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여행(旅行)
정한모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垂面)의 강(江)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記憶)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절벽(絶壁)
헤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부딪히곤
까무러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하는 화약(火藥) 냄새 소용돌이
전쟁(戰爭)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恐怖)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焦燥)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이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사상계』 153, 1965.11)
[어휘풀이]
-아비규환 : 불교에서의 아비(阿鼻)지옥과 규환(叫喚)지옥으로, 여러 사람이 비참한 지경에 빠져 울부짖는 참상을 비유적으로 이른다.
[작품해설]
이 시는 나비의 여행과 아가의 꿈길을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시킨 다음, 전쟁의 공포와 아가의 꿈을 은유적으로 대조시켜 순수 의식과 휴머니즘에 대한 근원적인 동경을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전 3연의 서사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 시에서 1연은 아가가 하는 꿈 여행의 전 과정을 서사적으로 보여 주는 부분이며, 2연은 아가가 꿈 여행을 떠나 체험한 구체적 내용으로, 시적 화자는 3연에서나 나타난다.
아가는 꿈속에서 ‘하늘하늘’ 날개 짓을 하며, ‘수면의 상을 건너’ 추억 속의 ‘들판’과 상상의 ‘바다’ 위를 즐겁게 놀며 다니지만, 결국에는 ‘절벽’과 ‘미로’에 부딪치곤 놀라 깨어난다. 아가는 밤마다 이러한 꿈 여행을 반복한다. 이렇게 아가의 꿈 여행이 행복한 결말로 끝나지 못하는 까닭은 그가 아비규환의 전쟁을 겪는 악몽을 꾸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인은 소름 끼치는 아가의 꿈 여행과 아가의 순수성을 대조시키는 방법을 통해 전쟁의 비극성을 고발한다.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요, ‘해후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이며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 체험이라는 표현은 바로 비인간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를 상징한다.
3연은 괴로운 꿈 여행에서 돌아와 기진맥진해 하는 아가를 시적 화자가 품에 안고 위로해 주는 내용이다.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라는 마지막 구절에 휴머니즘의 주제 의식이 표출되어 있다.
‘나비의 여행’과 ‘아가의 꿈’은 시인이 추구하는 휴머니즘의 서로 다른 상징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시는 나약하기만 한 나비[아가]의 여행[꿈]을 통해서 부조히한 현실을 고발하고 비인간적 가치와 무질서를 폭로한다. 이를 통해 시인은 자신이 소망하는 휴머니즘의 참모습을 보여 주고자 한다.
[작가소개]
정한모(鄭漢摸)
일모(一茅)
1923년 충청남도 부여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45년 『백맥』에 시 「귀향시편」 발표하여 등단
1972년 제4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73년 『현대시론』 발간
1983년 시선집 『나비의 여행』 발간
1975년 서울대학교 교수
197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84년 한국문화예술원장
1988년 문화공보부장관
1991년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1991년 사망
시집 : 『카오스의 사족(蛇足)』(1958), 『여백을 위한 서정(抒情)』(1959), 『아가의 방』(1970), 『새벽』(1975), 『사랑시편』(1983), 『아가의 방 별사(別詞)』(1983), 『원점에 서서』(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