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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
롬 11:1-6
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롬 11:1-6 / [이스라엘 중의 참선민]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거부하고 버리신 것이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 역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2-3) ㄱ)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선택한 당신의 백성을 버리신 일이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 상기해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일찍이 예언자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제단을 헐어 버렸는가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 고발하면서 그 땅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나 자기 혼자뿐이며, 그들이 자기마저도 죽이려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ㄱ. 시94:14(참조,삼상12:22,왕상19:10,14)) 4) 그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니다. 남아 있는 사람은 너 하나뿐만이 아니다. ㄴ)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사람이 너 말고도 7천 명이나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ㄴ. 왕상19:18) 5)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 전부가 하나님을 떠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선택되어 구원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6) 그러나 그들도 선을 행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값없이 주는 선물이 더 이상 값없이 주는 것이 될 수없기 때문입니다. 일을 해서 얻는 것이라면 선물은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하였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자신의 예와 엘리야 시대의 남은 자 칠천 명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심(1) 바울의 질문은 하나의 답변을 요구하지 않는 수사의문문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를 묻습니다. 이는 언제든지 부정적인 대답이 기대되는 물음을 통해 강한 긍정의 진술을 하는 형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 있게 “그럴 수 없느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94:14)는 말씀의 실례로서 과거에 복음을 거부하고 오히려 성도들을 핍박했던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증거로 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인, 아브라함의 씨, 베냐민 지파는 자신이 확실한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삼중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2-4)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신다는 또 하나의 증거로 엘리야에 대해 기록한 성경내용을 상기시킵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의 눈을 피해 달아나면서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부 바알을 섬기며,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주의 제단을 허물어 버려서 이제 자신 혼자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 19:10, 18). 즉,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처럼 보이는 아합 왕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택한 바 된 칠천 명을 남겨두셨습니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5-6)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부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한 것처럼 보이는 지금의 상황에도, 엘리야 시대처럼,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소수의 남은 사람들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 소수의 남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아 되었습니다.
적용: 주변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회와 성도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며 공격할 때에 낙심하거나 외로움을 느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변에 마귀에게 굴복하지 않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을 남겨두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위로와 용기를 얻고 계속 주의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가정이야말로 축복의 근원이 될 수도 있고 타락과 불의의 온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멸망사가 남긴 교훈 가운데 하나가 도덕불감증과 가정의 파괴였습니다. 로마가정들의 붕괴와 함께 역사가 무너져 가는 그 마지막 황혼을 지켜보면서 한 철학자는 "애국자여 가정을 지키시오."라고 호소했으며, "신이여, 기도하는 가정을 로마에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시오."라는 기도문을 남겼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 설 교 >
체험적인 신앙과 낙관적인 소망
송기성 목사
서양 격언에 “체험은 지혜의 어머니” (Experience is the mother of wisdom.)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지혜는 체험을 통해 축적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지혜도 체험을 통해 확고해집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체험적인 신앙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체험한 이후에 이전에는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뵙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욥42:5).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체험한 이후에 자기 자신의 신앙을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앙인이 되었노라고 하였습니다(롬8:15).
오늘의 본문 로마서 11:1-6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 (God’s mercy on Israel) 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체험적인 신앙을 근거로 그 민족에 대한 낙관적인 소망을 증언하였습니다. 당면한 현실이 아무리 비관적이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체험적인 신앙의 사람에게는 언제나 낙관적인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체험적인 신앙과 낙관적인 소망, 그것이 우리 각자의 고백과 간증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1.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과 10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지적하였습니다. 반면에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되었음을 증언하였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아주 분명하게 자문자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롬11:1)
사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을 결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을 향해 가던 중에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원인이 그가 예수님을 박해하였기 때문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행9:5). 그는 그가 자백한 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였습니다 (고전15:9).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사도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을 짓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근거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미국 애틀랜타에 살고 있는 민수화 성도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1991년 4명의 자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서투른 영어로 작은 사업을 시작해, 자녀들을 다 대학에 보내고 결혼까지 시켰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하던 사업에 법적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결국 아버지와 아버지 사업을 돕던 남동생까지 수감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25년간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던 아버지와 가정에 닥친 시련과 충격은 너무 컸습니다. 가족 모두 믿음으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은 아닌지 의심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QT를 하다가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사43:2) 라는 말씀이 눈과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면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역경의 파도가 우리를 침몰시킬 것만 같지만, 우리는 주님 손만 꼭 붙들고 건너가야 한다. 그럴 때 이 세상 어떤 역경도 우리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며, 아무리 뜨거운 불도 우리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광야 길을 홀로 걷게 하지 않으신다. 외롭고 힘든 곳일수록 우리와 함께 하시고 따뜻하게 우리를 안아 주시는 분이시다. 아픔 가운데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복음’과 복음이 주는 ‘소망’을 소외된 무슬림 미전도 종족에게도 전하고 싶다. 그래서 자녀들과 함께 동아시아에 있는 무슬림 지역으로 단기 선교를 떠나려 한다.” 아멘!
하나님께서 선지자 호세아를 통해서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11: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대하여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언약의 백성에게 신실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이 배은망덕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찌 너를 포기하겠느냐?” (How can I give you up?),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How can I abandon you?) 하시며 그들을 참아 주시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불붙듯 뜨거운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애완동물을 버리거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버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온전히 불붙듯 하는 뜨거운 사랑으로 함께 해 주셔서 물불의 시련과 역경 속에서 체험적인 신앙으로 낙관적인 소망을 갖게 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체험적인 신앙으로 낙관적인 소망을 품고 언제 어디서나 온전히 불붙듯 하는 사랑으로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서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체험에 이어 열왕기상 19장에 기록된 선지자 엘리야의 체험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거듭 강조하였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완악해져서 아합 왕을 따라 우상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렸으며,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였고, 하나님의 제단들을 헐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엘리야까지 잡아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인생 최악의 위기에 몰린 엘리야는 이제 자기 하나만 남았다고 생각하며 불안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그 패역한 이스라엘을 고발하여 심판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또 하나님께 버림을 당했다고 생각되는 백성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엘리야의 짧은 생각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왕상19:4) 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11:5)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은혜로 된 것이지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롬11:6)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을 위하여 은혜로 택하신 자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십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10년간 빈민촌 사역과 노숙자 예배 사역을 하던 김경열(51)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있었던 선교지의 동네 촌장 루카스는 온갖 망나니짓을 하고 다녔습니다. 교회 유치원 선생을 납치해 가려 했으며,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상식을 벗어난 패륜적 행동을 일삼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에이즈에 걸렸습니다. 몇 가지 합병증까지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의 가족이 심방을 요청했습니다. 김 선교사님은 영양제와 고기를 사 들고 방문해 그를 위로하고 소망을 품도록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후 매주 한 번식 정기적으로 방문해 함께 성경을 읽고 하나님이 원하시면 살려 달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뼈와 가죽만 남은 촌장 루카스는 ‘아멘’ 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놀라웁게도 그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피골이 상접했던 그에게 살이 붙고 생기가 돌았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그의 회생을 믿지 못해, 그를 직접 보러 왔습니다. 김경열 선교사님은 <냄새 나는 예수> 라는 제목의 책에서 “오직 그가 회개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이유로 찾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아무리 악한 자라도 회개하고 돌아올 때 은혜를 베푸신다” 고 간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물론 ‘그리스도의 향기’란 우리 내면에서 풍겨 나오는 그것을 말하지만, 생애 동안 소외받던 세리와 죄인들, 길거리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셨던 ‘냄새 나는 예수님’, ‘악취 나는 예수님’의 삶도 본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며 묻고 있습니다.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오렌지족이었던 박윤석씨는 김경열 선교사님의 북콘서트에 참석했다가 너무 큰 감동을 받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지나 남은 자로 돌아온 김 선교사님과 같은 이 땅의 숨겨진 그루터기들처럼 끝까지 최선을 다하며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아멘!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사6:1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완악해진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 성읍이 황폐하게 되고 토지도 황폐하게 되어 가옥에 주민이 없는 (사6:11)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를 남겨 두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은혜로 택하신 남은 자를 통해서 구원 역사를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여 남겨 두신 남은 자의 특징이 있습니다. 남은 자는 소수입니다. 남은 자는 그루터기처럼 남의 눈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은 자는 거룩한 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완악하여져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멸망을 자초하였을 때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소수의 거룩한 그리고 남의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남은 자를 통해서 결코 버리지 않은 자기 백성을 반드시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택함을 받은 남은 자 곧 소수의 거룩한 씨는 성읍와 토지가 황폐해졌을 때 오히려 새로운 싹을 내고 가지를 뻗으며 열매를 맺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서 구원 역사를 이루신다는 체험적인 신앙으로 낙관적인 소망을 품고 열매를 맺는 거룩한 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성경’과 ‘전통’과 ‘이성’과 함께 ‘체험’을 중시했습니다. 그가 비록 모태 신자였으며 경건 훈련을 하고 성경 지식을 쌓았지만 그의 생애와 사역에 있어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이룬 것은 바로 체험을 통해서 였기 때문입니다.
바람직한 신앙은 체험적인 신앙입니다. 체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은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도 낙관적인 소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선지자 이사야는 성읍과 토지가 황폐해질 때에도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며, 은혜로 택한 자를 남겨 두시고 그 거룩한 씨를 통해서 구원 역사를 이루신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은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시며 온전히 불붙듯 한 사랑으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로 택한 자를 남겨 주시고 그 남겨진 거룩한 씨를 반드시 구원하시고 그 그루터기를 통해서 구원 역사를 이루신다는 소망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물불의 시련과 역경 가운데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복음과 복음이 주는 소망을 전하며 살아가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Buffet, just for God!
로마서 11:1-12 / 김동호 목사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것이 매우 위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하다 드디어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게 됩니다.
저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자 교회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되어 환난과 핍박의 상황에서도 감당할 수 없는 부흥을 하게 됩니다. 하루에도 수 천 명씩 회개하고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날마다 구원 얻는 사람의 수가 더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의 생명력을 확인하게 됩니다. 교인들이 성령으로 충만할 때 교회는 생명력을 가지고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고 배울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그로 인해 교회와 교인이 부흥하고 성장하게 될 때 언제나 사탄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초대교회에도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자마자 핍박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시작된 교회의 핍박이 본격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가해지기 시작하자 성도들을 그 핍박으로 인하여 사방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핍박을 통하여 교인들을 흩으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에 붙기 시작한 성령의 불을 끄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의 계산 착오였습니다. 사탄이 초대교회와 교인들을 너무 우습게 보았습니다. 저들은 사탄의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졌으나 전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뭉쳐있을 때에도 강했지만 흩어져 혼자가 되었을 때에도 강했습니다. 때문에 흩어져 혼자가 되었을 때에도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들이 흩어져 가는 곳 마다 성령의 불이 붙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흩어지지 말고 모여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후에는 오히려 모여 있는 것 보다 흩어지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들이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에 모여 있게 하셨고, 막상 저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에는 핍박을 통하여 오히려 저들을 흩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흩음을 통하여 복음의 확산이 이루어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이와 같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와 같은 역사가 우리나라 교회의 역사 안에서 똑같이 재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복음은 남한보다 북한 쪽으로 먼저 들어 왔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부흥과 성장은 북한이 남한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크고 빨랐습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만 옛날 평양과 정주와 선천은 80% 이상이 교인이었으며 그와 같은 곳들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까지 불리었던 곳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부흥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초대교회의 부흥과 똑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특별합니다. 초대교회의 부흥은 오순절 날 성령 충만 함을 받은 후 일어났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부흥도 우리한국교회의 오순절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1907년 대 회개운동 이후 일어났습니다.
1907년 평양에서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부흥회에서 큰 은혜를 받은 길선주 목사님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일어나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죽은 친구의 재산을 정리해 주면서 그 중 얼마를 떼어 먹었다는 사실을 울면서 자복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교인들이 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의 죄를 울며 고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는 눈물바다가 되었고 저녁에 시작한 부흥회는 새벽까지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된 회개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가 전국의 교회가 똑같은 회개의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 때 우리 한국교회는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1907년 대 회개운동이라고 부릅니다. 1907년 대 회개운동 이후 우리 한국 교회는 대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초대교회와 똑같이 날마다 구원 얻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어 1907년 대 부흥운동이라고도 부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배워야만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참된 모습을 갖게 될 때 교회는 언제나 부흥하고 성장하였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였을 때에도 계속해서 성령 충만 함이 계속되어져야만 하는데, 성장이 가져온 열매에 급급하여 회개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게 되면 교회는 부패하게 되어 냄새를 풍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경험을 통하여 부흥과 성장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결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과 결론입니다. 문제는 부흥과 성장에서 생긴 것이 아니고 계속적인 성령충만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교회의 사이즈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이즈와 관계없이 늘 성령의 충만함을 통하여 교회의 건강을 유지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의 사이즈가 작으면 건강할 것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사이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 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에서와 우리 한국교회에서 보여 진 바와 같이 성령충만함을 통하여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순수하게 지키고 있을 때 언제나 부흥과 성장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의 교회가 오순절 날 성령 충만을 통하여 부흥하고 성장하게 되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있었듯이 우리 한국교회도 1907년 대 부흥운동이 있은 후 그에 못지않은 핍박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후 특히 우리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통하여 수많은 순교의 피를 흘려야만 하는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교회에 대한 핍박을 끝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평양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점령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왜정시대 때 신사참배보다 더 심한 박해가 주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이북의 많은 사람들이 남한으로 피난을 내려 올 수밖에 없었는데 사람들은 그냥 자유를 찾아 내려온 것이라고들 이야기 하지만, 그 자유는 그냥 자유가 아니라 신앙의 자유이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내려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섬겼습니다. 예루살렘 핍박 이후 교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던 것과 똑같은 일이 우리 한국교회에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들이 남한으로 내려와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섬긴지 불과 반세기 만에 남한의 교회는 세계선교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성장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남한이 복음화 되면서부터 남한이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예외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언제나 보면 기독교신앙을 가진 개인과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부흥하고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의 중심이 북한에 있었을 때 북한이 경제적으로 남한 보다 월등하다시피 앞서 가고 있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북한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중심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옮겨오게 되었을 때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 남한이 누리고 있는 경제적인 풍성함이 남한 교회의 부흥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남한이 격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의 원인이 우리 남한 교회의 타락과 부패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 남한과 남한교회는 북한과 특히 북한의 교회에 대하여 큰 빚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배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상식으로는 공산화를 통한 핍박이 북한이 아니라 남한에 이루어졌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식과 생각은 사도행전 초대교회 때에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교회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두 번의 경우 모두 성령 충만 함을 받은 교회와 교인들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저들을 통하여 영육간의 복을 세상으로 펼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또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믿는 자의 사명과 축복은 자기 혼자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잠시 동안의 고생과 핍박을 감수하면서라도 남을 잘 살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명을 위하여 우리 크리스천들은 비록 잠시 동안이라고는 하여도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남한의 복음화를 위하여 북한을 영영히 버리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바울이 똑같은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하여 답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핍박을 가하시고 이스라엘을 영영히 버리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하여 바울은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롬 11: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그 땅에 의인 7천명을 남겨 놓으셨으며, 이방의 부흥과 성장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땅에 건강한 영적 시기가 일어나게 되어 드디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 회복 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이 다시 회복 되는 날 세상은 예루살렘의 핍박을 통하여 받은 세상은 그 보다 더 큰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 리요> (롬 11: 11 - 12)
여러분 이 말씀은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남한 교회를 통하여 다시 북한과 북한 교회를 살리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북한과 북한 교회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단호히 ‘그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북한에 북한과 북한을 살릴 의인 7천명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북한에 바알에 무릎을 꿇지 않은 의인 7천을 하나님은 남겨 두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들이 북한 교회 회복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한과 남한 교회의 풍성함이 저들로 하여금 건강한 영적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여 저들이 전보다 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들은 결국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우리 남한 교회와 북한 교회의 덕을 보게 될 것입니다.
통일이 되면 틀림없이 북한은 우리 보다 더 예수를 잘 믿는 나라가 다시 될 것입니다. 우리 남한 교회가 조금만 도와주면 (사실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빚을 갚는 것) 저들은 신속히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일어날 뿐 아니라 오늘 성경의 표현대로 충만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남한 교회는 다시 북한 교회의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저들을 통하여 다시 예수 믿는 것과 교회 섬기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해 북한 교회를 통하여 우리 남한 교회가 새로워 질 것입니다. 건강해 질 것입니다.
북한 교회는 우리 남한 교회를 통하여 살아나고, 우리 남한 교회는 북한 교회를 통하여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남한 교회와 북한 교회가 하나 되어 세상과 세계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루살렘과 같았던 평양을 치신 이유입니다. 잠시 사랑하는 평양을 치심으로 복음이 남한으로 흩어지게 되고 남한이 풍성해짐을 통해 다시 평양을 회복하시고, 평양의 회복을 통하여 남한 교회를 다시 한번 거듭나게 하시고, 남한과 북한의 교회를 통하여 세계와 세상을 축복하시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생각과 같이 예루살렘과 같은 평양이 핍박을 받지 않았다면 북한은 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남한으로 내려 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축복의 순환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이 계속 되어야 할 축복의 순환은 우리 남한 교회의 몫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영적 육적 축복의 빚을 갚아야만 합니다. 북한과 북한 교회에 갚아야만 합니다.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저들을 위하여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기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몫을 나누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많은 선교가 있지만 그 중에 우선순위를 두고 우리가 하여야 선교가 저는 바로 북한선교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에 대해서는 우리가 빚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빚을 갚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몫의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오래 전에 북한 선교에 헌신하고 계시는 남서울 은혜교회의 홍정길 목사님이 통일이 되려면 우리 재산의 1/3은 내 놓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수치가 정확한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만큼의 희생이 있어야만 된다는 것을 역설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말씀을 나름대로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것을 원하신다면 저는 기꺼이 그렇게 할 마음이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3년 후면 2007년이 되는데, 2007년은 앞에서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우리 땅의 오순절 사건이었던 1907년 대 회개운동과 대 부흥운동이 있은 지 꼭 100년이 되는 해 입니다.
2007년에 다시 평양에서 대 회개와 대 부흥의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1907년의 역사는 길선주 목사님에 의하여 촉발이 되었으나, 2007년의 역사는 우리 남한 교회가 촉발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양은 예루살렘과 같은 곳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버리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평양을 찾으실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적인 염려와 회의를 버리고 북한에 투자하고 북한에 선교 해야만 합니다.
오늘 하나님을 위한 뷔페의 메뉴는 ‘북한 선교’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안에 북한선교를 위한 모임이 결성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활발하게 북한선교를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북한선교의 대와 맥을 이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고 헌신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남겨놓은 자들
로마서 11:1-12 / 조상호 목사
EX) 유태인들의 삶의 기준을 엿볼 수 있는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유태인 부인이 백화점에서 코트를 하나 샀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코트 주머니 속에 다이아 반지 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반지는 코트 가게 주인이 코트를 정리하다가 실수로, 팔려고 했던 코트 주머니에 빠뜨린 것이었습니다. 코트를 산 유대인 부인은 다이아 반지를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하여 자기의 아이와 함께 다시 백화점으로 갔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의 아이가 보는 앞에서 주인에게 그 반지를 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옷가게 주인은 너무나도 고마워하고 감사해 하면서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토록 정직하실 수가 있습니까?”그러자 부인은 "나는 유대인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한 후, 자신의 자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이 유태인들은 항상 자기 아이에게 정직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성공하라.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일단 대학에 들어가라. 그 길이 효도하는 길이다" 라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태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태인과 하나님에 대한 긍지를 갖게 합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유태인은 유태인으로 살아야지 어떠한 유혹이 있더라도 유태인임을 저버릴 수는 없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교육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항상 감사를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았다는 자부심을 안고 살아가게 합니다.
1. 복음을 거부한 선택받은 사람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우리가 이미 9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들은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 지금으로부터 4,000여년 전, 그들의 조상이라고 하는 야곱 때에 이미 선택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하는 제사장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막상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메시아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다시 한번 (10:16)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들 대부분은 복음을 순종치 아니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길로부터 멀어져 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14:6)에서 말씀 것처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습니다(행4:12).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데,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로부터 멀어져 간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길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EX) 과거 미국 잭슨 대통령 시절에 법률논쟁이 크게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한 죄수가 대통령의 특별 사면을 받아 교도소 밖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수는 자기의 죄를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대통령의 특사를 거절하고 계속 교도소에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변호사들 간에 유명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한 쪽에서는 '특별사면을 본인이 거절한다 할지라도 대통령의 특사명령에 따라 그 죄수를 교도소 밖으로 내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아무리 대통령의 특사 명령이라 할지라도 본인이 싫으면 별수 없다. 그냥 본인이 원하는 대로 교도소에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랫동안 갑론을박하며 토론 끝에 결국 '본인이 수락해야 대통령의 특사령도 유효하다. 그래서 그 죄수는 본인 원하는 대로 계속해서 교도소에 있게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특별하게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특별사면을 받은 죄수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은혜의 길로부터, 구원의 길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그러면 어느 분들은 이렇게 질문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버리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1절에서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비록 이스라엘백성들이 복음을 불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2. 우리에게 남은 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아직도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그 남은 자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서 유대인중의 유대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오히려 목숨걸고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복음증거를 위해 남겨 놓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엘리야 시대에도 남겨 놓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두운 세대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사람들을 숨겨 놓았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엘리야 선지자가 악한 왕비 이세벨로부터 쫓김을 당할 때, 그의 곁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이세벨의 졸개들이 그의 주위를 완전히 포위하였습니다.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절망의 상태에서 갈멜산 산상에서 거짓 선지자 850명을 보기 좋게 무찔렀던 갈멜산의 챔피온 엘리야도 별수 없었습니다. 그는 절망하였습니다. 죽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엘리야야! 걱정하지 말라. 너를 위하여 거짓 우상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한 7,000명을 남겨 놓았노라" 할렐루야! 이것이 하나님의 작전이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EX) 저도 비록 일천한 목회 경력이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엘리야처럼 정말 죽기를 소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목회가 그렇게 힘들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그 때는 정말 죽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아니 자살해도 천국에 갈수 있다는 보장만 있었다면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주위에 없는 것같이 느껴졌습니다.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심령이 컬컬해서 미칠 것 같았습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에서는 통곡을 하였습니다. 더 이상 버틸 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새벽에 하나님께 떼를 썼습니다. 금요집회가 끝나서 성도들이 다 가고 혼자 남아, 바로 이 강대상 밑에 엎드려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차라리 목숨을 거두셔서 이 고통의 잔을 옮겨 주십시오" 정말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저였습니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금요일 저녁, 그 때도 혼자 부르짖어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지만 나는 변하지 않아. 나는 영원토록 너와 함께 한단다." 저는 이 말씀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후 저의 눈에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남겨 놓은 자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아주 절망의 상태라고 생각했고 아무도 주위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남겨 놓은 분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명 두명 다섯명 우후죽순으로 남은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할렐루야! 결국 하나님께서 남겨 놓은 분들로 인하여 영혼의 갈증이 해소되었고 다시 힘을 얻어 이와 같이 힘있게 다시 주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 가운데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떠나고 혼자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핍박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남겨 놓은 카드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카드는 빅카드로 세상의 카드와 다릅니다. 우리를 위해 남겨 놓은 자들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 카드를 사용하십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남겨 놓은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옆에 계신 분들에게 인사하시겠습니다. "형제님! 자매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돕기 위해 남은 자가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때마다 소수의 사람들을 남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부대보다 소수 정예부대를 활용하시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서 70여명 이상의 가족들을 기근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 그리고 여호수아를 통해서 200만명 이상의 이스라엘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들을 통해서 메뚜기 떼처럼 중다한 미디안과 아말렉의 연합군을 무찔렀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복음이 유럽으로 전해졌습니다. 마르틴 루터를 통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를 통해서 한국 땅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바로 이들이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준비시켜 놓은, 남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특별히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해서 일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구원하십니다.
3. 믿는 우리가 남은 자이다
그러면 오늘날 하나님께서 누구를 남겨 놓으셨습니까? 다시 말해서 누가 남은 자입니까? 5절에서 그 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5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남은 자는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남은 자입니다. 그러면 은혜를 받은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은 자들이요, 또한 하나님의 인류 구원작전을 위해 준비시켜 놓은 남은 자들입니다.
반면에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7절에서 그 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여기에서 '남은 자'들이란 앞에서 말하는 의미의 남은 자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택한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가리킵니다. 즉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손에 굳은살이 박힌 것'처럼 마음에 굳은살이 박히어서 아무리 귀한 말씀을 들려주어도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주어도 전혀 요동이 없습니다. 또 그들은 8절과 9절에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귀에 새기지 못합니다. 찬양을 수없이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다. 또 그들은 밥상, 즉 육적인 것에만 신경을 씁니다. 이 세상에서 살려면 밥상을 받아야 합니다. 밥을 먹어야 삽니다. 그러나 영적인 일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밤낮없이 밥상만 찾는 사람은 그 밥상이 덧이 됩니다. 신령한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밤낮없이 육적인 것만 찾는 사람은 그 밥상이 저주가 됩니다. 한마디로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해져서 영적인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먹는 것, 마시는 것, 즐기는 것에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밥상보다도, 즐기는 것보다도 신령한 것에, 영적인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찬송을 해도 기도를 해도 말씀을 들어도 눈물이 줄줄 흐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 중에 마음이 완악하여 은혜 받지 못하는 분들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보는 신령한 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수의 사람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들을 아직까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은혜를 받지 아니한 사람들을 위해 준비시켜 놓았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복음이 이방사람에게 전해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시기 나게 하는 방법을 통해서 이방사람들에게 전해진 복음이 다시 이스라엘로 전해지도록 했습니다.
EX) 저희 집에 사내 아들이 둘이 있습니다. 큰애와 작은애는 여섯 살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둘째 애가 밥을 잘 먹지 않습니다. 그 때 제가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밥을 먹지 않는 아이 앞에서 큰애에게 맛있는 것을 듬뿍 주면서 한 마디 던집니다. "얘야! 맛있는 것 너 혼자 많이 먹어. 쟤 주지 말고 너 혼자 먹어. 맛있지?" 그러면 그 소리를 듣고 둘째애가 언제 달려왔는지, 재빠르게 달려와서 식탁에 앉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그 맛있는 것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형보다 더 열심히 먹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시기 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 나게 하기 위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전해진 복음이 다시 이스라엘로 전해지도록 우회작전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받고 은혜를 받은 우리를 아직까지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작전도구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악하여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남은 자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죽기를 소원한 엘리야에게 7,000명의 남은 자를 준비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남겨 둔 자들이 있음을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귀한 동역자를 남겨 놓은 줄로 믿습니다. 함께 짐을 지고 갈 친구를 예비하여 놓은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캄캄한 현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남은 자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눈앞에 보이는 밥상만 찾으며 쾌락만 추구하는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완악한 사람들의 남은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크라이스트처치 지역의 교민들과 이 도시의 시민들과 남태평양의 미전도 종족들의 남은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지만, 은혜의 복음을 아직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남은 자의 구원
로마서 11:1-12 / 박조준 목사
오늘 봉독한 로마서 11장까지로 교리적인 부분은 끝이 나고 12장부터는 그리스도인의 생활면 을 취급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구원의 역사에 대해서 말하면서 먼저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예절에 대해서 9장에서 취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까지 생각한 10장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거부로 말 미암아 이 놀라운 복음이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지나간 역사였습니다. 이제 바울의 구원사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일단 버림받은 이스라엘이 회복하게 된다는 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그 첫부분으로 이스라엘이 거부한 것이 결정적이 아님을 밝혔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 자 신의 간증에서 시작하여 엘리야 시대의 남은 자의 신앙을 예로 들어 지금도 이스라엘의 거부는 부분적이요 일시적이지 절대적이 아닌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이스라엘이 회 복될 가능성이 내다보인다고 희망적인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 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구약에 보면 하나님이 그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상이 여러 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가령 사무엘상 12장 2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했습니다. 신명기 31장 6절에는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 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였습니다. 열왕기상 6장 13절에는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시편 99절 14절에는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 기업을 떠나지 아니하시리 로다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부터 그의 택한 백성을 절대로 떠나지 아니하시겠다고 버리지 아 니하시겠다고 거듭 거듭 약속하신 것을 믿는 바울은 확신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피는 물보다 진하다 는 평범하 면서도 뜻깊은 격언이 있습니다만 누가 뭐래도 사도 바울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인 것 은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잠시도 그 민족이 그의 가슴에서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서 바울은 구약 전체에 깔려 있는 택한 백성에 대한 개념을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구약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오늘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이방 여인 이세벨을 왕후로 데려오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하나님만 섬겨야 할 이스라엘 왕이 왕후 이세벨이 가지고 온 이방신 바알신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인 잘 맞아야지요 이거 잘못 맞아 놓으면 고스란히 망합니다. 아무리 한 나라의 왕이라 하지만 그 부인의 말 안들을 수 있어요? 그래서 왕이 여호와를 섬기 는 것보다 바알 우상을 섬기는 일에 기울여지게 되니까 이것 때문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왕에게 아부하는 사람도 생기게 되고 그러다 보니 바알 우상을 섬기 는 사람이 날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요사이도 가만히 보면서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대통령이 불교를 신봉한다 하면 그 밑 에 있는 소위 정부 요인들 그 부인들은 괜히 그 쪽으로 쏠립니다. 하긴 괜히도 아니지요. 그렇 게 윗사람한테 잘 죄어서 그 자리에 오래 붙여 있어 보려는 심산이지요. 군대에서도 지휘관에 따라서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아합 왕 때가 바로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일인데 왕과 왕후가 바알 우상을 섬기게 되니까 그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되어서 집 집마다 거의 바알 우상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꼴이 말이 아니었습 니다. 자,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보시니 한심하기 짝이 없단 말이요. 그래서 3년 반 동안 이나 이스라엘 경내에 비가 내리지 않는 재앙을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스라엘 땅은 메말라서 봄과 가을 소위 이른 비와 늦은 비 밖에 없는 땅인데 3년 이상 비 한 방울 땅에 떨어지지 않게 되니 문자 그대로 땅이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백성들 은 다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형편이 이렇게 되니 한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왕으로서도 여간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왜 이런 어려움이 이 땅에 임했나? 하신 것을 알아보았더니 하나님의 종 엘리야가 한 번 언젠가 저주하는 것처럼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이 땅에 비가 내리지 않게 된 것을 알게 되었습 니다. 그래서 아합 왕은 엘리야를 만나러 찾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소행이 그렇습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온 국민이 도탄 가운데 빠진 것은 생 각지 아니하고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누나 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인간의 양심이 이렇게 되면 큰 일입니다. 전에 요나같은 사람은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고도 그것이 싫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니느웨와는 반대가 되는 다시스로 가는 배의 선가를 주고 탔다가 배 전체 가 심한 풍랑을 만나 어려움을 겪게 되고 싣고 가던 짐을 다 물 속에 던지고 최선을 다해 보았 지만 할 수가 없어서 제비를 뽑는데 요나에게 걸렸습니다. 이때 요나의 말을 들어보세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당신들을 위하여 잔 잔하게 될 것이요. 당신들이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것을 내가 압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자세입니다.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자, 그런데 아합 왕은 하나님을 섬겨아 할 자기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바알 우상을 섬 겼기 때문에 내린 벌인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만 잡아서 없애 버리면 잘 되리라고 생각 했습니다. 이거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눈이 어두워지면 이렇게 되니 쉽습니다. 이렇게 되면 큰 일입니다. 아합 왕이 엘리야를 길에서 만나자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야단을 쳤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이 때 엘리야가 담대히 왕에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여호와의 명령을 버리고 바알을 좇았기 때문 이요. 그러니 이제 더 기다릴 것없이 바알신과 여호와 신과 대결해서 이기는 편으로 좇게 합시 다. 바알 선지 450명, 아세라의 선지 400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시오. 그래서 바알 선지들과 여호와의 선지 엘리야와의 대결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상황을 상 상해 보세요. 우선 숫적으로도 450 바알 선지와 하나님의 종 엘리야 한사람이었습니다. 그 뿐입 니까? 바알 선지자들은 왕과 왕후 이세벨의 후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얼마나 의기 양양한지 모 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아무도 후원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백성들더러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으라 해도 백성들은 경우만 보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아니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알 선지자 와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그들에게 너희는 수가 많으니까 먼저 송아지를 잡아 제단에 놓고 너희 신을 불러 그 송아지를 살라 불로 응답하게 하라. 그래서 바알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을 부르며 바 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고서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아무리 소리쳐도 응답이 없었습니 다.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심지어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해 피를 흘리면서까지 외쳐도 아무 런 소리도 응답도 없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들이 가까이 나 아 올 때 엘리야는 무너진 하나님의 제단을 다시 수축하는데 열두지파를 따라 열두 돌을 가지고 단을 쌓고 도랑을 파고 거기에 물을 붓는데 제물과 나무가 완전히 젖을 때까지 세 번씩 부어 도 랑에 물이 가득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녁 소제를 드릴 때 나아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 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생명 을 내건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가 끝마치자마자 하나님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까지 핥은 듯이 말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때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엎드려 말하기를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힘을 얻어 바알 선지를 하나 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고 기손 시내로 내려가서 다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이 가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서 말 하기를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같이 너를 없애 버리고 말 겠다. 만일 그렇게 아니하면 내가 신들에게 벌을 받을 것이다 고 했습니다. 이쯤되니 엘리야가 그냥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엘리야는 그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도망을 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도망해서 광야 어느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께 억지를 씁니다. 하나님, 이제는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 해 주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조금도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는 너무 지쳐서 로뎀나무 밑에 잠이 들었습니다.
이때 잠자고 있는 엘리야를 천사가 와서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으라 하는 말소리에 깨어보니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어 서 그것을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어서 일어나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해서 다시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얻어 사 십 주야를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 한 굴이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왜 여기 있느냐? 이 때 엘리야의 대답이, 하나님, 제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별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이스라엘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 고 지금 저 혼자 남았는데 저희가 제 생명도 찾아 죽이려고 하고 있어 지금 이곳까지 피하여 왔 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바람과 지진 그리고 불이 지나간 후에 세미한 소리로 낙심되어 연약한 가운 데 빠져 있는 엘리야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엘리야야 너는 지금 죽을 수도 없고 죽어서도 안돼. 그리고 너를 죽일 자도 없어. 왜냐하면 너에게는 큰 사명이 있어. 이 세상에 살아서 할 일이 있어.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 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더구나 지금 네가 생각하기로는 내 사람이 이 땅에 너만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내가 이스라 엘 가운데 7천 사람을 남겼는데 다 그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 추지 아니한 자야. 자 여러분, 이 배경을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 2-5절 말씀을 같이 한 번 읽어보십시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령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 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 였으며 주의 제단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와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여기 엘리야의 말 가운데 나만 남았는데 하는 말을 생각해 보세요. 물론 엘리야는 훌륭한 하 나님의 사람입니다. 불의 선지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상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만 그렇게 열심이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줄로 생각했습니다. 이 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춘 것으로 여겼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혼자 바로 믿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을 송사했다고 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독선적인 사람은 언제나 외롭습니다. 마음에 평화와 기쁨 그리고 사랑이 없어 지기 쉽습니다. 모두가 마귀 자식으로만 보이고 나 혼자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니 까 자연히 고독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어요?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사람이 보는 것이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전 이스라엘이 타락한 것으로 송사했으나 하나님은 남은 자가 7천명에 달한다고 하 였습니다. 성경적인 의미로 보면 7은 완전수 만수(滿數)요 10은 세속적인 만수입니다. 이 두 가 지가 결합한 7천은 많은 수를 의미합니다. 어느 시대이든, 겉으로 볼 때는 모두가 타락해 보이는 때라고 하더라도 경건한 남은 자 는 우 리 인간의 생각보다 많은 법입니다. 그래서 이 남은 자 ( , remnant)의 구원에 대해서 신학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의 대선지, 소선지 할 것 없이 거의 입을 모아 남은 자의 구원을 역설하였고 그때마 다 그들의 영적인 여건을 지적하였습니다. 예레미야 23장 3절에 내가 내 양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하였습니다. 에스겔 1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사람이 거기에 있다고 해도 다 멸망시키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22절에 가보면 그러나 그 가운데 면하는 자가 남아 있어 끌려 나오리니 곧 자녀들이라 그들이 너희에게로 나아오리니 너희가 그 행동과 소위를 보 면 내가 예루살렘에 내린 재앙 곧 그 내린 모든 일에 대하여 너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 하였습 니다. 미가서 2장 12절에 야곱아 내가 정녕히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정녕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 양떼 같게 하며 초장의 양떼 같게 하리니 그들의 인수가 많으므로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며 하였습니다. 스바냐 3장 12-13절에는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 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하였습니다. 특별히 구약의 최대의 선지 이사야가 사명을 받아 이스라엘 앞에 나서려 할 때 하나님은 이스 라엘 백성의 전체적인 완악상을 미리 경고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고 불신의 기간을 물을 때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성 읍과 거민이 전폐할 때까지라고 대답하시면서 그러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셨습니다. 거룩한 그루터기 가 곧 남은 자 렘난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남은 자는 단순한 구약의 인용만은 물론 아닙니다. 이런 구약적 배경에 서서 그가 지향하는 것은 멀리 보이는 미래사였습니다. 바울이 영적인 눈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현재는 불신앙으로 타락한 포로민과 같이 보였습니 다. 그들은 이 영적인 시련기를 통해서 연단된 후 언젠가는 회개하면서 그리스도 앞에 돌아오리 라는 기대가 9-11장까지에 논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남은 자, 동족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 인의 경우만이 아닐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는 어떤 경우이든지 소수의 남은 자에게서 그 진수 를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유혹되기 쉽고 타락하기 쉬운 것입니다. 엘리야를 보세요. 바알신 선지자와 그렇게 담 대하게 대결했고 승리까지 한 후에 이세벨의 말 한 마디에 그만 오금을 못쓰고 도망치고 절망적 인 상태에서 하나님께 억지쓰고 누워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대중은 쉽사리 타락하여 탈선하고 마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나귀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옷을 길에 펴고 대단한 환영을 했습니다. 중심에서 우러나온 환영이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 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는 그들의 입을 통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소리 질렀습 니다. 이것이 대중입니다. 그러나 남은 자 가 있습니다. 남은 최후의 무리에게 생생한 생명력이 보존되는 법입니다. 그 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 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 24:12-13). 우리는 이 말씀을 명심해야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언제나 개인적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을 다해야 하고 스스로 복종해야 하 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단체로 부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하나님만의 비밀 통로가 있습니다. 사람은 그가 어떤 민족의 일원이나 어느 가정의 식구가 되었거나 혹은 자기 조상으로부터 의 와 구원을 상속받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은 나 자신이 결단을 내림으로 구원을 얻 게 되는 것입니다. 선민으로서 한꺼번에 인정된 것은 전체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들의 마음을 바친 각 개인, 하나님께 순복한 사람, 그리고 소위 남은 자들입니다. 남은 자들이란 그 민족 중에서 하나님께 성별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하나 하나가 하나님 앞에서 남은 자의 구원 에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 기도합시다.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엘리야같이 불의 선지자도 나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자기 혼자 만 바로 믿고 바로 산다는 독선적인 자세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구원은 은혜입니 다. 사람의 눈으로 불 수 없는 하나님만 아시는 남은 자 가 있습니다. 그들이 이 땅의 그루터기 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이 땅의 그루터기가 됩시다.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
민병석 목사
서 론 : 바울이 말한 10장까지의 논증을 들으면 큰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이 증거한 말씀으로 비취어 본다면 어느 면으로 이스라엘은 복음으로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들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게도 이방인들처럼 복음적인 소망이 있다고 단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은 이스라엘에게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라고 말한 바울의 자기백성이란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정한 영적 이스라엘을 의미해 주는 말이 아닙니다. 육적으로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1)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자손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많은 민족가운데서 유독 그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선택임으로 중요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살아오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율법을 받았고 그들에게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주셨다는 사실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인류의 메시야가 그들의 혈통에서 태어나신 사실 역시 크나큰 축복입니다.
(2) 그러나 이 같은 이스라엘의 택하심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택하심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태어난 육신의 자녀가 자녀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롬9:8). 이스라엘이 복된 것은 이방인들에게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 없는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같은 특권적인 민족적 우월성을 스스로 버리고 육신적인 자손의 위치에 머무르는 것으로 만족해 왔습니다. 이 일이 이스라엘이 복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3)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자신의 신분을 밝힌 것은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버리셨다면 자기도 그의 백성인데 어찌하여 사도의 직분까지 주셔서 복음의 일꾼으로 삼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고 말한 것은 그러면 이스라엘 중에는 복음으로 구원받을 자가 전혀 없다는 말이냐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자기 백성들이기 때문에 특별한 배려를 할 것이란 말이 아닙니다.
(4) 바울은 다시 이 사실을 역사적으로 거슬려 올라가 엘리야 시대에 있었던 사실에서 증거 했습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과 이세벨에 의하여 그의 생명이 심히 위태한 처지에 놓여 있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송사 하는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끓지 아니한 사람 7천을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보기엔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7천명이나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숨겨 두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해 주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 중에 복음을 따라 구원을 얻을 백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에도 남겨두신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
바울은 5절에서 이 남겨 두신 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1)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은혜로 택하심을 따랐다”는 말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이스라엘의 택하심은 은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따라 태어난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건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은혜로 말미암은 택하심이 아닙니다. 이방인이건 이스라엘이건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택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이스라엘의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이스라엘의 선택을 구원의 선택인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도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를 두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다 불순종하는 것 같고 다 복음을 거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은혜로 하나님의 선태 받은 사람들이 남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이 같은 일은 은혜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행위로 보아서는 구원 얻을 자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10장에서 밝혀 준대로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리라”고 했습니다(롬10:2,3). 이 같은 그들은 마땅히 복음에서 떨어질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그 가운데도 구원받을 그의 백성들을 선택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바울이 6절에서 행위로 말미암지 않았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택하심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기 때문이 아니란 것입니다. 다른 한가지는 그들이 또한 율법을 지키는 대가도 아니란 것입니다. 만약 육신적인 어떤 조건이 선택의 기준이 될 수 있다면 이는 결코 은혜일 수가 없습니다.
(4) 은혜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을 말합니다. 은혜엔 인종이나 지식이나 학식이나 빈부나 사회적 신분에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 생명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들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의 역사에 속합니다.
결 론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모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입장에 있었으면서도 복음을 거슬림으로 구원의 은혜에서 떨어진 사실에 대하여 심히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의 많은 수효가 복음으로 돌아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그 복음을 거역하는 사실에 대하여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절망적이 아님을 알고 이스라엘로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간절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게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는 계시를 받고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남은 자, 잃은 양을 찾아야 할 사명에 불탔습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습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 바울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아 있는 사람
조재호 목사
시간을 나타내는 말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입니다. 크로노스는 시계가 가르쳐 주는 시간으로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시간이 흘러 오늘은 2003년 1월 26일입니다. 한 시간 한 시간, 하루 하루가 흘러 1년 365일이 지나가는데 이런 시간이 크로노스입니다. 크로노스는 누구에게나 동일하고 공평하며 어린이, 청년, 장년, 노년, 부자나 가난한 자, 한국인이나 외국인이나, 다이아몬드 박힌 좋은 시계 차고 다니는 사람이나 보잘것없는 만 원짜리 시계를 찬 사람이나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다릅니다. 카이로스는 의미 있는 사건으로서의 시간을 말합니다. 성경은 카이로스를 말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이것은 하나님의 때인 카이로스를 말합니다.
올 한해가 무의미하게 시간만 흘려보내는 그런 한해가 아니라, 의미 있고 복된 사건들을 많이 만나는 귀한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로 “~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둘째 주 설교 제목은 복 있는 사람, 셋째 주 설교 제목은 심지가 견고한 사람, 오늘 설교 제목은 남은 사람, 다음 주 설교 제목은 양 같은 사람, 그 다음주는 멋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나눈 대로, ‘올해 복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심지가 견고한 사람이 되시기를’,‘하나님 앞에서 남은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남은 사람이란 무엇이고 누구를 말합니까?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5)
2차대전 중 히틀러의 만행으로 유럽에 거주하는 유대인 575만 명이 죽었습니다. 1939년에 독일군이 폴란드 바르샤바를 침공해 수십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끌고 갔습니다. 영화 “피아니스트”를 보면 두 부모, 두 아들, 두 딸을 가진 한 유대 가정이 참혹한 현실을 맞게 됩니다. 결국에는 피아노를 잘 치는 맏아들만 살아남고 부모와 남동생, 두 여동생은 모두 수용소로 끌려가 죽고 맙니다. 추위와 굶주림, 죽음의 공포 속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한 맏아들은 천재 피아니스트인 스필먼입니다. 그는 독일군이 점령한 바르샤바 한 복판에서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살아남은 그가 비인간적인 만행, 죽음의 공포 속에서 인생의 희망을 증언합니다.
신구약 성경에는 남은 사람이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고 일하시는 아주 중요한 방법입니다.
사람의 관심분야는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야생의 동물에게, 어떤 사람은 곤충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식물에 관심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하늘의 별에, 어떤 사람은 증권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분야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말씀을 남겨 두시고 은혜를 남겨 주시고 하나님이 필요하셔서 우리 자신을 남겨 두십니다. 하나님이 남겨 두신 사람이 남은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가 남겨 두신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이 남겨 두신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남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1. 남은 사람이란 하나님께 인정받고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누구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아주 행복한 일입니다.
최근에 가족들하고 난생 처음 노래방에 갔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노래를 다 하고 나니까 화면에 평가가 나오는데 “대단히 잘 하셨습니다. 훌륭한 가수입니다. 완벽합니다”라는 평가가 나오니까 기계가 기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지만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인정받지 못하고 버림받는 사람입니다.
아내된 사람은 남편에게 인정을 받아야 행복하고 남편된 사람은 아내에게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인정해야 합니다. 남편을 인정하십시오. 아내를 인정하십시오. 자녀를 인정하십시오. 다른 사람, 동역자를 인정하십시오. 인정받는 사람은 살맛이 나고, 행복하고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기계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고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도 필요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으시고 남이 나를 찾는 인생, 하나님과 여러 사람에게 귀하다고 인정받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남은 사람이란 하나님이 필요하셔서 남겨둔 사람입니다.
분열왕국 북 이스라엘에 아합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알 우상을 음란하게 숭배하는 시돈왕의 딸 이세벨을 왕후로 맞아 들였습니다. 이 여자의 사악한 영향력이 얼마나 심했던지 한 손엔 칼, 한 손엔 우상을 들고는 남편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전국을 강타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가뭄이 극심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아합왕에게 ‘바알을 섬기는 가짜 선지자 450명과 이세라를 섬기는 가짜 선지자 400명 모두를 호렙산에 불러 모으라‘고 영적 대결을 신청했습니다. ‘그들이 찾는 우상이 진짜 하나님이신가? 나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신가?’ 대결하는 것입니다. 850명이 제물을 잡고 우상을 부르고 하루 종일 날뛰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850명이 지쳐있을 때, 저녁 무렵 엘리야 혼자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왕상18:36)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을 적시고 온 땅에는 비가 내리고, 가짜 선지자를 모두 죽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이 “내가 엘리야를 죽이리라” 결심하고 특공대를 조직했습니다. 갈멜산에서 도망한 엘리야는 브엘세바 광야로 가서 기진맥진 한 채 하나님께 푸념 반, 하소연 반. 기도합니다.
“악한 여자 손에 하나님의 일군들이 다 죽고, 이제 저 혼자만 남았습니다. 저도 죽여주십시오” 그러자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너 혼자만 남은 것이 아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 아니한 7천명을 남겨 놓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가 혼자뿐이라고 투덜거렸을 때, 하나님은 남겨 놓은 사람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믿음의 사람을 남겨 놓으십니다. 하나님은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도 어둠을 밝힐 불씨를 남겨 놓으십니다. 불의의 세상 가운데서도 소금과 같은 사람을 남겨 놓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우상에 무릎 꿇지 않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해서 남겨 놓으신 사람으로 분류되십시오. 하나님의 손에서 구분되기를 열망하십시오. 하나님의 눈에 잘 들기를 열망하십시오. 올해가 그런 한해 되기를 바랍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차지하느니라”
3. 남은 사람이란 하나님이 어딘가에 필요하셔서 쓰시려고 남겨놓으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곳에 필요한 사람을 구별하십니다.
어느 남자 집사님과 식사 대화 중, 그 분이 조금씩 생기는 돈을 아내 몰래 적금을 들고 있다고 했습니다. 2-3년 정도 모으면 1-2백만원 만들어지는데 그것을 가지고 아내 생일 선물, 아이들 졸업 선물, 가족 여행경비로 사용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 집사님은 1등 남편. 착한 아빠입니다.
저도 신혼 초에 아내 모르게 비자금 만들다가 그만 들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비자금을 한푼도 못쓰고 모두 아내에게 바쳤습니다.
착한 남편이 필요한 곳에 쓰기 위해서 모아 놓은 돈이 얼마나 귀한 돈입니까? 넉넉하지 못한 월급으로 살아가는 아내가 꼭 필요한 곳에 쓰기 위해서 다른 봉투에 남겨놓은 돈이 얼마나 귀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하셔서 필요한 곳에 쓰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사명을 자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아내 그리고 여섯 가족을 방주에 남겨 놓으셨습니다. 홍수 나기 전에 노아에게 주어진 노아의 사명은 따라 어떤 오해나 빈정거림이 있어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이 주신 설계도대로 방주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홍수가 난 다음, 노아의 사명은 방주 안에 있는 동식물을 잘 보호하는 것이고, 마른 땅에 잘 정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여덟 가족을 쓰기 위해 남겨 놓으셨습니다.
올해는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여러분이 관계하는 곳에서, 여러분이 일하는 곳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축복의 인생이 되십시오. 인정받는 사람, 인정받아 필요한 사람, 필요해서 쓰임 받는 사람,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