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벤투스는 8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스트라이커였던 최순호(42·포항 스틸러스 감독)에게 수차례의 강력한 영입의지를 표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유벤투스는 81년과 86년 최순호 영입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당시 최순호의 소속구단이었던 포항제철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81년 세계 청소년대회에서 강호 이탈리아를 상대로 한국은 4:1의 놀랄만한 대승을 거뒀다. 2골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이탈리아의 수비진을 무참히 짓밟은 최순호가 바로 그 주역. 한국은 비록 브라질, 루마니아와의 경기에서 연이어 패하며 본선진출에 실패했지만, 최순호는 대회에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고 특히 유벤투스는 대회 이후 멕시코 월드컵이 열린 86년까지 5년 동안이나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과 유벤투스의 인연은 각별하고도 질기다. 유벤투스 수뇌진은 최순호의 플레이를 직접 보기 위해 4개국 초청대회가 열리고 있던 멕시코까지 쫓아갔지만, 최순호가 부상으로 경기출전이 힘들게 되자 당시 한국팀의 단장에게 간청, 결국 알제리전 후반에 부상중임에도 한골을 기록하며 팀을 2:0의 승리로 이끄는 그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벤투스는 그를 ‘축구가 무엇인지 알고 플레이 하는 선수’로 평가하며 지속적으로 영입을 시도했지만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못한 채 그를 향한 5년간의 짝사랑을 마감해야 했다.
“유벤투스가 스카우트 의사를 밝히고 5년이나 쫓아다녔는데도 변변한 협상 한번해보지 못한 경우는 전 세계에서 최순호가 유일할 것이다.” 라며 혀를 내둘린 유벤투스 스카우트의 말은 당시 세계 축구계의 사정에 무지했던 한국 축구계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최순호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국내에서 은퇴하고 프랑스 2부리그에서 스위퍼를 보며 코치 수업을 받았던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떠올리면 당시 유벤투스의 적극적인 구애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질 뿐이다.
또한 불세출의 스트라이커 '차붐' 차범근(50·수원 삼성 감독) 역시 80년대 중반 AC밀란,유벤투스등으로부터 영입제의를 받았다. 차범근에대한 적극적인 영입의사를 밝혔던 유벤투스는 파올로 로시, 미셀 플라티니등을 앞세우며 컵위너스 컵 우승을 시작으로, 유러피언 슈퍼컵과 도요타컵, UEFA 챔피언스 리그 정상등 유럽 3대 클럽대항전을 모두 제패할당시 차범근에게 100DM이란 세게 최고수준급의 이적료를 제시하였지만, 고심끝에 분데스리가에 잔류를 선언하며 차범근의 에이전트는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최고의 리그는 분데스리가다"며 유벤투스의 러브콜을 거절했다.
그가 평소“다른 유럽리그에 진출해보지 못한 것이 평생 아쉬움”이라고 입버릇처럼 말 해왔기 때문에 아쉬움은 더 크다.
94년 미국 월드컵후 홍명보에게 유럽 유수의 클럽들은 지속적으로 영입의사를 밝혀왔다. 하지만 소속팀 포항은 ‘한국 최고의 스타를 헐값에 보낼 수 없다.’는 이유로 모든 제의를 거절하며 그의 유럽진출을 무산시켰고, 결국 홍명보는 “ 구단의 결정에따라 아쉽지만 팀을 우승시킨 뒤 유럽 빅리그로 반드시 진출하겠다.”라는 말과 함께 다음 시즌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포항은 “올해 지역연고의 법인으로 새출발한만큼 내년엔 꼭 우승해 명문팀의 입지를 다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팀의 간판스타인 홍명보가 절대 필요하다."며 그의 해외진출 시기를 늦추도록 종용했지만, 유럽진출에 대한 그의 열망은 너무나도 뜨거웠다.
당시 홍명보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있던 이탈리아 세리에A의 파도바와 볼로냐는 96년 2월 그가 팀의 전지훈련으로 포르투갈에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포항에 영입의사를 밝힌 후, 4~5일 정도의 입단테스트 기간을 요청했다. 하지만 포항은 “한국의 최고 선수에게 입단테스트 제의는 말도 안 되는 일.” 이라며 필사적으로 반대했고 홍명보 역시 구단의 강력한 반대에 어쩔수 없이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파도바와 볼로냐 측은 '홍명보의 포항 내에서 비중이 큰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입단테스트 후 입단이 확정되면 우선 계약만 하고 홍명보는 96시즌을 한국에서 보낸 뒤 96/97 시즌중반에 이적을 시켜도 좋다'라는 양해까지 구했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다.
96시즌을 끝으로 홍명보에게 많은 관심을 보인 팀들은 칼스루에SC와 함부르크SV, 그리고 헤르타 베를린이었다. 특히 1894년 창단, 95, 96년 연속 UEFA컵에 나설 정도로 안정된 전력을 갖춘 칼스루에SC는 팀의 기둥인 '리베로' 해슬러의 부상으로 비상이 걸린 상태였고 그의 공백을 메울 리베로 감을 홍명보로 점찍어두었다.
칼스루에나 홍명보 모두 가치를 정확히 매길 시간이 부족하다며 임대라는 형식에 뜻을 모은 후, 일단 6개월 임대로 분데스리가 96/97 후기 리그부터 경기에 참여하기로 결정했고 홍명보는 6개월 동안 자신의 진가를 보여준 뒤 완전 이적으로 이적료, 연봉 등 정식 입단에 따른 절차를 밟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칼스루에에게 줄곧 임대로 30만불를 요구하며 자세를 굽히지 않았고 결국 어이없게도 또 다시 이적료 문제로 유럽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연이은 이탈리아 세리에A 삼프도리아에서의 입단제의도 역시 줄곧 이적료 150만 달러(당시 인터밀란으로 이적한 호베르투 카를로스의 이적료는 700만달러)를 요구하며 제의를 거절했다. 당시 홍명보는 입단테스트를 위해 이탈리아행 비행기 티켓까지 끊어 놓았지만 헛수고를 한셈이었다. 그러나 유럽진출에 미련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다. 97년 12월 프랑스에서 벌어진 유럽 올스타와 세계 올스타의 경기가 바로 그것이다.
세계 올스타에 선발된 홍명보는 지단, 클루이베르트, 복시치, 호나우디뉴, 바티스투타등이 이끄는 유럽 올스타를 맞아 오른쪽 사이드백으로 출전, 안정된 수비를 바탕으로 정교한 패싱능력과 노련한 플레이로 수비진을 리드하며 90분풀타임을 무난히 소화해내며 팀의 5:2승리를 이끌었다.
당시 지단, 클루이베르트등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상대로 효과적인 수비를 펼친 그에 대해 바르셀로나의 반 할 감독은 커다란 관심을 표명했고 당시 소속팀이던 벨마레 히라츠카에 입단제의를 적극 표명했으나 이번에도 결사적인 반대로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98년 5월,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홍명보의 이적을 요청한 바르셀로나는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그의 결정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답변조차 들을수없었다.
세계적인 스포츠 축구 사학자 빌 머레이는 그의 저서 <세계축구사>에서 한국을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국가 "라고 평해놓았다. 그다지 좋지않은 환경속에서도 수준급의 선수가 끊임없이 배출된다는 점, 그렇게 길러낸 우수한 인재들의 해외진출을 억압함으로써 축구실력을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방책을 외면한다는것이다.
“홍명보가 만일 지금 다시 축구를 시작한다면 세계최고 선수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유럽에서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FIFA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의 칼럼니스트 랍 휴스
첫댓글 아 이런면에서 볼때는 정말....... 포항시러 ㅜㅜ
이거 정말 사실인가.?.-_-;; 포항.. ;;;.. 대략난감..
포항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