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이런 말을 한다.
『저 사람은 양심이 없어』
『양심대로 살아야지』
도대체 양심이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양심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무엇이 양심이냐 했을 때는 어리둥절한다.
양심이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지금 이 단계에서 이것이 선이니 하라든가 이것은 악이니 하지 말라든가 하는 지능의 실천적 판단이다」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각 사람 마음 안에 그 사람 혼자 스스로가 선악을 구별하며 생활할 수 있도록 넣어주신 실천적 생활의 판단기관이다.
실천적이니까 즉 선은 행할 것이고 악은 피해야 할 것이라는 이론적인 지식과 다르고 양심은 지금 이 선을 행하든가 이 악을 행하지 말라든가 하는 실천 명령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영심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양심의 명령대로 살면 마음의 평화를 느끼고 양심대로 살지 않으면 불안과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 하는 것을 안다. 우리 속에 있는 양심이라도 우리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아도 객관적으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 아오스딩 성인은 양심이란
『하느님의 법이 우리 마음에 세겨진 것을 뜻한다』했다. 양심이란 마치 우리 육체에 무엇이 유익하며 무엇이 해로운가를 우리 육신이 본능적으로 잘 알듯이 영혼에도 무엇이 유익한지 무엇이 해로운지는 영혼이 잘 안다. 바로 이 판단을 하는 기관이 영혼 안의 양심이다.
동물은 자유가 없고 본능적으로 생활한다. 본능에 따르지 않으면 육신 생명에 큰 해를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생명을 잃게 된다. 양심은 영혼에 유익한 선을 행하라 명령하고 영혼이 해로운 악을 피하라고 명령한다. 사람은 자유가 있기 때문에 양심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양심을 따르지 않으며 가책을 느낀다. 왜냐하면 대자연은 이유 없는 일과 쓸 데 없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육체에 부상을 당하면 아픔을 느끼고 그 아픔이 생명에 해로음을 알리는 위험 신호를 하는 것이다. 양심을 어기고 악을 행하면 가책을 느낀다.
그 가책이 영혼 생명에 위험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로부터 그만큼 벌을 받게 되었다는 붉은 신호다.
/ 김영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