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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2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요한 16,29-33
이 세상이 악마의 목구멍임을 잊을 때 벌어지는 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을 이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과 싸우신 것입니다.
세상과 싸우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해있다는 말은 하느님께 속해있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싸우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1922년 6월 10일 미네소타주 그랜드래피즈에서 태어난 주디 갈랜드(Judy Garland)는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은 배우이자 가수였습니다.
그녀는 상징적인 영화 ‘오즈의 마법사’(1939)에서 도로시 역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 공연으로 그녀는 16세의 나이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습니다.
주디를 스타로 만든 사람은 어머니였습니다. 주디는 세 자매 중 막내였습니다.
어머니 에델은 방송작가로 자식들을 스타로 만들겠다는 강한 집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을 각종 무대에 세웠는데 막내 주디는 괴상한 어머니로 인해 네 살 때부터 무대에 올라 노래하였습니다.
세 자매 중 주디가 재능을 보이자 어머니는 각종 오디션을 통해 열세 살의 주디를 MGM 영화사의 전속 배우로 합격시킵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녀의 전성기와 불행이 동시에 시작합니다.
배역을 따내기 위해 각종 파티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 그녀의 어머니에 의해 감독과 프로듀서들에게
성접대를 강제로 해야 했습니다.
당시 그녀는 미성년자였습니다.
결국 오즈의 마법사로 일약 스타 반열에 오릅니다. 어렸을 때부터 닦여진 출중한 연기력, 탁월한 노래 실력과 무대 감각으로 각종 영화와 쇼에 출연하면서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처참한 비극이 있었습니다.
당시 40~50년대 할리우드는 ‘핀업걸’이라고 하여 섹시한 여배우들이 유행이었는데 151cm라는 작은 키에 귀여운 얼굴인 그녀는 당시 시류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소속사 MGM 영화사는 그녀가 날씬할 수 있도록 식단을 수프 한 그릇만 줄 정도로
엄격하게 감시하고 제한했으며 식사 대신 담배와 ‘암페타민’ 같은 마약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이 암페타민 같은 경우 어머니가 열 살 때부터 주었다고 합니다.
일을 할 때는 마약과 담배를 주고 일이 끝날 때는 ‘바르비튜레이트’라는 강력한 수면제를 먹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녀는 평생 약물 중독의 후유증과 트라우마에 시달렸습니다.
약물중독, 성접대, 가혹한 노동으로 그녀는 정신쇠약에 걸려서 여러 번의 자살 시도와 여러 번의 결혼을 반복하였고 각종 소동과 약물 중독으로 1950년, 소속사와 계약이 종료됩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스물여덟 살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어머니 에델과 결별하고 혼자 힘으로 살아보려 했습니다.
실력이 출중하여 나름 인기를 유지했지만, 약물남용, 알코올중독, 자살소동으로 그녀의 고통이 지속되었고 1969년 6월 22일 47세의 나이로 바르비투르산염 과다복용으로 일찍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러한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많은 연예인이 어렸을 때부터 세상 인기에 중독되어 결국엔 안 좋은 파국을 맞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관중 앞에서 공연하고 집으로 돌아와 혼자 우울증에 시달리는 스타들이 많은 것입니다.
세상은 혼자가 되면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속여 그 사람의 재능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단물이 빠지면 가차 없이 버립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전부였던 그들은 참지 못하고
타락한 삶을 살다가 그렇게 생을 마감합니다. 세상의 힘은 정말 엄청나다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악마의 지배 아래에 있음을 믿읍시다.
이구아수 폭포에 악마의 목구멍이라 이름 붙여진
구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 근처로 가면 빨려 들어갑니다.
세상은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과 싸워 이기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5,19)라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이 세상의 신”(2코린 4,4)이 존재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떠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 방법은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세상은 무엇으로 우리를 굴복시키려 할까요? 바로 ‘외로움’입니다.
사람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혼자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엔가는 소속되려 합니다.
이것을 위해 노력하다 결국 세상에 나 혼자라는 결론에 도달하면 더 이상 버틸 힘을 잃게 됩니다.
주디는 어머니와 세상에 속하기 위해 자기 인생을 망쳐버렸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속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것에 속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자기만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 속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누군가의 공간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가 만든 공간을 지배하는 법을 따라야 합니다.
주디가 어머니와 머물기 위해 어머니의 법을 따랐듯이 예수님은 당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아버지의 법을 따랐습니다.
그것으로 세상의 법을 이기신 것입니다.
세상을 악이 지배하고 있음을 믿읍시다.
그래서 세상에 속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믿읍시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속하지 않는 방법은 아버지께 속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세상은 멸망할 것이나 하느님은 영원하십니다.
온도가 점점 올라가는 물속에서 수영을 즐기다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22일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요한 16,29-33
주님께서는 언제나 세상을 이기시고, 세상의 가치관을 능가하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아름다운 성지에서 2박3일간의 은혜로운 피정을 마치고 돌아갑니다.
피정에 오신 분들과 함께 대화도 나누고, 강의도 해드리고, 동반해드리며, 사목자로서 느끼는 보람도 큽니다.
“당신 자신만을 위한 맞춤형 강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며 감사를 표하는 분들에게 오히려 제가 감사했습니다.
피정 파견 미사는 주님 승천 대축일 미사였는데, 강론 때 제가 그랬습니다.
“이제 우리는 2박3일 간의 은혜로운 피정을 마치게 됩니다.
좋은 느낌들, 좋은 깨달음을 마음에 안고, 이제 다시금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제 또다시 내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야 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마다 주님께서, 그리고 성모님께서 주신 기쁨과 위로를 생각하며, 성령과 성모님께서 우리 일상 안에 굳건히 현존하고 동반하심을 기억하며 시시각각 힘을 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이 피정 끝나자마자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타고 온 트럭을 몰고 이사 나가는 집으로 달려갑니다.
쓸만한 침대와 소파를 건져 피정센터로 싣고 갑니다.
여러분들께서도 하늘만 쳐다보지 마시고,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여러분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인간 관계, 때로 지루하게 반복되는 자질구레한 가정사, 그 속에 주님께서 굳건히
현존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 주님께서 참으로 큰 힘이 되는 위로의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십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항상 현존하시고, 우리 매일의 일상사 안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명확히 인식하고 살아간다면, 그 어떤 세상의 고난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악으로 인해 고통당할 때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언제나 세상을 이기시고, 세상의 가치관을 능가하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7주간 월요일>
(2023. 5. 22. 월)(요한 16,29-33)
<내가 세상을 이겼다.>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2-33).”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의 시간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박해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군인들과 함께 오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될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려두고 흩어진 일은, 또는 달아난 일은 ‘배반’이 아닙니다.
‘배반’이란, 예수님을 등지고 박해자들 편에 서는 일입니다.
흩어진 제자들은 박해자들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배반자는 유다 한 사람뿐입니다.)
요한 사도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려두고 흩어진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보호하려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내신 일로 해석했고, 복음서에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8,8-9).”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씀은,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면,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사람들(제자들)로부터도 버림받고 철저하게 혼자가 되신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 모든 일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고, 결코 버림받은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씀은 신앙인들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 상황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도 박해를 받다보면 완전히 고립되어서, 하느님과 사람들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것 같은 심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 되든지, 어떤 심정이 되든지 간에, 하느님은 신앙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고, 항상 지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마태 10,29-3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이라는 말씀에서 ‘이 말’은, 15장과 16장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미리 예고하는 말씀과
제자들이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 미리 예고하는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르고 당하시는 일도 아니고, 힘이 없어서 당하시는 일도 아니라는 것, ‘인간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이라는 것을 제자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보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나를 믿어라.
그리고 평화를 잃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당시 상황에서는 예수님의 말씀들이 제자들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이 모두 기억났고, 그 말씀들의 진정한 뜻도 모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더욱 깊은 믿음과 확신으로 이어졌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고 있다.”입니다.
<지금도 겪고 있고, 앞으로도 겪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도 제자들이 겪고 있는 고난에 포함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에도 제자들은 끊임없이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에서’는 ‘내 안에서’의 반대말입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 안에서’는 평화를 얻지만, ‘세상에서’ 고난을 겪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신앙인들은 ‘세상에서’는 고난을 겪지만 ‘예수님 안에서’ 평화를 얻어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라는 말씀은,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흔들리지 말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승리를 미리 앞당겨서 선언하신 말씀이고, 동시에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길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겼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들은 “하느님 뜻과 계획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 즉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창조주이신 분이고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일’에서 패배나 실패는 결코 없습니다.
언제나 항상 승리자는 하느님이십니다.
물론 중간 과정에서 사탄이, 또는 인간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자체를 막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참여하는 생활이고, 승리자이신 하느님과 예수님의 편에 서는 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곧 하느님의 일이고, 이 생활에 패배는 없습니다.
신앙인 자신이 포기하지만 않으면... 중간에 힘든 고난과 시련을 겪더라도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로 가는 과정입니다.
바로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