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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잠들어있었고 햇볕은 눈물이 나도록 따뜻했다.
새학기 첫날. 고등학교 입학식날.
설레는 마음에 전날 밤 잠을 설쳐버린 내가 급하게 학교로 뛰어갔을 때 이미 입학식은 끝난 상태였다.
허탈함에 아직은 낮설은 교복을 쓱쓱 털어내고 씩씩하게 1학년 7반을 향해 걸어갔다.
힐끗 복도를 통해 보면 한창 자기소개를 하고 있는 건지 시끌벅적한 교실.
담임선생님은 계시지않았고 마침 한 남자아이가 자신의 소개를 하려는지 교탁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맞추어 난 재빨리 교실에 들어갔다.
딱 하나 남은 자리.
그 자리에 슬쩍 다가가 앉은 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교실 앞을 바라보았을 때.
"하이 헬로우 방가요. 내 이름은 병언신이고, 병신이라고 부르기만 해봐요 잡것들아."
병언신. 자기 소개를 하고있는 그 남자애, 아니 언신이를 난 멍하니 바라보았다. 반아이들은 귀염상 있는 얼굴에
동글동글 말하는 그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난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곤 나는.
벌떡.
"아 씨파, 병신새끼 니가 왜 여깄어!!!"
..라고 외쳐버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것이 중학교 1학년때부터 같은 반이었더니,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금조차 병언신이 내 앞에서 번듯이
자기소개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넌 또 같은 반이냐??!아니, 이게 아니라 누구보고 병신이래, 병신이!!"
내가 외치자 마자, 지지않는 다는 듯이 삿대질까지 하며 외치는 병언신. 애들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우리 둘을 바라보았고 난 그 시선을 느끼며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으씨, 니가 왜 거기앉아!"
반아이들의 시선은 의식하지 못하고 나를 향해 버럭, 소리치는 병언신.
"뭐! 자리 하나밖에 없는데 난 땅바닥에 앉으리?!"
"니가 왜 내 옆자리냐고!"
그제야 난 내 옆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텅텅 비어있는 자리의 책상위에 다소곳이 놓인 가방하나. 그 가방 옆에
떨구어져 있는 명찰, [병언신]
하,하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려버린 날 보며 병언신도 피식 웃어버렸다.
이렇게도 엮이는 구나. 이렇게도 우린 만나는 구나.
바보같이, 그렇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는 것이었다.
.
언신이는 뚜벅뚜벅 자기소개를 마치고, 자신의 머리를 엉클어 뜨리며 자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병신아. 너 또 같은 반이냐?"
'병신'
병언신이 가장 싫어하는 별명이자 욕. 자신의 이름과 발음이 흡사한 욕설인 병신때문에 병언신은
참 많이도 놀림을 받았었다.
때릴까, 말까 하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 보는 언신이.
그러다가 결국.
"바부팅. 뒤질래요, 너."
병언신은 '바부팅'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고, 뒤질래라는 말로 끝을 맺...으려 했으나.
"병언신 병신 병언신 병신 병언신 병신."
끝없이 중얼거리며 약올리듯 웃는 나를 보다 결국엔 콩, 하고 딱밤을 때리더라.
"씨, 아파."
"그러게 누가 병신이라 부르랬냐."
나름대로 귀여운 목소리를 낸다고 '씨'라는 말마저 덧붙였건만, 언신이는 미간을 좁힐 뿐이었다.
"병신을 병신이라 부르지 뭐라불러."
하지만 그 살짝 좁힌 미간에 은근히 위압감이 서려있어, 큰소리론 말하지 못하고 가만히 궁시렁댈수밖에 없었다.
언제더라.
그러니깐 중학교 2학년때, 그래. 내가 2학년 6반이고 언신이도 6반이었을 때. 한 남자애가 언신이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무심코 '병신'이라 불렀던 적이 있다. 그 남자애딴에는 장난이었겠지만, 그 단어를 들은 언신이의
반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갑자기 싸늘해지더니 정말 말 그대로 그 남자애를 두드려팼고, 아이들은
병신이라 부르면 저렇게 된다, 하는 겁에 질려 더이상 언신이를 병신이라 부르지않았다. 그 당시 나 또한
그 상황을 목격한지라 언제 저렇게 맞는 것 아닐까, 겁에 질려 한동안 '병신'이라는 말은 물론 병이라는 단어조차
입에서 꺼내지않았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오래가지않았다. 일주일쯤 지났을 까.
"아씨, 병신."
나도 모르게 무심결에 툭, 그 말을 내뱉었고 반아이들은 그 모습에 하얗게 질려갔다.
헉,하고 숨을 삼켜 겁에 질린 표정으로 눈을 꼭 감아 주먹세례를 기다렸지만 내게 돌아온 것은.
"바부팅. 지랄 그만 까."
장난스레 웃으며 딱밤을 매기는 그 손이었다.
아직도 잊지 못한다. 경악하는 표정 반, 믿지못하겠다는 표정 반, 부럽다는 표정 반으로 날 바라보던 아이들의
눈길을.
그리고 그 것을 기점으로 병언신은 나에게 [병언신=만만한 놈]이라는 공식으로 입력되었다.
그랬기에 지금 내가.
"병신. 책상 띄어놔."
이렇게 개길 수 있는 거겠지.
.
그리고 그 첫날 이후 나와 병언신의 사이에 대한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모두 나와 병언신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뻔한 소문들. 병언신은 중학교시절부터 우리사이에 맴도는 그 소문들에 대해선 늘 그렇듯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별 일 없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또한 그런 모습을 따라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헤이, 병신!"
"아씨. 그렇게 부르지말라니깐, 이한나?"
밝게 웃으며 말을 건네자 왁스로 머리를 삐죽삐죽 세운 언신이 울상을 지으며 외쳤다.
눈썹이 축 처져 울상을 짓고 있었지만 언신이의 볼에 자리잡고 있는, 움푹하게 패인 보조개.
"왜요, 병신씨."
끄떡하지않고 대꾸하는 나를 보며 언신이는 다 포기했다는 듯이 한숨을 푹푹내셨고 그런 언신이를 다시 한번
짓궂게 바라본 후 거침없이 뒷문을 활짝 열어제꼈다.
"하,한나야. 이제 종치는데…"
쭈뼛쭈뼛 말리는 반장에게, "그럼 수고." 라고 대답하고 망설임없이 교실을 빠져나가…려다 다시 문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안 나와, 병신?"
이라 외쳐버린 나.
"아씨, 이한나 저것은."
잔뜩 힘을 준 머리를 긁적거리며, 입술을 퉁하니 내밀었지만 언신이는 거부하지 않은 채 교실을 빠져나왔다.
후비적, 내가 어디로 가려는지도 모르면서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지 나보다 먼저 계단을 올라가기만 하는 병언신.
"내가 어디가는 줄알고?"
나보다 날 더 잘아는 듯한 그 모습에 괜히 심통이나 물으면.
"니가 갈 때가 하나밖에 없잖냐."
라고 말하며 씨익 웃는 병신.
그렇게 나보다 더 먼저, 내가 가려던 곳에 들어가 버린 바보같은 …병언신.
언신이보다 훨씬 뒤로 쳐저서 드디어 도달한 옥상. 가볍게 쉼호흡을 한 후 삐걱거리는 소음을 내는 문을 열었다.
"어라라?"
보이지않았다. 조금 전에 옥상에 올라간 언신이 보이지않았다.
"언신…아?"
고요한 옥상. 바람소리조차 느껴질 정도로 미동이라는 것은 전혀 없는 이 곳에서, 언신의 이름을 부르다가 이내
옅게 느껴지는 향기에 그 향기의 근원지로 다가갔다.
옥상의 난간 끝, 체육창고의 뒷편.
과연 그 곳엔 언신이 쪼그려 앉은 채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날 바라보지않고 말하는 언신이. 그런 언신이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향기가 났거든. 맨날 너가 바르는 로션향."
작게 입속말로 대단하네, 라고 중얼거린 언신이는 고개를 무릎에 파묻었다.
"뭐 하고 있었는데?"
그래, 불과 몇분 전과 달리 너무도 조용해진 모습에 조금은 불안해졌다.
"그냥, 뭐 보고있었어."
"뭘? 하늘?"
"아니, 저기."
여전히 고개는 들지 않은 채 언신인 손끝으로 어딘가를 응시했다. 그 손끝이 향하는 곳은 하늘이 아닌, 저 나락의
끝, 지상. 높은 건물들이 즐비한 그 곳을 바라보다 아찔하게 느껴지는 현기증에 고개를 돌리면 어느새 언신이는
깔려있던 매트위로 누워있다.
"왜 이리 조용하실까."
무미건조하게 내뱉은 말이었지만 언신이는 그 말마저 놓치지않았다.
"등신아. 난 맨날 조잘거려야되냐?"
피이, 하고 교실에서의 상황과는 뭔가 뒤바껴진 느낌에 나도 따라 매트에 누으려 했으나.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모르냐? 눕지마."
주먹으로 사정없이 내 등을 밀어대는 통에 눕지못하고 가만히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용하다.
숨이 막힐 듯 조용해서, 그 분위기를 차마 깨뜨리지 못하고 얌전히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숨막히는 침묵을
깨뜨려준것은, 역시나 언신이.
"이한나."
"응."
"우리 사귈래."
"응"
너무도 태평하게 말하는 그 말에 반사적으로 내 혀를 빠져나간 말.
그게 끝이었다. 언신이는 계속 누워있었고 나는 자꾸만 하늘만 바라보았다.
붉어진 볼이 보일까, 애꿎은 하늘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
우리 사귀는거 맞나, 할 정도로 변함없는 일상과 변함없는 우리의 행동들.
하지만 가끔 나의 머리를 흐트려놓는 그 손길과 날 보며 밝게 웃는 그 모습들은 '행복'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언신아아."
교실청소라며 열심히 대걸레질을 하고 있는 언신이를 늘어지게 부르면.
"조금만 기다려."
개의치않고 대답하는 언신이.
혼자 책상에 엎드려있다가, 의자를 발로 텅텅 차보기도 했다가, 책상을 두드리기도 했다가. 그렇게 온몸으로
심심함을 표현하는 내게, '얌전히 있어.'라는 말로 언신이는 기를 죽였다.
언제 이렇게 변했지. 왜 내가 이렇게 꼼짝도 못하지.
살짝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썼지만 그래도 베실베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참 열심히도 청소를 하고 있는 언신이의
뒷모습에서도 웃음이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바부팅."
물기가 젖은 손으로 내 볼을 타악,튕기며 말하는 언신이와 저녁놀이 짙게 깔리는것을 보며 교정을 빠져나왔다.
"한나야."
"응."
그 노을에 혼이 빠져 설렁설렁 대꾸하면, 언신이는 그 것이 불만인지 내 볼을 늘어뜨린다.
"너 나 계속 기다릴 수 있어? 지금, 나 끝날 때 까지 기다린 것 처럼, 기다릴 수 있어?"
그리고 그 물음에 난 응,이라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또다시 '병신'이라 중얼거린 후 젖어있는 손을
잡아주었다.
"대체 너한테 병신은 무슨 뜻이냐?"
긴 팔을 내 어깨에 걸쳐 걸어가면서, 나에게 묻는 언신이. 잠시 곰곰히 생각을 하다,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언신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음. 병신? 아무 뜻도 없는데?"
눈동자를 동글동글 굴리며 대답하자 김이 빠졌는지 언신이는 슬금슬금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왜, 뭘 기대했는데."
"아씨파. 짜증나, 너."
웃음끼가 가득한 목소리로 이번엔 내가 언신이의 팔에 팔짱을 끼며 묻자 언신이는 금새 빨개진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꺄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내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고, 저녁놀에 유난히 언신이의 얼굴이 붉어져 보이고.
평소 스킨십을 싫어한다던 언신이는, 그날 내가 꼈던 팔짱을 풀지않았다.
* *
"얼씨구. 얼굴폈네, 민다운."
교실에 들어가자 마자 생글생글 웃으며 날 맞이하는 다운이가 오늘따라 밝아보였다.
어젯밤, 다운이가 내게 보낸 [나 남친생겼다!!]라는 문자로 인해 그 이유는 이해가 갔다.
"한나야, 너 언신이가 뭐라고 고백했어?"
이내, 행복에 겨운 목소리로 다운이가 내게 물었다.
"고백?"
맞다. 그게 고백이었나?
"그냥 사귀자던데."
덤덤하게 말을 이으며 가방을 내려놓는 내 행동에, 안그래도 큰 눈을 동그랗게 키우는 다운이.
"정말?!"
"응. 그러면 안되나?"
머리를 긁적이며 묻자 다운이는 금방 내가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나야. 너 사랑받고 있긴 한거야?"
지나가는 말로 묻는 다운이. 그자리에 우뚝 멈춰선 나완 달리 다운이는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한다며 자리를 떴고,
난 걸음을 옮길수가 없었다.
'고백', '사랑받고 있긴 한거야?'
라는 말소리가 자꾸만 귀를 울렸다.
사람의 맘은 참 간사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것엔 전혀 신경쓰지않았는데, 다운이의 말을 듣고 난 후로
나도 모르게 의식하게 되었다.
고백도 모자라 아직까지 사랑한다는 커녕 좋아한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는데.
"이씨. 병신아."
그 답답한 맘을 털어놓지 못하고 애꿎은 언신이에게 화풀이중. 발로 운동장흙을 퍽퍽 차대는 나를 언신이는
모르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병신. 그러니까 니가 병신이다, 병신아."
"이게, 병신 3번들어갔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절대 주먹을 쥐지않고, 움푹 패여있는 보조개.
"병신아. 넌 나 좋아하긴 해?"
참아야지, 하면서도 난 꾹꾹 참았던 말을 뱉어내고야 말았다. 그것도, 순식간에.
"뭐?"
한순간 좁혀지는 미간. 발걸음을 뚝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바부팅. 다시 말해봐."
"........"
"이한나."
난 거의 울상을 지으며 도리질을 해댔고 답답한 듯 언신이는 연신 내 머리를 엉클어트렸다.
"뭐가 불안한건데…"
조금 씁쓸한 듯 이어지는 그 말과 함께.
* * *
듣지 못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좋아한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다.
욕심인가?
하고 잔뜩 우울한 맘으로 침대에 오도커니 누워있을 때.
드르륵,하는 문자소리와 함께 도착한 문자.
[이한나 바부팅아
한번이라도
나랑 밤에 마주치기만 해봐
사망이야 그날로. 하긴 나도 너
랑 마주치긴싫다
해지기전에 집에 좀 들어가라]
그 머리로 꽤나 애썼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한나 사랑해]라는 짧은 말이면 될것을 뭐가 그리 쑥쓰럽다고 이렇게 보내는지.
피식, 웃으며 난 답장을 눌렀고 내 답장은…
"이한나 너 뒤질래???!"
내 답장을 보자마자 전화를 한 언신이의 목소리에 난 행복한 웃음을 터뜨렸다.
내 짧은 답장.
[병신.]
내 병신이라는 말의 뜻은, 어쩌면 사랑해라는 말과도 같을 거야.
널 보면 자꾸만 병신이라는 말이 하고 싶고 병신이라는 말은 내가 오직 너한테만 하는 말이니까.
맘속으로 가만히 속삭인 후 침대에 누운 채 살짝 눈을 감았다.
"아씨파 왜 대답안해!! 너 진짜 병신이 뭐냐, 병신이!!"
아직까지도 우렁차게 울려퍼지는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
"............"
"야. 이한나, 자냐?"
"............"
"꿈속이라고 생각하고 잘 들어. 한번밖에 안해줄테니까."
"............"
"사랑해."
"............."
"잘자라, 바부팅."
.
.
병신.
누군가 내게 '이상형이 뭐에요?'라고 묻는 다면 난 망설임없이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병신같은 남자.'
라고.
누구보다도 밝게 웃을 줄 알고 누구보다도 작게 울수 있는 남자.
누구보다도 날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
바로 병신 같은 사람이, 병언신같은 사람이 내 사랑이니까.
★
오랜만인거져!!ㅠ_ㅠ
보고싶었어요정말. 닉네임다시 원상복귀했습니당
아 반햇어요 ㅋㅋㅋㅋ 기분 좋아지는 소설이네요. 원래 댓글 잘 안쓰는데 님한텐 특별이 쓰고 싶어서~ 다음 소설도 쭉쭉 읽어보겠습니다. 님 팬할꺼예요!
잘보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