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조명
붉은 악보
김명아
출항을 기다리는 여수항 오동도 등대 마을에서
첫 불을 밝히고 화물선 모여들고
썰소리 돌아오는 바다를 듣는다
신발코는 모두 집 쪽으로 돌려놓은
손길을 따라 지금도
집집마다 불을 밝히고 있다
불빛을 따라 해가 미끄러져 들어온다
어딘가에서부터 나를 깨우는
곁에 앉아 토닥이는 손짓이 있다
몇 해가 흘렀을까
눈길 닿는 곳마다 솟대 세우고
비와 천둥을 부르며 감겨든다
차오르는 목울대, 웅크린 어둠살 너머
붉은 해가 떠오른다
법당에 나비가 날아들었다
지난여름 햇살이 꽃살문으로 출렁인다
밤낮이 갈마들고 향초는 불을 물고
솟아오르듯 번진다 나비가 좇던 악보
망설이다 삼켜버린 음표, 붉은 악보가
하늘에 펼쳐졌다 내려놓은
그러나 달려온 얼굴이다
더블베이스 앙상블
- 바시오나 아모로사
더블베이스가 비행을 시작한다
기댄 듯 붙잡은 듯 흔들거린다
가장 낮은 곳으로 춤추듯 호흡하며
수직의 현을 탔다 거장의 팔은
악기를 안고 도약하듯 해와 달을 넘나들며
천천히 변주된 선율을 연주했다
짧고 굵은 활이 현을 그었다 떼었을까
울림통은 바흐의 하프시코드 협주곡을
들려주었고 벌판에 중후한 몸통으로
키다리 신사는 섬세한 귀를 열었다
피치카토 주법으로 코끼리를 데려오거나
묵직한 저음의 발자국이 현 위에서
동굴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마지막 악장이 끝날 때까지
관객과 호흡하며 치닫던 더블베이스는
박수를 녹여냈을까 휘파람을 반죽한
달의 눈물은 건기의 물웅덩이를 채우고
저물녘의 징검다리를 건너며
장거리 전화를 붙들고 푸른 문으로 사라졌다
합니다 사이에 팝니다
웃음이 남아있는 볼트를 사고 화장이 지워진 너트를 팔았다 꿈이 깨는 날 톱니바퀴는 필요 없었다
짧은 치마를 팔고 긴 다리를 샀다 배꼽티를 팔 때 배꼽을 사고 귀마개를 팔 때 귀를 샀다 안경을 팔면서 눈을 샀고 마스크를 팔 땐 입을 샀다 그러나 긴 다리를 살 때 발은 사지 못했고 배꼽은 사면서 말라버렸고 귀를 살 땐 들리지 않았다 눈을 살 땐 보이지 않았고 입속에는 이가 없었다
바늘 없는 괘종시계가 울린다 오후 1시, 서둘러 문을 연다 ‘파마세일 합니다’ 등판을 지고 물결파마가 출렁이고 베이비파마가 기어 다녔다 눈썹을 짧게 심고 깜박이는 눈꺼풀 위로 ‘속눈썹 합니다’ 간판은 머리를 자르고 있다
안개꽃 한 다발을 안고 4D 영화를 볼 때 흔들리는 의자에 앉았다 타는 냄새 속에 물방울이 튀었고 안경은 벗지 못했다 물 묻은 선잠을 자다 자리에서 일어나 건강만을 판다는 간판을 내걸었다 잠가지지 않는 문을 열고 배달된 시래기뭉치를 볶아 비빔밥을 만들었다
접시를 깨뜨리며 냄비를 팔고 찌그러진 냄비를 펴며 접시를 팔았다 냄비우동에 조개를 빼고 시장을 오가는 행인의 다리를 걸고 젓가락을 들었다 멈췄다 불어 터진 면발을 세며 귀퉁이로 몰려드는, 건너야 할 신호등을 보고 횡단보도를 늘리며 넘어졌다
귀가 눈을 뜨고 따라간다
성주산 근처 아파트 인적 드문 곳
평상에 앉아 바람을 보고 있었다
다급한 목청소리와 떨림
산새들의 울부짖음에
귀가 눈을 뜨고 따라간다
평상 가까이 깃털 펼치지 못한
아기새가 겅중거리며 다가오고
지나가던 모자가 외친다
“뒤에 고양이가 숨어 있어요”
바람의 단면을 카메라에 담던 두 손
성큼 일어나 날갯죽지를 잡는다
뭇 새들 지저귀는 나뭇가지 위로 올려주자
젖은 날개는 바람의 옷을 입었을까
놓쳐버린 날개가 만져지고
나무를 바라보던 눈은 숲을 향하고
응시하며 주고받던 지저귐 날아오른다
화단으로 들어간 들고양이,
나뭇잎 되어 뒹굴고 뒹군다
중심선을 세운다
경매된 계절, 서쪽 비상구 앞에 서 있다
밤새 몰아치는 비바람 삼켰을까
등고선 따라 경계를 허무는 선명한 지문,
저장 창고에서 검색어를 꺼내어
알고리즘 패턴을 찾아내자
입속 동심원은 팽창하고 터질 듯
분화되면 진화된 모습 앞에서
사람은 DNA를 알아버린 유일한 존재,
뜨거운 얼음이 필요할 때 세상을 은유한다
바람의 각도를 잡으며 구름 사이 하늘을 걷는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파도는 올 것이다
모래집이 흘러내리는 순간, 달의 위로를 받으며
환절기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파도를 깨물며 해안가 담벼락을 타고
기어오르는 담쟁이넝쿨은 키를 키울 것이다
바다의 모국어를 들으며 맨발은 흩어지고
화석이 되어버린 느린 오후의 시간을 삼킨다
소실점을 마주하면 조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통통배에서 바람이 묻어났다
바닷가 창문에 흰 커튼 드리우면
카페 가득 물보라 일고 저녁을 낳는다
어스름 지는 해를 따라 돌아오는 길을 연다
점이지대漸移地帶
머리 깎은 산봉우리 절벽 끝에 섰다
손발 떨어뜨리고 뿌리째 거꾸로 처박힌
옹이눈 꿰뚫고 발밑을 허물며
가장 밝은 안쪽을 보았을까
겹치고 혼재되어 맞물린 사이에서
바위틈을 비집고 힘줄기로 솟아난
초생수初生水 받아들고 비를 기다린다
꽃팔랑나비가 엉겅퀴 목을 꺾어
귀를 세우고 나무 사이를 살피는 동안
도둑잠을 자다 쓰다듬는
햇살에 눈을 뜬다 접힌 길을 펴며
새로운 다리가 되어 지켜나가는
귓바퀴를 돌아 실바람 사이를 다시 걷는다
점이지대에서 바람의 날개를 찾는다
케렌시아querencia를 꿈꾸며
“당신이 가장 믿을 만한 친구는 거울 속에 있다”라는 문구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이미 하나를 선택한 것이다”라는 탈무드의 문장은 자신을 뒤돌아보거나 선택을 미루게 될 때 되새겨보는 말이다.
메타 무의식, 잠재의식보다 더 깊은 무의식의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내적 기준’을 세우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최선에 목적을 두고 미래를 가꾸는 일. 서로의 중심 세계가 다름을 인정하고 좋아하고 의미 있는 일에 집중한다면 겸허히 허락된 경계를 받아들이고 펼쳐지는 세상에 감사하며 나아갈 수 있으리라 본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구체적인 목표를 두고 자신의 환경을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이 무의식을 의식화시키기 위함이고 운명을 바꾸어 나가는 일이라고 했다. 서로 인정하고 관계 회복을 위해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함께 있”으며 서로 맞닿아 삶의 유한성을 누리고 있음을 기억하고자 한다.
케렌시아는 에스파냐어로 ‘투우경기장에서 소가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르는 장소’라는 뜻으로 자신만의 피난처, 또는 안식처를 말한다.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재충전할 수 있는 제3의 공간과 시간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취미 생활이나 산책, 여행 등 좋아하는 일을 통해 위로받고 재충전함으로서 ‘긍정적 재평가’를 할 수 있으며 그 여유로움이 왜곡되지 않는 판단과 공감 능력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한결같다는 것은 변하지 않음이 아니라 수많은 변화마저 사랑할 수 있음을 말한다”라고 했다. 오늘도 바람이 불었고 바람이 보였다. 내일도 바람은 불 것이다. ‘본다’와 ‘보인다’의 차이는 무엇일까?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긍정적인 시선으로 지금, 오늘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바람은 숨결이 되고 감정의 씨앗이 되어 자라나 자신이 생각하는 또 다른 생각들의 본질을 묻고 의미를 바꿀 것이다. 개인의 의지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고 믿기에 바람길에서 하늘을 보며 삶을 항해한다.
우리의 무의식은 생활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항상 새고 있다. 그래서 그냥 보이고 들키고 만다. 또한 무의식적인 태도와 말을 늘 보여주고 표현하고 있으면서도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다 걸어야 바람의 궤적을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삶 속에서 시간의 추를 따라 나와의 대화를 통해 삶을 재해석하고 재창조함으로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고슴도치가 긴 가시로 서로 상처를 입히지 않고도 같이 있을 수 있는 적정거리를 찾듯, 우리도 서로를 찔러 다치지 않을 수 있는 거리, 지켜보며 믿을 수 있는 거리를 기억하면서 각자의 마음에 미래를 두고 더 크고 단단하게 키워나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나만의 케렌시아를 만들어 좋아하는 일을 해나갈 때 가능하며 계속할 수도 있다고 믿으며 우리 모두의 케렌시아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