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23년만에
일 년이 금방 지났구나.
작년 초에 아빠가 조정래 님의 <아리랑> 12권을 다시 읽고 나서,
내년에는 <한강> 10권을 다시 읽겠다고 이야기했었잖아.
그 내년이 올해가 되었구나.
2025년 새해가 되었으니 <한강>을 다시 읽기로 했단다.
아빠가 <한강> 1권을 읽기 시작한 것은 2002년 2월 26일이더구나.
23년이 지났지만,
책 앞면지에 적은 날짜는 어제 적은 듯 번짐이 없더구나.
23년 전의 메모가 그대로인 것이
세월의 너무 빠름을 증명하는 것 같았어.
세월 빠름을 다시 이야기하지는 않겠다면서도
23년이란 세월이 금방 지나가 버린 것에 무서움마저 드는구나.
2002년 2월 26일… 아빠는 무엇을 했을까?
어떤 마음으로 <한강> 1권을 펼쳤을까?
당시에도 독후감을 쓰긴 해서
찾아보니, 뭐에 바빴는지 10권을 다 읽고 퉁쳐서 간단히 적었더구나.
이번에는 너희들에게 독서편지 형식으로
한 권씩 읽을 때마다 이야기를 해줄게.
올해도 주중에는 다른 책들을 읽고
<한강>은 주말에 1권씩 읽으려고 한단다.
그럼 <한강> 1권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1. 전쟁이 끝나고
조정래 님의 <한강>은 1950년대 후반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단다.
전쟁으로 전국이 폐허가 된 이후
다시 일어나기 위해 온 국민이 몸부림을 치던 그런 시기였지.
그리고 여전히 이승만 독재가 권력의 꼭대기에 있던 시기였단다.
공부를 한다고 돈벌이를 구한다고 너도나도 서울로 올라가기 시작하던 시기도 이 즈음이란다.
유일민도 대학교에 합격하여 입학을 앞두고 서울로 향했단다.
그러면서 동생 고등학생 유일표도 서울에서 공부를 시킨다고 함께 왔단다.
그들은 성북동에 들어서는 움막촌에서 지내기로 했단다.
유일민의 아버지는 빨치산 출신으로
전쟁 때 월북을 하여 어머니 혼자 아이들을 키웠단다.
그렇게 아버지와 인연이 끝났으면 더 좋았겠지만,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유일민과 어머니는 수시로 경찰의 수사를 받곤 했단다.
서울에 처음 오게 된 유일민은 선배 김선오가 서울역에 마중 나와 주었어.
김선오는 일류대 법대생으로
국회의원 강기수가 후원하는 남천장학사에서 지내면서 공부했단다.
강기수는 유일민의 아버지와 악연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어.
영악한 국회의원 강기수는 자기 지역 출신의 법대생들에게 숙소와 학비를 대주면서
장학생들을 후원한다는 좋은 이미지를 만들었지만,
실상을 그 학생들을 빨리 사법고시에 합격시켜
자신의 정치적 배경으로 두려는 목적이 있었단다.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선거 때면 지역에 함께 내려가서 선거 운동을 도와야 했어.
돈 없는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강기수 의원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단다.
강기수 의원의 딸 강숙자는 고등학생이었는데,
김선오와 선배 이규백이 강숙자의 과외도 해주어야 했어.
그런데도 강숙자는 결국 돈 내고 대학에 입학하였단다.
강숙자의 친구로 의대생 안경자, 역사학도 박영자 등이 있단다.
그들은 남천장학사 학생들과 어울렸는데,
유일민은 김선오의 후배로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지만
깊은 이질감만 느끼고 말았단다.
유일민은 임호태라는 학생의 가정교사 일을 하게 되었는데,
시험 때마다 살얼음판이었단다.
성적이 떨어지면 바로 자리가 잘리기 때문에
학생보다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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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말 마. 성적표 받아오는 날이 사형 언도 받는 날이니까. 성적이 떨어지는 거야 더 말할 것도 없고, 제자리걸음만 해도 사형이지. 5등 이내의 경우는 예외지만, 그런 아이들이 가정교사 두는 게 어디 흔한가. 끝없이 성적이 오르기를 바라는 부모들 욕심 앞에서 우리들 목숨은 하루살이야. 아까운 돈 쓰고 있는 부모들 욕심 탓할 게 아니라 가난한 우리들 신세를 탓해야지.”
어떤 선배가 쓰디쓰게 웃으며 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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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민과 유일표가 살고 있는 움막촌에는
소작농으로 일하던 농민들도 많이 올라왔단다.
기술도 없고 일자리도 없으니 그들은 지게꾼일 등을 하며 하루벌이를 했단다.
그런 사람 중에 천수만이라는 사람도 무작정 상경하여 움막살이를 했어.
지게꾼으로 일했어.
고향 사람인 나삼득은 식구들과 좀더 일찍 상경하였어.
같음 움막집이지만, 어느 정도 터를 잡은 듯 했단다.
…
이렇게 다들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엄청난 태풍이 한반도를 덮쳤단다.
요즘도 큰 태풍이 올 때마다 가끔씩 소환되는 태풍 ‘사라’가 그 주인공이란다.
태풍 ‘사라’로 많은 피해, 특히 전라도 쪽 피해가 컸다고 하는구나.
재산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많이 죽었는데,
김선오의 아버지도 태풍 사라로 돌아가시고,
이규백의 형도 태풍 사라로 돌아가셨단다.
김선오는 자신의 꿈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에 상심이 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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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42)
상복을 입은 김선오는 아버지 영전에 망연히 앉아 있었다. 비가 아무리 심하게 퍼부었어도 아버지는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아니, 비가 심하면 심할수록 아버지는 더 나가서 논을 돌보려고 했을 것이다. 열 마지기의 논, 그건 아버지의 육신이었고 생명이었다. 소작인의 자식으로 태어나 손수 그 열 마지기의 논을 장만한 것은 아버지의 크나큰 긍지였고 자랑이었다. 지주와 소작인 사이에 철저한 착취구조 속에서 그것은 거의 기적 같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자신이 고등학생이 되고서였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더욱 크고 강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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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혁명
1945년 해당 이후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1950년대 후반에도 이어졌단다.
오히려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푸대접을 받곤 했단다.
광복군 출신으로 대령으로 복무하고 있는 한인곤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어.
군 내부에서 계속 차별을 받다가 결국 대령으로 예편했단다.
그보다 먼저 중령으로 예편한 남재구는 일자리를 못얻어 수위로 일하고 있었는데,
직장을 찾아가보니 그것도 그만 두었다고 한다.
한인곤의 둘도 없는 친구이기 때문에 한인곤은 신문 광고까지 내면서 친구 남재구를 찾았단다.
결국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되었단다.
….
유일민의 친구 서동철이란 사람이 있어.
서동철의 아버지도 빨치산 출신이야.
유일민의 아버지와 다른 점은 돌아가셨다는 거야.
그래서 경찰의 조사는 받지 않았지.
서동철은 유일민보다 먼저 서울에 올라와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반공청년단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말이 반공청년단이지, 정치깡패였단다.
당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는데,
자유당의 이승만은 온갖 불법적인 방법을 선거를 준비했어.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으로 투표용지까지 사서 대리 투표하는 방법도 있었어.
야당 민주당에서는 조병옥이라는 후보가 나왔는데,
이승만을 압도할 인기를 누리고 있었어.
하지만 미국에서 돌연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단다.
결국 장면 후보가 대통령 후보가 되었어.
군인을 그만둔 한인곤은 민주당에서 경호대로 일하면서 정치에 발을 들였단다.
자유당은 정부기관을 이용하여 야당의 선거유세를 계획적으로 방해를 했어.
온갖 불법을 일삼은 이승만이 다시 대통령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불법선거시위가 장난이 아니었어.
그런데 마산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11명이 죽고 많은 사람이 다쳤단다.
이 일로 시위는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어.
고등학생들이 먼저 앞장섰고, 대학생들도 동참했단다.
그 이후에는 전 연령층의 사람들이 시위에 동참을 했단다.
이것이 그 유명한, 너희들도 알고 있는 4.19 혁명이란다.
경찰은 시위대에 총으로 응수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하지만 시위는 더욱 커지고
조용하던 대학교수들도 시위에 동참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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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253)
고등학생들까지 터져나오고 있구나. 저것들이 세상이나 정치를 뭘 안다고. 투표권도 없는 미성년자들이. 헌데 아니야…… 고대생들이 데모를 일으키기 전에 전국에서 일어난 그 많은 데모는 전부 고등학생들이 일으키지 않았나. 데모대 중에 제일 무서운 게 물불 가리지 않는 고등학생들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고등학생들이 왜 그렇게 대학생들보다 먼저 데모를 시작하게 된 거지? 가만있거라…… 그게…… 아아 그렇구나.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선거기간 동안 야당 유세장에 못 가게 아느라고 일요일에도 등교를 시키고, 갑자기 시험을 치르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글짓기를 시키고…… 그런 처사에 대해 유일표가 얼마나 불평 불만을 했던가. 그 따위 치졸한 처사들이 고등학생들을 자극해 불평불만을 사고 결국 정치의식까지 길러준 것이로구나. 이거야말로 자업자득이 아니고 뭔가. 그나저나 물불 가리지 않는 고등학생들까지 저렇게 터져나오면 이 판이 어떻게 될까? 정말 엎어지는 것 아닐까? 내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거 아닌가. 글쎄…… 한 정권이 그리 쉽게 무너질 리 있나. 한바탕 불평 불만을 터뜨리고 가라앉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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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표도 이 시위에 적극 동참했지만,
유일민은 아버지의 이력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어.
동생이 시위에 참석했다는 것을 알고 동생을 찾으러 나섰다가
시위 행렬에 끼게 되었는데,
유일민은 계속 갈등하고 자신을 자책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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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
나는 오늘 무엇이었는가. 방관자였는가, 구경꾼이었는가, 훼방꾼이었는가. 방관자는 비겁자다, 다같이 궐기하자고 하지 않았는가. 방관자보다도 더 나쁜 존재. 비겁자도 못 되는 나는 무엇인가. 비겁자보다도 더 나쁜 명칭…… 이기주의자, 기회주의자, 파렴치한…… 그 어느 것도 합당하지가 않았다.
유일민은 자신이 인간벌레 같은 부끄러움과 혐오감에 묻혀 있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구급차에 실리는 부상자들을 보았을 때, 피 흘리는 여학생이 업혀가는 것을 보았을 때, 피범벅된 시체를 떠메고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을 보았을 때 가슴 푸들거리는 데모의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끝내 행동화하지 못한 자신은 참으로 하잘 것 없고 한심스런 인간벌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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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갈등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남천장학사 학생들이었단다.
시위에 참석하는 것은 자신들을 후원하는 강기수 의원에 배신하는 행동이라 생각했지만,
무엇이 정의인지 모두 알고 있었단다.
어떤 이들은 시위에 참석하고,
어떤 이들은 시위에 참석하지 않았단다.
김선오는 계속 갈등하다가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도 시위에 참석하지 않았단다.
….
전국적인 시위는 결국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내면서
4.19 혁명은 성공의 깃발을 꽂았단다.
…
여기까지가 <한강> 1권의 이야기란다.
독재를 끌어낸 국민들을 보면서,
오늘날 독재를 하려던 코끼리를 끌어낸 국민들이 떠오르더구나.
우매하고 야욕에 넘치는 지도자들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런 괴물들을 끄집어내리는 힘을 가진 국민들 또한 있단다.
그런 지도자들을 가진 우리나라가 부끄럽다가도
그런 국민들은 가진 우리나라가 자랑스럽구나.
아직 내란은 진행 중.
얼른 내란의 수괴는 대통령 탄핵이 인용이 되길 바라고,
그를 따르는 내란의 힘은 공중분해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새벽 어스름이 스러져 가고 있는 한겨울 기차가 달리고 있었다.
책의 끝 문장: 세상을 떠난 큰누나 같기도 했던 그 여자의 수심 깊은 얼굴이 어른거렸다.
책제목 : 한강 1 (제1부 격랑시대)
지은이 : 조정래
펴낸곳 : 해냄
페이지 : 345 page
책무게 : 483 g
펴낸날 : 2001년 11월 05일
책정가 : 8,000원
읽은날 : 2025.01.04~2025.01.05
글쓴날 : 2025.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