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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작가들의 금지곡과
개명, 개사의 사례
1960년대는 6.25전쟁의 상처가
미처 아물지 않은데다
남북의 이념대립이 강하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방송윤리위원회에서는
1965년 월북 작가들의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하게 된다.
이에 월북 작가들의 금지곡과
개사된 사례를 찾아 정리해 본다.
1. 월북 작가에 대한
금지곡 지정의 배경
해방 이후 한국은
이데올로기의 충돌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이후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게 된다.
대표적 월북 작가였던
조명암(1901년~1993년)은
월북 이후 북한 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을 지냈고
북한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을 정도로
북한 문화예술계에서
핵심적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즉 카프(KAPF)에서 활동하였던
박영호(1911년~1953년)도
월북 작가 중 존재감이 있었다.
6.25 이후 반공이념이 한창이던 당시,
이러한 경력을 지닌
두 사람의 작품이 방송에 나오는 것을
정부는 용인할 수 없었고
결국 ‘작사자 월북’의 사유로
1965년 이들의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하게 된다.
금지곡 지정은
1962년 설립된
방송윤리위원회의 심의규정 중
‘국가의 존엄과 민족의 긍지를
손상할 우려가 있는 가사와 곡은
방송하지 아니한다’라는
조항이 근거가 되었다.
월북 작가에 대한 금지곡 지정 이후
노래의 개명과 개사가 만연하였고
이는 원작자가 누군지
알기 힘들어지는 혼란을 초래하였다.
월북 작사자의 노래가
방송 금지곡으로 지정된 이후
방송윤리위원회에서는
이들 금지곡을 구제하기 위해
제39차 방송가요심의회(1969.7.25)
결정에 의거 세칙을 제정하였다.
그 결과 월북 작가 작품의
동일한 제목은 허용하되
‘원작자의 가사를
그대로 인용했을 경우’,
‘두 개 이상의 단어가 동일하여
분위기가 비슷한 경우’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규칙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음반 심의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작사자의 개명과 개사가
가장 잘 드러난 음반으로
1975년 지구레코드에서 발매한
이성애가 부르는
백년설의 히트송을 들 수 있다.
조명암과 박영호가 작사했던
고향설, 유랑극단 등
대표곡들이 수록되었으며
‘두신’이라는 작사자로
둔갑되어 있다.
월북 작가 중 대표적 작사가로
조영출(조명암)과 박영호,
작곡자로는 김해송과 이면상이 있다.
조명암은 조영출의 예명이지만
그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조영출은 조명암 외에도
금운탄(구십리 고개 등 25곡),
이가실(양산도 봄바람 등 36곡),
‘김다인’ 등의
예명을 사용한 적이 있다.
박영호는 ‘처녀림’이라는 예명으로
마도로스 박,
꿈꾸는 항구선 등을 발표하였다.
그도 김다인이란 예명으로
활동한 적이 있어 한 때
‘누가 김다인인가?’라는
논쟁이 있기도 했다.
한 이름을 두고
두 사람이 활동한 경력 때문인지
1960~1970년대 심의 과정에서
조명암과 박영호의 작품이
뒤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코스모스 탄식의 경우
조명암 작사임에도
방송윤리위원회에서는
박영호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였다.
작곡가 김해송과 이면상은
월북 작곡가에
해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는 이들의 작곡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노래들 상당수에
조명암과 박영호의 가사가 사용되면서
금지곡이 되었다.
김해송이 작곡한 노래들 중
조명암의 가사가 사용된
낙화삼천,
코스모스 탄식 등이 있고,
박영호의 가사로
오빠는 풍각쟁이,
울어라 문풍지 등이 있다.
이들 모두 금지곡 처분을 당했다.
또 다른 월북 작곡가 이면상은
진주라 천리길
(박영호 작사)
네가 좋더라(조명암 작사) 등을
작곡하였다.
한편 박영호 작사,
박시춘 작곡의 금지곡
천리정처는
1987년 해금이 될 때까지도
월북자 이면상 작곡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작곡에 있어 김해송과
이재호의 노래들은
이봉룡 작곡으로
변한 경우가 상당하였다.
이재호는
월북 작곡가는 아니었지만
1960년 사망하면서
작곡자가 변경되었다고 추측된다.
이봉룡은
김해송의 부인이었던
이난영의 오빠였다.
이러한 가족관계에 따라
금지곡 시행 이후
김해송의 상당수 작품은
이봉룡 작곡으로
자연스럽게 변경될 수 있었다.
박향림 오빠는 풍각쟁이야
박영호 작사, 김해송 작곡의
오빠는 풍각쟁이야는
지금도 사랑받고 있는 만요이다.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는
작사자 미상,
이봉룡 작곡으로 등록되어 있다.
1960년대 발매된 음반에는
작사자로 ‘남천아 보사
(일종의 개사)’로 나온다.
한편 이봉룡은
이 노래를
경음악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경음악은
가사와 관계가 없어
금지곡 대상이 아니었다.
1970년대 이후
가사로 인해 금지곡이 될 경우에
가사를 빼고 연주 음악으로
발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봉룡도 이러한 예로 해석된다.
김정구 낙화삼천
1942년 김정구가 불렀던
낙화삼천은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의 노래였으나
1973년 김정구의 음반에는
박세종 개사,
이봉룡 작곡으로
작사 · 작곡자 모두가 다르게 나타난다.
월북 작가의 개명과 개사에 있어서
가장 주목할 인물이
바로 작사가 반야월이다.
유성기 음반시절 노래들은
대부분
전주-1절-간주-2절-3절-후주의
형태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반야월이 개사한
작품들을 분석해보면
대부분의 노래들을
3절에서 2절로 축약시켰다.
그리고 단어를 교체하는 방법,
각 절의 문장들을
재편집하는 방식 등
다양한 방법으로 개사를 하였다.
이러한 개사는
1969년 ‘방송윤리위원회가
제시한 세칙’에 근거하였다.
저작자들이 이미 월북한 상황에서
이들 노래의 개사는
새로운 창작으로 인정되면서
다양한 가사 유형이 나타났다.
1987년 해금 이후
원형을 찾고자 하는 바람으로
유성기 시절의 3절 가사로
부르는 음반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 가곡 기다리는 마음의
작사자 김민부도
월북 작가들의 노래들을
상당수 개사하였다.
그의 개사는
방송심의에만 사용되었고
실제 음반으로
발표된 사례는 찾기 힘들다.
방송 금지곡 1호로 지정되었던
조명암 작사의 기로의 황혼은 정
부 개사권고를 받아들여
추미림 작사의
새로운 가사로 등장한다.
1절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기로의 황혼> | |
---|---|
조명암 작사 | 추미림 작사 |
그러냐 그러냐 | 그러냐 그러냐 |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의
코스모스 탄식은 박향림이 불렀다.
노래의 원 가사와
1975년 박남포 개사로
심의를 받았던 가사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코스모스 탄식> | |
---|---|
조명암 작사 | 박남포 개사 |
코스모스 피어날제 맺은 인연도 | 코스모스 피어날제 맺은 첫사랑 |
한편 지구레코드사의
1970년대 가사 심의본에는
작사자가 불로초로 되어 있고
낙동강 다리,
구포정거장 등
6.25 피난시절을 연상시키는
지명이 새롭게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개사가
자유롭게 이뤄졌음을 엿볼 수 있다.
박향림 코스모스탄식(1940년대)
박재란 코스모스탄식
(반야월 작사로 변화, 1964년)
김시스터즈 코스모스 탄식 (1970년대)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의
총각 진정서는
1938년
김정구가 오케레코드를 통해
발표한 노래다.
1960년대 오-케 태평레코드가
발매한 음반에서
문예부 작사, 박시춘 작곡의
누님 장가보내주(총각진정서)로
발매되기도 하였다.
원곡의 가사가
원가사 ‘까마귀 까치울고
어여쁘고 순직한’을
이미자의 노래에서는
‘까치떼 노래하고’로 불렀다.
이후 반야월의 손을 거쳐
‘까치가 노래하고
반달같이 어여쁜’으로
개사되었다.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남인수가 노래한
눈오는 네온가는
금지곡으로 지정되자
1절에 있던
‘서리는 피눈물’,
‘치맛자락’을
2절에 배치하여
분위기를 바꾸었다.
1960년대 남인수의 음반과
백설희, 이미자가 함께 부른
음반 모두
작사자는 조명암이 아닌
추미림으로 등록하여
심의를 통과하였다.
박영호 작사의 번지없는 주막
산팔자 물팔자,
눈물의 백년화는
1940년 음반에 실렸다.
그런데 눈물의 백년화가
조선총독부 검열에 걸려
발매 금지되자,
번지 없는 주막을
뒷면에 급히 대체 수록하여
재발매했다.
이 곡의 원제목은
번지 업는 주막으로
오늘날 맞춤법과 차이가 난다.
그러나 박영호의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금지곡에 지정되지 않고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노래가 되었다.
그런데 이 두 곡 모두
박영호의 예명인
‘처녀림’으로 기록되었고
해방 후에도 작사자가
처녀림으로 알려지면서
월북 작사자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는
두 곡 모두 반야월의
작품으로 등록되어 있다.
조명암 작사의
갑돌이와 갑순이, 온돌야화
조명암 작사의 갑돌이와 갑순이는
1960년대 이후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 노래의 원곡은
온돌야화(溫突夜話)로
당시 김다인 작사,
전기현 작곡으로 발표되었다.
발표 당시에 별 반응이 없었지만
갑돌이와 갑순이로
리메이크된 후에는 인기를 누렸다.
당시 제목이 바뀐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65년이
월북자 방송 금지곡이 지정되었던
시기임을 고려한다면
음반사에서
제목을 변경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원곡 온돌야화가
유명했던 곡이었다면
금지곡 목록에 올라
작사자의 이름도 바꾸고
개사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갑돌이와 갑순이는
원래의 제목이 바뀌고
조명암 작사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군사정권 시절에도
원래 가사 그대로
널리 불리는 노래가 될 수 있었다.
김석송 작사, 안기영 작곡의
그리운 강남은 한 때
박영호 작사로 잘못 알려지면서
작사자 월북’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작사자 석송(石松) 김형원은
시인으로
1931년 안기영이
자신의 작곡집에
그의 시(詩)를
그리운 강남의 가사로 수록하였다.
김석송은 6.25 전쟁 당시
납북되어 행방불명되었다.
안기영은 월북 작곡가이지만
당시 월북 작곡가에 대해
별도의 규제는 없었다.
따라서 심의과정에서
작사가의 정보가
박영호로 알려지면서
월북 작사자 금지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만약 작사자가
박영호가 아니라
김석송으로 제대로 알려졌다면
이 곡은 금지곡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의
막간아가씨는
1937년 박향림의 노래로 발매되었다.
이 곡은 1969년에
이미 금지곡으로 지정되었지만
추미림 작사, 이봉룡 작곡으로
음반 심의를 통과할 수 있었다.
1920~1930년대
유랑극단의 공연에서
막과 막 사이를 전환할 때
노래를 불렀던 가수를
‘막간아가씨’라 불렀는데
신카나리아가 대표적인 가수이다.
이 노래는
유랑극단이 쇠퇴할 무렵인
1930년대 후반 발매되었고
북간도에서 제주도까지
유랑하던 막간아가씨의
애환을 다루고 있다.
바니걸즈가 부른 가사
(1978년 지구레코드)에는
‘오늘은 북간도 내일은 제주도’가
‘오늘은 인천항 내일은 부산항’으로
개사되었다.
그러나 박영호의 작사로
뒤늦게 밝혀지면서
1980년 공연윤리위원회에서는
이 노래를 작사자 월북의 사유로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이로써 막간아가씨는
1975년 이후
유일한 작사자 월북 사유의
금지곡이 되었다.
이 노래는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KOMCA)에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의
곡예사의 꿈이라는 노래로
곡명을 바꾸어 재등록되었다.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이 불렀던
향수는 한국 최초로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만남으로
기록되고 있다.
정지용의 시 향수는 이들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곡을 붙여 불렀는데
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정지용의 작품이
해금이 되기 전인 1987년 11월,
서림화랑 주체로
시인들의 시를 그림으로
이미지화한
그림들을 전시하게 되었다.
당시 작가 강우문은
정지용의 향수를 주제로
그림을 그려 관심을 모았다.
이듬해 1988년 3월말
정지용의 작품이 해금되면서
채동선(1901년~1953년)이
과거 작곡했던 향수의 원본 악보가
전시되고 공연도 진행되었다.
당시 향수 노래는
테너 임웅균이 불렀다.
같은 해 강준일
예술종합학교 교수가 향수 시에
맞추어 작곡을 하였고,
가곡 명태의 작곡가 변훈 또한
변훈가곡선집2에
그가 작곡한 향수를 수록했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박인수,
이동원이 불렀던 향수는
1989년 6월 15일
아세아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
노래의 성공 이후
‘김희갑이 과거에 노래를
작곡하였지만
정지용의 작품이 금지대상이어서
발표를 미뤘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동원이
김희갑을 찾아가서
작곡을 의뢰했던 것이
1988년 3월 이후이기에
발표를 미뤘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월북 작가가 아님에도
가명을 사용하여
심의를 통과한 경우가 있었는데
아침이슬을 작곡한 김민기가
유일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는 1970년대 후반
양희은의 음반에 사용된
노래들을 작곡했지만
작사, 작곡가를
김아영, 양희은으로 하여
심의를 통과했다.
이들의 이름으로\
심의를 통과한 노래는
고무줄 놀이,
식구생각,
천리길,
밤배놀이 등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반야월은 추미림, 박남포라는
예명을 사용하여
조명암과 박영호의 노래 다수를
개사하였다.
그 결과 1987년
해금 이후
원작자가 누구인가를 두고
소송이 벌어지는 등
원작자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조명암의 작품들은
남한에 생존해 있던 자녀가
소송을 통해
수백여 곡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남한에 자손이 없었던
박영호의
연락선은 떠난다,
북국오천키로 등
상당수 노래들은
반야월의 노래로 저작권 등록되었다.
한편 아직도
추미림으로 등록된 노래 17곡이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되어 있다.
이 노래들은
눈물의 수박등,
마도로스상선보이,
마도로스수기 등으로
반야월의 유족에게도
승계되지 않은 작품들로
박영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월북 작가의 개명과 개사문제는
원저작자를 가리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개사를 주도적으로 진행했던
반야월에 대해서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1960년대는
음악 저작권의 개념이
매우 미약하였고,
당사자들도 월북을 한 상태였다.
심의통과를 위해
정부의 개사방침을 따랐던
반야월의 입장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개사도 일종의 창작이므로
그가 개사에 참여했던 노래에 대한
저작권은
당연히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 저작권자가
원작자와 다르게 등록되어 있는
현실은
향후 학문 연구에
상당한 혼란을 줄 수 있어
조속한 시일 내에
원작자에 대한 정리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