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지역을 여행하면서 몇 차례 들렀던 밀양강변의 월연정과 금시당백곡재,그리고 퇴로리의 여주이씨 고택(古宅)들을 보고서 밀양지역 명문 사족(士族)들의 삶을 단편적으로나마 고찰해 본다.
여주(驪州) 이씨(李氏) 밀양 퇴로(退老) 가문(세거지 밀양 부북면 퇴로리)은 우리 민족의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적 유학(儒學)을 기반으로 하면서 신학문을 수용하는 ‘新舊竝進(신구병진)’의 학풍을 실천함으로써 문중발전과 사회적 공헌을 이루었다.
여주이씨 밀양파는 15세기 후반 서울에서 밀양으로 이주하여 현재의 삼랑진 용성리, 단장면 무릉리, 단장리,사연리 등지에 산거(散居)하면서 이곳 유력 양반들과 혼인으로 연결되고 경제적 토대를 갖추어 지방 사족(士族)으로 정착하였다. 이 가문은 16세기 중엽 월연(月淵) 이태(李迨)와 그의 조카 금시당(今是堂) 이광진(李光軫 1513~1566)이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외에는 대체로 재야에서 학문에 종사하였고 밀양의 유림(儒林) 사회에서 상당한 명망을 유지해 왔다. 지금 밀양강변에는 월연정(月淵亭)과 금시당백곡재(今是堂栢谷齋)가 그들의 별서(別墅) 유적으로 남아 있다.
약 400년후 도원(桃源) 이종극(李鍾極)의 아들 항재(恒齋) 이익구(李翊九), 정존헌(靜存軒) 이능구(李能九), 용재(庸齋) 이명구(李命九) 삼 형제가 1800년대 말에 세거지인 단장면 무릉리에서 부북면 퇴로리로 이주한 후에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신교육과 각종 사회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이들은 성리학적인 전통에 철저했던 밀양 사족(士族) 사회에서는 드물게 동족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실학(實學)을 계승하여 신학문에 종사하였고, ‘新舊竝進’이라는 근대적인 정신을 실천하였다. 이는 항재가 성호학파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이 되어 실학에 심취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성리학의 고정 관념을 벗어나 역사를 통한 성찰을 중시하였고,국가 존망의 시대에 사는 선비의 자세로 “服田力穡(복전역색.농사에 힘씀)”과 “通商惠工(통상혜공)”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항재의 학문과 정신은 그의 자질(子姪)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00년대 초에 항재는 향리에 화산의숙(華山義塾)을 설립하고 일본 교사들을 초빙하여 자손들에게 신학문과 측량기술 등을 가르치다가 1910년 망국(亡國)으로 폐지하였다. 그의 아들 이병희(李炳喜)는 뒤를 이어 1921년에 정진의숙(正進義塾.후에 正進學校)을 설립하였고, 조카 이주형(李周衡)은 1946년 밀양중학교를 설립하여 신교육 보급에 기여하였다. 그들은 자제들에게 가숙(家塾)에서 한문을 익히도록 하였지만, 자신들이 설립한 신식 학교에 보내기도 하고 서울로 유학을 시키기도 하였다. 그 결과 제헌 국회의원 이주형(李周衡)등 많은 학자ㆍ교육자, 관료ㆍ정치가들을 배출하였고 지역 사회의 근대화에도 기여하게 되었다.
이 가문에서는 1909년에 신식 활자를 사용하는 인쇄소(同文社)를 설치하여 성호의 문집인 『星湖集』 50권 27책 등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또한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 항재는 『讀史箚記』 8권 4책을 저술하였고, 성헌 이병희는 『朝鮮史綱目』 14책을 저술하였으며, 퇴수재(退修齋) 이병곤(李炳鲲)은 조선시대의 각종 사료를 수집하여 『李家墨莊史料叢編』 40책을 편집하였다.
퇴로의 이씨들은 문중 사창(社倉)을 설립하여 빈민들을 구제하였고, 약포(藥鋪)와 정미소도 운영하였다. 그리고 자손들 중에는 상업(退老商店)과 잠업(蠶種製造所)에 종사한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가풍은 성리학을 신봉하던 밀양의 전통적인 양반 사회에서 보기 드문 흥미있는 사례라고 하겠다.
19세기 후반의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 여주이씨 퇴로가문은 전통적인 유학의 가치를 고수하면서도 실학적인 기반 위에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할 신학문을 수용하여 교육하였고, 각종 사회 공헌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상당한 경제력 때문에 가능하였지만, 그들은 일정한 규모 이외에 농장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고 그 부(富)를 사회에 환원하였다. 이는 유학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가치와 근대적 의식이 결합되어 이룩한 ‘新舊竝進’의 드문 사례라 할 것이다. 참고: 한국학술정보(주) KISS
▼ 여주이씨 밀양문중의 퇴로리 고택(노란원), 안동권씨 완재정이 있는 위양지(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