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겨울에 무늬를 더하다
이름 없는 카페
김명수
이름 없는 물처럼
그같은 바람처럼
언덕 위의 그 카페
당신의 내 인생
한 나무의 꿈처럼
나는 거기서
커피를 마시지요
아직도 깨어있어?
나무들 잎이
살이 쪘다고
어떤 날
어떤 수많은 날
어느 날
난해한 시들처럼
오후 한때
난해한 시를 읽는
그 어느 날
아지랑이 이는 날
거기까지
여기까지
유리遊離와 소속
시는 시작노트에 앞선다.
‘이름 없는 카페’
미리 써진 시. 익숙치 않은 제목이다.
나는 이름 없는 카페에 가지 않았다. 이름 없는 카페는 몽상의 카페.
현실적 기능과 비현실적 기능이 빚어낸 공간이다.
그러나 나는 산문을 위해 언덕 위의 그 카페에 간 것으로 해야한다
한적한 언덕에 카페가 있다.
간판조차 없는 곳.
침묵을 간직한 두어 그루 나무가 창 아래 서있다. 오가는 길을 연다.
나무 쪽을 향해 놓인 몇 개의 의자들이 비어있고, 제법 먼 길을 걸어 갈증을 느낀 나는 커피를 주문한다. 쓰고 단 음료. 커피.
카페는 어디에 있으며 그곳에서 무엇을 떠올렸나?
우리에게 거처란 대지에 대한 소속, 대지와 더불어 존재함을 의미했다.
대지의 온갖 존재, 산천 초목 뭇생명들. 그리고 더 넓혀 저 먼 하늘의 해와 달에 어리는 순환과 질서를 함께 호흡하고 그것과 결속했다.
이것은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이어서 인간은 대지의 공간에서 스스로 객체이며 주체였다.
지금 우리는 그 어딘가에서 멀리도 벗어났다.
지금 우리의 거처는 어디인가?
우리는 지금 공간에 대한 감각을 잃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땅과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조차 잃은듯 하다.
아스팔트와 속도와 인간이 만든 시멘트와 철강의 드높은 구조물은 우리의 시야를 차단하고 우리의 심장을 급박하게 뛰게 한다. 이 속에서 문득 떠올리게 되는 것은 우리가 모든 사물에 스스로 개입하고 흡수되던 한 때의 시간이다.
소속에 대해 생각해본다.
유리遊離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우리는 끝내 수동적인가.
한잔의 차, 달콤하고 쓰디쓴 커피. 그 일회적 인위적 음료에서 갈증을 달래는 당신과 나의 휴식은 적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