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3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金口) 주교 학자 기념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39-42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시편 8,5)
명절이 다가오면 종갓집 대가족이 더 그립습니다. 형 누나와 같은 또래 삼촌과 고모의 어머니, 우리 어무이가 시어머니로 각별히 모셨던 벙어리 두번째 친할머니. 큰형인줄 알았던 월남갔다온 사촌형. 우리 어무이 바로 밑 여동생 춘천 이모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함께 살았던 외사촌 형과 동생. 한 동네에 살았던 배다른 여동생과 누나. 사람은 무조건 좋아하시던 '속없는' 우리 어무이 덕분에 명절이 다가오면 더 보고싶고 그리운 사람들입니다.
우리 어무이 사람 좋아하고 사람 복많은 건 분명 외할머니로부터 선물받은 모태신앙 때문입니다.
일주일 내내 몸빼바지 입고 부엌데기로 농사꾼으로 죽으라 일하시다, 주일 아침에는 고운 한복으로 갈아입고, 소중한 사람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을 가슴에 따뜻이 안아주시는 자비로우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을 깨닫게 한 신앙 때문입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다 돌아온 작은 아들을 가슴에 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시는 아버지(루카 15,11-42 참조)를 만나는 기쁨을 깨닫게 한 신앙 때문입니다.
자기자신과 만나는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기쁨을 깨닫게 한 신앙 때문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7-38)
밥집에서의 삶은 육체적으로는 사실 새벽부터 바쁘고 힘듭니다. 그런데 마음은 무지 즐겁고 기쁩니다. 우리 어무이처럼 사람들을 통하여 참 다양하게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