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0장 피난처가 되시는 예수님
가나안의 모든 영토를 이스라엘 지파별로 분배하고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도피성을 정하여 구별하는 일이었다.
(수 20: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수 20: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여
(수 20:3)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수자를 피할 곳이니라
도피성이란 (히)미크라트(מִקלָט)로 “피난처, 도피처 혹은 수용소”를 의미한다. 도피성을 두는 이유는 치안이나 사회적 안전 제도가 확립되지 않았던 고대 사회에서 실수로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고의가 아닌 실수로 살인이 저질러졌을 경우 감정적으로 복수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안전한 곳에서 재판받기까지 피할 수 있도록 마련한 제도다. 그래서 살인 사건이 정말 실수로 저질러 진 것이라면, 그 가해자는 목숨을 보장받을 수 있었지만 도피성 안에서만 살아야 했다. 그러나 실수가 아닌 고의로, 죽일 의도를 가지고 저지른 살인인 경우는 반드시 법에 따라서 처벌하도록 했다.
그렇다면 이 도피성은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을까? 도피성의 현실적인 적용은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는가? 그리고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구약의 도피성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며 또한 죄악의 조수가 범람하는 세상에 세워진 하나님교회의 상징이기도 하다. 모든 죄인은 그리스도께 피하여야 살 수 있다. 원수는 새 사냥꾼처럼 올무를 치고 총을 쏘아서 연약한 사람들을 떨어뜨리려고 한다. 이런 때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가 될 것이다.
도피성 제도에는 중요한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도피성으로 도망하는 자는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가족과 직업을 모두 버려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할 시간도 없었다. 생명이 위태롭기 때문에 안전한 땅으로 피하는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다른 모든 이해관계를 포기해야 하였다. 피로도 잊고 어려움도 돌아보지 않았다. 도피자는 그 성벽 안에 도달하기까지는 감히 한순간도 발걸음을 늦출 수 없었다.”(부조, 517) 안전 구역으로 들어서기까지는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사단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서 날뛰고 있다. 자신의 생명이 경각간에 달린 줄도 모르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난처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는지 모른다.
두 번째 원칙은 내 안에 거하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도피성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언제고 도피성 밖으로 나아가는 죄인은 복수자의 손에 빠졌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을 따라야 함을 배웠다. 그와 마찬가지로 죄인이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죄인은 믿음과 순종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야 한다.”(부조, 517)
세계 곳곳에 절대 안락하지 않고 허름한 난민촌들이 흩어져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하고 초라해 보이는 곳들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곳이 바로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예수, 그분은 죄악 세상에 우리 영혼이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다. 공중에 권세 잡은 자, 사단과 악한 영들이 영혼의 사냥꾼처럼 정죄와 사망의 총탄들을 퍼붓고 있는 이 시대에 지체 말고 달려가야 할 우리의 피난처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 나는 오늘도 그분 안으로 피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영혼의 피난처이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 새벽 다시 주님의 날 개 그날 아래로 숨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신 것처럼 부지 중에 죄인 된 우리가
살아남을 유일한 길, 예수님께 달려가서 주님 안에, 주님께만 붙어있게 해 주십시오.
새마음을 주시고 주의 영으로 충만케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팟캐스트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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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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