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생전에도 사후에도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조선 여성이 있다. 심훈의 <동방의 애인>, 손석춘의 <코레예바의 눈물>을 비롯해 조선희의 <세 여자>에 등장하는 그녀. 실제 인생은 브라운관이나 소설이나 사진 속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했다. 그녀의 이름은 주세죽(朱世竹, 1901년 6월 2일 ~ 1953년)이다. 그녀는 조선 최고의 미녀로 불렸으며 상록수의 저자 심훈은 그녀의 외모가 조각같다고 하였다.
주세죽은 1901년 6월 7일 함경남도 함흥군 주남면 상리(현 함흥시 성천동)의 넉넉한 집에서 아버지 주용섭과 어머니 신씨 사이의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 주경흠이 있었다. 이후 함흥부 대화정4정목(현 함흥시 삼일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옮기기도 했다.
그녀는 함흥 영생여학교를 2년 다니다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는 바람에 퇴학당했다. 이후 경성에 가서 활동하다 1921년 중국 상하이로 피아노 공부를 하러 유학을 떠났다. 이 때 상하이에서 박헌영과 김단야를 만났고, 1922년에 유학을 마치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했고, 그해 5월에는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를 조직했다. 그해 11월에는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박헌영과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1925년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풀려났으며, 1926년에는 6.10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었고 얼마 뒤에 풀려났다.
1927년엔 김활란 등이 참여한 여성운동단체 근우회(槿友會)에 참가하는 등 여성 항일 운동 및 여성 계몽 활동에도 참여했다. 1927년 박헌영이 가출옥하고 1928년 9월 남편 박헌영과 함께 만삭의 몸으로 조선을 탈출하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으로 이주했고, 도중에 딸 박 비비안나를 낳았다.
그 후 신한촌 하바로프스카야에 있던 선우섭(鮮于燮)의 집에 잠시 기거하다가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지냈으며, 그 뒤에는 코민테른의 지시로 1932년 상하이로 갔다. 1933년 박헌영이 일본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 형무소에 갔고 김단야와 모스크바에 피신한다. 박헌영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다른 공산주의자인 김단야와 재혼하였다. 당시 공산주의들 사이에서는 이 추문을 두고 주세죽과 김단야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지만, 박헌영은 "신경쓸 거 없다"며 넘어갔다. 박헌영은 1939년에 출옥하였는데, 친척들이 주세죽의 행방을 묻자 죽었다고 답했다고 한다.
1937년 김단야의 아이를 임신하였으나, 대숙청의 광풍이 몰아치면서 김단야는 일본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주세죽도 체포되어 1938년에 카자흐스탄으로 유형을 가 5년간 복역하였다. 김단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김비탈리는 1~2살 무렵, 주세죽이 유형 생활을 할 때 사망했다.
카자흐스탄 지역 협동농장에서 계속 일하던 중에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스탈린에게 북한으로 귀국하게 허락해달라고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전 남편 박헌영은 북한 부수상이 되었고, 1946년 7월에 소련을 방문했을 때 딸 박비비안나를 만났으나 주세죽과는 만나지 않았으며, 1949년 8월에 자신의 비서였던 윤 레나와 재혼했다.
1953년, 병든 몸으로 딸 비비안나가 있는 모스크바로 가던 중에 기차에서 병이 악화되어 모스크바 도착 후에 사망하였다. 건강이 안 좋은데 무리해가면서 딸에게 간 이유는, 전 남편 박헌영이 북한에서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소련 정부가 박헌영의 핏줄이기도 한 비비안나를 북한으로 강제송환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딸은 어머니가 모스크바에 온다는 것을 모르고 다른 지방으로 공연을 떠난 상태라, 임종은 사위인 빅토르 마르코프가 지켰다. 당시 소련의 교통, 통신 상황이 열악해서 딸에게 미리 연락하지 못하고 갔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딸을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1989년에 소련에서 정식으로 복권되었다. 김단야도 이때 복권되었다.
참여정부 시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 재평가가 진행되면서 2007년 대한민국에서 복권되고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딸 비비안나 박이 한국에 와서 대리수령했다. 다만 일제강점기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건국훈장 수여에 대해서 보수우익 계열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박헌영은 미제 간첩으로 총살당하기전 김일성에게 자신의 아내 윤레나와 아들, 딸을 소련으로 보내달라고 했지만
그들의 그후 행방은 알수 없다
첫댓글 절말로 미인이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지금기준으로도 상당한 미인입니다
조선최고 미인도 알게되고 역사공부도 하게되었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휴일되시기 바랍니다!
박헌영과 주세죽
과거사 잘 읽었습니다
주세죽 정말 미인이네요.
반갑습니다. 박헌영과 주세죽의 이야기는 당시 장안의 화제였고 신문기사에도 많이 나와있습니다. 주세죽은 오똑한 콧날에 반짝이는 눈, 계란형의 얼굴을 한 미인입니다
정말 미인이네요
일생이 평탄하지 못해
가슴아픔니다
반갑습니다. 그녀의 삶은 함흥에서 서울로 상해로 블라디보스톡으로 카자흐스탄으로 모스크바로 유랑의 역사였습니다
주세죽 어르신은
정말 미인이세요.
1901년생이시면
우리 할머니랑 동
갑이시네유.
반갑습니다. 그분은 1세기전에 이땅에 살다간 선각자이자 시대의 희생자였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반갑습니다 오늘은 바쁘셨나 봅니다 ^^
@기정수 나름대로
바빴습니다
잘읽고 갑니다.
주세죽보다 저는 박헌영에 눈이 더 가네요.
저의 옆동네 출신 엘리트였는데
굴곡진 시대에 참 복잡한 인생을 살았지요.
반갑습니다. 고향이 예산 신양에 가까우신것 같습니다. 신양면 그의 생가 부근엔 그의 자취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좌익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거의 복권됐지만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남침에 적극 가담한 박헌영은 복권되지 않았습니다.
어지럽던 한 시대가
젊은 엘리뜨 부부를 갈라 놓았군요
감사합니다 이념이 젊고 아름다운 그녀의 삶을 빼앗아갔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아픈 시대의 사람
지금 쯤 태어 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반갑습니다. 조선 최고의 미녀라 칭송되던 그녀의 삶은 유랑과 이별로 점철된 슬픈 삶이었습니다
전 근대적 역사 한편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념은 달랐지만 치열하게 살다간 사람들이었습니다 ^^
그시절엔 빠르지도 않지만
지금보면 한창나이에 병사 했으니 ..이념전쟁에 희생양 이랄까요 미인박명 이라 하면 조금 지나친 표현 이지만요
반갑습니다. 사랑했던 두남자 모두 총살당했고 두번째남편 김단야에게 난 아이도 굶어죽은 비운의 여인입니다. 당시 53세면 조금 빠르다 할수 있습니다. 맨아래 사진 박헌영은 이때가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을겁니다
이념 앞에선 그저ᆢ
그 삶의 역정을 그려볼 뿐~ _()_
반갑습니다 사랑과 이념이 그녀의 인생을 유랑속으로 몰고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