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매출이 675억원에 불과하지만 '한국인이 주인인 다국적 제약기업'을 표방하며 일찌감치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섰을 뿐 아니라,중국 연변지역 현지의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선발해 장학금을 주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과학벤처중소기업부 기자들이 20일 만난 강덕영 한국유나이티드제약 사장(60) 역시 독특한 캐릭터를 가졌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자 해박한 역사 지식을 가진 그는 간혹 무신론자들로부터는 '광신도',기독교 신자들로부터는 '이단'이라는 억울한 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가 매달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개최하는 '작은 음악회'는 제약업계뿐 아니라 의사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다.
강 사장 스스로도 "제약업계에서 워낙에 '돈키호테'로 소문이 나 있어 별로 친한 사람이 없다"고 말할 정도다.
강 사장과 기자들의 '만남'은 'CEO의 세상사는 이야기' 코너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주인공의 자택에서 이뤄졌다.
강 사장의 집은 총 300평 중 180평 정도가 '한국 유타이티드제약 문화센터'로 쓰이고 있었다.
4시간여에 걸친 대화는 문화센터의 콘서트 룸에서 시작해 정원에서 끝이 났다.
-벽에 걸린 액자에 '강하고 담대하라'고 쓰여져 있는데,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우리 회사의 기본 정신이랑 통합니다.말하자면 '불굴의 개척정신'이지요.직원들에게 항상 '인 스파이트 오브(in spite of)'정신을 강조합니다.'무엇때문에 못한다'고 하지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낸다'는 생각으로 일하라는 뜻이지요."
-휴가철이 다 끝나가는데 어딜 다녀 오셨나요.
"가족들과 함께 괌에 갔다 왔습니다.수영을 잘 못하니깐 첨벙거리다가 왔어요."
-수영을 아주 못하시나요.
"옛날엔 조금 했는데,나이가 드니 물에 들어가면 쥐가 나서 겁이 나요."
-'강하고 담대하라'라는 회사의 정신이랑 안 어울리는 것같은데요.
"그렇게 되나요(웃음).뭐 괜히 쓸데 없는데 용감해서 몸 버릴 필요 있나요.강하고 담대하다가 빠져 죽으면 건져줄 사람도 없잖아요."
#"떡대 좋아 중동고서도 무시 안당해"
-올해 환갑을 맞았는데도 피부가 참 고운 편입니다.어렸을 때 화상을 크게 입었다고 말하던데 흉터 하나 없네요.
"4살때 6·25가 터졌어요.당시 아버지께서 학생복 만드는 일을 하셨지요. 하루는 어머니께서 직원들에게 줄 저녁식사로 커다란 가마솥에 호박죽을 끓이고 있었는데,제가 그만 거기에 빠져버린 겁니다. 온몸에 극심한 화상을 입어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지요."
-정말 큰일 날뻔 했네요.
"결국 가족들은 피난 가는 걸 포기했습니다.어머니가 독실한 신앙인이었는데,밤샘 기도를 시작하셨지요.그리고 약이 없어 된장도 바르고 마당에 심어놓은 옥잠화 잎으로 치료를 했어요.그런데 신기하게 3개월 정도가 지나자 깨끗이 완치가 된겁니다.그것도 흉터 하나 없이."
-놀랍네요.어느 쪽이 완치 효과를 냈다고 보시나요.
"글쎄요.나중에 알아보니 옥잠화 잎이 화상을 치료하는 효과가 없다는 건 확실한 것 같아요.그렇게 보면 기도가 힘을 발휘한 것 같기도 하고¡@."
-프로필을 보니 1965년에 '주먹'으로 더 유명한 중동고를 졸업했던데요.
"그래요.제가 다닐 때만 해도 중동고 하면 '주먹'으로 유명했지요.사실 학교 모자만 쓰고 나가도 유명한 '동네 깡패'들도 친한 척 하던 시절이었어요.당시 경복고에도 힘좀 쓰는 친구들이 많았는데,이들도 운동화를 꺾은 채 질질 끌고 지나가다 우리학교 앞에만 오면 신발을 바로 신고 지나갈 정도였지요."
-지금도 어깨가 딱 벌어질 정도로 몸이 좋은데, 당시 사장님도 '한싸움' 해보셨나요.
"중동고는 모두가 싸움을 잘 하니 오히려 학교내에선 서로 싸우지를 않았어요.나는 '범생이계열'에 속해서 싸움을 거의 안했지만 '떡대'(덩치)가 좋아서 반에서 랭킹 10위권 안에는 들었지 싶어요.중동에서 10위 안이면 정말 대단한 거예요."
-중동고가 선후배간 의리가 대단하다면서요.
"제약회사 영업사원 시절 병원에 약을 팔러 갔더니 의사가 중동고 후배였어요.그 친구가 '아,선배님 아니십니까.학교다닐 땐 꼼짝도 못했는데 약팔러 오셨네요' 하더군요.(웃음)"
#80년대 초 국보위 끌려가 죽도록 맞아
-다국적 제약사 산도스 영업사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원래 제약업에 관심이 있었나요.
"그건 아닙니다.군복무 후 1971년에 사회에 나오니 취직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어요.이력서를 20통 준비해서 사람 뽑는다는 데가 있으면 무조건 지원했어요.그래서 겨우 취직된 곳이 스위스계 다국적 제약사 산도스였어요."
-만약 직장을 골라서 갈 수 있었다면 어디에 들어가고 싶으셨나요.
"나도 사실 여러분들처럼 기자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그 당시 젊은 사람들은 신문사나 한국은행에 들어가는 게 꿈이었으니까."
-영업도 체질이 있다던데 사장님은 어떠셨나요.
"지금은 영업사원에 대한 인식이 좋지만,그 당시에는 회사내에서도 '판매원','외무사원'이라고 불리며 장가 가기조차 힘든 직업으로 통했어요.처음에는 가방들고 다니다가 우연히 동창생이라도 만나면 부끄러워질 때가 많았죠.남에게 부탁하는 직업이라 비굴함을 느낄때도 있었고.그래도 천직이라 생각하고 한 달에 한 번씩 구두 뒷굽을 갈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어요."
-제약회사 영업사원을 하다보면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던데요.
"산부인과 제품이 있어서 부산 침례병원을 갔었는데,몇 번을 찾아가도 의사가 안 만나주는거예요.한번은 하도 안만나줘서 다짜고짜 수술방에 쳐들어 갔는데,산모가 애를 낳고 있더군요.순간 당황했는데,이 양반도 웃긴게 나더러 그냥 들어오라는 거예요."
-남의 부인이 애 낳는 장면을 목격한 셈이네요.
"그 의사가 웃으면서 '나도 강씨지만,니 고집도 참 지독하구나'라고 하더군요.결국 제품을 사줬어요.'강씨 고집'으로 끝장 낸거지."
-월급쟁이 시절에 겪은 가장 힘들었던 경험을 꼽는다면 뭐가 기억나세요.
"80년대 초에 전두환씨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자마자 기업의 비리조사를 대대적으로 한적이 있었어요.제약회사 차례가 됐을 때 내가 제일 영업 잘하는 명단에 들어 있었는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끌려갔지요.당시 영업차장이었는데 판촉비 준 거 다 불라고 하더군요.의자밖에 없는 2평짜리 방에서 엄청나게 맞았어요.어떤 회사 영업사원은 하도 맞아서 미쳐버렸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정말 무시무시한 경험을 하셨네요.
"어떤 제약회사에서 끌려온 사람은 '내가 부산고 나오고 서울대 약대를 나왔는데 거짓말 하겠냐'며 버텼다고 하더군요.그랬더니 조사관이 '야 임마. 나는 중학교 나와서 계급이 준위밖에 안된다'고 하면서 엄청 때렸다고 하더군요.난 그냥 조사관한테 솔직하게 하소연 했어요.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장교 제대하고 취직할데가 없어 영업사원으로 들어왔다고.또 여기서 모든 것 불면 직장에서 쫓겨날 것이고,얘기 안하면 맞아죽을텐데 나도 답답해 죽겠다고.그랬더니 그 사람도 웃더군.결국 회사에 누를 끼치지 않고 풀려나서 회사 돌아가 의리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요."
#사업철칙 "좌우간 배신은 안 한다"
-다소 식상하지만 창업자들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질문인데요.자기 사업을 하기로 결심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해외 출장을 자주 다녔는데,각국의 산도스 영업사원 출신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독립해 수입도매상을 하거나 관련 분야에서 독자적 영역을 개척하고 있더군요.남들보다 승진도 빠르고 안정된 상태였지만 독립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어요."
-샐러리맨이 창업하면 실패확률이 훨씬 높은데 자신감이 컸었던 모양이죠.
"81년 창업하기 전에 '아,이정도면 해볼만한 실력이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그런데 창업해서 성공할 확률이 1%정도 밖에 안된다고 들었어요.난 1%안에 들었으니 운이 좋았던 거지."
-사업하며 위기도 많이 겪었을 듯 싶은데 최악의 경우도 맞아 보셨나요.
"사업 시작한지 한 6∼7년 정도 됐을때 같은데,부도가 별거 아니더군요.은행에서 돈 빌려 쓴거 매달 갚고 있는데,들어온 어음을 할인해서 갚는데 돈이 모자라더군요.그래서 부도위기에 몰린적 있어요."
-아직 사업을 하고 계시니 부도는 면했을 것같은데 어떻게 극복했나요.
"방법이 있나요.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수 밖에 없지."
-이번에도 '기도의 힘'인가요.기도 한다고 없는 돈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한참 기도를 하는데 새벽 3시쯤 되니깐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나도 깜짝 놀랄 아이디어였죠.당시만 해도 은행가서 대출 받으면 그중 반을 적금을 들어야 했어요.일명 '꺽기'라고들 하죠.그래서 은행 지점장을 찾아가서 '예대상계'를 해달라고 했죠.우리 회사가 그 은행에 가지고 있던 예금이랑 대출을 상쇄시켜서 은행 이자를 안갚은 거죠."
-은행에서 순순히 받아주던가요.
"처음에는 해주고 싶은데 규정상 못해준다고 하더군요.마침 갓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이 은행들에 이자 못 갚는 기업들 예대상계로 해결해 주라고 공문을 내려보냈어요.그러니깐 바로 해결해 주더군요."
-한국유나이티드제약은 회사 규모에 비해 해외 매출 비중이 높습니다.
"글로벌화가 안되면 먹고 살수가 없습니다.전체 시장이 100%라면 99%가 바깥에 있어요.한국은 1%밖에 안되요.그 1%만 바라보면서 우물쭈물 하다간 죽습니다."(한국유나이티드제약은 미국,베트남,이집트에 현지 공장을 갖고 있고 세계 40개국에 의약품을 수출하고 있다.)
-글로벌 경영을 말씀하시니 세계경영을 주창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연상하게 되는데요.
"김우중 회장은 엘리베이터로 따지면 30층정도에 올라가 있던 사람입니다.30층에서 내려다 보니깐 할일이 많고,그 밑이 전부 돈으로 보이는 겁니다.나는 기껏해야 1,2층 정도에 올라가 있습니다.그 밑에 있는 돈만 보이는 거죠."
-대우그룹의 해체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을 것같은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김우중 회장 같은 사람을 '죽인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예요.아까운 사람이지요.대우가 망하는 바람에 한국의 세계화가 2~3년은 후퇴한 것 같아요."
-사업하면서 세운 철칙 같은게 있나요.
"좌우간 배신은 안한다.그런 정신이 있어요."
-기업인이 의리 너무 지키면 솔직히 정도를 걷기 힘들지 않습니까.
"정도랑 의리는 조금 다르죠.사업을 하다보면 원칙대로 딱 해서 안될때도 있습니다.그럴때는 비즈니스가 되는 쪽으로 합니다.그러나 나를 도와준 사람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습니다.물론 기업인에게 투명하고 정직한 것도 중요합니다."
-'배신'이라는 말은 혹시 경험을 해 본적이 있어서 하는 말인가요.
"많죠.한번은 직원 한명이 회사 기밀을 다 아니깐 5억원을 달라고 협박 하더군요.물론 안들어줬죠.그랬더니 검찰에 고발하더군요.이 친구 사촌형이 당시 검찰 간부였다고 하데요.
-검찰 조사를 받았으면 고생을 보통한게 아니었을텐데요.
"그런데 아무리 조사해도 아무것도 안나오니깐 검사가 '2억 주고 해결하라'고 하더군요.'내가 왜 그래야 하냐'며 버텼죠.결국 그 친구는 별 소득 없이 회사에서 짤렸어요.재밌는건 이 친구가 우리 회사 그만두고 다른 회사에 갔는데,그 회사에서 전화가 왔어요.이 친구가 또 5억 달라고 하는데 어떻해야 하냐고."
-아까도 언급했지만 보통 고집이 아닌 듯한데 혹시 고집때문에 손해본 적은 없었나요.
"반대 경우는 있습니다.2000년 초반에 세무조사 받은적이 있어요.세무서 직원들이 한달을 넘게 뒤져도 아무것도 안나오니깐 '대충 (추징금)얼마 내고 마시죠'하더군요.'그걸 내가 왜 내냐'며 버텼어요.그랬더니 이놈들이 '모범납세인상'을 주더군요.탈세는 못 찾았으니 그걸로라도 뭔가 실적을 올렸다는 걸 보여줘야 했나봐요."
-부인과는 어떻게 만났나요.
"대학 4학년때 YMCA가 대구에서 개최한 하계 수련회 가서 만났어요.나는 서울에서,와이프는 부산에 살고 있을때였죠"
-첫 눈에 끌렸나요.
"모르겠어요.세월이 지나다보니 결혼까지 한거고.필(feel)이 안 왔으면 결혼까지 했겠어요."
-지역이 달라 연애하기 힘들었을텐데.
"멀리 살아도 짝이 될려고 하면 되요.주로 편지를 많이 썼죠."
이 대목에서 부인 박경희 여사가 입을 열었다.
"군대 있을때 편지를 많이 쓰지도 않았는데,한번은 편지가 왔길래 봤더니 풀이 없어서 그랬는지 편지봉투를 껌으로 붙여놨더라구요.그런데 껌이 단물이 빠져야 오래 붙어 있는데 단물도 안 빠졌는데 붙여서 편지봉투가 제대로 봉해지지도 않았더라구요.얼마나 웃기던지."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하시나요
"그런 생각 해본적 없어요.인생은 그냥 사업의 연속이라는 생각만 해요.성공의 개념은 아니고."
-장남에게 경영수업을 시키고 있다던데.
"경영 수업이 아니고 우리 회사에 취직 한거죠.공무쪽에 있습니다.기계 고치고,기계 사고,기자재 관리하는게 주 업무죠."
-왜 그쪽 부서에 보냈나요
"모든 회사 살림의 기본이 공무입니다.회사 지출의 절반 정도가 거기서부터 발생해요.거기서 생산직 직원들이랑 사귈수도 있고.생산직이 얼마나 힘들고 회사에 중요한지 깨달아야 해요.그 사람들의 애환을 알고 호흡을 맞춰야 기업 경영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