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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역사영화와 역사비평
1. 역사적 고증과 연구
역사학자가 영화나 드라마 자체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직 흔한 일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활성화될 것으로 예측된다. 과거엔 역사학자가 역사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 대해 언급하는 일이란 고증을 문제삼아 비판하는 일 정도가 전부였지만, 최근엔 역사연구자가 그것들에 대해 고증을 문제 삼는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대중 오락물에서 과거의 정확한 재현이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역사연구자들이 더 이상 대중문화에서 고증을 문제 삼지 않게 됨에 따라 그에 대한 언급조차 거의 사라져버렸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역사연구자는 고증 이외에는 대중문화에 대해 정말 할 말이 전혀 없는 것일까?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이나 역사학자는 날로 권위와 인기를 잃어가고 있는 데 반해, 대중문화에서의 역사는 날로 인기가 집중되는 현실에서 역사연구자들은 역사영상물에 대해 과연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역사연구자가 대중문화에 관여하는 보다 바람직한 방식은 어떤 것일까?
오늘날 대중들은 영화나 드라마, 혹은 방송 다큐멘터리 같은 영상매체를 통해 역사를 배운다. KBS에서 방영되었던 <역사스페셜> (1998~2003, 2005~2006, 2009~2012), <한국사 傳> (2007~2008), <역사추적> (2008~2009), 그리고 현재 방송중인 <역사저널, 그날> (2013~) 등의 역사교양프로그램이나 역사다큐멘터리가 높은 교육적 효과를 갖고 있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와 같이 허구적으로 재구성된 대중 영상물을 통해 역사를 배우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이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견해가 존재한다.
한편에서는 대중문화를 통해 재현되는 역사는 작가와 감독(연출자)을 비롯한 제작진들의 상상 속에서 주조된 역사이기 때문에 사실을 왜곡할 위험이 있으므로 역사교육 효과가 미미하거나 오히려 역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또 한편에서는 대중문화 속의 역사 재현은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역사 인식 제고에 기여하기 때문에 역사교육 효과가 크다고 주장한다. 과연 허구가 개입된 역사영상물은 역사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교육적 매개체인가, 아니면 대중이 소비하는 수많은 영상콘텐츠 중 실화, 혹은 실존인물의 이야기라는 매력적인 오락품목의 하나인가?
이러한 질문은 역사와 대중을 만나게 해주는 매개체인 극화된 역사영상물에 대한 두 가지 차원의 접근을 대변한다. 하나는 ‘역사의 대중화’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의 콘텐츠화’, 곧 ‘역사의 대중문화화’라는 차원이다. 양자는 경우에 따라 혼용되고 있지만 실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탄생한 용어이다. 결국, ‘역사의 영화화’는 대중에게 역사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서 대중매체와 역사영상물을 바라보는 반면에, ‘역사의 대중문화화’ 논의는 영상콘텐츠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역사를 자원화할 것인가 하는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본다. 역사대중화란 비단 역사교육만이 아니라 역사서술과 방법론 및 역사인식과 관련된 광범위한 문제이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역사대중화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1987년 이후 민주화의 흐름에 따라 그간 상아탑에 갇혀 있던 역사학을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기 위한 소장 역사연구자와 역사교육자들의 노력에 의해서였으며, 역사를 통해 대중을 계몽, 각성시키려는 기획의 일환이었다. 민주화가 가속화된 1990년대는 전례 없이 대중문화 부문의 질적 양적 고양이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그 산업적 가치가 날로 커져가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2000년대에는 한류 바람을 타고 외국에서도 한국의 음악이나 드라마, 영화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이에 정부에서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을 발족하여 대중문화를 문화산업을 견인하는 ‘콘텐츠’로서 인식하고 지원함으로써 역사대중화와 문화산업의 연결고리가 설정되었다. 바로 ‘역사콘텐츠’라는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이어 대학가에 인문학 위기론과 신자유주의 바람이 불면서 여러 대학의 사학과가 콘텐츠나 문화 관련 학과명으로 개명되기도 했는데, 이는 과거 역사학자를 양성하는데 치우치던 역사교육에서 벗어나 역사 자원을 활용하여 문화콘텐츠 생산에 기여하고 인문학의 효용성을 높이려는 ‘역사의 대중문화화’, 곧 ‘역사콘텐츠’ 기획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리하여, 역사의 대중화는 지향과 목적이고 이를 실천하는 방법론 내지 결과물이 역사콘텐츠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양측 모두 ‘쉬운 역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으나, 전자가 ‘역사의 의미’를 추구한다면 후자는 ‘역사의 재미’에 보다 많은 비중을 둔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즉, 전자는 역사의 본질, 내용을 중요시함으로써 그 방법이나 형식에 대해서는 도구적으로 사고하는데 반해, 후자는 방법이나 형식의 중요성을 우선시함으로써 내용적 측면이 오히려 도구화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이나 실존 인물을 소재로 차용하되 내용의 상당부분을 허구적 상상력에 의존하는 역사드라마나 역사극영화의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2. 진정한 역사의 대중화를 생각한다
역사영화의 개념을 정밀하게 재규정하는 것이 가질 수 있는 장점과 효과는 무엇인가? 우선, 역사영화를 명확히 범주화하는 것은 생산자와 소비자, 그리고 비평자 모두에게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있다. 역사영화가 촉발시킬 관심과 논쟁은 바로 그 직접적인 효과이다. 역사가들은 자신의 전공 시대와 분야를 다룬 역사극이 나올 경우, 보다 적극적으로 그것이 역사영화인지 어떤지 분석하고 비평을 행해야할 사회적 의무가 있다. 대중들은 이를 통해 영화(혹은 드라마)의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느 부분은 허구인지 하는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다. 그래야 어떤 것을 역사로 받아들이고 어떤 것을 그냥 영화적 설정과 오락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기반으로 대중들은 역사영화가 역사 이해와 역사 인식 제고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는 것을 직접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역사극의 제작진은 자신들이 만든 영화가 비평가와 소비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해 항상 민감하기 때문에 이런 논쟁과 논의들 은 결과적으로 생산에 긍정적 자극을 줄 수 있다. 그렇다고 제작진들이 역사의 무게에 짓눌려 역사영화 제작에 미온적일 것 같지는 않다. 최근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영화들 가운데에는 역사영화가 상당수 있으며, 그 중 많은 수가 수준높은 역사영화로 불릴 만한 것들이다. 이 때문에 콘텐츠를 생산하는 측에서도 역사영화 제작은 흥행과 비평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중요한 도전분야가 될 것이다. 역사가가 역사와 대중이 만나는 장으로서 대중적 역사영상물에 대해 적극적 비평을 가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역사영화이며, 관객들은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역사극을 접하게 되기 때문에 역사교육적 측면에서 효과적이다.
이처럼 역사영화는 그간 대립되는 입장으로 보였던 역사영상물에 대한 두 가지 접근법, 즉 역사대중화론과 역사콘텐츠론이 공유하는 사유의 공간이 될 수 있다. 곧 역사적 사실과 해석을 중요시하며 이를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는 방식으로서 역사영상물을 바라보는 것과 역사를 의미와 재미를 동시에 갖춘 소재이자 자원으로 소비하는 방식으로서 역사영상물을 바라보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역사영화를 대화의 접점으로 삼아 좁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영화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이 단순히 역사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역사교육과 역사대중화의 본래 목적일 것이다.
그런데 역사대중화가 역사가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대중문화 생산자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은 오래전부터 역사가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져왔다는 점은 때때로 역사가들을 당혹케 한다. 더구나 근래에는 역사 자료들이 속속번역, 정리되어 디지털화되고 데이터베이스화되면서 사료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져 이제 누구나 사료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역사가만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드라마의 제작진들도, 일반 대중들도 얼마든지 ‘문학하기’, ‘철학하기’처럼 ‘역사하기’를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해서 전문적인 영화감독이 사라지지 않듯이, 누구나 역사를 해석하고 서술할 수 있다고 해서 전문 역사가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역사가의 전문성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며, 역사가는 역사영화를 제작하는 데에도 단순 자문이나 감수 정도가 아니라 기획이나 시나리오 공동 작업과 같은 더 큰 역할을 할 여지가 점차 커질 것이다.
현대 문화에서 영화는 이제 빼놓을 수 없는 텍스트가 되었다. 수많은 자연과학자, 인문사회과학자, 각계의 전문가들이 영화를 매개로 자신의 전문영역을 소개하고 해설하며 비평하는 것은 보편적이고도 필연적인 일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역사가들만이 영화를 매개로 역사를 비평하는 것에 가장 소홀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우리의 역사교육이 비평적 관점을 고취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경계해온 결과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화를 매개로 역사를 비평한다는 것은 단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거나 사실 여부를 잣대로 영화를 비판하고 재단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화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매개하여 사고할 수 있는 역사적 사고력과 상상력 그리고 역사인식을 증진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는 다양한 가치판단의 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서 새롭게 문제를 인식할 것을 촉구하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비평가가 영화감독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듯 역사비평을 하는 역사가도 대중문화 생산자들의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비평이 대중들의 영화 독해력을 높여주듯이, 영화를 통한 역사비평도 대중들의 역사이해력을 높일 수 있다. 영화에 대한 고양된 안목이 대중의 문화소비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것과 같이, 영화를 통한 역사비평 역시 영화에 은폐되어 있거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왜곡, 변형되어 있는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고 역사적 의미를 끌어냄으로써 대중의 역사소비를 풍성한 역사적 사유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한 사회가 생산한 역사영화의 수준은 근본적으로 영화 제작의 수준이 아니라 역사학 연구의 수준에 달려있다. 오늘날 학교에서의 역사교육은 고등학교까지는 암기식 교육에 머물고 대학부터는 역사학자 양성 교육에 국한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교육의 컨셉이 역사생산자 교육에서 역사소비자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역사전문가들의 지적은 타당하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지금, 역사교육의 테두리 안에 영상사료 및 역사영상물을 독해하고 이를 역사적사유로 전환시킬 수 있는 교육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의 대중화는 과거처럼 역사가와 대중 사이에 위계를 설정하고 일방적인 계몽과 각성을 행하는 것이 아니기에, 아무리 역사영화가 과거를 재현하고 해석하는 데에 공을 들인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역사영화는 그것이 생산된 시기의 현재적 관점과 맥락 속에서 생산되고 소비되고 비평이 행해진다. 역사영화 속에서 과거는 항상 현재를 패러디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역사영화는 공감과 감동을 통해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를 성찰하고 사유할 수 있는 생각의 힘을 길러준다. 관객은 보다 적극적으로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며, 이를 권리로서 역사가와 대중문화 생산자들에게 당당히 주장할 수 있다.
결국 역사영화를 통해 관객은 현재의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받는 것이다. 더구나 역사교과서가 국정화되어 역사교육이 정치적 사상통제의 도구로 사용될 여지가 많은 이러한 때에 역사영화는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역사해석만이 아니라 대안적 역사해석을 대중들에게 제공하는 가장 효율적인 창구가 될 것이다. 역사적 사유와 비판의식을 키울 수 있는 촉매제로서 역사와 대중이 만나는 장으로서의 역사영화가 존재해야 하는 본질적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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