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학은 言必稱(언필칭) 特殊大學(특수대학)이라 했다.
뭐가 특수했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일반대학과는 뭐가 달라도 달랐었다.
아마 우리들 삶의 토대를 바다에 두고 있다는데서 그렇게 불리었던것 같다.
인간의 일차적 삶의 토대가 태생적으로 땅 위인데 반하여 그 부차적 삶의 토대라 할 바다에서 삶을 追究(추구)하는 바가 특수해서 그랬을것 같다.
하루 세끼 단체급식에 기숙사에서 관급의 유니폼을 입고 생활하였다.
예컨대 소위 半官半民制度(반관반민제도)라 해서 학비의 절반은 정부에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개인이 지불하는식이다.
당시 우리들 主副食費(주부식비)가 하루 195원으로 이는 三軍士官生徒들의 50원에 비하면 그야말로 破格的(파격적)이라 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는 우리 學長의 威勢(위세)로 얻어 낸 特別豫算(특별예산)의 결과로 보인다.
아침 식단은 천편일률로 된장국에 김치를 곁들인 간단식으로 主食은 米麥(미맥) 7:3比率(비율)이었다.
점심과 저녁메뉴는 매일매일 달리 나왔다.
다만 점심에는 언제나 기름 동동뜨는 소고깃국이 나왔었고 식기 한편에 예외없이 주황색의 부채꼴 모양의 치즈가 한토막씩 나왔다.
그러나 저녁반찬은 어느 메뉴건 質量(질양) 구별없이 그야말로 먹음직스러웠다.
그중에 잡채요리가 지금도 생각 난다.
당면에 이지가지 채소를 곁들인 푸짐한 잡채에 걸직한 고추장을 얹어 비벼먹는 그 맛이 아직도 삼삼하다.
거기에 토요일 점심이면 언제나 바삭거리는 누런 동까스가 구미를 진동시켰다.
週末点檢淸掃(주말점검청소)를 무사히 마치고 먹는 그 점심 동까스요리는 연중 불변이다.
바로 그 감칠맛 나는 동까스 때문에 언제나 골치가 아픈 무리들이 바로 식사당번이다.
廚房(주방)에서 일하는 調理員들은 거의 오래동안 승선생활을 했던 분들이었다.
그네가 음식을 충분히 만들어 식당에 가져다 놓으면 그것을 전교생에게 균등배분하는것은 언제나 1학년 食事當番(식사당번) 몫이다.
그 식사당번이야 말로 순차적으로 돌아오는 1학년생들에게는 아주 귀찮은 일이었다.
매끼 식사당번은 식사시간 15분 전에 식당창구에 대기하고 있다가 3학년 부터 2학년 1학년 순으로 배식을 하게 마련이다.
허나 어느 메뉴건 각자의 好不好(호불호)가 있어서 배식에 여간 신경이 쓰이질 않았다.
대개는 젊잖은 체면에 그냥 배식해 주는대로 지나가지만 치사한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협박하기 일쑤다.
그렇게 덤으로 더 얹어주면 결국은 음식이 모자랄수도 있어 그런 날이면 식사당번이 배 곯는 날이다.
때론 배만 곯는게 아니고 당직사관으로 부터 배식을 잘못했다는 죄목으로 몽둥이 찜질 당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그 치사한 음식탐을 외면이라도 했다가는 어느날 白頭氣合(백두기합)에 아구통 돌아갈지도 모르니 그저 언제나 죽을 맛은 그저 그 식사당번이다.
그래서 어느 약삭빠른 친구들은 인끼메뉴를 미리 적당량 삥땅해 뒀다가 썰물이 지나고 나면 슬쩍 꺼내서 晩餐(만찬)을 즐기기도 한다.
그렇게 상급생으로 부터 부당한 압력으로 戰戰兢兢(전전긍긍)하던 하급생이 해가 바뀌어 상급생으로 지위가 바뀌면 개구리 올챙이쩍 생각 안난다고 二重食事(이중식사)의 前轍(전철)을 또 밟는것이니 이 역시 더러운 積弊(적폐)의 惡循還(악순환)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제 制服(제복) 이야기를 좀 해 보자.
여름엔 夏正服(하정복) 겨울엔 冬正服(동정복)이고 하얀 커버를 한 금테두리 모자를 썼다.
이들 정복은 學內外 行事때 외에는 거의 입지를 않았고 언제나 평상시엔 푸르스름한 通常服(통상복) 차림으로 하얀 로푸를 두른 검정 통상모를 썼었다.
모표는 역시 노란 금박의 닻(Anchor)이다.
그러다가 무슨 작업시간이면 하얀 작업복으로 바꿔입었었다.
헌데 우수운것은 통상복 뒷 주머니엔 언제나 큼직한 양은 숟가락이 꼽혀 있었다.
아마 이들 스푼(Spoon)은 관급품 항목에 들지 않았던것 같다.
동정복은 검정 더불양복에 검정 넥타이 차림이다.
양복소매 양 끝단엔 學年標識(학년표지)로 노란 금박의 北極星(북극성)이 장식되어 있어 별이 하나면 1학년이고 2학년은 별 둘 그리고 3학년은 별 셋이었다.
이 북극성이야 말로 그 옛날 英國士官(영국사관)들이 눈물을 훔치던 소맷단에서 유래했다는것으로 苦難(고난)의 상징이기도 했다.
겨울이면 정복 위에 검정 외투를 걸치고 하얀 목도리로 액센트를 줬다.
하정복은 위아래 하얀 정복에 검정 넥타이를 받혔는데 어깨에는 금빛 찬란한 肩章(견장)을 달았다.
견장에는 한줄 두줄 세줄의 학년 표지가 새겨져 있었고 항해과는 닻(Anchor)이 그리고 기관과는 스크루(Scrw)가 새겨져있었다.
어느 늦 여름날이었다.
운동장에서 행사를 마친 정복차림의 전교생이 막 기숙사로 향해 비탈길을 올라가고 있을때였다.
학생들의 움직임이 웅성대며 뭔가 예사롭지가 않았다.
이리 몰리고 저리 흩어지고 마치 群舞(군무)하는 白鳥(백조)의 무리처럼 심상찮은 학생들의 움직임이었다.
느닷없이 우리 교정에 어느 유명 女徘優(여배우)가 등장한 때문이다.
당대 최고 스타인 K孃이어서 더더욱 소란스러웠다.
이 不毛絶海(불모절해)의 캠퍼스요 禁女(금녀)의 땅에 潑辣無雙(발랄무쌍)의 淸純美(청순미)를 자랑하던 그 美貌(미모)의 K孃이 혜성처럼 등장한것이다.
13期 어느 선배의 Girl Friend로서다.
빨간 브라우스에 검정바지 차림의 그녀가 忠武路에선 하루가 다르게 聲價(성가)를 높이는 얼짱스타지만 아직은 철부지 天眞少女(천진소녀)였었나 보다.
한동안 난리법석을 떨던 그녀가 떠나간 교정은 다시 고요속에 沈潛(침잠)해 버린다.
마치 뜰안의 한마리 새가 훌쩍 날아가 버린듯한 그런 허전함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녀는 한번인가 더 우리 학교를 찾았던것으로 1년 年上의 그 마도로스 지망생에 대한 그저 단순배려였는지도 모를일이다.
그때 우리 학교엔 철철이 鷺山(노산) 李殷相(이은상)선생의 特講(특강)이 있었다.
忠武公 誕辰日(탄신일)을 비롯하여 개교기념일 등 해마다 몇번씩이고 어려운 걸음을 하여 주셨었다.
莫逆之友(막역지우)인 우리 학장님과의 交分에서도 그랬겠지만 특히 忠武公硏究의 大家로서 장차 海洋開拓(해양개척)의 일꾼들에게 하시고 싶은 特講에 남다른 感懷(감회)가 있었던것 같았다.
넓은 식당에 빼곡히 자리잡은 制服의 學生들 앞에 선 그분의 姿態(자태)는 老詩人이요 歷史學者이기 이전에 영락없는 生佛(생불)이셨다.
작달막한 키에 큼직한 얼굴이며 그 척 늘어진 양쪽 귓밥이 마치 부처와도 흡사했다.
특히 딱딱하기 쉬운 歷史에 대한 그분의 言辯(언변)은 그야말로 구수하기가 청산유수여서 몇시간이고 계속되는 그분의 亂中日記(난중일기) 해설은 하나도 듣는데 지루하지가 않았다.
창가에 반듯하게 앉아 이 鷺山先生의 강의를 傾聽(경청)하는 우리 학장님의 미소 역시 잔잔한 모습이셨다.
特講을 마친 鷺山先生이 學長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講堂을 떠나 가실때 우리 학생들은 雨雷(우뢰)와 같은 기립박수로 그분들을 전송했었다.
Blog.Naver 2006/9/9 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