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 언어②
<①편에서 계속>
메뉴판에 ‘진짜(real)’라는 형용사가 등장하곤 한다. 그 레스토랑이 내는 음식 가운데 엄밀히 말해 어떤 것이 ‘진짜’인지는 아는 방법이 있을까? 주래프스키는 “가격을 봐야 안다”고 썼다. 값싼 레스토랑은 진짜 생크림, 진짜 으깬 감자, 진짜 베이컨을 낸다고 약속한다. 조금 더 비싼 레스토랑에 가면 ‘진짜’라는 단어는 게와 메이플시럽을 묘사할 때만 쓰인다.
영화 '심야식당'의 문어 소세지
더 비싼 레스토랑에서는 메뉴판에서 ‘진짜’라는 단어를 찾기 어렵다. 진짜 베이컨을 쓰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고객들은 그곳의 베이컨과 생크림과 게가 진짜라고 이미 전제하기 때문이다. 어떤 레스토랑이 진짜 버터를 쓴다고 말한다는 그 말을 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진짜인지 아닌지 의심을 받는 상황이거나 변명할 필요가 있거나.
‘음식의 언어’가 메뉴판 속 언어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책이라면, 장사하는 비법을 일러주는 실용서는 따로 있다. ‘장사의 신’(쌤앤파커스)은 5평짜리 이자카야(선술집)에서 출발해 여러 점포로 덩치를 키우며 직원 100여 명을 독립시킨 일본 요식업계의 전설 우노 다카시가 들려주는 성공 스토리다. 제목은 요란하지만 내용은 소박하다. 바둑에 빗대면 정석을 섬기는 이론 바둑이 아니라 실전적인 잡초 바둑이라고 할까. 하지만 몇몇 대목에서는 무릎을 탁 치면서 이 할아버지를 우러러보게 하는 지혜를 만난다.
이자카야들의 전쟁에서 우노 다카시는 어떻게 승리했을까. 가게의 목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밑천은 박했고 음식재료며 요리도 평범했다. 비장의 무기는 바로 ‘말 걸기’였다. 그는 ‘어떻게 하면 손님이 즐거워할까’를 늘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손님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했고, 이야기하며 관계를 맺었고, ‘단골이 새 단골을 창출한다’는 다단계(?)를 신봉했다. “손님이 들어오는데 멀뚱히 있거나 ‘어서 오세요’라고 건조하게 인사하는 가게는 성공할 수 없다”고 그는 역설한다.
손님과의 이야기와 리듬이 장사의 핵심이다. 하지만 말재주가 없다고 접객을 못하는 게 아니다. 1000원짜리 빨래 건조대에 커다란 포크를 매달아 조명을 만들었더니 손님이 먼저 말을 붙였다. 요리 이름을 독특하게 지으면 누구든 “이게 뭐예요?” 물어올 것이다. 닭 날개 튀김을 주문한 손님에겐 “오른쪽 날개로 드릴까요, 아니면 왼쪽?” 하며 씩 웃어준다. 이런 이야기가 돈을 지불하는 자와 챙기는 자 사이의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가게는 활기를 띤다. 이 책에서 “메뉴에는 그때그때 유행을 반영할 수 있지만 가게 전체를 걸고 유행을 좇아선 안 된다”는 대목을 읽을 때, 불붙었다 식어버린 찜닭집과 조개구이집이 떠오른다.
18일 개봉한 영화 ‘심야식당’은 음식이 어떤 욕망을 끌어안고 있는지 증명한다. 이를테면 심리학을 음식에 담은 영화다. 음식과 잘 어울리는 이야기로 관객을 쓰다듬고 위로한다. 일본 도쿄의 번화가 뒷골목에 자정부터 아침 7시까지 문을 여는 조용한 밥집 ‘심야식당’이 있다. 메뉴라곤 돼지고기 된장국 정식, 맥주, 사케, 소주뿐이다. 하지만 주인장 마스터(고바야시 가오루)는 손님이 원하는 요리를 가능한 한 만들어준다. 허기와 마음을 달래주는 음식과 더불어 단골손님들의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일본에서 240만부 팔렸다는 아베 야로의 만화가 원작이다. 과거를 알 수 없는 마스터가 운영하는 작은 식당을 배경으로 각양각색의 손님들이 등장한다. 일을 마친 샐러리맨, 경찰, 스트리퍼, 건달, 동성애자…. “보통 만화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오히려 주인공이 아닌 삶을 살아가기에 더욱 특별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마스터가 만든 음식을 중심으로 굴러가는 이 서정적인 만화는 2012~13년 뮤지컬로 먼저 한국 관객을 만났다. 하지만 경쾌한데 좀 겉도는 느낌이었다. 덜 굽거나 덜 삶은 인생의 맛이랄까.
영화 '심야식당'의 마스터(고바야시 가오루).
영화는 퇴근길 자동차들을 음악과 엇박자로 보여주며 출발한다. 모두 귀가할 무렵 시작되는 심야식당의 하루. 문어 소시지, 두부조림, 계란말이, 호박 국수…. 입안에 군침이 돈다. 고단한 하루를 보낸 손님은 심야식당에서 이렇게 주문한다. “마스터, 계란말이 평소보다 달콤하게!” 요리 한 접시로 근심을 지우고 슬픔을 잊는 것이다.
‘우리에게 음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다가오는 영화다. 기아와의 투쟁은 끝났다. 음식은 이제 허기를 채우는 게 아닌 다른 기능을 한다. ‘심야식당’에서 요리는 크게 세 가지, 즉 나폴리탄ㆍ마밥ㆍ카레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이들은 각각 사랑ㆍ향수ㆍ감사의 감정을 실어 보낸다.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에 두 번이나 실패한 다마코(다카오카 사키)와 순수한 청년의 사랑은 나폴리탄에, 미치루(다베 미카코)의 힘겨운 도시 생활을 위로하는 고향의 맛은 마밥에, 동일본 대지진으로 아내를 잃은 남자를 구원해준 자원봉사자 아케미(기쿠치 아키코)에 대한 감사는 카레에 각각 담겨 있다.
현대인은 고독을 달래기 위해 심야식당을 찾는다. 일본 대표 배우로 꼽히는 고바야시 가오루는 최근 한국을 방문해 “심야식당은 어쩌면 30~40대 여성을 위한 공간”이라며 “그들은 아이의 어머니로, 남편의 아내로, 부모님의 딸로 자신만의 공간이 없다. 마음에 있는 말을 쏟아낼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음식으로 감동한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는 “중년에 접어들면 부모나 친구를 잃는 경험이 많아진다”며 “그들과 먹었던 음식을, 허름해 보이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식당에서 맛볼 때 느끼는 감정이 이 영화로 전하고 싶은 주제”라고 답했다.
‘심야식당’은 우리가 음식으로부터 영양적 가치 말고도 심리적 가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고급 레스토랑의 블라인드 메뉴나 근사한 요리 이름에도 계량할 수 없는 심리적 가치가 얹혀 있을 것이다.
박돈규 문화부 기자 E-mail : coeur@chosun.com
대학에서 미생물학과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연극학을 공부했다. &..
대학에서 미생물학과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연극학을 공부했다.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다) 2006년 공연프로듀서협회가 주는 올해의 기자상을 받았다. (이듬해 그 상이 폐지됐다) 2008~2010년 한국뮤지컬대상 심사위원을 지냈다. ('가슴을 쿵 울리는 드라마'에 가점을 준 것을 고백합니다) 현재 출판 담당 기자. (책에 대한 궁금증 무한 흡입 중) 뮤지컬 스무 편에 대한 에세이 '뮤지컬 블라블라블라'를 냈다. (오랜만에 나온 양서인데 재고가 상당량 남아 있다^^)
출처/ 프리미언조선 [박돈규기자의 책시렁] 2015.06.23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