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도 걸었다. 다리가 아프게 걸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에게 묻는다.
'왜 걷느냐' 그 질문에 어떠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왜 걷는가. 길이 내 앞에 있기 때문에? 그건 대답이 아닌 것 같고
시간이 많이 남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다.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나는요, 갈 곳도 없고 심심해서 나왔죠 / 하지만 찾고 싶은 사람 있어요"라는
이문세의 '오늘 하루'에 나오는 노랫말처럼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걷는가?
"나는 시간이나 돈을 좇은 것이 아니라 삶을 좇았다.
여기서 삶이란 건강 지상주의자가 말하는 딱한 의미의 삶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건강은 완벽하였으며, 나는 단련된 운동선수였다.
여기서 삶이란 좀 더 참된 의미, 좀 더 넓은 의미, 좀 더 달콤한 의미의 삶으로서
유감스러운 사회의 장벽너머에서 살아갈 때 느끼는 상쾌한 기쁨,
우울한 벽을 넘어 생동하는 상쾌한 기쁨, 완벽한 육체와
깨어 있는 정신으로 살아갈 때 느끼는 상쾌한 기쁨을 의미한다.
나는 미국인으로서 우리나라를 잘 모른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과거에 나는 우리나라를 잘 몰랐고, 지금도 대부분의 미국인은 잘 모른다."
/루미스(C.F lymmis)가 <대륙 횡단 도보 여행>에서 한 말이다.
나는 걸으면서 상쾌함 보다 나 자신을 위한 고독함을 더 즐기지만
내가 살아 있다는 것, 내 영혼이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느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 영혼이 자꾸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느끼면서 즐긴 그만큼 고통스럽다.
그건 항상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이 반 반인 것이 세상 이치니까
어쨌든 산이고, 강이고, 길이고, 이 세상을 걷는다 는 것은 나를 아는 지름길이자,
나를 찾아가는 깨달음의 길이자 이 세상을 알아 가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북학의>를 지은 초정 박제가(朴齊家)의〈묘향산소기(妙香山小記)〉에서
산수 유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무릇 유람이란 흥치(興致)를 위주로 하나니,
노는 것에 날을 헤아리지 않고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머물며,
나를 알아주는 벗과 함께 마음에 맞는 곳을 찾을 뿐이다.
저 어지러이 떠들썩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대저 속된 자들은 선방에서 기생을 끼고 시냇가에서 풍악을 베푸니,
꽃 아래서 향을 사르고 차 마시는 데 과일을 두는 격이라 하겠다.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물었다.
"산속에서 풍악을 들으니 어떻습니까?"
"내 귀는 다만 물소리와 스님이 낙엽 밟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오."
지금도 절집 아래 계곡에서 고기를 굽고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그 당시 숭유억불정책이 판을 치는 나라에서 오죽했겠는가?
나 역시 박제가 선생과 같은 여정을 추구했고,
그래서 조용히 떠났다가 조용히 돌아오는 여행이 가장 좋은 여행이라 생각한다.
길에서 만난 모든 풍경들을 마음속에 가득 채우고 돌아와
가끔씩 추억의 서랍에서 꺼내어 다시 한번 음미하는 여정, 그것이 바로 내가 추구하고 그리는 여정이다.
하지만 마음속에 가장 오래도록 간직되는 편안한 여정은 같이 있으면 편한 몇몇 지인과 함께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해찰도 하고, 가끔씩은 아름다운 정자에 올라한 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담소를 좋아한다.
그러한 순간이 내 인생을 살찌우고 정신이 명료해지는 여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왕헌지(王獻之)가 말하였다.
"산 그림자 진 길을 따라 걸어가노라면 산천의 경치가 절로 아름다운 빛을 발산하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경치 구경하기에도 겨를이 없게 만드네.
가을이나 겨울 같은 때엔 더더욱 형언하기 어려운 기이한 경치가 펼쳐지지." <세설선어>에 실린 글이다.
또 당나라 때 문장가인 당인(唐寅)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봄 산은 산뜻하고, 여름 산은 물방울이 듣는 듯하고, 가을 산은 수척해 보이고, 겨울 산은 싸늘해 보인다."
그렇다. 사시사철이 다른 우리나라의 산은 어느 계절에 가느냐에 따라
이전과 다른 풍경을 보여주면서 저마다 다른 느낌을 갖도록 해주는 마력이 있다.
그래서 어느 계절이건 답사를 가서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미를 제대로 느끼고 못 느끼는 것은,
그 또한 그곳으로 들어가는 사람 개개인의 몫이리라.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다'라는 키츠의 시 구절과 같이
이 땅 구석구석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나무와 풀,
그리고 형형색색의 꽃들이 지금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며 어서 찾아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장유(長孺) 서익손(徐益孫)이 말하였다.
"내게 눈도 있고 발도 있으므로 내가 갈 수 있는 곳에 경치 좋은 산천이 있으면 내가 즉시 간다.
그러면 내가 바로 이 경치 좋은 산천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명세설선어>에 실린 글과 같이 산천은 누구의 것이 아닌 산천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것이다.
'산천을 걷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바꾸어 말하면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산천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
옛 사대부들의 산천 유람관이다.
집을 나서는 순간 펼쳐지는 모든 풍경이 한 페이지의 잘 쓰인 책이라는 말이다.
가다 가 만나는 풍경을 마음속에 스케치하고 담아 두기만 하면 된다.
길이 곧 도서관이고,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길 위에 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 사물, 그 모든 것들이 다 나의 스승이다.
'걸으면서 배운다.'
첫댓글 길에서 만나는 사람, 사물, 그 모든것이 다 나의 스승이다
걸으면서 배운다.
많이 걷다보면
저절로 이 말에 공감하게 되지요,,,
돌아보니 작년 한 해도
참 많이 걸었습니다
올해는 남쪽으로
내려가 걸을 계획을
가지고 있지요^^
길에 대한 단상
잘 보고 갑니다~걷자님 ^^
'길에서 자유를'.....한때 한참 걸을 때 배낭에 매달고 다니 던 문구였습니다
지나고 보니...자유를 원 없이 만끽 한 발 걸음 이였지만
길에서 수많은 경험과 지식을 얻었다는 게 더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남해 피요르드식 해안들은 볼 것이 너무 도 많은 아름다운 곳....
어디로 발 걸음을 하시던 항상 응원합니다.....^^
처음 길 위에서의 걸음은
완주라는 목표로 여유 없이
조급한 마음으로 걸었던 거 같네요.
하지만 요즘 걸으면서
새삼 느끼는 점은 걸었던 길이
다른 계절에 가면
또 새롭게 보이고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으면서 마음의 여유도
생기더군요.
산천의 풍경을 감상하며 걷는게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낍니다.
좋은 책이 어린아이의
인생을 바꾼다는 말이 있듯이
요즘 주말에 길을 걸으면서 느끼는 건
"걸으면서 인생을 배운다" 입니다~
걷자님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예전에 길도 제대로 없던 우리나라 등 줄기 백두대간을 미친(?) 지인들 몇 명 과
하던 일 모든 걸 잠시 멈추고 산에서 보급 받으면서 먹고 자며....
47일 동안 거지(?) 처럼 걸었던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완주 후...진부령에서 울면서 다시는 그 길은 쳐다 보지도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블루님 말씀 처럼 또 다른 계절을 느끼고 싶은 유혹에 빠져 들어
인간은 망각의 동물 인 냥....또 다시 구간 별로 걷고 걷다 보니 10년 넘게 대간 길을 걷기도 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위로하고 다독이면서 걷는 데는 길 만큼 좋은 게 없더군요..
걷는 모습에 흐트러짐 없이 단단하게 걷는 블루님 모습을 보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그 발 걸음에 화이팅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