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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개혁주의 신앙
Ⅰ. 개혁주의의 역사적 개념
1. 종교개혁과 개혁주의
① 개혁주의란 종교개혁 이후에 발생한 개신교 사상 중 루터교회와 구별되는 칼빈주의(Calvinism)를 의미한다. 개혁주의는 장로교회와 개혁교회(Reformed Church)에서 따르는 신학노선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대/소요리문답>으로 불리는 고유의 신조(Creed)를 가지고 있다.
②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빠른 시간 안에 유럽 전역은 초대교회의 신앙과 성경의 가르침대로 교회를 회복하자는 칼빈주의의 신학 사상을 받아들였고, 칼빈주의는 개혁교회의 주류 신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장로교 신학자들은 칼빈주의를 개혁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명칭으로서 칼빈주의는 중세교회 이전의 <카톨릭 교회>의 역사성을 계승하고 종교개혁 시기에 본격화된 정통신학의 전통들 중 하나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③ 이렇게 하여 수립된 개혁주의 신앙전통을 지금까지 존중하는 교회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장로교회의 역사적 문서들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대/소요리 문답 그리고 개혁파 교회의 <하나 되는 세 고백서(Three Forms of Unity)>를 신앙 고백으로 채택하는 교회들을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부른다.
2. 칼빈주의
① <칼빈주의>는, 칼빈이 주창한 기독교의 사상 및 신학사조로서 종교개혁을 통해 체계화 되어 개신교의 주요 신학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칼빈주의>라는 말은 칼빈 개인의 사상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 사상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발전하게 된 데에 칼빈의 사상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에서 쓰이는 말이다.
② 개혁교회를 통해 칼빈주의는 꽃을 피우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개혁교회 전통을 계승하는 교파의 하나로서 칼빈주의를 말할 때에는 개혁주의라는 표현을 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의 별칭들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장로주의, 보수주의, 칼빈주의 등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 사상의 흐름이 어거스틴에게 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어거스틴 전통의 칼빈주의라고도 불린다.
③ 개혁주의 교리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를 강조하기 때문에 “은혜의 교리”라고도 불린다.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개신교 교파들로는 종교개혁 때부터 시작된 개혁교회 외에도 장로교회와 개혁 침례교회가 대표적이다.
3. 칼빈
① 종교개혁에 있어서 칼빈의 영향력은 상당히 크다. 이는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의 영향력을 통해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칼빈은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시각에서 그 때까지 드러난 기독교 진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술하려고 하였다.
② 그는 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하였는데, 그와 같은 시대에 루터는 주로 독일에서, 쯔빙글리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활동하였다. 종교개혁의 열풍이 유럽 전역으로 번져가면서 개신교의 신학은 점차 칼빈의 신학 쪽으로 기울었다. 그 결과 루터교가 주류로 뿌리를 내린 독일 및 스칸디나비아의 몇 곳을 제외하고는 칼빈주의가 개신교 신학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③ 이렇게 하여 유럽에 자리 잡은 개신교회가 개혁교회이며,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John Knox, 1514년? ~ 1572년)가 스코틀랜드에 개혁주의를 전파함으로써 설립된 교회가 <장로교회>이다. 따라서 이들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체계화 된 신학사상 및 그 전통을 개혁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를 개혁교회라고 부르며, 칼빈주의 신학을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Ⅱ. 개혁교회의 신앙고백
1. 문서들
① 개혁주의가 무엇인가를 잘 나타내는 문서는 개혁교회의 역사적 문서들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독일), 네덜란드 신앙고백, 도르트 신조(네덜란드)이며, 이외에도 제2스위스 신앙고백(츠빙글리 전통), 프랑스 신앙고백, 제네바 요리문답(제네바 전통),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스코틀랜드) 등이 있다.
②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으로 주로 채택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그 대/소요리 문답 또한 개혁주의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기초로 작성한 개혁 침례교회의 제2차 런던신앙고백은 침례 신앙 위에서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2. 빗나간 개혁교회 남아프리카
① 초기 미국 이주민들은 잉글랜드 청교도들과 네덜란드 이주민들을 포함하여 대부분 칼빈주의를 따르는 개신교회의 신도들이었다. 네덜란드 이민자들은 17세기 초 남아프리카에도 개혁주의를 전파하였다.
② 그러나 남아공의 개혁교회는 인종차별이라는 지배 질서를 국정(國政)으로 채택했다. 이는 바벨탑 사건과 노아의 세 아들 사건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아시아 사람은 아시아 사람끼리 흩어져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해석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파의 교리와 상관없이 백인은 구원이 예정되어 있으나, 흑인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잘못에 대해 개혁교회에서는 흑백통합정부가 들어선 뒤에 사과함으로써 과거사 청산을 위한 죄책 고백을 실천하였다.
Ⅲ. 개혁주의 핵심 교리
칼빈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교리는 다섯 솔라, 언약신학 그리고 칼빈주의 5대 강령이다. 5대 강령의 경우 앞 글자를 따서 TULIP이라고도 한다. 이것들은 개신교의 다른 여러 신학 유파(流波)와 칼빈주의를 구분 짓는 내용들이 된다.
1. 다섯 솔라(Five Solas)
다섯 솔라는 종교 개혁 때 처음으로 대두된 기독교의 다섯 가지 표어로, 라틴어로 쓰였다. 이는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에 반대한 개신교의 기본적인 믿음 체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따라서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개신교는 대체로 이 개념을 따른다.
①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어떤 말이나 생각이 진리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유일한 권위는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인 성경에 있다는 뜻이다.
② Sola Gratia (오직 은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 로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쪽에 아무런 자격이나 조건을 찾지 않으신다는 내용이다.
③ Sola Fide (오직 믿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구속의 은혜는 오직 믿음(=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 갈 2:20)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④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덧입는 것뿐이다.
⑤ Soli Deo Gloria (오직 주님만 영광을 받으심)
구원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다는 뜻이다.
2. 칼빈주의 5대 강령(the Five Points of Calvinism)
①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믿음에는 다른 질(質)이 있어서 그 중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받을 수 없는 유(類)의 믿음도 있다. 다른 종류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사람에게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락의 결과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싫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참된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요 6: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②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전적 타락설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것인데,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③ 제한적 속죄 (Limited Atonement)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사람이 결국 “구속의 언약” 또는 “은혜의 언약”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게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구원의 대상이 100명이라고 할 때, 알미니안주의는 100명 모두에게 해당한다고 본다. 그러면 예수의 속죄의 유효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극단적 칼빈주의는 100명중에 50명만이라는 제한된 수만이 구원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칼빈주의는 100명중에 10명 또는 50명 그리고 99명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구원에 관한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것이므로 의미상 제한된, 한정된, 특정적 의미를 뜻하지만, 계량적(計量的)으로 한정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④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요 6:37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의 언약” 과도 연관이 있다.
⑤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요 6: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구속의 언약” 과 연관이 있다.
3. 예배의 규정적 원리
1) 칼빈주의는 예배를 성경, 기도, 찬송, 헌상, 성찬, 세례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들에게 특수한 은혜를 내리시기 위해 정하신 방도라고 본다. 이것들을 은혜의 방도라고 부르는데, 어떠한 것들이 은혜의 방도인가 뿐만 아니라 그 방도들을 사람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또한 성경에 계시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칼빈주의의 특징이다. 이는 물론 Sola Scriptura 정신과 부합된다. 특히 예배에 해당하는 도리들을 묶어 예배의 규정적 원리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예배할 때 예수님이라고 상상하여 만든 그림이나 조각상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표적인 규정적 원리의 하나이다. 그 원리들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칼빈주의 신학자들 사이에도 이견이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교파별로 이러한 규정적 원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2) 예배의 규정적 원리에 대한 근거로 사용되는 성경 구절에는 십계명 중 둘째 계명인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예배하지 말라” 이다. 둘째 계명이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뜻이 아닌 것은,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은 이미 첫째 계명에서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째 계명의 뜻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할 때 그분의 형상이라고 무엇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 역사를 출애굽기 32장 4절에서 볼 수 있다.
Ⅳ. 칼빈주의의 양상들
1. 자유의지와 칼빈주의
1) 칼빈주의와 관련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칼빈주의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막는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적 타락”설에서 언급되었듯이 칼빈주의는 자연인이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어버렸다든지 선택의 자유를 잃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인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심성 때문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언제까지 계속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심성을 바꾸어 주실 때까지라는 것이다.
2) 종교개혁 당시 이러한 칼빈주의 원죄론에 반대하고 “사람은 하나님이 심성을 따로 바꾸어 주시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만들 수 있다” 고 주장한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이 에라스무스다. 여기에 반박하고 “전적 타락”설을 주장한 것이 루터의 《노예의지론(Bondage of the Will)》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의 역할과 관련된 것으로서, 이에 대한 기독교의 내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 지을 수 있다.
① 신인합력설(synergism)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지만, 사람이 그것을 취하느냐의 여부는 인간에게 달려있다. 즉,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이라는 것이다.
② 단독설(monergism)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취하는 것도 그리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구원은 하나님께만 달려있다는 것이다.
3) 그러므로 에라스무스의 주장은 합력설에 해당하며, 마르틴 루터의 주장은 단독설에 해당된다. 합력설과 단독설의 논쟁은 기독교 초창기에 이미 있었고, 잘 알려진 것이 4~5세기에 있었던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이다. 펠라기우스는 합력설을 주장하고 어거스틴은 단독설을 주장하였는데, 카르타고 회의에서 교회는 펠라기우스 사상을 정죄하였다. 종교개혁 이후로는 17세기에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합력설을 주장하였다. 이 때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박하면서 도르트 총회에서 작성된 것이 “칼빈주의 5대 강령” 이다. 18세기에는 웨슬리가 합력설을 주장하였다.
2. 단독설에 관한 개혁주의자들의 입장
1) “그 누구라도 구원을, 아무리 작은 일부분이라도, 사람의 자유의지와 연관짓는다면, 그는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 — 마틴 루터(Martin Luther), Bondage of the Will
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무엇이라도 우리가 행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효로 만드는 것입니다” — 존 오웬, Works of John Owen, Vol.3, p.433
3)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지옥으로 가고자 하는 자유의지는 있으나 천국으로 가려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그분의 선하신 뜻을 따르려는 의지와 힘을 만들어 주실 때까지 계속됩니다” — 조지 휘트필드, Works, pp.89-90
4) “죽은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을 만일 우리가 볼 수 있다면 아마 죄인이 자기 자유 의지로 그리스도께 돌아서는 것 또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찰스 스펄전, Morning And Evening
5) “(하나님의 주권은)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멸망하는 걸림돌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주권과 맞선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멸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우리의 영혼에 대한 주권에 습복하는 것입니다; 곧 그 분께서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강퍅케 하시고자 하는 자에게 그렇게 하시는 분으로서입니다. ” — 조나단 에드워즈,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2, The Banner of Truth Trust, Reprinted 1995, pp.849-854
3. 극단적 칼빈주의(hyper-Calvinism)
1) 칼빈주의와 극단적 칼빈주의의 가장 큰 차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대상과 속죄의 유효성과 범위에 대한 인식에서 나타난다. 칼빈주의는 복음의 유효성에 있어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인 동시에 제한적 속죄를 말한다. 여기서 제한적이라는 것은 계량적인 뜻만이 아니라 한정적(definite) 또는 특정적 (particular)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2) 그러나 극단적 칼빈주의는 인류에 대한 복음의 유효성과 제한에 있어서 예수는 오직 선택 받은 사람들만을 위해 유효하다고 주장하며 예배의 전통과 형식 그리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초기 종교개혁 시대의 전통을 고수한다. 그런데 “극단적 칼빈주의(hyper-Calvinism)” 라는 용어는 신정통주의(칼바르트, 볼트만)와 자유주의자들(알미니안주의 포함)이 칼빈주의를 매도하기 위해 지칭한 용어이다. 엄격히 말해서 “극단적 칼빈주의” 는 “원리적 칼빈주의” 라고 지칭해야 한다. 신정통주의와 자유주의자들은 칼빈주의 자체를 극단적 칼빈주의로 해석한다.
Ⅴ.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1. 역사
1) 개혁주의의 특성
① 개혁주의의 특성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오직 성경” 을 표방하는 사람들은 개혁주의자로 볼 수 있으며, 그들의 신학 또한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교회사에 있어서 모든 이단들도 “오직 성경” 을 말했다는 것이다. 어떤 개인이든 단체이든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설명할 때에 “성경적” 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② 17세기 도르트 회의에서 알미니안들도 “오직 성경” 만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했다. 이후 정통주의에 반발하여 일어난 독일의 경건주의자들도 “오직 성경” 을 주장했으며, 오순절파 및 각종 신비주의와 영성운동가들도 모두 “오직 성경” 을 표방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신학을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즉 “오직 성경” 을 주장한다고 해서 모두가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③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호소하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이 나온 근거가 성경의 바른 해석을 통한 성경적 원리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성경” 이라는 모토를 내걸었다면, 그것이 표방하는 바가 원리적으로 개혁주의 내에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여기에 공통되는 양상(樣相)은 역사적으로 정리된 정통적 교리와 신앙고백을 인정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중시한다는 미명하에 신학적인 전제-혹은 신앙고백서를 제쳐두고 단편적인 성경해석에 근거하는 자의적이고 비성경적인 방식을 지양(止揚)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으로 돌아가되, 성경으로 되돌아가는 외형적 운동만으로 엄밀한 개혁주의가 표상되는 것은 아니다
2) 한국의 개혁주의
① 한국에서는 1907년 9월 17일 최초의 장로교 독노회(獨老會;the independent Prosbyterian Church)가 설립되었다. 이때를 전후(前後)해서 한국을 향한 모(母)교회(=미국교회)들의 선교정책은 하나의 복음주의 교회(one evangelical Church) 곧 “한국 그리스도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Korea)를 세우려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 공동성경번역사업과 합동찬송가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그 신학의 근저(根柢)에서는 사실상 감리교와 장로교가 구별되지 않는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한국선교의 모교회는 당시 한국교회상을 1901년 미국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오순절 운동과 같은 것으로 판단하였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교회연합운동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서 장로교 선교회(영어공의회)는 1908년 독립적인 형태의 장로교를 세우려고까지 계획했었다.
② 그러나 합동의 운동은 독노회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주춤하게 된다. 이 때 한국 장로교 독노회가 채택한 것이 인도 장로교회의 단순한 고백형태인 12신조인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고백은 개혁주의의 독특성이 가려진 형태로써, 예정론에 있어서 유기론에 대한 고백이 없고, 그리스도의 제한속죄에 대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교파를 가릴 것 없이 단일교회 형성을 바라던 그 당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선교지 신학의 한계이며, 유아기 교회로써 역사적 개혁주의에 대한 분별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③ 한편 그 당시 미국 북장로교 상황을 살펴보면 보다 더 분명한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데, 다름 아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수정작업(1902-1903)으로 표상되는 그 시대의 연합적인 성격이 그것이다. 그 때의 한국 선교의 모교회들은 교회부흥과 선교운동으로부터 온건하고 진보적인 입장을 수용하는 분위기였고, 수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그것의 반영이다. 간략하게 살펴보면, 성령에 대한 고백과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대해서 34장과 35장을 첨가하였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나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하면 비성경적이고 부당하며...” 의 항목을 수정하였는데, 맹세거절에 대한 죄를 부정하고(22장 3절),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적그리스도로 하지 않고 비성경적이라고 고백하였고(25장 6항), 이방인들이 선이 있음을 인정하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처럼 무시해서는 안되며, 그것을 찬양할 가치가 있고, 유용하다(16장7항)는 식으로 수정하였다.
③ 특히 “선교운동에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위해서 ”... 멸망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의 교리는 하나님의 어떠한 죄인의 죽음도 원하시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거저 주실 구원을 준비하신 것과 조화되게 주장되어야 한다...”는 것과 “우리는 유아 때에 죽은 모든 이들이 은혜의 선택 안에 포함되며, 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되고 구원함을 받는다고 믿는다” 라는 해석으로 선언문을 첨가했다. 이는 영원한 작정교리는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유화, 구원의 은혜가 만인에게 미친다는 교리와 조화한다는 선언이었고 따라서 하나님은 어떤 죄인의 죽음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 하나님은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들을 위한 충분한 구원을 제공하셨고, 그 구원을 모든 이들에게 적용하시며, 복음안에서 모든 이들에게 제공하셨다는 선언이었다. 따라서 유아로 죽은 자는 누구나 은혜의 선택 안에 포함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하여 그가 기뻐하신 때와 장소, 및 방법에 의해서 중생되고 구원받는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는 아르미니우스보다 더 진보적인 웨슬레주의에 가까운 선언이며, 결과적으로 가장 근본적인 교리에 있어서 감리교와 장로교는 구별되지 않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모교회의 상황이 직, 간접적으로 한국교회에 반영되었던 것이다.
④ 그러나 우리는 엄밀한 성경의 해석을 통한 개혁주의의 준거들이 바른 것임을 숙지하고 계승해야만 한다. 개혁주의의 독특성이란 칼빈주의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성경의 바른 해석에 있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정통 개혁신학의 바른 노선은 “오직 성경” 이며 그 바른 해석이라는 노선만을 취하는 것이다. 그 노선의 예를 예정론과 관련한 제한속죄에서 들어보자.
⑴ 일반적으로 예정론에 대해 수용하는 입장을 개혁주의라고 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대개 도르트 회의의 결정과 관련해서 생기는 일반적인 오해 가운데 하나는, 그 논쟁의 핵심이 예정의 시기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개혁주의 안에서의 예정론 문제의 핵심은 그 내용에 관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물론 개혁주의의 입장은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택자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고백한다.
⑵ 칼빈 이후 각종 교파가 발흥한 시대에 알려져 있는 절충 형태의 이해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 위해 충분히 고통받고 죽으셨으나 다만 그 효력에 있어서 택자에게만 유효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피성 발언에 대해 칼빈은 그의 “요한일서 2:2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함이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의 주석에서 강하게 직언한다. 그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에서 문제 제기를 하면서 “그러나 여기서 바로 문제가 제기될 수 있으니, 곧 모든 세상의 죄가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모든 유기자(遺棄者)들과 심지어는 사단까지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구원 가능성을 확대하는 이유로 삼는 환상적인 우리들의 허황한 꿈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겠다. 그런 무도한 자들의 망설(妄說)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 왜냐하면 요한의 목적은 이 축복을 전 교회(敎會)에 공통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두’라는 단어를 사도 요한이 사용하였다 해서 곧 그것 자체가 유기자까지 모두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며, 다만 모든 믿는 사람들과 지구 위의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그런 선택받은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개혁주의의 참된 방향
① 개혁주의는 이미 역사적으로 형성된 신학유산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를 말할 때, 시대가 변함에 따라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개혁하고, 바꾸어 나아가는 것으로 개혁주의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이해할 때에는 이미 개혁주의가 아니다. 개혁주의는 무엇인가를 변혁하고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교회 중에 남겨둔 그 깊고 풍성한 신학적 보고를 연구하고 다시 찾아내서 사도들과 믿음의 선진들이 동일하게 걸어갔던 그 길을 묵묵히 그 원리에 따라 걸어가는 것이다. 즉 바른 성경 해석에 있는 것이다. 만일 그의 생(生)이 바른 성경을 증명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있어서 개혁주의는 허망한 것이 된다. 오늘날 신자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새것이 아니라 옛것을 바로 찾고 세우는데 있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항상 개혁해야 한다는 사실과 역사적으로 개혁된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에 대한 오해를 조심해야 한다.
②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개혁주의의 피상성(皮相性)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17세기의 풍부한 신학적 유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흔히 17세기가 고백주의, 메마른 정통주의 등의 부정적인 어투로 표현되고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이런 부정적 평가의 현상은 17세기를 직접적으로(혹은 원전으로부터) 전혀 접해보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 평가자가 다른 부류에 속한 역사가로써 개혁주의 밖에서 개혁주의를 피상적으로 평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개혁주의라는 용어를 자신의 신학 함에 사용하려면 먼저 개혁 당시의 성경에 대한 보고(報告)가 얼마나 알차고 풍성한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개혁주의는 없고 타인에 의해 각색된 포괄적인 개혁주의 혹은 오도된 개혁주의만이 우리에게 남게 될 것이다.
③ 결국 바른 성경 해석을 통해서 성경 전체의 통일성이 드러나고 이 통일성으로 인한 진리를 먹고 마시는 인생의 원리가 곧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말과 생각에서뿐만 아니라 삶의 전(全) 과정에서도 “진리” 를 따라가는 자의 신앙 정신이 개혁주의 신학의 기본이 되는 것은 자명(自明)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계시 대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억측에 따라(=자의적으로, 인본적으로) 하나님을 상상하는” 자들의 모든 형태의 봉사와 예배는 하나님 앞에 가치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에 따르면 우상이란 어떤 객체(客體)가 아니라 인간의 자신의 허영과 욕심을 객관화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자기 망상에 사로잡힌 자의 예배와 경건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확고하게 말하고 있다.
③ 그런 의미에서 참된 경건과 겸손은 오직 바른 성경 해석을 통해서 성경 진리를 아는 자에게만 있는 것이다. 우리는 칼빈 이래 많은 개혁신학자들이 바른 성경 해석을 통해서 걸어간 그 길을 걷고자 소망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전(全) 생애를 통해 성경 진리를 드러내고 보존하였던 것처럼, 드러난 진리는 우리의 남은 생을 통해 계속적으로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개혁주의자라는 별칭은 살아서 듣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그 성경의 진리로 먹고 마시며 생(生)을 마감한 자리에서 후대가 내려주는 평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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