에게는 감격적인 복음이었습니다.
어찌 들으리요(14-15) 보내심을 받아야 전하고, 전해야 듣고, 들어야 믿고, 믿어야 부른다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고백하기까지의 과정을 말합니다. 전하는 자가 없으면 들을 수 없고 듣지 못하면 믿지 못하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과정은 결코 공백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의 구원에 대한 소원과 간구로 시작하여 보내심을 받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사야 52장 7절을 인용하여 전도자를 예찬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로서 포로되어 살던 백성들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파수꾼이었습니다. 복음 전도자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부활하신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은 그것을 믿지 않고 고백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한다는 경고입니다.
적용: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고 고백할 수 있도록 보내심을 받은 우리는 오늘도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발은 아름다운 발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발은 무엇을 하는데 사용되고 있나요? 범죄를 저지르는 데 사용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만약 그렇다면 이제는 돌이켜 우리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길 수 있는 아름다운 발을 가진 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 설 교 >
구원의 도리
로마서 10:11-13 / 김양인 목사
성경은 사람이 구원을 받는데 무슨 자격을 요구하지 않으며, 다만 이같이 선언합니다.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
구원 받는데 민족의 차별이 없습니다. 선민의식이 강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므로 당연히 구원을 받지만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했으므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합니다. 이 누구든지 안에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때 헬라인은 모든 이방인들을 대표합니다. 헬라인 안에는 한국인인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는 구절은 “유대인이나 한국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선민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이 누구나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별도 없습니다. 과거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던 시대에도 믿음의 세계에서는 남녀가 평등하게 대접을 받았습니다. 사회적인 신분의 차별도 없습니다. 고대 로마세계에서는 노예제도가 성행했습니다. 노예는 인권이 없고 마치 가축이나 물건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데는 자유자와 노예의 차별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3:28에 이르기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연령의 차별도 없습니다. 어른만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믿을 수 있습니다. 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라도 괜찮습니다. 한번은 사람들이 자기의 어린 아기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그들을 나무라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빈부의 차이도 없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차별 없이 누구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원칙을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데는 선민과 이방인, 남녀, 노소, 빈부의 차이가 전혀 필요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복음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구절과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구절은 같은 의미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곧 주를 믿는 자를 말합니다. 선민이냐 이방인이냐, 남자냐 여자냐, 어른이냐 아이냐, 부자냐 가난한 자냐의 차별이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선량한지 악한지의 차별도 무의미합니다. 선량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선량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완전한 기준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에 불과합니다. 구태여 말하자면, 선량한 사람은 선량한 죄인이고 악한 사람은 악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법인 율법에 의하면 둘 다 멸망 받을 죄인입니다.
로마서 3장에 보면, 인간들의 실상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여기서, “하나도 없다”는 표현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래도 이 세상에는 의인들이 소수 나마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들은 온 인류가 추앙하는 성인들이지 않은가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단언합니다. 인간들이 볼 때에는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인데도 성경은 그들을 포함해서 “깨닫는 자도 없다”고 단정 짓습니다. 철학을 탐구하고, 도를 닦고, 수양을 하고, 자선을 하는 것, 등등 인간들의 모든 행위가 한 가지로 무익한 것이요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서 인정받을만한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기준이 너무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까? 항의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준의 엄격함을 비난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요즘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방사능 오염수가 매일 300톤 이상이나 바다로 유입된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주변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에서 방사능이 검출되어 얼마 전부터 우리나라도 일본산 물고기 수입을 금지했습니다. 수입금지 조치를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정부가 나서서 일본산 수입 물고기에서 검출된 방사능 양이 기준치 이하이므로 건강에 해가 되지 않으므로 먹어도 된다고 발표했지만 국민들은 믿으려 하지 않고 불안해했습니다. 그 이유는 방사능은 기준치 이하라고 해도 그것이 쌓이면 치명적인 부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부는 우리 정부에게 항의하고 일본산 물고기에서 검출된 방사능 양이 기준치 이하이므로 수입을 재개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은 기준치 이하이더라도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관련이 있는 일본산 물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기준과 원칙은 정당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이 엄격하다고 항의할 수 없습니다. 죄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우리의 영혼을 죽일 수 있으므로 심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죄를 지은 사람만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죄를 범한 사람은 누구나 다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작은 죄를 지은 사람도 죄인이고 큰 죄를 지은 사람도 죄인입니다. 죄인은 누구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큰 죄를 지은 사람과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은 다 심판을 받지만, 각 사람이 지은 죄의 경중에 따라서 형벌이 다릅니다. 그러면 이 땅에 태어난 사람 가운데 구원 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죄인이므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기독교는 너무나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언제나 죄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때가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같은 지적은 맞습니다. 기독교가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항상 죄에 대하여 말하는 것도 맞습니다. 그것은 병원에 가면 의사가 병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의사에게 “당신이 나의 병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심을 갖기 때문에 부담스럽습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처럼 나의 질병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주는 의사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육체의 질병이 아니라 영혼의 질병을 치료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더니 그가 예수님을 위해 자기 집에서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마태의 동료 세리들과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참석했습니다. 그 때 서기관들이 이 광경을 보고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고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은 스스로 의로운 자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세리들과 경건치 못한 자들을 죄인이라고 여기고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의사로서 영혼이 병든 자들을 가까이 하셨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겼으므로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께 나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리들과 죄인들은 자기들의 추하고 비참한 영적 실상을 알았으므로 겸손히 주님 앞에 나아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건강에 자신하는 사람이 병원을 찾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자기가 죄인인 사실을 시인하는 사람이라야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세상에서 잘 난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 부자들, 권세가 있는 사람들,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들 중에는 주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데,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을 상당히 쓸 만한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인데…’ 그런 자부심에 차 있어서 자기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서 잘난 것이 예수님을 믿는 데 불리한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형편은 초대교회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내세울 것이 없으므로 마음이 겸손해 지기 쉬운데, 바로 이 겸손함이 주님을 믿는데 유리한 조건이 됩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생활이 매우 건전하고 윤리적으로 훌륭한데 전도를 해도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기독교인들의 부족함을 지적하면서 자기의 의로움을 은근히 내세웁니다.
기독교인들의 언행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모범이 되어야 하지만,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다 성숙한 신자인 것이 아니고 미숙한 단계에 있는 신자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누구나 도덕적으로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과 자신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자기를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평생 전혀 죄를 짓지 않고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한 사람인들 있을까요? 만약 그렇게 살아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과 남을 속이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믿기 전에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감히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 빛나는 광채 앞에 엎드러졌고 시력을 상실하였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하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 때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내심 받은 메시아이신 것을 알게 되었고 자기가 얼마나 무서운 죄를 범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다메섹의 어느 골방에서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주님의 은총을 입어 다시 눈을 보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자기의 생애를 바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15)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의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의 마음눈을 열어주시자 자기의 추악한 실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탄식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고 했습니다. 율법에 비추어 흠이 없노라고 자부하던 사람의 입에서 이런 탄식이 터져 나왔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를 구제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라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교회 생활을 오래 했더라도 이 사실을 절감하지 못했다면, 아직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취미 삼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가 선용으로 그저 한번 믿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그것도 영원한 생명이냐 영원한 파멸이냐를 결정짓는 심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5)…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리 인생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셨을 리가 만무할 것입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의 죽음이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예수님을 미워한 유대교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기득권층의 이해관계 때문에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나 로마 총독 빌라도나 로마 군병들은 말하자면, 조연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요,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대속의 죽음을 죽을 것을 미리 아시고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그 이튿날 아침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르시기를 “48)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희생하실 것을 미리 다 알고 계셨으며, 공생애 내내 그 결정적인 때를 위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셨다는 사실은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를 말해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은 우리의 죄가 그만큼 크고 심각하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목숨을 버려야 할 만큼 죄는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하게 주님을 믿는 사람은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에 대한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대속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대속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어 장사 되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대속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죽고 살지 못하셨다면 그 분이 인류의 구세주시라고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덤에 장사되신 지 삼일 만에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셨으므로 만민의 구주이신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 같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죄 많은 옛 사람이 죽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우리가 새 생명으로 함께 부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를 대하실 때 자연인 아무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대하십니다. 로마서 8장에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신 말씀은 예수 믿는 성도들을 위한 해방 선언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완전무결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약점과 부족함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아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대홍수가 나서 모든 사람들이 다 물에 빠져 죽었으나 방주 안에 있었던 노아의 식구 여덟 사람은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인품이 고상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방주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결점이 있고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의 공로는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점차적으로 인격이 성숙해진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는 과거에 자랑거리로 여겼던 가문, 학벌, 사회적인 신분, 지식, 의로움, 종교적 열심 따위를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하였으며, “…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고 했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은혜를 아는 성도들은 사도처럼 오직 예수님만 자랑합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한 것도, 많은 봉사를 한 것도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내세우는 자랑이 될 수 없으며 다만,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 종교들은 인간의 공로를 구원의 중요한 수단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람은 스스로 도를 깨닫고 선을 쌓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깨닫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밖에 없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신 대로, 예수님 한 분만이 인류의 구주이십니다.
우리가 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밖에 없으며,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 개인의 의로움이나 선행, 자질, 노력 따위는 구원을 받는데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의지하는 사람은 오히려 주님을 올바로 믿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스스로 지혜롭고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구원의 방법이 너무 단순하고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단순함과 쉬움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베풀어주신 지극한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낫 놓고 기역자를 모르는 사람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흉악한 살인강도도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사함 받고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 중 한 사람은 주님을 향하여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라고 한 마디 부탁드린 것밖에 없으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만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세주로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성도님들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한 결코 정죄함이 없고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며 살아가실 뿐 아니라, 아직도 인간의 노력과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얻는 줄 알고 있는 불신 이웃들에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 도리’를 부지런히 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구원, 그 이후!
오정호 목사
실력있는 그리스도인이란 복음을 잘 정리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에게 있어 필수적인 질문 세가지는 첫째, 복음이란 무엇인가? 둘째, 나는 누구인가? 셋째,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입니다.
Ⅰ.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부끄러움을 당치않게 합니다(11절).
본절은 이사야28장16절의 인용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정죄와 지옥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으면 이 지상에서도 수치를 물러가게 하고 당당하게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복음의 은혜요, 본질입니다. 우리나라의 문화는 수치중심의 문화입니다. 내가 갖지 못한 것, 부족한 것, 과거의 수치스러운 기억들 때문에 남앞에 당당하고 떳떳하게 서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러움이 아니라 당당함과 떳떳함으로 설 수 있도록 우리를 변화시켜줍니다. 의의 세마포로 우리의 수치를 덮어주십니다. 우리는 실패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축복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때에 나의 죄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훈련시키시고 성숙시키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끄러움 중심의 삶이 아니라 은총 중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 부요하게 합니다(12절).
바울은 복음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배움의 정도나 직급에 따른 차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안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요, 축복입니다. 복음은 주를 부르는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합니다. '부요하다'는 말은 '가득 차도록 채우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믿는 자들의 만족과 축복이 됩니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게 만드는 이것이 바로 복음의 은혜요, 위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인생의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을 부요함으로 가득 채우시고 풍성하게 하시는 주님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세상에는 완전한 만족이 없습니다. 세상의 만족은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당시 로마는 지식과 문화와 발달된 도로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과 가정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삶의 만족과 희망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복음은 믿는자에게 부요함과 만족함을 줍니다.
셋째, 구원을 얻게 합니다(13절).
'누구든지'라는 표현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른 어떤 사람이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려있음을 말합니다(10절).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죄로부터의 자유케 되고 심판을 면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를 구원의 종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죄를 씻지 못합니다. 율법으로, 선행으로 발버둥쳐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죄의 옷을 벗기고 의의 옷을 입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롬3:21). 복음이란 부끄러움을 당치않게 하고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며,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안에 있는 나는 누구입니까?
Ⅱ. 복음은 우리의 자아상을 바꿉니다.
복음안에 있는 나는 죄와 형벌에서 해방받은 나,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한 나입니다(롬8:1-2). 나를 묶을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죄도 지옥도 우리를 더 이상 묶어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하실 뿐만 아니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롬8:30).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마음에 깊이 체험한 자만이 예수믿는 자답게 살 수 있습니다. 삶의 담대함은 지식이나 경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복음 안에서 해방된 자신을 발견하는데서 나옵니다. 우리의 신분에 대한 새로운 자각은 어떤 삶의 유혹이나 고난도 극복할 수 있게 합니다.
Ⅲ. 복음은 사명을 자각하게 합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자 두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주여 뉘시니이까?"("Who are you, Lord?" /행9:5),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What shall I do, Lord?" /행22:10) 복음안에서 새로운 자아상을 확립한 사람은 주님에 대한 인식과 '내가 무엇을 해야 주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겠는가?'의 자신의 사명의 문제를 인식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살지만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사명이 명확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명에 대해 명확히 자각합니다(14-15).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대명제에서 출발하여 다른 이들도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하는 사명을 자각합니다(10:1). 사도바울은 구원을 받아 부끄러움에서 자유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축복이 자신에게서 멈추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되어 구원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의 가치를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복음이 무엇인지 그 가치를 아는 자는 복음을 감추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그의 삶의 전부를 걸었습니다(행20:24). 복음에 전부를 건 사람만이 영원할 수 있습니다.(요일2:17)
교회가 왜 존재해야 합니까? 교회는 어둡고 부패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영광스러운 복음은 곧 예수그리스이십니다. 이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올바른 성도와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자랑이 확실합니다.
사도바울은 오직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엡6:19).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전도의 문을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골4:3). 우리는 직장과 사업의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귀하지만 직장과 사업을 통하여 전도의 문이 열려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직장과 사업의 문도 함께 열릴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복음이란 무엇이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명쾌히 정리하여 "2001 새생명축제"가 나를 통해 복음이 확산되고 또 다른 생명이 구원을 얻게 되는 "생명의 축제"가 되게 합시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도 누군가 나에게 복음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라면 이제 나도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놀라운 복음의 축복이 우리를 통해 확산되게 합시다. 사도바울의 확신과 열정이 우리에게 이어지게 하여 생명을 얻게 하는 복음이 이웃과 직장동료들에게 전파되게 합시다.
이 가을에 주님을 개인적으로 간절하게 부름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구원의 은총을 마음껏 체험합시다. 할렐루야!
선교를 위한 호소
이종윤 목사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누구든지'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닌 인종, 문화, 경제, 학력, 배경의 차별 없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구원 신앙에는 지적내용을 알아야 하며, 그 내용에 대한 인격적 동의를 해야하고, 마지막으로 완전한 헌신이 있어야 하는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완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내 힘과 의지로 할 수 없으니 나를 구원해 달라고 주님을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으리라'는 부분은 가정이나 개연성이 아닌 확실한 미래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케 하는 선교를 위한 4가지 필요성은 무엇일까요?
Ⅰ.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14절에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른다는 것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즉 14절의 말씀은 믿음이 없이는 바른 기도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소용없다는 생각으로 기도를 게을리 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주님을 부르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을 믿을 때 그리스도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 가운데 주님을 부르는 자가 그 믿음으로 전도 또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Ⅱ. 그리스도를 들어야 한다
'듣지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14절). 듣는 것은 넓은 의미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성경을 떠나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된 말씀을 풀어 적용시키는 설교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어야 그리스도를 부를 수 있습니다.
Ⅲ.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한다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4절). 복음은 입술, 책, 전도지, 행동, 전화, 텔레비젼, 테이프, 설교 등등 많은 방법을 통해 전파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은사와 기회를 복음전파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유명한 설교자가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웃에게, 친구에게 내 입으로 예수님을 믿으라는 단 한마디라도 건넨다면 그것이 바로 복음의 전파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믿음으로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입니다.
Ⅳ. 그리스도의 사자를 보내야 한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15절). 보내심을 받은 이는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이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메시지가 있음을 깨닫고, 그 계시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받았다면 전하고 싶은 내적 충격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이 주님을 믿게 하고픈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옷입혀질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오늘 평화의 복음을 많은 이들이 받을 수 있도록 우리는 소리쳐야 합니다. 이것을 전하는 것이 신자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녀의 권세와 하늘 상속자로서 성령의 무한한 지혜로 인도될 것입니다. 소망과 평화를 잃고 그리스도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자들에게 이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고 의지하고 죄 용서함 받고 구원을 얻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사명을 가진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호소입니다.
아름다운 발을 가졌습니까
로마서 10:!3-15 / 조상호 목사
작년 8월11일자, 국민일보에 <여성 68% 외모가 인생좌우>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13∼43세의 우리나라 여성 2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전화면접 조사결과, 우리 사회의 13∼43세 여성 68%가 외모가 인생의 성패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78%는 외모 가꾸기는 멋이 아니라, 생활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또 외모 가꾸기에 하루 평균 53분을 투자하며, 거울은 평균 8.3회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조사 결과 응답자의 69%는 외모에 신경을 쓰고 외출하면 타인이 더 친절하게 대한다고 생각했으며, 56%는 또래의 여성을 보면 외모부터 비교하게 된다고 답해서, 외모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 중압감을 느끼는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25∼34세의 여성들은 외모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수단이라고 여겨 외모 관리에 가장 적극적이었습니다. 35∼43세의 중년여성들은 외모를 부의 상징, 사회적 지위를 평가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외모에 대한 높은 관심은 대단합니다.
지난 6일 금요집회 때, 제가 “미용선교를 하시는 모 목사님이 오셔서 낮에는 무료로 레이저로 점이나 흉 같은 것을 빼주고, 밤에는 집회를 하려고 계획했다가 목사님에게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 생겨 취소되었습니다.”고 했을 때, 가장 아쉬워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자매님들이야 평소부터 아름다움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당연히 안타까워 할 수 있지만, 예상외로 수많은 중고등부 남학생들과 청년선교회 형제들, 그리고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모 남자 집사님이 가장 안타까워했습니다. 나중에 건강을 회복하시면 그 목사님이 다시 뉴질랜드에 오실지 모르지만, 그 때 저는 다시 한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름다움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큰 눈과 오똑한 코, 갸름한 얼굴모양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몸매, 가슴, 주름살, 팔, 다리, 발 등으로 해가 가면 갈수록 밑으로 내려가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노출의 계절인 여름철을 맞이하여 <날씬한 종아리 맞춤 시술법- 멋진 다리 뽐내세요>라는 기사도 실렸습니다. 특별히 올해 2003년도에는 미니 스커트의 대유행으로 날씬한 종아리 만들기를 위해 지방흡입술이나 보톡스 라는 주사를 종아리에 주사하여 날씬한 종아리를 만드는 성형수술이 각광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 예쁜 하이힐을 신었을 때, 구두 모양이 살지 않는다고 해서 족부정형외과에 가서 발 수술도 한다고 합니다. 골격 구조상 서양인보다는 다소 넙적한 모양의 발을 가진 동양여성이 서양인 발에 맞게 만들어진, 좁고 높은 스타일의 구두를 즐겨 신은 탓에 엄지발가락과 두 번째 발가락이 꼬부라지거나, 신발과의 접촉으로 피부가 두꺼워지거나, 혹이 생기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 족부 변형 수술을 받는다고 합니다. 엄지 발가락쪽 관절의 안쪽 가장자리를 2.5㎝ 정도 절개한 다음, 튀어나온 뼈를 다듬고 관절의 각도를 교정하는 족부 변형 수술을 받으면 예쁜 발 모양을 되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쁜 하이힐도 마음대로 신을 수 있어 멋을 마음껏 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족부 변형 수술은 돈도 많이 들 뿐 아니라, 나름대로 위험도 뒤따릅니다. 수술 후 보기 흉한 흉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수술 후 3~4주 동안 조심해서 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수술 후에 후유증도 생길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아름다운 발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할까 합니다. 위험하지도 않고, 흉터 걱정도 없고, 후유증을 염려할 필요도 없이, 수술하지 않고도 아름다운 발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아름다운 발을 가질 수 있습니까?
좋은 소식을 전하라
우리가 좋은 소식을 전할 때, 아름다운 발이라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습니다. 세상의 족부 변형수술을 받고 예쁜 구두 신으면 남자 친구가, 애인이, 아내나 남편이 아름다운 발을 가졌다고 인정할지 모르지만, 그 인정은 불완전합니다. 수술하여 깍은 뼈에 이상이 생기면 아무도 예쁜 발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항상 아름다운 발이라고 인정받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만약 여러분들이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인 복음을 듣고 구원받았다면, 새 생명을 얻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십시오. 거기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만납니다.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은 가진 것이 없어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일으켰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때 기적을 경험하여 치료받은 그가 취한 행동을 아십니까? 사도행전 7장 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에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한 다음,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자기를 고쳐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4장에 보면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고 여섯 번째도 남편이 아닌 남자와 살면서 인생의 갈급함 때문에 목말라 하는 여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녀가 사마리아의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인생은 180도로 변화되었습니다. 변화된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요한복음 4장 28절과 29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주님을 만난 후에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그녀가 체험한 것을 전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 와 보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까?
1)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전해야 하는 이유 첫 번째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13절과 14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말씀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뒤에서부터 해석하면 더 쉽게 이해가 됩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들을 수 없습니다. 전해야 들을 수 있습니다. 또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믿고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들어야 합니다. 17절 말씀처럼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리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전파하지 않으면 믿는 자들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생명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할 때, 비로소 생명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솔로몬 수도 호니아라에 가서 귀한 분을 한 분 만났습니다. 김덕기 장로님이라는 분입니다. 김장로님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19년 전에 솔로몬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고생을 참 많이 하셨습니다. 솔로몬 원주민을 상대로 비즈니스를 시작하여 19년이 지난 지금은 현대자동차와 쌍용 자동차의 판매. 수리를 전담하고, 자동차를 임대하는 KOSOL이라는 회사와, 솔로몬에서 유일한 한국 식당인 Seoul Cafeteria와 각종 물건과 선물들을 판매하는 Seoul Shopping을 경영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의 말씀에 의하면 비행기 한대 값보다도 더 값이 나가는 어획권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호니아라의 가장 중심지에 큰 건물과 많은 대지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분은 솔로몬이라는 나라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인물이 되셨습니다. 저와 다른 일행들이 입국신고서에 머무를 숙소를 기입하지 않아 입국 심사대에서 입국이 거부되었을 때, Mr Kim이라는 한 마디에 통과가 되었습니다. 또 솔로몬 아가페 순복음교회의 성도들과 원주민 주일학교 아이들에 주려고 시드니와 브리스베인에서 준비한 각종 학용품과 스넥종류의 음식물, 각종 떡 등과 우리 일행의 짐들이 무려 20여 개나 되어 통관되지 않을 때, 세관검사대 밖에 계시던 김장로님을 공항 안에 까지 불러 들여 아무 문제없이 통관되기도 했습니다. 호니아라 시내 어디를 가도 Mr Kim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김장로님은 솔로몬 호니아라에서는 유명한 인물이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분이 오랫동안 고생하여 돈 많이 벌고, 호니아라에 널리 알려진 것 때문에 그 분을 귀한 분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그 분을 처음으로 만났기 때문에, 그 분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그곳에 3일 동안 체류하면서 직접 목격한 바로는 정말 돈을 잘 벌 줄도 알고, 돈을 잘 쓸 줄도 아는 분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김장로님은 당신이 직접 땅을 사고 그곳에 95년에 아름다운 150석 정도의 솔로몬 아가페순복음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전임사역자가 없는데도 장로님께서 100% 재원을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2001년에는 부속실 3개와 부엌, 샤워실과 화장실이 딸린 별관을 건축했습니다. 또 트럭- 그곳에서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에 승용차보다는 트럭이 유용한데- 한대를 교회에서 사용하도록 기증하였습니다. 원주민 성도들이 돈이 없고 말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헌금을 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의 경상비 대부분을 김장로님께서 부담하고 계십니다. 또 지난 3여년 전에 일어난 종족분쟁이라는 Tension으로 인해 150여명의 성도 중에서 100여명의 성도들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현재에는 50여명의 성도로 줄어들었지만, 김장로님의 마음속에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현재의 교회 건물 뒤로 600석의 본당을 건축하려고 땅까지 이미 마련해 놓고 있었습니다. 또 김장로님께서는 내년 4월에 있을 예정인 조용기목사님의 솔로몬특별성회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조목사님 성회는 현지 AOG 교회들이 연합하여 주관하고 있지만, 사실상 성회에 필요한 모든 재정을 김장로님께서 부담한다는 각서를 쓰고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성회 장소인 스타디움과 수십 명이 사용할 호텔임대, 그리고 각종 차량지원과 식사준비, 특별성회 홍보, 그리고 여러 섬으로부터 성회에 참석할 원주민 교회 지도자들의 여행경비까지 합하면 몇 십만 불이 들지 모르지만, 전액을 김장로님께서 부담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가 솔로몬으로 선교를 오면 선교기간 동안 사용할 트럭도 무료로 제공해주고 선교팀이 머무를 장소로 교회 뿐 아니라, 모든 편의 시설을 제공해준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으셨습니다. 할렐루야! 김장로님께서는 멋지게 돈을 쓸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제대로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생명들을 위해서, 제대로 말씀 훈련을 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동부 서주하는 아름다운 발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도 이러한 아름다운 발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돈을 벌어, 그 돈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멋지게 사용하는 멋진 부자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제와 봉사입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핵심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비단 교회가 아니라도 다른 사회단체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교회만이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줄로 믿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주어야 하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십자가인 줄로 믿습니다. 아프리카 동부지역의 선교사였던 빈센트 도노반은 <기독교의 재발견>이라는 책에서 19년 동안 마사이족과 함께한 시간들에 대해서 적어놓고 있습니다. 도노반 선교사가 동부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기존 선교단이 세운 학교와 병원 및 기타 시설들이 잘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교회나 크리스쳔들은 찾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고 보니 선교사들이 학교 짓고 병원 짓느라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자신들이 처음에 왜 아프리카까지 왔는지 그 목적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도노반 선교사는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마사이족 전체에 큰 영적 부흥이 일어났고, 눈물로 회심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사이족 추장이 도노반 선교사에게 찾아와서 통곡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왜 그런 생명의 말씀을 이제야 전하는 것입니까? 진작 증거 했으면 우리 부모님이 구원을 받았을 것이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구원받았을 것이고, 우리 가족들이 구원받았을 텐데 왜 지금에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지 않으면 누가 증거합니까? 용역회사가 대신 해 줄 수 있습니까? 전하는 자가 없이 아무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가 이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미 복음을 듣고 축복을 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과 세상이 말하는 복은 서로 다릅니다. 전에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세상이 말하는 복은 ‘happiness’ 다시 말하면 ‘행복’을 의미하는 반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blessing’, 즉 ‘축복’을 의미합니다. 이 행복을 뜻하는 ‘happiness’와 복을 뜻하는 ‘blessing’은 완전히 다른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happiness’의 어원은 ‘우연히 일어나다’, ‘우연히 만나다’라는 의미의 ‘happen’에서부터 나왔습니다. 단어적인 의미로 보면 행복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행복한 사람이 내일 불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어려웠던 사람이 내일 행복해질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행복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가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축복은 완전히 다릅니다. ‘blessing’은 피를 흘린다는 뜻의 ‘bleed’에서 나왔습니다. 축복이란 피 흘림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전 인류가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축복의 기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닿는 사람마다, 닿는 곳마다 축복이 임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축복은 섬김과 희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축복은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많이 받았다는 것은 많은 피를 흘리라는 메시지라고 믿습니다. 좋은 소식을 들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라는 메시지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미 복음을 듣고 축복을 받은 존재가 되었다면 축복을 전달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아난 존재가 되었다면 이제 우리가 Woolston 지역과 크라이스트처치시와 남섬과 남태평양, 땅 끝에 이르기까지 죽은 영혼들을 살리는 일들을 감당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내가 살기 위해서
우리가 전해야 하는 이유 두 번째는 내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 증거를 영혼 구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 증거는 다른 사람을 살릴 뿐 아니라 나도 살게 하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 증거와 복음 증거를 제쳐 놓고 다른 것에 신경을 쓰다보면 문제에 빠집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헬라파 사람들과 유대파 사람들이 서로 원망하며 다투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씀 전하는 것을 제쳐 놓고 다른 일에 신경을 쓰다보니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스왈드 스미스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화석처럼 되고 말 것이다.” 또 어떤 신학자는 “선교하기를 멈추는 교회는 복음적인 교회로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세계적인 교회를 추세를 보면 선교하지 않는 유럽의 교회들은 다 사양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반면에 성령의 능력을 인정하고 의지함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아, 선교하는 교회들은 오히려 흥왕하고 있습니다.
제가 호주에서 평신도로 있을 때, 중고등부 교사로 오랫동안 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어릴 때부터 호주에서 자란 학생들로부터 호주 문화를 많이 배웠습니다. 그 중에 프리스비 게임을 중고등부 야외예배나 수련회에 서 자주 한 기억이 납니다. 프리스비 게임은 한국말로는 부메랑이라고 부르는데 ‘ㄱ'자 모양의 조그만 나무입니다. 원래 이 부메랑은 호주 원주민인 아보리진들이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는 과일을 따거나, 나무 가지에 앉아있는 새 같은 동물들을 사냥할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한 쪽 끝을 잡고 하늘을 향해 던지면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다가 목표물을 명중시킨 후 한 바퀴 돌아서 던진 사람에게로 다시 온다는 것입니다. 프리스비를 던진 사람은 그것을 주우러 갈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할 필요도 없이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으면 정확하게 다시 돌아옵니다. 저는 우리의 인생이 이 부메랑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대개의 경우, 던지면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팥 심은데 팥 나고 콩 심은데 콩 납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땀을 흘리면 그 땀의 대가를 얻게 되어 있습니다. 미래는 얼마나 오늘에 투자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것이 부메랑법칙입니다. 이것은 또한 성경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내가 열심히 복음을 심으면 그 열매가 분명히 나에게 돌아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살릴 뿐 아니라, 본인에게도 유익합니다.
유황불에 멸망한 소돔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화인지 아니면 야사인지 모르지만, 중요한 의미가 있어 소개합니다. 소돔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앞두고 있을 때, 심지어 유황불이 떨어져 소돔성이 멸망하는 그 날 아침까지 성문에 서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어떤 노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있는 그 노인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변화되지 않는데, 왜 쓸데없이 날마다 외치고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노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도록 계속 외치고 있소.” 소돔과 고모라는 굉장히 악한 도성입니다. 아무리 의로운 롯과 같은 사람이라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소돔 사람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자기도 가만히 있다가는 나중에 소돔 사람처럼 되어 버릴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외치고 있는 이상, 나는 소돔 사람이 되지 않는다. 내가 외치고 있는 이상, 소돔 사람은 변화를 받지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절대로 소돔 사람을 닮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외치고 있는 이상 나는 건재하다.”
전통적으로 카톨릭 국가라고 할 수 있는 남미 대륙에서는 개신교가 부흥하고 있다고 합니다. 1년에 50만 명 이상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남미의 카톨릭 교회는 누구든지 성당 안에 붙들어놓고 미사만 드리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카톨릭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점차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교회, 특히 여러 교파들 가운데 특별히 순복음교회와 같은 오순절 계통의 교회가 열심히 전도했기 때문에 개신교가 엄청나게 부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제 갓 예수님을 믿게 된 새신자들을 앉혀놓고 이렇게 가르친다고 합니다. “당신이 지금 예수 믿었지요? 그렇다면 그 예수를 당신 혼자 모시고 있지 마세요. 아직도 예수를 몰라 멸망하는 사람이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당장 나가서 전도하십시오.” 이와 같이 누구든지 예수를 믿은 즉시 가까운 이웃에게 예수를 증거 하도록 가르친 것이 오늘의 부흥을 일으키는데 빼놓을 수 없는 비결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믿음이 성장하려면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2년 동안 미션에 다녀온 청년들을 보면 굉장히 많이 성장하고 성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7월에 있을 Youth Mission에도 참석하여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8월9일의 홈컴밍데이에 참여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기 바랍니다. 12월에 있을 Mission 2003에도 참여하셔서 복음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복음 증거는 다른 사람을 살릴 뿐 아니라, 복음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는 유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구원은 산에 가서 혼자 도 닦고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려면 믿어야 합니다. 믿으려면 들어야 합니다. 들으려면 누군가 전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소식을 전하러 가는 사람의 발은 복된 발인 줄로 믿습니다. 복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발은 아름다운 발인 줄로 믿습니다. 15절 중반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저는 이러한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들의 발이 주님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발이 돌맹이 차는 발이 아니라, 신경질 나서 다른 사람의 엉덩이를 차는 발이 아니라, 죄악을 저지르는데 달려가는 발이 아니라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 되기를 바랍니다.
변화를 꿈꾸는 자
로마서 10:13-15 / 김태영 목사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바람을 보면서 이 시대에 필요한 진정한 생명의 바람을 일으켜야 한다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특별히 이번 주는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날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고향을 방문하고 친지들을 만나게 됩니다.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끝내지 마시고, 우리에게 있는 그들에게 필요한 생명의 바람을 일으키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진정한 생명의 변화를 꿈꾸는 자에게 필요한 변화의 에너지가 무엇인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진정한 변화의 에너지는 소통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해 막혀 있다면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부모와 자녀, 또는 부부 사이가 통하지 않고 막히면 가정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어느 관계에서든지 통하지 않으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바울이 생명의 변화를 위해서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 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흘러 보내기 위해 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를 보면, 세상의 관리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지만 제자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 생명의 말씀을 증거 합니다. 설날 명절에 강요하거나 다투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살아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 해야 합니다. 생명의 통로를 막아놓고 변화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생명의 변화를 원하신다면 생명의 통로를 열고 복음을 전하여 듣게 해야 합니다. 삼락가족들 모두가 사방으로 통하여 복음의 나팔을 울려 불어 생명의 변화가 이 땅에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2) 진정한 변화의 에너지는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시대 사람들을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슬퍼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 시대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귀에 들려지지만 다른 사람의 모든 말을 차단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행동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사기를 떨어뜨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지금 당장 우리 앞에 열매가 맺혀지지 않았다고 열매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일을 이루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봄에 농부는 가을 추수를 기대하며 힘들어도 몸을 움직여서 씨를 뿌립니다. 미리 여름의 가뭄과 병충해를 두려워해서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가을에 추수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생명의 변화를 원한다면 움직여야 합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보물섬에 이르는 지도를 가지고 있어도, 움직여 찾아가지 않으면 그 보물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행동해야 이 땅에 생명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위해 일어서기를 확정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이번 구정명절에 생명의 변화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행동하는 삼락가족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 진정한 변화의 에너지는 인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고 거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 하지 않고 기다리십니다. 겔33:11에 보면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이 악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시며, 이 땅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생명의 변화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들어와 있습니다. 끝이 없는 그 은혜의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그 은혜의 바다에서 즐겨야 합니다. 조급함과 좁은 소견으로 은혜의 바다를 작은 수영장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그들을 포기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이루심을 기대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진정한 생명의 변화가 이루어짐을 기대하며 끝까지 인내하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변화를 꿈꾸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생명을 이 땅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눌 때, 생명의 변화가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며 그 날을 꿈꿉니다. 꿈꾸는 진정한 변화를 이루기 위해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생명의 변화의 에너지는 소통, 행동, 인내입니다. 이번 구정명절에는 우리 안에 이 에너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서 맘껏 헤엄쳐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생명의 변화를 이루는 삼락가족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