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언어의 편안함
- 김명아 시인의 시들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목소리 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점점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여야 정치인들은 삿대질하며 자극적인 막말로 서로를 비난하고, 어디서나 시끄럽고 현란한 상품 광고가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는 ‘막장 드라마’에서는 상대를 증오하는 앙칼진 목소리가 점점 드높아지고 있다. 이런 시대 시의 언어에서도 엽기적이고 도발적인 튀는 목소리가 새로운 감성으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강퍅한 언어의 홍수 속에서 시인들도 독자들도 점차 피곤해지고 있다. 김명아 시인의 시들은 이 반대편의 언어로 우리를 위로한다.
그의 시들은 낮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다음 시를 보자.
더블베이스가 비행을 시작한다
기댄 듯 붙잡은 듯 흔들거린다
가장 낮은 곳으로 춤추듯 호흡하며
…(중략)…
묵직한 저음의 발자국이 현 위에서
동굴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마지막 악장이 끝날 때까지
관객과 호흡하며 치닫던 더블베이스는
박수를 녹여냈을까 휘파람을 반죽한
달의 눈물은 건기의 물웅덩이를 채우고
저물녘의 징검다리를 건너며
장거리 전화를 붙들고 푸른 문으로 사라졌다
- 「더블베이스 앙상블」 부분
더블베이스는 높고 큰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악기가 아니다. 대신 낮은 소리로 다른 악기들의 소리를 화음으로 받쳐주고, 소리의 빈 공백을 채워주는 악기이다. 더블베이스의 그 “묵직한 저음의 발자국은” 동굴 같은 사람의 깊은 마음속으로 스며들기도 하고 “장거리 전화를 붙들고” 통화를 하듯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들을 연결해 준다. 시인은 자신의 시가 이 더블베이스의 소리를 닮고자 소망한다. 그래서 “달의 눈물은 건기의 물웅덩이를 채우고 / 저물녘의 징검다리를 건너”듯이 평화로운 화음을 만들어 내는 그런 언어로 시를 쓰고자 한다.
이런 언어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아름답고 평온하고 조화롭다.
법당에 나비가 날아들었다
지난여름 햇살이 꽃살문으로 출렁인다
밤낮이 갈마들고 향초는 불을 물고
솟아오르듯 번진다 나비가 좇던 악보
망설이다 삼켜버린 음표, 붉은 악보가
하늘에 펼쳐졌다 내려놓은
그러나 달려온 얼굴이다
- 「붉은 악보」 부분
시인은 여수 앞바다에서 해가 떠올라 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시인은 악보로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 붉은 기운 속에 있는 사물들 모두가 음표가 되어 함께 조화로운 풍경을 만들어 악보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시 속에 등장하는 여러 사물들, 나비, 꽃살문, 향초 등은 어느 하나 자신의 모습을 돋보이게 하고 과장하지 않는다. 해가 만든 붉은 빛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풍경을 만든다. 시인은 이런 세계를 꿈꾸고 있다. 아니 꿈꾸는 것이 아니라 김명아 시인은 그런 시선으로 세상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서로 목소리 높여 자신의 주장을 강변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다른 존재를 부정하거나 배제하지 않는 조화와 공존의 모습을 시인은 그리고 있다.
그런데 세상을 조화롭게 만드는 낮은 목소리가 왜 필요할까? 세상이 너무 시끄럽고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짧은 치마를 팔고 긴 다리를 샀다 배꼽티를 팔 때 배꼽을 사고 귀마개를 팔 때 귀를 샀다 안경을 팔면서 눈을 샀고 마스크를 팔 땐 입을 샀다 그러나 긴 다리를 살 때 발은 사지 못했고 배꼽은 사면서 말라버렸고 귀를 살 땐 들리지 않았다 눈을 살 땐 보이지 않았고 입속에는 이가 없었다
…(중략)…
접시를 깨뜨리며 냄비를 팔고 찌그러진 냄비를 펴며 접시를 팔았다 냄비우동에 조개를 빼고 시장을 오가는 행인의 다리를 걸고 젓가락을 들었다 멈췄다 불어 터진 면발을 세며 귀퉁이로 몰려드는, 건너야 할 신호등을 보고 횡단보도를 늘리며 넘어졌다
- 「합니다 사이에 팝니다」 부분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합니다”와 “팝니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상품과 용역을 팔아 이윤을 창출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더 큰 소리로 자신을 내세워야 하고 더 자극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 시대에 살다 보면 나는 사라지고 내가 사고, 파는 것으로 내가 규정된다. 시인은 그런 전도 현상을 “짧은 치마를 팔고 긴 다리를 샀다 배꼽티를 팔 때 배꼽을 사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자극적인 상품을 통해서만 나를 내세울 수밖에 없는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모두 “건너야 할 신호등을 보고 횡단보도를 늘리며 넘어졌다”라는 표현처럼 타인과 조화로운 행위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파멸로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시인은 낮은 목소리로 다른 존재들과의 공존이 필요함을 나직하게 설파한다. 다음 시의 “점이지대”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런 공간이다.
머리 깎은 산봉우리 절벽 끝에 섰다
손발 떨어뜨리고 뿌리째 거꾸로 처박힌
옹이눈 꿰뚫고 발밑을 허물며
가장 밝은 안쪽을 보았을까
겹치고 혼재되어 맞물린 사이에서
바위틈을 비집고 힘줄기로 솟아난
…(중략)…
햇살에 눈을 뜬다 접힌 길을 펴며
새로운 다리가 되어 지켜나가는
귓바퀴를 돌아 실바람 사이를 다시 걷는다
점이지대에서 바람의 날개를 찾는다
- 「점이지대」 부분
점이지대는 서로 다른 지리적, 지질학적 특징을 가진 두 지역이 겹치는 곳을 말한다. 시인은 바로 그곳에서 진실과 자유를 경험한다. “겹치고 혼재되어 맞물린 사이”인 그곳에서 “힘줄기로 솟아난” 생명의 힘을 발견한다. 나와 타인 내가 사는 곳과 다른 사람이 사는 곳이 만나는 이 점이지대야말로 “새로운 다리가 되어” 나와 다른 사람을 연결하고 “뿌리째 거꾸로 처박힌 / 옹이눈” 같이 자기만의 좁은 세상에 갇혀 사는 존재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야 비로소 자유로운 “바람의 날개”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 시는 이런 시인의 생각을 좀 더 극적으로 보여 준다.
“뒤에 고양이가 숨어 있어요”
바람의 단면을 카메라에 담던 두 손
성큼 일어나 날갯죽지를 잡는다
뭇 새들 지저귀는 나뭇가지 위로 올려주자
젖은 날개는 바람의 옷을 입었을까
놓쳐버린 날개가 만져지고
나무를 바라보던 눈은 숲을 향하고
응시하며 주고받던 지저귐 날아오른다
화단으로 들어간 들고양이,
나뭇잎 되어 뒹굴고 뒹군다
- 「귀가 눈을 뜨고 따라간다」 부분
산책길에 시인은 새들의 울부짖음과 다른 산책객의 외침을 듣는다. 아기새를 노리는 고양이를 발견한 새와 사람들의 소리이다. 이 비명과 외침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의 치명적인 대립 속에서 생겨난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이 시끄럽고 큰 높은 목소리 속에서 영위되는 것은 바로 이런 대립이 격화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아기새를 구해 나뭇가지 위로 올려주자, 세상에는 다시 평화가 온다. 시인의 그 모습을 “젖은 날개는 바람의 옷을 입”고 “나무를 바라보던 눈은 숲을 향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내 앞의 위험과 이익에서 눈을 돌려 더 높게 더 넓게 조화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귀가 눈을 뜨고 따라간다”라는 제목은 이런 생각에서 지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화단으로 들어간 들고양이 / 나뭇잎 되어 뒹굴고 뒹군다”라는 마지막 구절이 재미있다. 사냥에 실패한 들고양이가 나뭇잎이 되었다는 것은 포식자의 공격성을 포기한 고양이가 나뭇잎처럼 풍경의 한 부분이 되어 조화로운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김명아 시인의 시를 읽으면 아름답고 평화롭고 편안하여 잠시 우리를 휴식의 공간으로 이끌어 주는 것 같다. 그의 언어는 목소리 높여 무엇인가를 주장하지 않고 자극적인 이미지로 우리의 눈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다만 낮은 언어로 우리에게 아름답고 평화롭고 조화로운 세계의 심상을 보여 주고, 그러한 세계의 가능성을 믿게 만든다. 김명아 시인이 가진 낮은 목소리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이다.